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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사랑없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39)

 

   



 사람이 살면서 가장 많은 변화를 겪는 시기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일 거 같다. 그 이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잘은 몰라도, 더 많이 살아본 사람들도 그렇게들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평생에 걸쳐서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10대에서 20대가 끔찍할 정도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건 맞겠다.


 준비가 되었든 안 되었든 간에 끊임없이 결정을 강요당했다. 당연히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줄 알았던 것부터 시작하자마자 문과와 이과로 나눠졌다. 어느새 진로를 결정해야 했고 점수에 맞춰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남자애들은 입대시기를 정해야했다. 그리고 그 시기에 꽤나 많은 이성을 경험하게 된다. 역시 준비가 되었는지는 상관없다.


 몇몇 준비된 친구들은 다양한 기회들을 괜찮은 추억으로 남기겠지만, 상당수는 기회를 놓치거나 아예 알아채지도 못하거나 실수를 연발하는 바람에 평생 이불 걷어찰 기억을 남기게 된다.


 대학이 결정되고 입학하기 전까지 이성을 만날 수많은 기회들이 생겼었다. 앞으로 만나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아쉬움과, 다시는 만날 일이 없겠다는 홀가분함이 더해져 상당히 자유로운 만남이 가능한 시기였다.


 게다가 남녀공학이라 따로 다른 여학교와 미팅을 물색할 필요도 없었다. 고교시절 내내 같은 학교 학생이 맞았는지 궁금할 정도로 모른척했던 여학생들과도 어울릴 기회가 있었다. 그 와중에 다른 학교 여학생들까지 만나고 다니는 녀석들도 있었고, 누가 누구와 만난다는 소문은 대단찮았다. 하도 많은 친구들이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던 시절이라 사귄다? 어쩐다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수한 첫 경험담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혐오감이 생길 정도가 아닐 외모라면 꽤나 많은 녀석들이 어른 되었다는 소식들을 쏟아냈다. 


 당연히 모두에게 열린 기회들은 아니다.



 “썽현! 지영이네 반 여자애들이랑 미팅 좀 하자는데~ 콜?”


 “거의 다 아는 애들인데 무슨 미팅이야~ 그냥 만나서 노는 거지!”


 “아! 역시 너에게는 효정이가 있다 이거냐? 이수정도 나온다는데~ 그냥 와서 놀다 가지? 수정이가 효정이보다 가슴 더 크지 않냐? 크크큭~ 걔 요즘 장난 아니라던데?”


 “걔 가슴이야 원래 장난 아니었지. 뭐가 요즘 장난 아니야?”


 “태준이랑 사귀다 헤어졌잖아. 그 뭐랄까 최고의 상황 아니겠냐?”


 “둘이 사귄 것도 몰랐는데 벌써 헤어졌냐? 어차피 대학 가면 못 볼 건데 헤어지려고 또 만나?”


 “그러니까 최고의 상황이지! 책임 없는 쾌락이랄까?”


 “발정 났냐? 콘돔이나 써라~ 난 바빠”



 난 게임을 했다. 그동안 참았던 게임을 실컷 했다. 다행히 혼자만 게임을 했던 건 아니다. 나처럼 미뤄뒀던 게임을 같이 했던 한심한 녀석들이 많아서 다행이다. 우리는 실컷 게임을 하다가 다른 몇몇 친구들의 첫 경험 소식을 듣고 잠시 부러워했으나, 우리에게는 꼭 이뤄야하는 목적이 눈앞에 있었다. 부러움은 잠시 접어두고 게임전략을 수정하고 연습을 통해 실력을 향상시켰다. 


 유명길드에 당당히 가입하고 우리가 그런 길드에서 형님들의 칭찬을 듣는 에이스가 되었다. 프로게이머가 될 것도 아니면서, 어쩌면 꽤나 좋은 추억들을 만들 수도 있을 시간을 게임으로 가득 채웠다. 불과 몇 주가 지나지도 않아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그 시절에 게임을 같이 했던 사람들을 거의 기억도 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걸 몰랐다. 그때는 마치 그들과 의형제가 된 기분으로 평생을 함께할 줄 알았지만, 한두 번 길드 술자리에 나갔다가 여자만 찾는 형들에게 실망하며 현실을 깨달았다.


 나 같은 녀석들이 뒤늦게 여자애들에게 기웃거리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거나 애초에 이성을 만나는 일에 관심 없는 여자애들만 남아있었다. 그래도 나는 만날 여자애들이 있긴 했는데, 한명은 이미 몇 번이나 헤어지고도 다시 만나는 남자친구가 있는 평생지기동네친구였고, 다른 한명은 나랑 같은 대학에 진학하게 된 동아리친구였다.


 실수가 생기면 관계개선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친구들뿐이다. 앞으로도 꽤나 긴 시간을 보게 될 이성친구라는 게 원래 그렇다. 동성친구들이야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것처럼 내가 제공하는 편의에 대한 대가보다 훨씬 큰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이성친구는 식물을 키우는 것과 비슷했다. 어느새 혼자 자라있기도 하고 물을 너무 많이 주거나 주지 않아도 죽어버린다.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회복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회복해버리기도 한다. 운이 좋으면 꽃을 피우기도 하는데, 열매의 주인이 나라는 보장은 없다.


 평생지기동네친구인 송민아가 그랬다.



 “너 요즘 집에 항상 늦게 들어온다며? 아주 신났구나? 효정이 걔랑은 대학도 같은 곳으로 간다며? 이제 곧 둘이 살림도 차리겠네? 적당히 해라 그러다 금방 지친다.”


 “아니. 난 별로 걔랑 만난 적이 없는데. 그냥 친구들이랑 게임하느라 늦게 들어간 거야. 그리고 참. 남친이랑 몇 번이나 헤어졌는지 세기도 어려운 애가 할 말이냐?”


 “아~ 걔가 그렇게 말하래? 효정이 걔 내가 봐도 좀 장난 아닌 거 같아. 무슨 애가 눈치 보는 게 습관이야. 나한테 둘 사이 말해주는 게 뭐 어때서 그런데?”


 “야! 쏭민아! 네가 남친이랑 만날 때마다 나를 pc방에 보냈잖아. 게임을 좋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를 제공한 당사자가! 게임 하는 걸 의심하는 거야? 와~ 그럼 너는 남친이랑 자주 헤어져서 덜 지쳐?”


 “오오~ 우리 유성현 많이 컸네? 다 컸어. 메시지에 반박을 못하니까 메신저를 공격하는 거야? 효정이 걔가 가르쳐줬어? 내가 남친이랑 자주 헤어지면서도 또 만나는 걸 비아냥거리라고?”


 “효정이 진짜 그런 애 아니야.”


 “워~ 이제 편도 들어. 그렇지 평생 친구보다는 애인이 먼저지. 암~ 그렇지.”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한 것도 아니다. 송민아가 갑자기 연락해서는 우리 집 근처라며 나오라 했다. 오랜만이라 반갑게 나갔다가 싸웠다. 민아랑 싸우는 일도 오랜만이라 급격히 피곤해져 대강 핑계를 대고 도망가려는데, 자기가 먼저 남친이랑 약속이 있다며 가겠다고 했다. 약속시간이 애매하게 남은 김에 나를 만났단다.


 이제 슬슬 열 받으려는데, 민아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들며 피임은 꼭 하라고 했다. 내가 3년 전쯤에 하고 싶었던 말을 민아가 했다. 난 아무리 친해도 여자애에게 그런 말을 하긴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민아는, 관계는커녕 여자를 만나지도 않는 내게 피임을 하란다. 내가 자웅동체생물이냐.


 송민아는 그 남자친구라는 인간과 얼마나 많이 했을까. 젠장.



 수능이 끝나고 대입원서를 넣던 기간에 효정이를 딱 세 번 만났다. 그나마도 두 번은 편집부회식이었고, 따로 둘이 만난 건 한번이었다. 게임을 하고 있는데 효정이가 잠깐 만나자고 했었다. 같이 밥을 먹거나 영화라도 보자는 줄 알았는데, 추운 집 앞 놀이터에서 정말 잠깐 만났었다. 효정이 엄마가 많이 편찮으신지 걱정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위로해줘야 할지 잘 몰라서 그냥 좀 어깨를 토닥여주다가 집에 들어가는 민아에게 걸렸다.


 게다가 (민아네 엄마가 또 위장병이 도져서) 우리 엄마가 민아네 집에 반찬을 가져다주고 오는 길에 민아를 만났다. 이집 저집 엄마들이 편찮으신 중에 나는 뜬금없이 여자친구가 생긴 남자애가 돼버렸다. 민아가 몇 년이나 만나는 남자친구가 있었을 때도 별 말이 없었던 부모님들까지 내가 여자친구가 생겼다며 좋아하셨다.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봤자, 나는 소꿉친구 민아에게 아직 마음이 있어서 여자친구를 감추는 녀석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게임을 하러 다니는 걸 여자친구를 만나러 다니는 걸로 오해받았다. 세상에 이렇게 억울한 오해가 있겠나 싶다.


 차라리 효정이를 진지하게 만나보는 게 낫겠다. 그러나 효정이에게 내가 먼저 연락하기가 좀 애매했다. 나를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게 먼저 다가오던 여자애가 연락이 뜸하니까, 효정이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줄 알았다. 아니면 내가 애매하게 구니까 이젠 마음이 떠난 줄 알았다. 


 효정이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을 때 무척 기뻤다. 하지만, 아무 말이 없어서 전화가 끊긴 줄 알았다. 내가 효정이를 몇 번 불러도 대답이 없던 효정이는 울고 있었다. 효정이네 엄마가 많이 편찮으시단다.



 일단 병원을 물어서 찾아갔다.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거 같았다. 병원으로 가면서 편집부 선배들에게 연락을 하고, 한수진 선생님에게도 연락을 했다. 


 효정이 엄마가 수술중이라 했다. 아무리 뒤져도 보호자가 없어서 수술이 늦어졌단다. 울음을 참느라 숨을 내쉬기가 힘들어 보이는 효정이의 어깨를 안아줬다. 효정이가 내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선배 두 명이 도착했을 때, 수술이 끝났다.


 의사 선생님이 일단은 수술이 잘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표정은 어두웠고 지켜보자는 얘기를 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연락하려고 했는데, 선배들이 그냥 오게 하라고 했다. 내가 효정이를 달래는 동안 선배들은 병원비를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보호자를 찾기 힘들 정도라면 병원비를 걱정해야 하는 게 당연했다.


 한수진 선생님도 도착하고 다른 선배들도 왔다. 한수진 선생님은 효정이가 아직 졸업한 건 아니니까 도울 방법이 있을 것이라 했다. 다른 선배는 지원받을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고, 우리 편집부원들끼리라도 최대한 돈을 모아보기로 했다.


 사람이 아프면, 가장 큰 문제는 항상 돈이다. 효정이 엄마가 건강을 회복하고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를 걱정하는 시간은 무척 짧았다. 돈을 걱정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아직 대학에 다니고 있는 선배들도 마찬가지였고, 한수진 선생님도 효정이가 병원비를 지불할 능력이 되는지 걱정했다. 


 어딘가에 전화를 몇 번 걸었던 한수진 선생님이 효정이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우리 편집부에서는 모금을 진행하기로 했고, 한수진 선생님은 어차피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계시니까 나가서 좀 쉬다가 오라고 했다. 효정이는 그냥 병원에 있겠다고 했지만, 한수진 선생님은 병원 근처에 있는 거랑 무슨 차이가 있겠냐며 나를 따로 불러 말했다. 



 “어쩔래. 네가 데리고 있을래. 다른 여자애랑 있으라고 할까.”


 “효정이는 어느 쪽이 편할까요?”


 “네가 더 잘 알겠지. 나는 일단 애들 데리고 나갈 테니까 네가 같이 있다가 데리고 나가서 밥이라도 먹여. 너 돈 없지. 자.”



 한수진 선생님이 지갑에서 10만원을 꺼내줬다. 겨우 밥이나 먹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라고 하니까 선생님이 말했다.



 “급하게 움직이려면 택시비가 필요할 수도 있겠고, 효정이는 좀 씻고 자야 하니까.”


 “아. 그러면 다른 여자선배가 낫겠는데요.”


 “아니, 그러려면 네 쪽이 낫겠다. 다른 여자애들이 더 불편할 거야. 너는 괜찮아”



 다른 선배들과 선생님이 함께 병원을 나가면서 선배 한명이 내게 또 돈을 줬다. 한수진 선생님에게 이미 돈을 받았다고 했지만, 일단 받아두고 남으면 나중에 알아서 하라고 했다. 


 오늘밤 집에 들어가긴 힘들 것 같아서 엄마한테 미리 전화했다. 친구 엄마가 수술을 했는데 걱정되어서 같이 있어줘야겠다고 얘기했다. 엄마는 알았다며 오늘 민아네 집에서 고기를 구워먹기로 했단다.



 [민아네 엄마 다시 위장병 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그래서 좋은 고기로 골랐어. 민아엄마는 어차피 술 안 먹잖아~]


 [.......네]



 효정이는 나도 집에 가보라고 했다. 자기 혼자 기다려도 괜찮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고집을 피웠고, 바람도 쐴 겸 밥을 밖에서 먹고 병원에 함께 있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리고 밥을 먹고 와서 내가 말했다.



 “내가 자리 지키고 있을 테니까 씻고 옷도 좀 갈아입고 와”


 “응”



 이렇게 간단히 말을 들을 줄 알았다면, 진작 씻고 오라고 말해줄 걸 그랬다. 나는 천천히 와도 괜찮다는 쓸데없는 얘길 했고, 효정이는 남자 기준으로도 상당히 빨리 돌아왔다. 


 효정이 엄마가 깨어났을 때, 효정이도 잠에서 깼다. 덕분에 내 어깨는 상당히 뻐근했고, 효정이가 흘린 침도 좀 묻었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효정이가 나와서 이제 괜찮다며 고맙다고 했다. 


 난 집에서 씻고 좀 쉬다가 다시 병원으로 갔다. 효정이를 집에 다녀오게 했고 밥을 먹였다. 효정이랑 며칠 동안 그렇게 같이 보냈지만, 진지한 대화는 별로 나누지 못했다. 가끔 쓸모없는 얘기들로 시간을 채웠다. 다행히 효정이 엄마의 상태가 좋아지면서 퇴원을 할 수 있었다. 


 병원비는 한수진 선생님이 지불하셨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런 돈이 생겼는지 설명은 안 해줬다. 편집부에서 모은 돈은 효정이가 엄마를 간병하는데 보태 쓰라고 전달했다. 


 나랑 효정이는 같은 대학에 진학했지만, 효정이가 엄마를 간병하느라 고교시절보다도 어울리지 못했다. 가끔 마주치는 효정이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휴학규정에 따른 신입생장학금 때문에 억지로 학교에 나오는 효정이가 힘겨워 보였다.



 효정이 엄마는 효정이가 평범한 대학생활을 하길 원했던 것 같다. 교정의 꽃들이 몽우리 질 무렵에 세상을 떠나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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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겁게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일을 하는 기분이 들어 다음 주는 잠시 쉬겠습니다. 나중에 계속 쓰겠습니다. 

댓글
  • 란제리 2018/11/15 15:02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글쓰는 즐거움이 두려움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글이 쓰고 싶어 미치겠단 생각이 드실 때 돌아오세요 ㅎ

    (SqPVuk)

  • NorthWind 2018/11/15 16:06

    란제리// 그렇게 진지하게 접근할 일은 아닌 거 같아요. ㅎㅎㅎ

    (SqPVuk)

  • EulersN 2018/11/15 16:42

    헐..... 기다리겠습니다. 돈 받고 하는 일도 아닌데 억지로 할 수는 없죠 ㅎㅎ

    (SqPVuk)

  • Shy  2018/11/15 20:38

    짠효정 ㅠㅠ

    (SqPVuk)

  • 순수 2018/11/15 23:58

    항상 잘 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SqPVuk)

(SqPV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