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천국 코하비닷컴
https://cohabe.com/sisa/898479

19금사랑없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79)

 


 



 우산을 펴기 애매하게 불편한 비가 내리는 날씨였다. 빗방울이 내린다기보다는 흩날린다는 게 어울리겠다. 앞장서 술집을 나와 민효정을 기다렸다. 혹시라도 민효정이 정말 취했다면 많은 갈등을 하게 될 것이다. 


 함께 술을 마시며 슬며시 민효정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놨었다. 일부러 약간은 취한 것처럼 스치듯 그랬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거부한다면 실수인척 손을 뺄 생각이었지만, 민효정도 취한 듯 술잔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주무르거나하진 않았다. 그저 테이블에 손을 올려놓는 대신 민효정의 허벅지에 손을 놓고 기다렸다. 민효정이 만지작거리던 술잔을 들어 마시는 걸 보고 안심했다. 민효정이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자는 말을 먼저 꺼내긴 했어도........


 민효정이 정말 취해서 비틀거리기라도 했다면, 그냥 집에 데려다줘야 한다는 갈등을 했겠다. 


 우산을 펴고 기다리는데, 민효정이 또렷이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걸어 나왔다. 이제야 확신할 수 있었고, 민효정이 내가 편 우산 밑으로 들어오는 모습에 기뻐했다. 더 이상의 걸림돌은 없다는 확신이 섰다.


 아니. 아직 남았다. 습기로 가득한 날씨라, 민효정의 화장품 냄새와 옅은 향수냄새에 잠시 취했던 모양이다. 한 우산아래 들어온 민효정의 어깨를 감싸주긴 했어도, 선택은 민효정의 것이어야 했다.



 “어떻게~ 민효정 씨. 한잔 더 할래?”



 민효정이 나를 올려다보며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정을 읽기 어려운 무표정한 얼굴이긴 했는데, 민효정은 확실히 선택했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거리는 우산을 펴고 걷는 사람들 때문에 복잡했지만, 빨리 걸을 수 없어서 더 좋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결정들이 관계에 얼마나 중요해지는지 잘 알고 있다. 게다가 한 우산아래 민효정의 밀착한 몸은 더할 나위없는 애피타이저였다.


 근처의 모텔로 향하지 않았다. 민효정과 함께 택시를 잡아타고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다. 민효정은 술집을 나와서부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것도 좋았다. 일부러 민효정을 뒷자리에 태우고 내가 조수석에 앉았다. 마지막까지 민효정의 선택을 강요하고 싶었다.


 같은 직장의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부하직원과의 관계라면 아무리 신중해도 모자라겠다. 


 택시에서 내려 뒷좌석의 문을 열려고 했다. 혹시 내리지 않는다면 택시기사에게 택시비를 전달하고 인사나 할 생각이었지만, 민효정이 먼저 문을 열고 내렸다. 이제 됐다.



 “효정 씨. 들어가서 커피나 한잔 할래?”



 민효정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내 우산 속으로 들어왔다. 이번엔 민효정의 어깨를 감싸지 않았다. 팔꿈치를 살짝 밀어 넣었더니, 가볍게 내 팔을 잡아줬다.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문을 들어설 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던 민효정이, 구두를 벗으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깨끗하네요.”


 “아 고마워”


 “삶이 지저분해질수록 자기 공간은 깨끗하게 하려는 심리가 있다더군요.”


 “그래? 사는 게 정말 힘들면 자기 공간을 치울 여력도 없지 않을까?”


 “힘든 것과 지저분한 것은 많이 다를 거예요. 과장님.”


 “.......아. 커피 어떻게 마셔? 아메리카노? 믹스?”


 “커피는 됐고요. 혹시 집에 컵라면 있어요? 조금 출출한데”



 여태 내가 알고 있던 민효정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당돌했다. 사무실에서는 필요한 말만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다지 살가운 편이 아니긴 했지만, 원래 좀 예쁜 애들이 방어막을 형성하는 편이라 이해했었다. 그럼에도 다른 직원들과 관계가 나쁘진 않았다. 마치 모든 남자들과 밀당을 하는 것처럼 적절한 관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여자애였다.


 뭐랄까. 자신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일들에 자신만의 규칙들을 정해놓고 대응한다는 의심이 들 정도였는데, 민효정은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파에 털썩 기대며 앉았다. 정장으로 가려진 민효정의 큰 가슴이 출렁이는 게 보일 정도로 편하게 앉았다.



 “컵라면이.......참깨랑 튀김우동 두 가지 밖에 없는데 어떤 걸로 할래?”


 “음~ 오늘 저녁에 했던 선택들 중에 가장 선택하기 어렵네요.”


 “둘 다 좋다는 얘기지?”


 “네. 처음으로 과장님이 선택하실 일이 생겼네요. 과장님이 골라주세요. 전 좀 씻어도 되겠어요? 비를 좀 맞았더니 불편해요.”



 여태 내가 강요했던 선택들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듯 말을 던진 민효정이 일어났다. 민효정이 정장재킷을 벗어 소파팔걸이에 개어놓고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멍하니 그런 민효정을 바라보다가, 계속 지켜보겠냐는 표정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급하게 돌아서 컵라면들을 노려봤다. 뭔가 말리는 기분이 들었는데, 뒤에서 들리는 지퍼 내려가는 소리에 뇌가 활동을 멈춰버렸다. 


 들고 있던 컵라면 용기에 쓰인 성분들까지 읽으며 견디려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뒤돌아보고 말았다. 속옷차림의 민효정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입술로만 피식 웃으며 욕실에 들어갔다. 스쳐지나간 민효정의 몸매는 예상대로 굉장했다. 


 여태 꽤나 많은 여자들을 만나왔었고 경험했는데 이렇게 설렜던 기억은 정말 오랜만이다. 욕실안쪽에서 샤워기물줄기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컵라면을 골라야 한다는 게 떠올랐다. 


 이거 정말 고르기 어렵다.


 물을 끓이며 나도 옷을 추리닝반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tv도 틀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한 번도 시청한 적 없었던 드라마에서 멈췄다. 


 엄청 가난하고 어려보이는 여자가 꽤 곤란해졌다. 간병 받아야 할 여자의 할머니가 돈 때문에 문제가 생겼고, 어리고 작은 여자가 할머니를 병원에서 빼내고 있었다. 병원침대의 절반도 될 것 같지 않은 작은 여자가 병원침대를 끌고 도망을 쳤다. 나도 모르게 드라마에 빠져들고 있는데 민효정이 타월을 두른 차림으로 욕실에서 나왔다. tv는 껐다.



 “과장님. 물이 끓고 있어요.”


 “아! 미안.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라면이 불을까봐.”


 “그렇겠네요. 과장님도 좀 씻으세요. 전 라면 좀 먹고 있을게요. 참. 남는 칫솔 있어요?”



 민효정에게 새 칫솔을 꺼내주고 욕실에 들어갔다. 욕실 안에는 민효정의 향기로 가득한 것 같았다. 게다가 민효정의 속옷이 세탁되어 타월걸이에 걸려있었다. 


 꽤나 빠르게 양치와 샤워를 동시에 마치고 욕실에서 나왔는데, 민효정이 입에 칫솔을 물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컵라면을 다 먹은 모양이다. 주방개수대에는 깨끗하게 씻긴 라면용기가 있었다. 


 다시 욕실에서 나온 민효정은 여전히 타월을 두른 차림이었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설레는 미소가 나오는 모습이었지만, 민효정은 세상 그렇게 편한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있어야 할지 침실에 들어가 있어야 할지 갈등하고 있었는데, 민효정은 자기 가방에서 작은 화장품을 꺼내 얼굴에 바르며 말했다.



 “과장님 제가 몇 번째에요?”


 “응? 뭐가?”


 “회사에서 만난 여직원이 제가 처음은 아닐 거잖아요.”


 “아.......아니. 집으로 데려온 직원은 효정 씨가 처음이야.”


 “그렇다고 해두죠. 어쨌든 다행이에요. 혹시라도 제가 처음이면 여러모로 불편하니까요.”


 “뭐가?”



 민효정이 일어나 냉장고를 열고 한참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샴페인이 있네요? 집에서 혼자 샴페인을 즐기시나 봐요?”


 “아니. 그건 전에 선물로 받은 거야. 여자를 불러서 같이 마시려고 사다 놓은 건 아니야”


 “괜찮아요. 우리 이거 마실래요?”



 내가 다가가 잔을 꺼냈다. 타월만 두른 차림의 민효정은 내가 다가가도 전혀 움츠리지 않았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내게 샴페인을 건넸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20대 중반의 여자애에게 완전히 휘둘리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나이를 먹으며 조금씩 찌질 해지긴 했어도, 관계를 가질 여자애들에게 휘둘리지는 않았었다. 보통의 여자애들은 알아서 어색해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반전시킬 말을 꺼내보려 했다. 



 “효정 씨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가봐?”


 “굉장히 어색하고 불편하고 부끄럽지만 애써 침착한척 노력하느라 이런다고 말씀드리는 게 좋겠어요? 아니면 워낙에 많은 남자들을 만나고 다녀서 이런 상황이 전혀 어렵지 않다고 말하는 게 듣기 좋을까요? 어느 쪽이든 솔직하지 못하거나 분위기를 불편하게만 하지 않을까요? 굳이 어른인척 행동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는 계속 과장님으로 대접해드릴 생각이에요. 아무래도 그쪽이 좋지 않겠어요? 제가 갑자기 친구처럼 굴지는 않을게요.”



 그제야 비슷한 경험을 했던 걸 떠올렸다. 그때도 내가 어쩔 줄 몰라 했었고 그녀가 내게 상황을 설명하고 내 이해를 도왔다. 그녀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친절했었다. 한수진이 그랬다.


 내 잔에 담긴 샴페인을 단숨에 마시고 잔을 채우는데, 민효정이 다시 말했다.



 “우리 전에 어디에서 본 적이 있었나요?”


 “그런 질문은 보통 남자들이 하는 거 아닌가? 만약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어. 솔직히 나도 비슷한 느낌을 받긴 했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게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해서 참았어. 아마~ 효정 씨가 미녀라서 그랬던 거 같아.”


 “아~ 그 말씀은 과장님이 잘생긴 편이라 어디에서 본 거 같은 얼굴이다?”


 “에이~ 그게 아니라. 뭐. 직장인 아저씨들은 보통 다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아?”


 “그럴지도 모르죠. 하긴 이런 익숙한 느낌을 과장님에게서만 받은 건 아닌 거 같네요. 가끔 어떤 남자들에게서는 비슷한 분위기가 있는 거 같아요.”



 비슷한 대화를 나눴었다. 그것도 한수진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위장이 쓰려오는 거 같은데, 민효정이 다시 말했다.



 “과장님이 저랑 이렇게 같이 있는 게 상당히 큰 문제라는 걸 저는 잘 알고 있어요. 과장님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때론 남자들이 원하는 것들 때문에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우리가 위험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무슨 의미야”


 “지금의 상황으로 서로가 이런 사람이라는 판단은 하지 말자고요. 아니, 과장님은 저를 좀 헤프게 생각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우리가 진지한 관계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걸 분명히 하고 싶어요. 과장님도 제게 그랬으면 좋겠고요. 사무실로 돌아가면 제가 과장님께 평소보다 냉소적으로 보일지도 몰라요. 아마도 우리사이에 지금 있을 일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전 평소와 같이 행동하는 것이고 과장님과 다른 불편함을 겪고 싶지 않아요. 저도 과장님이 저를 어떻게 대하더라도 평소와 같다면 전혀 오해하지 않을 게요.”


 “왜 꼭 그래야 하지?”


 “이미 시작이 잘못되어 있잖아요. 전 지금의 일을 실수라고 생각하고 서로 부끄러워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전혀 실수로 보이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거 같은데?”


 “과장님도 그런 거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어쩌면 우리가 진지한 사이가 될 수 있지도 않겠냐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왜 그런 가능성을 말살하려는 것이냐며 항의하고 싶었다. 


 민효정이 일어나며 두르고 있던 타월을 내렸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몸매가 드러나며 내 머릿속의 모든 생각들은 지워졌다. 민효정이 조금 부끄러워하는 태도이긴 했어도, 저 크고 아름다운 가슴을 가리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 고개를 숙여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일어서니 민효정이 먼저 침실로 들어갔다.



 이미 불편해졌다. 난 민효정을 사랑했다.






 계속.




--------------------------------------------

 무슨 컵라면을 골랐을까요? 다음 주에 계속 하겠습니다.

댓글
  • 4Justice 2019/01/25 13:17

    참깨라면 ㅋㅋㅋㅋ 튀김우동보다는 참깨라면이 더 양치하고 싶어질 것 같네요 ㅎㅎㅎ 근데 신라면은 없었나요?

    (XLq1J9)

  • 백살 2019/01/25 13:17

    참깨 한표 던집니다 ~

    (XLq1J9)

  • NorthWind 2019/01/25 13:21

    그럼 제가 오늘 참깨라면을 먹겠습니다.

    (XLq1J9)

  • 란제리 2019/01/25 13:41

    함탁.. 누가 어미새고 누가 아기새일까요? ㅎㅎ
    오늘의 효정이는 함지혜가 떠오르게 하네요. 단어 하나로 수십문장의 답을 듣던 화법이었는데 ㅎㅎ 역시 사람과의 관계는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미치나 봅니다.
    참깨라면 하자마자 배가넘이 생각나네요 ㅎㅎ 저도 참깨 1표입니다

    (XLq1J9)

  • NorthWind 2019/01/25 13:47

    여태 제목들처럼 계속 스며들고 가라 앉아 섞인다는 주제와 연결을 하려고 합니다.

    (XLq1J9)

  • 잔존사념 2019/01/25 14:31

    전 튀김우동이요! 튀김이 5개 들어있길 바랍니다 ㅡㅡㅋ

    (XLq1J9)

  • NorthWind 2019/01/25 14:41

    3 : 1

    (XLq1J9)

  • 배불러용 2019/01/25 14:47

    민효정에 어울리는 배우가 누가 있을지 궁금하네요.
    재밌습니다.

    (XLq1J9)

  • 한량 2019/01/25 14:58

    저도 참깨로 하려다가 다들 참깨를 고르셔서 그냥 튀김우동으로 하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작가님.

    (XLq1J9)

  • Coronawa 2019/01/25 16:04

    저도 튀김우동!
    북풍님 주말 잘 보내세요

    (XLq1J9)

  • 란제리 2019/01/25 16:19

    배불러용//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이즈원 김민주 입니다 ㅎㅎ
    일단 외형적 모습과 풍기는 분위기(?) 밝은 분위기는 아니니까 ㅎ

    (XLq1J9)

  • 순수 2019/01/25 16:36

    저도 참깨라면ㅋ
    주말 잘 보내세요~^^

    (XLq1J9)

  • 주처님 2019/01/26 00:22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XLq1J9)

  • NorthWind 2019/01/26 07:22

    모두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XLq1J9)

  • 도쿄금메달 2019/01/26 11:41

    출첵!

    (XLq1J9)

(XLq1J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