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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프레디 머큐리의 알려지지 않은 10가지 사실

프레디 머큐리의 알려지지 않은 10가지 사실

 

-롤링스톤즈 일본반 2018년 11월 16일 기재-



 

다이애나 비를 변장 시켜 게이 클럽에 데리고 간 에피소드나 O스 피스톨즈와의 대립, 마이클 잭슨과의 콜라보레이션, 그리고 비밀에 둘러 쌓인 묘지까지. 퀸의 싱어 프레디 머큐리의 알려지지 않은 일생을 쫓아본다.

 

‘Lover of life, singer of songs’. 브라이언 메이의 심플하고도 탁월한 이 표현은, 프레디 머큐리라는 복잡한 인물을 간단 명료하게 정의한다. “후회 없는 인생을 보낸 그이기에 이렇게 표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메이는 BBC의 다큐멘터리에서 말했다. “그는 마음이 넓고 살갑지만 어떨 때는 매우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어요.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일생을 바치겠다고 정한 것은 바로 음악을 만드는 것이었다는 겁니다.”

 

영국 보호 영토였던 동아프리카의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프레디 머큐리(본명: 파로크 불살라)의 넘치는 재능은, 그의 활력이나 화려함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것들 전부가 퀸의 악곡 제작에 쏟아졌음은 엄청난 라이브 퍼포먼스에서 짐작할 수 있다. 생전 그가 가진 4옥타브의 굉장한 음역은, 과학자들도 연구했을 정도로 통상의 록밴드 보컬의 한계를 넘고 있었다. 그의 사후에는 그 목소리가 에이즈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기도 했다.

 

프레디 머큐리가 이 세상을 떠난지 25년이 되는 2018년, 머큐리가 남긴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1. 퀸의 작품 보다 먼저 더 로네츠나 더스티 스프링필드의 커버곡을 발매하고 게리 글리터를 모방하다.

 

퀸의 레코드 데뷔에 앞서, 머큐리는 밴드 2명의 협력으로 솔로 앨범을 만들었고 상당히 우쭐해하고 있었다. 1973년 초, 아직 햇병아리였던 밴드는, 런던에 있는 트라이덴트 스튜디오에서 데뷔 앨범 레코딩을 하고 있었다. 비틀즈나 데이비드 보위가 사용한 최신 기기가 갖춰진 스튜디오였으나 아직 무명이었던 퀸에게는, 당연하게도 피크 시간을 피한 오전 3시에서 7시까지의 시간대에만 사용이 허용되었다. “그들은 이른바 ‘다크 타임’을 할당 받은 셈이었죠.” 프로듀서 존 앤소니는 전기 작가 마크 브레이크의 저서 ‘Is This the Real Life? The Untold Story of Queen’에서 증언했다. “엔지니어가 좋아하는 밴드의 프로듀싱을 하거나 종업원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그런 시간대였어요.”

 

어느 날 밤, 스튜디오가 비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머큐리에게 트라이덴트 스튜디오의 하우스 엔지니어를 하고 있던 로빈 제프리 케이블이 다가왔다. 케이블은 당시, 레코딩 프로듀서 필 스펙터가 개발한 ‘Wall of Sound’ 스타일을 재현하려고 했는데 퀸의 보컬의 목소리가 그의 프로젝트에 완벽히 일치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머큐리는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에게 연주를 의뢰했고, 로네츠의 ‘I Can Hear Music’과 캐럴 킹과 제리 고핀의 작품이자 더스티 스프링필드 버전으로 유명한 ‘Going Back’의 레코딩을 시작했다.

 

퀄리티는 충분하다고 판단한 케이블은 정식으로 발매할 것을 제안했다. 머큐리는 제안에 동의했지만 퀸의 데뷔 앨범의 완성도 가까워졌었기에,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펜네임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그는 래리 루렉스라는 색다른 이름을 골랐다. 본인은 게리 글리터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조크’라고 말했다. 글리터는 당시 영국 차트에 군림하고 있었다. 성으로 쓴 ‘루렉스’는, 글리터를 비롯해 글램 록 스타들이 애용한 보디 슈트에 사용된 금속 실의 브랜드에서 차용했다.

 

성범죄로 투옥되어 세상의 신용을 잃은 수십년 전, 글리터는 수많은 팬들을 무기로 내세웠다. 글리터의 팬 누구도 머큐리가 날리는 잽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분풀이로 머큐리의 음반 구입을 거부했고, 수많은 DJ들은 곡을 트는 것을 거절했다. 래리 루렉스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싱글은 1973년 6월 말에 발매됐지만, 완전히 실패로 끝나버렸다. 일주일 후 발매된 퀸의 첫번째 앨범은 솔로 싱글 보다는 나았다.

 

머큐리는 밴드에 정력을 쏟으면서도, 래리 루렉스의 실패에 대해서는 자신의 신념에 반한다고 생각 했고 상당히 아쉬워했다. “굉장한 작품이었다고 믿고 있어요.” 그는 훗날 회상한다. “어떤 퍼포머라도 카피를 당했다면 매우 영광이라 생각할 겁니다. 상대를 높이는 방법의 하나로 그저 약간 장난을 쳤을 뿐이었죠. 뭐가 문제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런 식이라면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의 퍼포머들은 전부 패러디를 한 거 아닌가요?”

 

솔로 싱글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머큐리와 케이블에 관계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다음 해 두번째 앨범 ‘Queen II’의 레코딩 중, 머큐리는 엔지니어에게 ‘Funny How Love Is’에서 ‘Wall of Sound’ 스타일을 입히도록 요청한다.

 

2. 머큐리가 퀸의 로고를 디자인하다.

 

‘퀸’이라는 밴드명을 프레디 머큐리가 고안해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밴드명 후보에는 ‘

빌드 유얼 원 보드’, 더 그랜드 댄스’, ‘더 리치 키즈’등도 있었지만 어떤 것도 머큐리의 비전을 이루어 줄 만한 것은 없었다. “퀸의 컨셉은 위엄과 장대함이라 할 수 있죠. 우리들은 댄디 하고 임팩트 있는 참신한 밴드가 되고 싶어요.” 영국의 음악 전문 주간지 멜로디 메이커에서 머큐리는 말했다. 그리고 퀸은 그의 바램대로의 길을 걷게 된다.

 

머큐리는 밴드명 뿐만 아니라, 왕가의 문장을 연상시키는 특징 있는 로고를 디자인했다. 로니 우드와 피트 타운젠드도 다녔던 런던의 ‘Ealing Art College’에서 기술을 갈고 닦은 그는, 데뷔 앨범의 표지용 로고를 그리기 시작했다. 로고는 4명의 멤버 각각의 별자리를 모티브로 하여 디자인 되어 있다. 존 디콘과 로저 테일러는 두마리의 사자로, 브라이언 메이는 게, 머큐리 자신은 두명의 요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처녀자리를 이미지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상부에는 희망과 부활의 심볼인 불사조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머큐리가 졸업한 ‘St. Peter's School’의 문장을 차용했다. 로고의 중심부에는 우아한 ‘Q’의 문자가 그려져 있고 그 중심에는 왕관이 배치되어 있다.

 

3. 머큐리가 데이비드 보위를 위해 스테이지를 구상하고 빈티지 부츠를 사주다.

 

1981년에 공개되어 세계적인 히트 곡이 된 ‘Under Pressure’를 보위와 머큐리가 공동 제작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2명의 관계는 무명 시절이던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조금 팔리는 수준이었던 보위가 ‘Ealing Art College’에서 작은 라이브 공연을 한 적이 있다. 머큐리는 기쁘게 보위의 짐 운반을 거드는 등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곳에서 보위와 머큐리는 몇 대의 테이블 붙여서 간이 스테이지를 만드는 등 여러가지를 같이 했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머큐리와 로저 테일러는 켄싱턴 마켓에 옷가게를 열고 빈티지 의류를 팔기 시작했다. 음악 활동 수입만으로는 생활하기가 녹록치 않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에드워드 7세 시대의 낡은 옷을 입곤 했어요. 수상한 업자에게 실크 스카프를 잔뜩 사들여서 다리미로 주름을 펴서 팔았었죠.” 테일러는 작가 브레이크에게 말했다. 브라이언 메이는, 들여온 의류에 그 정도로 흥미를 느끼진 못했다고 기억한다. “프레디는 그렇게 들여온 옷들을 집에 잔뜩 갖고 와서 보기에도 끔찍한 헝겊들을 잡아당기며 외쳤어요. ‘이 아름다운 옷들을 보라고! 이건 반드시 돈이 될거야!’ 그래서 제가 답했죠. ‘프레디, 그건 그냥 천쪼가리일 뿐이라고. 누더기 같은.’ “

 

머큐리와 테일러는 장사 솜씨가 형편없었기에, 결국 거리 건너편에서 의류 장사를 하던 친절한 앨런 메이어라는 남자가 그 둘을 고용하기로 했다. “그는 언제나 시원시원하게 일하는, 매우 예의 바른 청년이었어요.” BBC의 다큐멘터리 ‘Freddie’s Millions’에서 메이어는 프레디의 인상을 회상했다. “단 한번도 손님에게 클레임을 받은 적이 없었죠. 그만큼 그의 태도는 전혀 문제 없었어요. 기끔 지각을 하곤 했지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지요.”

 

메이어는 보위의 초기 시절 매니저와 알고 지낸 사이로, 어느 날 훗날 대스타가 되는 보위 본인이 그들의 가게에 나타났다. “‘Space Oddity’는 꽤 팔린 앨범이었지만 여전히 그는 가난한 상태였어요.” 브레이크의 저서 ‘Is This The Real Life’에서 메이어는 말했다. “’음악 비즈니스는 이래야지! 그냥 공짜로 가져가라구!’라고 내가 말하자 프레디는 보위에게 부츠 하나를 골라줬어요. 일개 점원이었던 프레디 머큐리가 팝스타 데이비드 보위에게 부츠를 사준 셈이었죠.”

 

4. 뜻밖에 O스 피스톨즈에게 큰 브레이크를 걸어버린 머큐리

 

1976년 12월 1일, 퀸은 새로운 앨범 ‘A Day at the Races’의 홍보 차 토크쇼 ‘Today with Bill Grundy’에 출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머큐리는 15년 동안 미뤄왔던 특유의 치아를 교정하기 위해 치과에 가야 했었다. 밴드의 레이블이었던 EMI는 당시 새롭게 계약했던 O스 피스톨즈를 대신 내보내게 된다. 방송 측이 준비한 많은 양의 술은, 그렇지 않아도 감당하기 힘든 펑크 록커들을 더욱 더 통제 불능으로 만들었다. 피스톨즈의 멤버 못지 않게 취해 있었던 쇼의 진행자 빌 그런디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이에 흥분한 스티브 존스와 존 라이든은 F-Word를 비롯한 방송 금지용 용어를 쏟아 냈다.

 

런던 지역에 한정된 방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의 엄청난 반발에 의해 O스 피스톨즈는 전국적으로 주목 받게 되었다. 데일리 미러지의 1면에는 ‘The Filth and the Fury!’라는 문자가 춤을 췄고 그 외의 수많은 타블로이드지에서도 일제히 다뤄졌다. 화를 참지 못한 트럭 운전수가 TV를 부숴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런던 시의회의 보수계 의원들은, O스 피스톨즈를 ‘구역질이 나는 인류의 안티 테제’라고 표현했다. 직후에 예정되어 있던 영국내 아레나 투어의 대부분이 취소되는 등 반대 운동도 일어났지만, 미디어의 언급이 끊이지 않았던 탓일까 되려 그들의 인기는 높아져 갔다.

 

슈퍼 스타 밴드를 늘 바보 취급 해왔던 O스 피스톨즈는, 특히 화려하고 뛰어난 연주 기술을 뽐내던 퀸을 경멸했다. 그런 감정은 두 밴드가 서로에게 갖고 있는 듯했다. 머큐리는 피스톨즈의 거친 스타일의 록 음악을 결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머큐리는, ‘펑크는 도저히 이해 못하겠어.’라고 말하곤 했어요.”라고 어느 EMI 간부는 전기 작가 브레이크에게 증언했다. “프레디에게 펑크는 음악이 아니었어요.”

 

1977년, 런던의 웨O스 스튜디오에서 퀸은, 데뷔 앨범을 레코딩 중이었던 O스 피스톨즈와 마주쳤다. “복도에서 우연히 그들과 마주쳤지요.” 메이는 브레이크에게 말했다. “저는 존 라이든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는 굉장히 예의 바른 사람이었어요. 우리들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죠.”

 

그러나 로저 테일러는 피스톨즈의 베이시스트에게 도저히 경의를 표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시드 비셔스는 그냥 바보였어요. 얼간이 같은 놈이었죠.” 다큐멘터리 ‘Queen: Days of Our Lives’에서 테일러는 회상했다. 어느 날 비셔스가 취한 채 퀸의 스튜디오에 비틀거리며 들어와서 “관객들 앞에서 발레를 춘 다는 놈이 누구야?”라며 머큐리를 비꼬았다. 시드는 그 직전에 머큐리가 NME의 인터뷰에서 했던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머큐리는 그리 간단히 시드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를 ‘미스터 표독씨(Mr. Ferocious)라고 불렀는데 영 맘에 들어하지 않더군요.” 머큐리는 방송 인터뷰에서 말했다. “전 ‘그래서 뭐? 어쩔건데?’라고 말했더니 그가 미친듯이 화를 냈어요. 제가 덧붙였죠. ‘오늘은 거울을 보며 확실하게 네 몸 이곳저곳을 그어봐! 그리고 내일이 되면 또 다른 곳에도 해보고!’ 그는 제가 그런 식으로 말 할 수 있다는 걸 매우 싫어했어요. 근데 뭐… 어쩌겠어요?”

 

5. 로얄 발레단과의 협연

 

O스 피스톨즈에 대해선 아는 곡조차 없는 머큐리였으나 발레에 대해서는 달랐다. ‘발레를 퍼트리겠다.’라고 공언한 것을 정말로 실현하려 했다. 1979년 8월, 로얄 발레단의 프린시펄이었던 웨인 이글링은 자선 공연에서 협연이 가능한, 특히 유연한 신체를 가진 스타를 찾고 있었고 그러던 중 프레디 머큐리를 발견하게 된다.

 

당초 머큐리 측의 반응은 긍정적이진 않았다. “걔네들 미친거 아냐?”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EMI의 대표였던 조셉 락우드 경과 이야기를 나누며 출연 오퍼에 흥미를 갖게 된다. 락우드는 마침 로얄 발레단의 이사장이기도 했다. “프레디는 원래 발레에 많은 흥미를 갖고 있었지만, 락우드가 그의 의욕에 불을 붙인 셈이었어요.” 퀸의 매니저였던 존 리드가 다큐멘터리 ‘The Great Pretender’에서 말했다. ‘락우드는 장대한 스케일을 좋아했어요. 그리고 프레디의 퍼포먼스도 장대 했었죠.” 완벽한 조합이었던 것이다.

 

퀸의 무대에서의 머큐리의 퍼포먼스는 마치 스포츠 같았지만, 발레에서는 그 레벨에 닿기까지 격한 리허설이 필요했을 것이다. “바를 잡거나 다리를 뻗는 등 얼추 비슷한 모습으로 연습을 하며 그들이 몇 년에 걸쳐서 습득한 것을 1주일만에 할 수 있도록 했었죠.” 머큐리는 런던 이브닝 뉴스에서 이야기했다. “정말 힘들었어요. 연습을 시작한지 이틀만에 뻗어버렸죠.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신체의 여러 새로운 부분에 고통이 느껴졌어요.”

 

머큐리는 1979년 10월 7일, 런던의 콜로시엄 시어터에 모인 2500명의 후원자들 앞에서 화려하게 데뷔하게 된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와 함께 3명의 남성에게 들려진 채 ‘Bohemian Rhapsody’와 퀸이 곧 발표할 싱글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열창했다. 퍼포먼스의 후반, 은으로 된 보디 슈트를 몸에 두른 머큐리는 고난이도의 풀보디 플립을 보여줬다.

 

“저런 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전세계에 오직 한 명뿐이었어요.” 관객석에서 보고 있던 로저 테일러는 브레이크에게 말했다. “프레지는 평균 연령 94세의 딱딱한 로얄 발레단 관객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한 겁니다. 그들은 눈 앞에 무대에서 허공을 날라다니는 은색 물체가 도대체 뭔지 이해할 수 없었겠죠. 정말 용기 있는 일이었고 굉장히 달아올랐어요.”

 

머큐리 자신은 그 당시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 “바리시니코프만큼은 아니었지만, 나이 먹은 초심자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믹 재거나 로드 스튜어트도 해봤으면 좋겠네요. 하하.”

 

6.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은 목욕 중에 떠올린 곡

 

1979년 6월, 퀸은 ‘The Game’ 앨범 제작을 위해 뮌헨이 체류 중이었다. 머큐리는 호화로운 Bayerischer Hof 호텔에서 여독을 풀기 위해 욕조에 들어갔다. 그 때, 어떤 멜로디가 그의 머리속에서 떠올랐다. 마치 딸꾹질을 하는 것 같은 로커빌리 스타일로 약간 비꼬는 듯한 곡이었다. 소년 머큐리의 보컬에 큰 영향을 끼친, 수년전에 세상을 떠난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한 애정을 표현 한 곡이기도 했다. 머큐리는 어시스턴트인 피터 힌즈에게 방으로 어쿠스틱 기타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바스 타올을 두른 채 그로서는 신기할 정도로 심플한 곡을 불안불안한 기타 연주로 만들기 시작했다.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은 5분인가 10분만에 완성했어요.” 1981년 머큐리는 멜로디 메이커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대로 치지도 못하는 기타로 만든 거였어요. 전 코드라고는 두세개 밖에 모르니까… 그런데 오히려 그게 더 좋았던 거죠. 한정된 좁은 프레임 워크로 심플하게 만들어야 했어요. 코드가 많았더라도 제대로 정리가 안됐을 거에요. 그런 제한이 있던 덕분에 좋은 곡을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곡의 골격이 완성된 순간 그는 엔지니어 레인 홀드 맥에게 레코딩 준비를 하라고 말하고 바로 뮤직랜드 스튜디오로 직행했다. “재빨리 준비해야 했지요.” 맥은 다큐멘터리 ‘Queen: Days of Our Lives’에서 이렇게 말했다. 멤버들도 바로 모이라고 했지만 메이는 도착이 늦어지고 있었다. 머큐리는 메이를 기다리려 하지 않았다. 그러긴커녕 메이의 완벽주의로부터 조금은 해방됐다는 걸 깨닫고 오히려 안심했다. “머큐리는, ‘브라이언이 오기 전에 빨리 끝내버리자. 녀석이 오면 대장정이 되어버릴 테니까’라고 말했어요.” 맥은 웃으며 회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메이가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대부분의 작업이 끝나가고 있었다. “브라이언이 맘에 들어하지 않을거야.” 누군가가 말하는 걸 머큐리는 듣고 있었다. 그 말대로 메이는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애당초 메이는 이 곡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레드 스페셜 기타(그 때까지의 퀸의 레코딩 대부분에 사용되었던)를 보다 1950년스러운 펜더 텔레캐스터로 바꾸도록 요구받았기에 더욱더 정색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재밌지 않았어요.” 메이는 브레이크에게 말했다. “전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이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죠.”

 

그 말대로 1979년 가을에 싱글로 선행 발매된 이 곡은 세계 차트 1위에 등극한다. “그 당시에는 아직 앨범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우리들은 계속 레코딩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테일러는 다큐멘터리 ‘Queen: Days of Our Lives’에서 회상한다. “뮌헨의 길을 걷고 있으면 누군가가 다가와 말해주곤 했죠. ‘당신들, 미국에서 차트 1위가 됐다고!’ 우리들은 엄청난 보람과 성취감을 느꼈어요.”

 

7. 다이애나 비를 변장시켜 게이 클럽에 데리고 가다.

 

1980년대 중반까지의 퀸은, 밴드명대로 왕실과도 가까운 관계였다. 머큐리는 훗날 웨일즈의 왕비가 되는 다이애나 스펜서와도 친분이 있었다. ‘서민의 왕비’는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사랑받았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미디어에게 쫓기는 것은 젊은 그녀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러던 차에 머큐리는 그녀를 밤의 거리로 데리고 나갈 계획을 세웠다.

 

여배우 클레오 로코스가 2013년에 출판한 회고록에 의하면, 어느 날 오후 다이애나와 머큐리는 영국의 코메디언 케니 에버렛의 주택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샴페인을 마시며 TV 방송 ‘The Golden Girls’의 재방송을 소리를 끈 채 대사를 외설스러운 언어로 바꿔 말하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제 뭘 할 지를 묻는 다이애나에게 머큐리는, 모두 함께 Royal Vauxhall T에이브이ern에 갈 거라 대답했다.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게이 클럽이었다. 다이애나는 자기도 같이 가고 싶다고 했다.

 

Royal Vauxhall T에이브이ern는 난폭한 분위기로 유명하고 손님들끼리 싸움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확실히 다이애나가 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 “우리들은 안된다고 했어요. ‘만약 네가 게이바에서 싸움에 휘말리거나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라며 말렸었죠.” 이렇게 말하는 로코스에게 다이애나는 신난 아이 같은 모습으로 조르기 시작했다. 프레디가 말했다. “좋아, 이 고귀하신 분을 즐겁게 해주자고!”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변장은 필수였다. 에버렛은 자기가 입으려고 했던 옷을 다이애나에게 입혔다. 밀리터리 자켓을 어깨에 걸치고 검은색의 비행 조종사용 안경을 쓰고 가죽 모자로 머리카락을 가렸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현시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독특한 복장을 한 남성 게이 모델처럼 보였죠.” 로코스는 회상한다.

 

그들은 다이애나를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바에 잠입시키는데 성공했다. 머큐리, 에버렛, 로코스에게 시선을 빼았긴 손님들은, 변장 한 공주의 모습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덕분에 다이애나는 혼자서 음료를 주문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인산인해를 해쳐가며 겨우 바까지 갔어요. 우리들은 장난끼 넘치는 초등학생처럼 서로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 댔죠. 다이애나와 머큐리는 킥킥거리며 웃어 댔고, 다이애나는 아무렇 지도 않게 화이트 와인과 맥주를 직접 주문했어요. 주문을 마치고 우리들은 서로의 눈을 보며 승리로 끝난 모험을 자축했어요.”

 

우쭐한 기분은 잠시, 그들은 약 20분만에 자리를 떠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이애나에게는 잠시라도 유명인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언젠가 또 해볼거야!” 그녀는 켄싱턴 궁전으로 돌아가면서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고 한다.

 

1990년대 초, 머큐리와 에버렛이 AIDS로 인해 잇달아 세상을 떠나고 다이애나는 영국 AIDS 기금의 후원자가 되었다. 이 기금은 영국을 대표하는 AIDS 환자 지원 조직이다. 다이애나의 Royal Vauxhall T에이브이ern에서의 하룻밤은 2016년 뮤지컬화 되어 그 클럽에서 상영되었다.

 

8. 마이클 잭슨과 레코딩을 했던 머큐리, 팝의 황제의 라마에게 방해 받다.

 

퀸의 결성 이전부터 머큐리는, 마이클 잭슨을 좋아했다. 그는 하드록을 좋아하는 룸메이트들에게 잭슨 파이브의 ‘I Want You Back’의 굉장함을 소리 높여 설명했다. “프레디는 마이클의 경외심을 갖고 있었어요.” 머큐리의 퍼스널 어시스턴트였던 피터 프리스톤은 전기 작가 브레이크에게 말했다. 잭슨이 1982년 대히트곡 ‘Thriller’로 예술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한단계 더 올라섰던 때는, 팝의 황제와 퀸의 프론트맨이 협업을 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기도 했다.

 

1983년 봄, 머큐리는 데모 세 곡을 제작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주 엔시노에 있는 잭슨의 홈 스튜디오에 방문한다. ‘There Must Be More To Life Than This’는 퀸의 1982년 앨범 ‘Hot Space’의 세션 중에 만들어진 곡으로, 가사는 미완성인 상태였다. 세션 테이프에는 머큐리가 잭슨에게 애드리브로 가사를 붙이도록 재촉하는 모습이 수록 되어있다. ‘State of Shock’는 대부분 잭슨이 만든 곡이었고 ‘Victory’는 두 사람의 공동 작품이었다.

 

이러한 곡들이 결국 완성되진 못했지만, 데모의 부틀랙에선 고생의 흔적이 느껴진다. ‘There must be more to life than this’는 다른 버전으로 1985년 머큐리의 솔로 앨범 ‘Mr. Bad Guy’에 수록 되었다. ‘State of Shock’는 잭슨이 믹 재거와의 듀엣 버전으로 1984년에 싱글 발매 되었다. ‘Victory’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완성 되지 못한 채 어딘가에 묻혀있다.

 

잭슨과의 공동 작업이 세상에 공개 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할 때의 머큐리는 매우 신중한 자세였다. “무언가를 완성시키기에는 두 사람 모두 다른 나라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아요.” 1987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다른 인터뷰에서는 팝의 황제에게 욕구불만 같은 것을 느꼈다고 서술했다. “그는 자신만의 좁은 세계에 갇히고 말았어요. 예전엔 같이 클럽에 가서 즐기기도 했지만 지금의 그는 요새에서 나오려 하질 않아요. 슬픈 일이죠.”

 

퀸의 매니저였던 짐 비치에 의하면, 세간에서 거론 되던 잭슨의 기행이 머큐리의 신경을 건드렸다고 한다. “프레디한테서 갑자기 전화가 와선, ‘빨리 와서 나 좀 스튜디오에서 데리고 나가줘’라고 부탁 받기도 했어요.” 피치는 다큐멘터리 ‘The Great Pretender’에서 회상한다.

 

잭슨 측도 머큐리의 나쁜 습관을 싫어했다고 한다. 머큐리의 전 퍼스널 어시스턴트가 더 선지에 투고한 이야기에 따르면, 머큐리가 100달러 화폐로 코카인을 코로 들여 마시는 모습을 잭슨에게 목격 당했기 때문에 세션이 이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어쨌든 머큐리는 세상을 뜰 때까지 잭슨과의 콜라보레이션의 실패에 대해 신경질적이었다. “프레디는 마이클과 레코딩 한 작품이 잭슨즈의 발표 곡이 되고 자기는 쫓겨난 꼴이 되었을 때 화를 냈었어요.” 메이는 다큐멘터리 ‘Is This the Real Life’에서 이렇게 말했다. ‘There must be more to life than this’는 윌리엄 오빗의 프로듀스로 리믹스 되어 2014년 컴필레이션 앨범 ‘Queen Forever’에 수록 되었다. 머큐리와 잭슨의 나머지 공동 작업 곡 두 곡은 아직도 미발표인 채로 남아있다.

 

9. 투어로 부재중일 때는 기르던 고양이에게 전화를 걸고, 가장 좋아하는 고양이였던 딜라일라를 위해 곡을 썼다.

 

프레디 머큐리는 고양이를 정말 좋아했다. 그는 생전에 자택에서 수많은 고양이를 키웠고 고양이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였다. 퀸의 투어로 해외에 나가 있을 때는 언제나 사랑하는 고양이들과 대화 하기 위해 자택에 전화를 걸곤 했다.

 

“호텔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를 걸었어요. 그는 정말로 자신의 고양이들에게 말을 걸고 있었지요.” 피터 프리스톤은 회고록 ‘Mr. Mercury’에서 회상 한다. “절친인 메리 오스틴이 톰과 제리를 바꿔가며 수화기에 대고 프레디의 목소리를 들려줬어요. 1년 내내 이런 식으로 했었죠.”

 

머큐리의 마지막 애인 짐 허튼이 그의 저택 Garden Lodge으로 이사할 때까지, 고양이들은 오스카, 티파니, 골리앗, 미코, 로미오, 딜라일라 이렇게 여섯 마리로 늘었다. “프레디는 고양이들을 자기의 아이처럼 돌봤어요.” 허튼은 자서전 ‘프레디 머큐리와 나’에서 서술 한다. “그는 언제나 고양이들과 장난을 쳤어요. 그가 부재중일 때는 집이고 정원이고 전부 다 고양이 천하로 난리였고, 밤이 되어서야 겨우 전부 모아서 집에 들여 보낼 수 있었죠.”

 

허튼은 저서에서 고양이 골리앗이 행방불명이 됐을 때의 에피소드를 소개 했다. “프레디는 크게 절망했고, 나중에는 반쯤 미쳐서 화로를 창 밖으로 던져 버리기도 했죠.” 머큐리는 고양이를 찾아 온 사람에게 1000파운드(약 150만원)를 주겠다며 현상금을 걸려도 했지만, 다행히 골리앗은 그 전에 발견 되었다.

 

“프레디는 정말 기뻐했어요.” 허튼이 서술한다. “5분 넘게 껴안고 쓰다듬고… 그러고선 마치 엄마처럼 쇳소리를 내며 혼내기도 했지요. 옅은 검은 털뭉치는 가만히 앉은 채 프레디의 설교를 듣다가 천천히 목을 울려댔죠.”

 

허튼이 ‘리틀 프리센스’라고 불렀던 딜라일라에게는 특별한 장소가 확보 되어 있었다. “Garden Lodge에 사는 고양이들 중에서 가장 프레디의 사랑을 받은 고양이였어요. 항상 껴안고 쓰다듬곤 했었죠. 프레디와 제가 잠자리에 들 때는 딜라일라도 함께였어요. 딜라일라는 침대 끝에서 자다가 밤이 깊어지면 몰래 빠져나가 근처를 배회 하곤 했지요.”

 

머큐리는 ‘Delilah’라는 곡을 써서 이 삼색 얼룩 고양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다. 다른 멤버들은 이 곡에 큰 애착이 없었지만, 마지못해 받아 들였다. 메이는 특히나 싫어했던 토크 박스를 써서 기타로 고양이의 목소리를 표현했다. “결국 마지막엔 굴복해서 토크 박스를 쓰기로 했었죠. 토크 박스가 준비 되면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냐옹이라는 소리를 내려면 이거 밖에 없구만’.” 1991년 기타 월드지에서 메이는 회상했다. 이 곡은 머큐리의 생전 마지막으로 발매 된 앨범 ‘Innuendo’에 수록 되었다. 머큐리의 당시 건강 상태를 생각하면 ‘울 것 같은 때에 너는 나를 미소 짓게 해줘. 너는 희망을 주고 나를 웃게 해줘. 좋은 느낌이야’라는 가사는 가슴에 꽂힌다.

 

10. 머큐리는 자신이 묻힌 곳을 비밀로 하도록 했고, 지금도 그 장소는 수수께끼다.

 

머큐리는 1987년 봄에 AIDS라고 진단 받고 그 후 서서히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병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택에 우리들을 모아놓고 진실을 이야기 했어요. 어쨌든 우리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었죠.” 테일러는 다큐멘터리 ‘Freddie Mercury: The Untold Story’에서 이야기 했다. 약해지고 마르고 작아져 가는 머큐리의 모습에서 불멸일 것 같았던 프론트맨이 중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라는 미디어의 추측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밴드는 전원 일치해서 어떤 문제도 없다고 강하게 부정했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비밀로 했어요. 거짓말을 했던 거죠.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지키고 싶었어요. 메이는 다큐멘터리 ‘Queen: Days of Our Lives’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1990년 연말, 밴드는 ‘Innuendo’ 앨범을 완성 시켰다. 이 앨범에는 애수가 깃든 발라드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도 수록 되어 있다. 머큐리의 쇠약해진 신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퀸의 초기 시대를 생각나게 한다. 그의 건강 상태에 대한 우려는 1991년 5월 30일에 촬영 된 이 곡의 뮤직 비디오에서 급격히 높아졌다. 흑백으로 촬영 됐는데도 불구하고 AIDS에 침식 된 머큐리의 몸 상태를 가릴 수는 없었다. “그는 긴 시간을 들여서 메이크업을 했고 마음을 진정 시켜 평안한 상태로 보이도록 했어요. 프레디는 이 비디오를 통해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던 거에요.” 메이는 2011년에 인디펜던트지에 이와 같이 말했다. 머큐리가 사랑한 고양이들을 그린 특별 제작한 조끼를 입은 마지막 씬에서 그는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으며 ‘I still love you’라고 속삭인다. 이것이 카메라 앞에서 한 그의 최후의 말이었다.

 

촬영하기 몇 주 전에 머큐리는 스위스의 몽트뢰에 체류 중이었고 몸이 허락하는 한 레코딩을 이어가고 있었다. 메이의 의하면 레코딩은 머큐리의 정상적인 감각을 유지시켜줬다고 한다. “당시 프레디는 이렇게 말했어요. ‘곡을 써줘. 내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건 이미 알고 있어. 가사를 계속 써줘. 나한테 더 시켜줘. 나는 노래 할 테니까 너희들이 나머지를 좋을 때로 해서 완성시켜줘’라고.” 메이는 다큐멘터리 ‘Queen: Days of Our Lives’에서 회상 했다.

 

프로듀서인 데이브 리차드는 세션을 서두를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악기를 튜닝 하는데 몇 시간이나 걸리는 건 이미 과거의 이야기였다. “곡을 만들면서도 그는 죽음에 가까워져 갔어요. ‘레코딩을 끝내면 난 죽겠지’라고 자각 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그는 ‘지금 바로 부를게. 멤버들의 연주를 기다릴 시간이 없어. 드럼 머신만 울리게 해줘. 나머지는 멤버들이 완성시켜 줄 거야’라고 말했었죠.”

 

메이가 쓴 슬로 템포의 장대한 곡 ‘Mother Love’에서 머큐리는 평상시 같은 모습으로 노래 했다. “어디에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 걸까?” 메이는 텔레그래프지에서 회상 했다. “아마도 보드카가 에너지의 원천이었을 겁니다. 프레디는 약간 워밍업을 하고 ‘한 잔 줘’라고 말하곤 바로 잔을 비워 버렸어요. 항상 스톨리차나야를 마셨죠. 그러고선 ‘테이프를 돌려줘’라고 말하곤 노래를 시작했죠.” 오랜 시간 서있을 수 없었고 걷는데도 지팡이가 필요했던 머큐리는 ‘Mother Love’의 보컬을 컨트롤 룸에서 레코딩했다.

 

“끝에서 두번째의 절까지 레코딩을 했을 때 프레디가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다음에 와서 완성시킬게’라고 말했어요. 그러나 그 후 그가 스튜디오에 돌아오는 일은 없었지요.” 결국 메이가 마지막 부분을 불러서 곡을 완성시켰다.

 

머큐리는 그 후 Garden Lodge로 돌아갔고 짐 허튼과 메리 오스틴이 그를 돌봐주었다. 오스틴은 그의 전 애인으로 1970년에 처음 만나 7년간 함께 살았다. 더 이상 동거는 하고 있지 않았지만 생활은 함께 했었다. 인터뷰에서 머큐리는 언제나 그녀를 진정한 친구라고 표현 했었다.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위그와의 인터뷰에서 유언이 주제가 됐을 때, “모든 재산은 메리와 고양이들 앞으로 남길 겁니다.”라고 말했었다. 퀸의 섬세한 명곡 ‘Love Of My Life’는 그녀에게 바치는 곡이었다.

 

오스틴은 소울 메이트의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타임 리미트를 정해뒀어요. 레코딩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을 때, 그런 기력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 끝이 왔다고 생각 했지요.” 그녀는 다큐멘터리 ‘The Great Pretender’에서 이렇게 회상 한다. “그의 인생도, 그의 기쁨도 그런 식이었으니까요.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그만큼의 힘을 쏟지 못했을 거라 생각해요.”

 

피할 수 없는 죽을 앞에 둔 머큐리는, 준비를 시작했다. “일요일 점심 식사를 마치고 갑자기, ‘내가 묻히고 싶은 장소는 이미 정해뒀어. 하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아줘. 파헤쳐 지는 건 질색이야. 그냥 편안하게 잠들고 싶어’라고 말했어요.”

 

1991년 11월 24일, 머큐리는 AIDS가 원인인 기관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런던 서부의 어느 켄살 그린 묘지에서 화장 되었다. 유골은 항아리에 담겨져 오스틴의 침실에 2년간 놓여졌고 그 후 그녀에 의해 몰래 그가 원한 장소로 옮겨진다. “주위 사람들에게 평소와는 뭔가 다른 모습인 것처럼 비춰지기 싫었어요. 그래서 ‘미용실에 갔다 올게’라고 말하고 나갔지요. 설득력 있는 이유가 필요했어요. 타이밍을 재는 것이 어려웠지요.” 그녀는 2013년 데일리 미러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항아리를 들고 살금살금 집을 나섰어요. 스태프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평소처럼 할 필요가 있었죠. 스태프는 가쉽을 좋아하고 입을 다물지 못하니까요. 그이가 원했던 대로 누구에게도 묻힌 장소가 알려질 일은 없을 거에요.”

 

머큐리의 부모에게 조차 비밀로 하고 있다고 알려진 그 장소를, 묘에 들려 인사를 하고 싶은 많은 팬들은 밝혀내려 했다. 머큐리의 출신지인 잔지바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자택의 정원에 심은 벚꽃 나무 밑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2013년,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여겨졌다. 머큐리의 출생 시의 이름(Farrokh Bulsara)과 날짜 (5 Sept. 1946 – 24 Nov. 1991)가 새겨진 묘석이 켄살 그린의 묘지에서 발견 된 것이다. ‘Pour Etre Toujours Pres De Toi Avec Tout Mon Amour – M’라고 프랑스어로 적힌 메시지의 최후의 M은 메리 오스틴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추측했다.

 

오스틴 자신은 “프레디는 절대 그 묘지에 있지 않아요.”라고 부정하고 있다. 그 후 묘석은 떼어내 졌고 아직도 그가 묻힌 장소는 밝혀지지 않았다.

 

2018년 12월 5일

 

번역 : 하작가

 

원문 링크 : https://rollingstonejapan.com/articles/detail/29438

 

 


** 낮에 올렸던 글인데 야심한 밤에 많은 분들 느긋하게 볼 수 있게 다시 한 번 올립니다. 메탈리카, 그린데이에 이어서 밴드 관련 글 번역 해 올리는 건 퀸이 세번째네요. 그러고 보니 푸파이터즈는 왜 안했지... 제임스 헷필드와 데이브 그롤을 가장 좋아하는데 프레디 머큐리 역시 많이 좋아집니다. 제가 좀 더 빨리 태어났더라면 어땠으려나요...**

댓글
  • 델토로 2018/12/06 01:01

    좋은글 감사합니다. 역시 스토리가 풍부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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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kinner 2018/12/06 01:04

    흥미로운글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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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더K 2018/12/06 01:08

    잘봤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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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영업팀 2018/12/06 01:17

    스크랩할게요~ 지우지 말아주세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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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ledge 2018/12/06 01:22

    잘봤습니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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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퍼손오공 2018/12/06 01:29

    이런 글 좋아요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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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ueCrew 2018/12/06 10:36

    선추 스크랩 후정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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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써클큐 2018/12/06 10:37

    감사합니다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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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쿤킴 2018/12/06 11:17

    분명히 글 밖에 없는데도 글을 읽는 동안에 머리 속에서 노래가 들리는 신기한 경험을 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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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스 2018/12/06 14:33

    스크렙 합니다 ㄷ ㄷ 지우지 마세유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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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룩킹삼진 2018/12/06 15:44

    감사합니다. 일단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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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르티시모 2018/12/06 19:15

    오 다이애나비랑 저랬다니 저것도 좋은 영화 소재가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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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렙트훅 2018/12/06 23:49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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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짱구한상훈 2018/12/07 01:01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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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테츠킨 2018/12/07 18:53

    아. 큰일이다. 이제 후레디 머큐리라 하면 ‘저녁은 자셨는지요?’ 가 저절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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