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관 위치는 경복궁 동쪽 주차장 옆 쪽 삼청동 가는 길에 있습니다
입장료 - 4천원
대부분 아시겠지만 통합 관람료라 현재 전시 중인 모든 전시를 다 볼 수 있습니다.
또 금.토 이틀 간은 저녁 6시 이후부터 9시까지 무료 관람 가능.
또한 아시겠지만 윤형근 화가는 한국 단색화의 거장 중 한 분이라 불리는 분으로, 보는 관점에 따라 매우 단순하고 한없이 재미없을 수 있으니 이쪽에 관심없는 분은 보다 괜히 성질 버리지 말고 그냥 안보시는 걸 추천합니다(전시 보며 계속 투덜투덜 욕하는 사람을 봐서 안타까웠;;).
최근에 본 전시 중 스스로의 무지함에 감탄하며 가장 집중해서 본 전시 후기라 그런지 주저리주저리 꽤 길어질 듯 싶네요
1층 1전시실부터 지하 2전시실까지 아시아 역대 최대 규모라 선전 중인 '뒤샹' 작품들이 상륙 중입니다. 덕분에 방학 맞이 중고딩부터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리는 중이라 일단 여긴 좀 조용해 질 때까지 피하는 걸로. (저는 빛의 속도로 보고 싶었던 한 작품만 후딱 보고 왔ㅋ)
하여, 전방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전시장이 바로 보입니다.
스케치북에 그린 자화상 (1962)
윤형근 (1928-2007)
이 분의 인생은 제가 아는 현대 화가 중 가장 파란만장하더군요. 충북 청주 출신으로 광복 후 일반 회사에 취직하지만 그림에 대한 열망으로 사직서를 쓰고 가출하듯 서울로 상경. 47년 서울대 미대 1회 입학생 중 한 명으로 그림에 입문. 시험 당일엔 긴장해서 늦잠을 자버려 비오는 날 우산도 없이 헐레벌떡 학교로 달려가 시험 시간 직전 아슬아슬하게 도착. 흠뻑 젖어 물을 뚝뚝 떨구며 숨을 헐떡거리는 그를 보던 시험 감독관 한 분이 '자네 그런 상태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겠나?' 라 물었다는데 자신있다고 외치곤 당당하게 합격합니다. 그 감독관이 이후 그의 스승이자 장인이 되는 한국 미술사의 거장 '김환기'
하지만, 입학 후 '국대안'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구류 조치 후 제적당합니다. (국대안이란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던 서울대학교 과들을 서울대란 이름으로 하나로 통합하려 한 것인데, 학생들이 이걸 반대한 이유는 이런 중대한 문제를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왜 미군정이 나서서 주도하느냐. 라는 것이었다고)
이후 6.25가 터지고, 그 시위 문제 때문에 '보도 연맹'에 끌려갔다가 정말 운좋게 탈출했고 그때 같이 끌려갔던 사람들은 다 죽었다 합니다. 이런 지경이라 피난도 못가고 적화된 서울에 있었는데, 먹고 살려고 체제 선전 포스터 그리는 부역을 했다 합니다. 결국 전쟁은 멈추었고 서울대 복학을 시도했지만 거절당하고 스승인 김환기가 교수로 있던 홍익대로 학적을 옮기게 됩니다. 그러나 부역 경럭이 새삼 문제가 되어 56년엔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 복역. 출소 후 겨우 대학을 졸업하고 청주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하며 생활의 안정을 찾고, 홍대 재학시절 만난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씨와 1960년 결혼하게 됩니다.
이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보니 30대 중반에 그린 저 자화상을 보면 50대라 해도 믿을만한 인생의 고락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 후에 본인이 회고하기를 이 시절에 이미 머리가 반백이 되어 있었다고.
습작. 소품들
제목 미상 (Title unknown)
캔버스에 유채
1966년경
그래도 이 시기엔 스승인 김환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게 그대로 보여 스승의 상징색처럼 여겨지는 청색이 주를 이루는 작품이나 무지막지한 두터운 덧칠 등이 보이는 작품들이 보입니다. 단색화로의 변화 조짐은 거의 없죠.
청색 (Blue)
캔버스에 유채
1972
단순화 과정의 처음 시작을 알리는 것 같은 작품이지만 마음껏 사용한 기름으로 인한 물감의 두서없는 번짐 등에서 여전히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초기작.
그리고 또 다른 엄청난 사건이 그를 덮칩니다.
1973년 숙명여고 사건. 숙명여중에 다니던 학생 하나가 성적이 미달됨에도 별다른 문제제기 없이 그대로 숙명여고로 진학한 사건으로 어느 재벌가의 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 개입한 인물이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중정의 이후락. 이때에 숙명여고 교사로 재직중이던 윤형근은 2월 교장에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며칠 후 레닌, 모택동 등이 쓰는 모자를 쓴다는 이유로 반공법위반 혐의를 받아 끌려가게 됩니다.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가 쓰고 다니던 베레모가 너무 멋있어 보여 본인이 입던 청바지를 잘라 직접 만든 모자로 어린 아들 것까지 2개를 만든 거라고.
중정의 누군가가 그의 동생을 찾아와 말하길, 그는 지금 모처에서 인생 공부 중이니 조용히 기다리라고 했답니다. 그렇게 약 한 달 후 그는 석방되지만 구속기간 중 사표를 내 학교는 그만두었고 이후 1980년까지 동네 파출소에 요시찰 인물로 등록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작품에서 색이 없어졌다 회고하게 됩니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1년 후 그의 스승이자 장인이었던 김환기가 죽습니다.
왼쪽이 그의 단색화, 오른쪽이 김환기의 대표작 중 하나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의 뉴욕 화실에서 찍은 사진)
연이은 사건 속에서 그림으로 침잠하게 된 그는 스승의 영향을 벗어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만들어 가고,
청다색 (Ultramarine umber)
'76-F23
마포에 유채 (oil on linen)
1976
놀랍게도 캔버스가 아닌 마포와 면포에 유화를 칠하는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대부분이 폭 2미터 이상의 대작들인데 다 보자면 너무 많은 관계로 몇 작품만 보자면,
'내 작품의 명제를 천지문(天地門)이라 해본다. 블루(blue)는 하늘이요, 엄버(umber)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라 했고, (내 그림의) 구도는 문(門)이다. 1977년 1월 일기 중'
청다색 (Umber-blue)
마포에 유채
1977
청다색 (Umber-blue)
면포에 유채(oil on cotton)
1976-77
그의 일기 내용처럼, 양쪽에 마치 문의 두 기둥을 세운 듯한 구도를 잡은 작품들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작업은 외국에서 먼저 평가 받기 시작해 78년 일본에서 첫 해외 전시를 하게 되고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 됩니다. 이때 평론가인 조셉 러브가 그의 작품을 보고 한눈에 반해 평생 그의 작품을 프랑스와 미국 등에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하게 됐답니다.
저는 처음에 거의 비슷한 구도와 색의 작품들을 보고 꽤나 당황했는데, 제법 오래 가까이서 보며 점점 빨려드는 강한 흡입력같은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뒤로 갈수록 한없이 차분해지는 감정을 느끼게 되더군요. 그는 평생 노자와 장자를 끼고 살았다는데 그 담대한 차분함이 절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윤형근은 마와 면이란 소재가 주는 그 자체의 질감.색감 등과 그 위를 적시는 유화의 번짐 등에 깊은 매력을 느껴 끊임없이 덧칠하고 기름의 농도 조절을 하는 등 무수한 연구와 실험을 반복했다 하고 번짐을 제어하기 위해 거의 모든 작품을 바닥에 눕힌 채로 작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세워 놓고 그렸음직한 두 점의 예외 작이 최초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으니
다색 (Burnt umber)
마포에 유채
1980
다색 (Burnt umber)
마포에 유채
1980
광주항쟁 소식을 듣고 그린 작품들입니다.
비극적인 소식에 절망한 그는 한동안 외국을 떠돌았다 합니다.
80년대 후반이 되면서 그의 작품 세계에 또 다른 변화가 찾아오는데, 전시에선 이 시기의 작품들을 '심간(深簡):간결한 아름다움'이라 표현했더군요
'이 시기 그의 작품은 한마디로 한층 더 간결해진다. 색채는 검은색의 미묘한 변주가 사라진 채 '순수한 검정'에 더욱 가깝고, 물감과 함께 섞었던 오일의 비율도 줄어들면서 화면은 한층 건조해진다. 형태와 색채, 과정과 결과가 더욱 엄격해지고 간결해지지만, 그 거대하고 순수한 검정색 앞에 서면 관객은 왠지 모를 '심연(深淵)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그의 후기 작업은 어떤 '확신에 찬 통찰을 보여주며, 존재와 존재 간의 관계, 그리고 고독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라고 합니다.
다색 (Burnt umber)
마포에 유채
1987
다색 (Burnt umber)
마포에 유채
1989
검색해본 큐레이터와 현장 도슨트의 설명에 의하면 그의 최절정기라 평가되는 시기의 작품 둘.
다색 (Umber)
마포에 유채
1988
제가 가장 오래 앞에 서 있었던 작품. 최근의 스산하고 복잡한 감정들이 모두 녹아있는 듯한 느낌이라 꽤나 넋놓고 서 있었네요
청다색 (Burnt unber&Ultramarine)
마포에 유채
1990-96
청다색(Burnt unber&Ultramarine)
마포에 유채
1999
3,4전시실에 걸친 작품들이 끝나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오른 후, 바로 앞에 보이는 짧은 계단을 올라 8전시실로 전시가 이어집니다. 이곳은 윤형근의 화실과 일상의 장소들을 재현해놓은 공간과 관련 다큐가 상영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죽기 얼마 전에 남긴 그의 유작이 있습니다.
화실에 있던 조각상과 나무였다는데 저 나무는 6.25 때 무너졌던 남대문의 일부가 굴러다니는 걸 작가가 주워온 거라더군요.
아래 붉은 빛의 장식장? 형태는 미쿡 미니멀리즘의 거장인 '도널드 저드'의 작품이랍니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로 93년에 처음 만났다는군요.
저드는 윤형근의 작품을 보고 한눈에 반해서 몇 점을 구입해 자신의 컬렉션에 넣어 재단에서 전시했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감사로 윤형근도 저드의 이 작품을 구입해 평생 자신의 화실에 걸어두고 감상했다고 하네요. 저드 작품 위의 소품은 윤형근의 작품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드는 이 만남이 있은 후 1년 뒤에 세상을 떠나는데, 죽기 전에도 부인에게 계획되어 있던 윤형근의 전시를 꼭 열 수 있게 해달라 부탁했다는군요.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윤형근의 명성은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아졌을지도 모르겠네요.
화실의 전경
실제 저 붓들로 그렸다 합니다
다큐 중 그의 작업 모습
그의 유작
원숙기 이후 사라진 면포에 작업해 한층 밝고 따뜻한 느낌이 물씬.
윤형근 전은 내년 베니스로 순회 전시를 떠날 예정이랍니다
끝
기회되면 가보고 싶네여
새벽에 안 자고 접속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좋은 글과 좋은 그림 보고 갑니다.
잘 봤습니다~ 날씨 좀 풀리면 꼭 다녀와야겠습니다
잘보고갑니다
가을에 보고왔는데...작품이 주는 무게가 아주 묵직하더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생과 예술이 서로 녹아 있군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이런 글들 덕분에 불펜이 아주 풍요로워집니다 감사합니다
올해의 작가상 전시할 때 보고 왔는데, 아직 전시중이군요. 전시장 들어가는 입구에 간략하게나마 생애에 대한 소개글이 벽과 테이블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굴곡진 삶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 전엔 이런 작품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는데, 그 분의 생애를 알게되니 조금이나마 제게도 와닿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시간상 8 전시관은 못보고 나왔는데 사진으로 담아주셔서 일부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작가의 인생을 알고 모니터를 통해서지만 그림을 보니 느낌이 다르네요.
직접 가서 감상해봐야 겠습니다.
좋은 소개 감사합니다.
저는 기대 와방하고 갔는데. 사실... 김환기 영향을 받은 듯한 습작들이 더 마음에 들었었어요.
이분이 요즘 특히 주목받는 이유도 사실 따로 있고요.
저도 한 번 가보고싶네요. 소개 감사합니다.
멋지네요
에휴.사회적으로 아무 기여를 못한 헛된 인생이네요.
축소 사진으로는 설명을 이해하기는 힘들겠군요.
미술관 자주 가시지 않는 분들은 도슨트 설명 꼭 들으면서 감상하시고 도슨트 설명 후 또 정리하는 차원에서 감상해보시길. 국현의 경우 매시간마다 도슨트가 있으나 프로그램이 달라집니다. 한 프로그램당 50분 정도 걸리는데 초심자들은 설명듣는것도 은근히 빡셈
강렬한느낌이네요
좋은글이네요. 추천하고 갑니다
queer// 주목받는 이유가 뭔가요?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