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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사랑없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121)

 


  5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한수진이 신기했다. 유성현이 기억하는 한수진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재잘재잘 떠드는 타입이 아니었는데, 한수진이 그분을 만나서 오스트리아로 여행을 다녔던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특별한 그녀만의 철학이 담긴 여행기라면 이해할 수도 있었겠지만, 한수진은 정말로 보통의 여자애들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했다. 



 “가을 단풍에 겨울의 하얀 눈을 뿌려 봄에 가져다놓은 것 같은 풍경이었어.”



 한수진은 감수성 풍부한 소녀처럼 표현했고, 유성현은 그런 한수진을 찬찬히 바라보며 듣고 있었다. 여전히 한수진과 유성현은 손을 잡고 있었지만, 서로가 그러고 있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어느 도시의 거리 모습들과 벽돌의 색깔, 식당의 귀엽고 고풍스러운 간판들, 햇살이 내린 작은 광장의 풍경. 한수진이 말하는 것들은 마치 유성현이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유성현이 한수진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고, 한수진이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지루하지?”


 “아뇨. 선생님이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해요.”


 “그런 것 같니.”


 “아닌가요.”


 “모르겠어.”



 한수진이 유성현에게서 슬며시 손을 뺐다. 유성현 그런 한수진의 태도에 미소 지으며 물었다.



 “선생님은 절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우리는.......정치적인 관계였지.”


 “그렇군요.”


 “아. 이해가 돼?”


 “아뇨. 전혀 모르겠다는 대답이었어요.”



 생글거리는 유성현을 바라보던 한수진이 무릎에 팔을 괴며 기댔다. 뭔가 생각한다는 듯 정면을 응시하던 한수진이 여전히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들에게 왜 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아. 별로 생각하지 못했던 분야네요. 다수의 의견을 모으려면 대표자가 필요하니까.......아 이건 그냥 민주주의 얘기네요.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사회질서를 위해?”


 “다 맞아 관계들을 정리해 줄 필요가 있으니까. 서로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도모하려면 정치가 필요한 거야.”


 “우리가 왜 정치적인 관계였죠?”


 “네게 송민아와 민효정이 있었지. 내게는 네가 모를 다른 남자들이 있었어. 넌 송민아와 민효정 사이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갈등했고, 나도 다른 남자들 사이에서의 합리적인 선택이 필요했지. 그래서 우린 정치적인 관계였다는 거야.”


 “제가 민아랑 효정이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선생님을 만났다고 해도, 그게 왜 정치적인 관계가 되나요. 선생님과 저 사이에 어떤 합리적인 선택이 필요했을까요?”


 “인간관계는 모두 작은 정치야. 호감을 얻으려는 과정에서 의도와 다르게 미움을 받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게 되고, 저지른 잘못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정치와 같아. 네가 민아에게 호감을 얻으려는 과정에서 미움을 받고, 효정이가 네게 마음을 보이려다 잘못을 저지르고, 내가 문제를 해결하려던 모든 노력들이 정치였어. 난 너흴 다스리려 했던 것 같아.”


 “절 통치하려 했군요.”


 “그랬던 모양이야. 사람들을 통치 받는다고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지도자를 원하지. 누군가 나서주길 기다리고 또 따르기 마련이야. 하지만 모든 통치자들이 성공하진 못하잖아.”


 “실패가 훨씬 많겠죠.”


 “꼭 실패라고 말하긴 어려운 일이야. 세상의 모든 독재자들이 실패했다고 말 할 수 없고, 합리적이었던 정치인들이 성공하긴 더 어려운 게 정치니까”


 “우리는 모두 성공하고 있다고 말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실패를 반면교사 삼을 수 있다면 말이에요.”


 “그럴까. 역사가 반복되고, 실패한 사랑은 반복해서 실패한다는 걸 생각한다면 말이야. 모두가 생각하는 올바른 정치가 실패하고, 순수하고 진정한 사랑이 실패하잖아. 왜 그럴까?”


 “선생님이 절 통치하는 일에 실패했다는 얘긴가요?”


 “아니야. 내가 너를 다스리려 했다는 건, 정치적인 인간관계가 되었다는 얘기지 너를 정말 통치하려고 했다는 말이 아니야. 우리는 순수하게 서로를 원해서 가까워졌다고 보기 어렵잖아. 서로의 필요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얘기지. 마치 정치처럼 말이야.” 


 “윤리와 도덕위에 군림하려는 정치처럼 말이죠?”


 “선과 악을 상관하지 않는 정치처럼 말이지.”


 “사실 지금 제가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서 대화하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겠어요. 그러니까 선생님과 저의 관계는 순수하지도 윤리적이지도 못했다는 얘기가 맞나요? 선생님뿐만 아니라 저도 그랬다는 얘기고요?”


 “그래. 우린 정치적 올바름을 지키지 못했다는 얘기야.”


 “정치처럼 필요했다는 얘기도 되겠네요.”


 “옳고 그름을 판단 할 수 없다는 얘기지.”



-------



 “쓰레기네”


 “난 네게 항상 그랬지.”


 “수녀님을 구한 게 아니었네?”


 “신께서 그녀까지 가질 이유가 있을까?”



 박해진이 자신이 구한 수녀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에 송민아가 경악했다. 경멸스럽다는 눈빛으로 박해진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박해진은 그런 송민아의 눈빛을 견디다 못해 말했다.



 “나 때문에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던 여자였어.”


 “더 쓰레기네”


 “하나님이 그녀를 내게 돌려보내기로 결정하신 모양이지.”


 “나도 가끔 신이라는 존재가 악마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어.”


 “.......내 잘못을 뉘우칠 기회를 주신 거지.”


 “그럼 평생 내 노예가 된다든가 송민아를 위해 평생 봉사한다든가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좋겠냐? 응? 만족하겠어? 말이 되는 얘기를 좀 해라. 넌 지금도 내가 끔찍하다며”


 “알 수 없는 일이야. 왜 세상은 잘못에 대한 대가를 제멋대로 정하는 거지? 피해자를 구제할 구체적인 보상이 우선되어야 하는 거 아니야?”


 “누가 그걸 정해줄 수 있는데? 네가 결정하면 세상이 따라야 할까?”


 “오빠. 내가 오빠에게 바란 게 뭐였는지 전혀 떠올리지 못하는 거야?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어? 내가 그걸 세상에 요구했어?”


 “그래. 그럼 딱 하나만 물어보자. 너 왜 유성현과 동거했냐?”


 “그게 지금 할 말이야?”


 “네가 그토록 당당하니까. 꺼내는 말이야. 여전히 아무런 죄책감이 없는지 궁금하다.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애가 남자친구가 군대 간 사이에 남자애와 동거했던 일이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거야?”


 “내가 말했잖아. 우린 그런........”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그게 거짓말이라면 당장 지옥에 떨어져 죽는다고 해도? 아니, 아무런 감정도 없었어? 평생을 알아온 남자애와 한 방에 사는 일이?”


 “진짜 수녀랑 만나고 있나 보네.”


 “비겁해 송민아. 난 그때 정말 너 사랑했어.”


 “그럼! 내 말을 믿어줬어야지! 내가 뭘 하든 믿고 기다려줬어야지! 내가 뭘 어째야 했는데! 내가 그걸 몰랐는지 알아? 나도 알았어! 그래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지 알아?”


 “내가 널 사랑한 게 죄냐?”



 식당에 모여 있던 주방 아주머니들과 영양사가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들로 송민아와 박해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좀 전에 있었던 지진과 식당에 갇혔다는 걱정은 모두 잊은 것 같았다. 뒤늦게 시선들을 느낀 송민아가 식탁에 고갤 처박았고, 박해진이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정수기에서 물을 떠 마셨다.


 여태 심상찮은 상황을 함께 즐기던 영양사가 나서서 주방 아주머니들을 이끌었다. 아주머니들은 아쉬움에 투덜거리면서도 영양사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들이 송민아와 박해진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주려고 그런 건 아니다. 좀 더 편히 엿듣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주방의 적당한 위치에 숨어있던 그들은, 박해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자 침묵으로 환호했다.



 “사랑은 내가 하는 거잖아. 내가 널 사랑한 거잖아. 원래 사랑은 이기적인 거잖아. 넌 날 사랑하긴 했냐?”


 “난.......말하고 싶지 않아.”



 숨은 관객들이 실망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차준호가 박 부장의 술병을 만지작거리다 내려놓았다. 민효정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고, 차준호는 그런 민효정을 바라보다 다시 맞은편 소파에 앉아 말했다. 



 “선교사를 만나고 있다며? 회사를 그만두면 같이 선교활동이라도 떠날 생각이야?”


 “아마도 그럴 것 같아요.”


 “신앙을 가지게 된 거야?”


 “아직 확신은 없어요. 하지만, 그에 대한 확신이 들어요.”


 “나에 대해선 확신이 들지 않았었나?”


 “차 과장님은.......매력적인 사람이에요.”


 “왜?”


 “제가 좋아했으니까요.”


 “왜? 익숙함 때문에? 내게 익숙한 느낌이 있었어?”


 “그렇게 말하지 마요. 저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에요.”


 “그래. 그래서 난 신을 믿지 않아. 아니, 신이 있더라도 우릴 사랑한다는 건 믿지 않아. 신은 우릴 괴롭히고 가지고 노는 걸로 쾌감을 느끼는 존재일 거야.”


 “.......차 과장님은 지금 만나는 분을 사랑하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게 신의 축복이라는 거야? 신이 우릴 사랑해서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거야? 장난해? 그럼 신은 우리 형을 세상에 내보내지 말았어야 해!”


 “지금의 그녀를 위해서 이 모든 일이 있을 수도 있었겠죠.”


 “하. 민효정. 선교사에게 제대로 세뇌되었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신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 총질을 하는지 알아? 신의 존재를 고민하기도 어려운 수많은 아이들이 죽는 건 어때? 멀리 갈 것도 없잖아? 그 배에는 신을 믿는 아이가 아무도 없었나?”


 “제게 아직 신앙의 확신이 없는 이유들 중에 하나기도 해요. 하지만 그런 모든 일들이 우리가 가진 자유의지에 대가라는 생각은 해요.”


 “그놈의 자유의지! 그러면서 신을 사랑하래! 자유롭게 서로를 죽일 권한을 줬으면 대가를 치르게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우리 형은 멀쩡히 잘 살고 있다고! 아니 독재자들이 평균수명보다 오래 사는 건 알아?”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이 세상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겠죠. 제가 차 과장님과 이런 대화를 더 나누기는 어려워요. 저도 차 과장님이 의심하는 것들을 여전히 의심하고 있으니까요. 저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로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


 “민효정 씨 같은 사람이 신앙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니까 하는 얘기야.”


 “그럼에도 차 과장님이 다시 사랑하고 있다니까 하는 말이에요.”


 “......내가 지금 사랑하는 게 신의 축복이라면, 나를 조금 더 신경 써 줘야 할 거야.”


 “하나님이 대가를 바라고 대가를 치르게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랬다면 우리가 더 끔찍해지지 않을까요. 차 과장님은 신을 상대로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삶을 살아 왔나요?”


 “신이 우릴 사랑한다니까 하는 소리야.”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왜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거지?”


 “사랑했으니까요.”



 차준호는 씁쓸하게 웃었지만, 민효정은 웃지 못했다.






 계속.


댓글
  • Inception 2019/04/02 13:15

    북풍님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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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ind 2019/04/02 13:17

    Inception// 제가요? 이 이야기를 끝내야 봄이 올 것 같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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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Justice 2019/04/02 13:22

    바빠서 추천만 드리고 나갑니다 ㅋㅋㅋ 아껴 뒀다가 나중에 읽겠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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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워니유니31 2019/04/02 13:52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
    북풍님에게 올 봄은 조금 늦게 왔으면 좋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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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헬렐레교관 2019/04/02 15:21

    저도문장몇개쯤은예쁘게쓸수있지요.
    하지만이큰그림을그릴수있는능력은죽었다깨나도가질수없을것같아요. 좀가르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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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ind 2019/04/02 16:00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읽을만 하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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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란제리 2019/04/02 16:15

    해진이랑 쏭의 대화가 제일 이해하기 쉽네요 ㅎㅎ 한샘이랑 성현이 대화는 저도 성현이 같은 기분이구요. 잘 읽고 있습니다~
    사랑없는 사람들이 사랑이야기 하니까 아는 만큼만 들리네요. 아직 고차원적인 사랑이야기는 좀 힘드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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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ulersN 2019/04/02 20:37

    결말에 너무 부담갖지 마시길~ 그냥 이대로 끝나도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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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ind 2019/04/03 13:29

    저도 사실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충분히 즐겁습니다. 읽는 분들도 그러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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