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05년
부산시 지하철 4호선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길이30m 폭 30m 정도의 유적이 발견됨
현장의 위치와 건축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동래성의 해자로 판명됨
출토 당시의 사진
그리 크지 않은 발굴현장인데도,
엄청난 수의 유골들과 병장기들이 발견됨
즉, 이 유물들은 임진왜란 극초기의 동래성 전투에 남겨진 흔적들이었음
임진왜란 당시의 기존의 조선군 무기양식을 새로 써야할만큼
많은 양의 병장기가 출토됨
근데 보다보니 뭔가 좀 이상함
아무리 당시 전투가 치열했다고 쳐도
길이, 폭 30m짜리 좁은 현장에서
발굴된 유골과 병장기의 수가 약간 과할정도로 많았음
발굴된 유골들을 조사해보니, 조선군의 유골들도 많았지만
여성과 아이의 유골들도 상당히 많이 발견됨
어린아이의 두개골엔 총상이 남아있고,
한 여성 유골은 몇 차례나 목을 베인 흔적도 발견됨
아무래도 동래성 전투에서 학살당한 조선군 포로들과 백성들의 시신을
해자에 뭉쳐서 버린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고 함
현재 관련 유물들은 부산지하철 4호선 수안역에
박물관 형식으로 전시되어있다고 함
베스트에 장평대전 글 보고 생각나서 올려봄
당시 동래부에는 약 3천의 병력과 2~3만 정도의 백성들이 있었다고 보고 있음
임진왜란때 쪽발이들 ㅈㄴ 거릴거없이 학살해댔지
그당시 일본군 군법이 저래 일본군 전국시대에 시대상황을 보면 이해가 가는게 전투를 엄청하다가 포로가 막대하게 발생하면 포로 관리에 식량까지
그당시 산업과 농업 생산력으로는 군인포로를 먹이는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지
또하나 포로를 관리하는 만큼의 병력 손실을 감수해야하니 죽이는쪽이 자신의 병력을 보전하는 가장 빠른 수단이기도 했고
그리고 조선의 성들이 대부분 끝까지 항전했다는점이 동래성 출토에서도 여실히 드러나지
임진왜란때 쪽발이들 ㅈㄴ 거릴거없이 학살해댔지
그당시 일본군 군법이 저래 일본군 전국시대에 시대상황을 보면 이해가 가는게 전투를 엄청하다가 포로가 막대하게 발생하면 포로 관리에 식량까지
그당시 산업과 농업 생산력으로는 군인포로를 먹이는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지
또하나 포로를 관리하는 만큼의 병력 손실을 감수해야하니 죽이는쪽이 자신의 병력을 보전하는 가장 빠른 수단이기도 했고
그리고 조선의 성들이 대부분 끝까지 항전했다는점이 동래성 출토에서도 여실히 드러나지
이순신 : 그래서 다 수장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