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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안의 수치라고 하신 분(이과 집안에 태어난 문과)

이브 라부이스(1904~2007)
작가, 피아니스트, 레지스탕스 경력자, 유니세프 운동가
전미 도서상(National Book Award), 레지옹 도뇌르 서훈자, 폴란드 부활십자훈장 수장자.
그녀가 자신을 집안의 수치라 말한 이유는...
아버지가 피에르 퀴리(1903년 물리학상), 어머니가 마리 퀴리(1903 물리학상, 1911년 화학상) 형부인 프레데리크 졸리퀴리(1935년 화학상), 언니인 이렌 졸리퀴리(1935년 화학상), 남편인 헨리 라부이스(1965년 UNICEF 대표로 평화상 수상)까지 노벨상 수상자라서...
댓글
  • 티이거 2018/10/11 22:28


    실제로 과학에 흥미를 안보이자 어머니 친구들이 눈총을 보냈다기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분들이.. 이분들

    (CoGrsa)

  • 댓글한땀 2018/10/11 22:35

    음... 저 분이 수치이면 나는 뭘까? 발톱의 때 정도는 될 수 있을까?

    (CoGrsa)

  • 부먹투사 2018/10/11 22:46

    하여간 이과생들 인성... 쯧쯔쯔...
    저렇게 이쁜 분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CoGrsa)

  • 대마왕36호기 2018/10/11 22:59

    이렌이 아니라 이브...

    (CoGrsa)

  • 득햏자 2018/10/11 23:40

    역시 이과 집안이라 수치라하는군요
    문과였음 문치라할텐대

    (CoGrsa)

  • 고만해^현띠가 2018/10/12 00:20

    근데 너무 아름답다.. 진짜 저런 얼굴로 하루만 살아보면 어떤 기분일까..

    (CoGrsa)

  • rhaeo 2018/10/12 00:58

    방사능 관련 연구를 안하셔서 유일하게 피폭당하지 않고 장수하셨죠;;
    과학은 몸에 해롭습니다.
    문과를 가세요. 여러분

    (CoGrsa)

  • 한글1~6ㅈㅏ 2018/10/12 01:31

    노벨상 그까이꺼 뭔상관여. 백살넘게 살았는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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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댓글캐리어 2018/10/12 01:35

    이과집안이라고 이과쪽으로만 가는건 아니군요

    (CoGrsa)

  • dagdha 2018/10/12 11:52

    [부연설명]
    마리 퀴리
    폴란드 출신 과학자.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하여 노벨물리학상 수상. 이후 금속 라듐 분리에 성공하여 노벨화학상 수상. 바르샤뱌 출생으로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에서 일가가 어려운 삶을 살다가 학업의 뜻을 두었으나 당시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교는 남자만 받아서 여자도 받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 소르본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 석사 학위를 받고 프랑스인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해 프랑스 국적을 취득.
    이후 방사능 물질인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하였으나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아니라고 노벨상 수상 대상에서 빠짐. 문제는 여자는 과학 아카데미 회원에 받아주지를 않았음. 그래서 정작 자기가 시작한 연구임에도 남편만 받고 자기는 못받을 상황에 처함. 그러나 남편이 '그럼 나도 안받아!' 라고 해서 물리학상을 받게 됨.
    이후 남편이 죽고 소르본 대학교에서 남편의 빈 자리에 후임으로 초빙. 프랑스 고등교육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학 교수가 됨. 이후 금속 라듐 분리에 성공하여 두번째 노벨상을 받게 되었으나 마침 폴 랑주벨과의 불륜 사건이 일어남. 언론들은 마침 잘되었다고 연일 까대는 가십성 기사를 쏟아내고 오죽하면 스웨덴에서 마리 퀴리에게 노벨상 거절하는게 어떻겠냐는 편지를 쓰기까지 했으나 마리 퀴리는 '상은 과학자의 사생활이 아니라 업적에 주어지는 것'이라며 상을 수상함. 그러나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린 마리 퀴리는 프랑스를 떠남.
    당시 프랑스는 지속적으로 마리 퀴리를 괴롭히고 있었음. 특히 보수적이고 구시대적인 과학계에서는 그녀에게 심한 성차별을 지속했는데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후보 투표에서도 탈락시켰는데 그 이유가 높으신 분들의 '이민자이고 여자를 아카데미에 받아들일 수 없다' 라는 주장때문이었음. 심지어 "여성은 영원히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없다" 라는 결의안까지 통과시키기까지 했음. 이 관행은 퀴리 부부의 제자인 마르게리테 프레이가 최초의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여성 회원이 되는 1962년까지 유지됨.
    1차 대전이 발발하자 퀴리 부인은 X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리틀 퀴리'라는 자동차를 직접 개발하여 전선을 돌아다니며 부상병을 진단, 100만명이 넘는 병사가 도움을 받았다고 함. 그러나 마리 퀴리에게는 어떠한 훈장이나 영예도 돌아가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도 모두 국가에 헌납해서 무일푼이 되었음. 게다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연구소로 돌아갔지만 남아있는 라듐이 1g밖에 안되었고 여기저기서 의학용으로 라듐을 빌려달라는 요청이 쇄도했지만 돈이 한푼도 없어서 구할 수도 없는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었음. 라듐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녀의 생활이 윤택했을 수도 있지만 그녀는 '라듐은 하나의 원소이며 모든 사람들의 것' 이라는 마인드로 특허권을 포기했었다고 함.
    이 사실을 인터뷰 중 알게 된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멜로니가 사연을 듣고 모금 운동을 전개, 라듐 1g을 구입할 돈을 마련하게 됨. 이후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 라듐 1g을 받는 행사에 참석하게 되는데, 이때가 되어서야 프랑스 정부는 자신들이 마리 퀴리를 너무 함부로 대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됨. "프랑스 정부는 뭐했는데 이렇게 훌륭하신 분을 흘대하냐?" 라는 욕을 먹기 싫었던 프랑스 정부는 그제서야 부랴부랴 그녀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려고 했으나 이미 마음 상할대로 상했던 그녀는 훈장을 사양함. 미국에 간 마리 퀴리는 대통령이 직접 수여식에 참여할 정도로 극진한 환대를 받음.
    급해진 프랑스는 이후 마리 퀴리에게 국가상과 연금을 수여하기로 하며 아예 그녀가 사양하거나 거부하지 못하도록 "거부권을 박탈해버림".  프랑스 의학 아카데미에서는 1923년 과학 아카데미가 엿먹으라는 듯 그녀를 회원으로 받아들임. 그녀가 입후보하지 않았으나 자발적으로 추천하였고, 다른 후보들이 모두 사퇴를 해 버렸음.
    마리 퀴리는 말년에 방사능에 의한 빈혈로 고생했으며 요양원에서 1934년 숨을 거둠. 그러나 피폭된 방사능 량에 비하면 오래 살았다고 하며, 방사능 피폭은 라듐 연구 때문이 아니라 1차대전때 부상병들의 X선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다가 입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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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케이쁜케이 2018/10/12 12:42

    문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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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adenza 2018/10/12 13:01

    마리퀴리가 남편의 제자(조수?)와 바람이 난 건 파리 신문의 대서특필 시리즈였다죠. 근데 아인슈타인이 말하길 "마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마리의 인품을 말한거라면 오케이, 근데 그게 아니라면 혹시?

    (CoGr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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