대학가의 열정적인 민주화 열망..
그 중심에는 매파라고 불리던 대의원회 회장 유시민이 있었고,
비둘기파라고 불리던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있었습니다.
자유에 대한 열망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서울대 이화여대 연세대 고려대를 중심으로
서울 부근의 대학생들은 피끓는 열기로 민주화를 목놓아 울부짖었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란 인간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이에 대응합니다.
허나 이같은 특단의 조치에도 그들의 열망은 사그러들 줄 몰랐고, 그 여세의 절정은 1980년 5월 15일로 이어집니다.
1980년 5월 15일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던 서울역 광장에 운집한 대학생들의 수는 무려 10만 명이었습니다.
이들이 모인 목적은 오직 하나, 자유 였습니다.
'전두환 사퇴' 와 '비상계엄령 해제'를 외치던 그 커다란 에너지는 주위의 시민들조차 감동시키며 흡수시키기에 이르렀고 4.19 혁명 이후 광복 이래 최대 변혁이 올 지도 모른다는 가슴 벅찬 희열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피어났습니다.
어떤 나라라도 국가 발전의 필수요소는 혁명을 수반한다고 했습니다.
혁명이 바로 앞에 다가온 듯 했습니다.
그것도 그 어떤 정치적 배후 없이 오로지 대학생들의 힘에 의해,
그 젊은이들의 열정에 동화된 시민들의 힘에 의해서 말이죠.
이러한 모든 것들을 짚어볼 때도 1980년 5월 15일은 절정의 순간이었고
결단의 순간 이었으며 역사의 순간이었습니다.
돌이켜보건데 그 날은 대한민국이 독재와 민주화의 경계선에 한 발 씩 담근 상태로
어느 한쪽 발만 디디면 정세는 완전히 기울어지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순간, 당시 대학생 지도부였던 매파 유시민과 비둘기파 심재철의 주장은 둘로 나뉩니다.
심재철 : "솔직히 처음 예상보다 너무나 많은 수의 인원이 군집했다.
이 많은 인원 수를 통제할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대로 계속 청와대까지 진군하다간 사분오열되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볼 지 모른다.
일단 각 학교로 해산 뒤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다시 진군하자"
유시민 : "지금 이 상태에서 해산을 명하는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모든게 끝난다. 이 많은 인원이 현재 여기서 복귀한다면 신군부는 어떤 보복행위를 할 지 모른다.
결단코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걸 끝내야 한다."
허나, '학생회장' 유시민의 발언권은 상대적으로,
아니 절대적으로 총학생회 회장 심재철의 발언권보다 파워가 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 많은 인원을 통제하기엔 결국 어느 한 쪽으로 지도부 세력을 모을 수 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총학생회 회장 쪽으로 주도 분위기는 흘러갔습니다.
유시민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
심재철은 서울역 광장에 운집한 수십만의 대학생들에게 각 학교로 복귀하길 명합니다.
이것이 한국 근현대사 역사상 가장 통탄할 순간으로 기억되는 서울역 회군 이었죠.
예상대로 학생들의 거센 반발이 일었지만 결국 그 많은 인파는 해산되고
뜻이 통하는 몇몇 무리들은 각 학교로 복귀 후에도 철야농성을 하며 시위를 계속했으나
서울역 광장의 그 어마어마했던 물결에 비해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 였습니다.
신군부... 이 때를 놓칠리가 없었습니다.
안 그래도 눈엣가시였던 먹물먹은 대학생들 처리에 골치아팠는데
만날 한데 모여 있어서 통제도 불가능하고 정말 어쩔 수 없이 계엄령만 확대하고 있던 찰나에
알아서 지 발로 해산해 주시니 가장 신바람 난 건 전두환 일당이었습니다.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은 더욱더 확대되고 전국 대학교에 휴교령을 내립니다.
각 학교를 급습해 눈에 보이는 대학생이란 대학생은 모두 군홧발로 짓밟아 연행합니다.
지도부가 모여있던 이화여대 회의장을 급습해 학생 대표들을 연행합니다.
그리고......1980년 5월 18일 광주는 고립된다.
재처리도 안되는 새끼
그리고 군제대후 독재의 후신당 입당
심재철 ㅂㅅ **
재처리도 안되는 새끼
심재철 ㅂㅅ **
후쿠시마 연료봉과 함께 재처리 해야 할 듯...
심재철 ㅅㅂㄴ 이었네
그리고 군제대후 독재의 후신당 입당
군 제대후 학교선생 하다가 엠비씨로 입사함
전두환이 똘만이가 꽂아 준게 아니면 절대 못함
위화도회군 저리가라네
재철아~~
당시 심재철은 김대중 내란사건 범죄자로 기소되었고, 다른 동지들 다들 2~3쪽의 진술서를 적는데,
유시민 혼자 99쪽의 진술서를 작성하고, 77명의 실명으로 동지들 좌표찍어 버린 유촉새~
공개되었드라.
알릴레오에서 자기입으로 해명은 창작소설로 기만하기 위해서였다지? 하하하하하ㅏㅎㅎㅎ
군부에서 파악한 학생회 위주로 진술한 걸로 아는데 뭔 소리임.
유시민이 진술하지 않아도 뻔한 학생회 지도부였던 걸로 암
어찌 가짜뉴스만 골라서 대갈통에 집어넣는지 ㅋㅋㅋ
ㄱㅅ야 잘알고 씨부리라
역시나 모든건 단방향 조작하는 유게답게 오늘도 여러가지 소설들 계속 올리겠네
소설은 무슨. 모르면 공부 좀해라.
역사를 소설로 만드는 친일자유당 열성팬
이러니 개.돼지 소리 듣지...
그 시절 직접 관련됐었던 서울대 동문들 보다 더 잘알고 있나보지?? 다들 유작가 옹호하고 변절자 욕하던데 말이야. 뇌 피셜은 적당히.
너 심재철이냐?
3당 야합때
혼자 반대하던 모습
왜그분 모습이~~~~
독립선언서 발표하려던 그때와 비슷한 흐름이군요
동학혁명이 생각납니다...
어린나이에 고문으로 인한 진술이라 어쩔수 없다 치지만 ~ 그다음 행보가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답이 되더군요~~
엠비씨 기자 생활후 한나라당 입당 ㅋㅋㅋ
부귀영화를 위해 동료를 팔아먹은 변절자들의최고봉 ....심재철
심재철 = 박정희 지 살려고 동료들 다 잡아죽임
모르는거지... 신군부의 회유를 받아 저런 결정을 한것일지
지금의 시대에 변절자 심재철이 하는 꼬라지를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만한 놈이긴하지요.
음...ㅠㅠ
당시 서울대 동문들이 누구를 옹호하고 누구를 배신자라 칭하는지만 봐도 답 나오죠. 아니면 당시 서울대생들 다 빨갱이냐?
20대 전반기 국회부의장을하면서 특활비 6억원 받았으나 소명도 없고 19대 국회 민간인불법사찰국조특위가 운영될 시기에 단 두 번 회의를 열고 활동비 명목으로 9,000만원을 받은 자. 또한 국회 세금으로 배우자에게 일감몰아주기의 의혹 당사자이며 안양 동안구 을에서 5선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