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우 선생님은 재밌다.
학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선생님이었지만, 공부는 설렁설렁 가르치는 편이었다. 항상 아이들을 웃게 만드는 그 말,
" 목숨 걸고 공부하지 마라~! 여기가 무슨 노량진이냐? "
김남우 선생님이 저렇게 농담 식으로 말을 할 때마다 아이들은, 무슨 학원 선생님이 공부하지 말라고 하냐며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선생님이 하도 저 말을 입에 달고 사니까, 하루는 한 친구가 웃으며 물어봤다.
" 노량진에서는 어떻게 공부하는데요? 쌤이 알긴 알아요? "
김남우 선생님은 손에서 책을 놓으며 웃었다.
" 궁금해? 그래, 오늘도 공부와 관계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해보자! "
아이들도 웃으면서 하나둘 펜을 놓았다. 새로울 것도 없이, 김남우 선생님의 수업은 항상 이렇게 설렁설렁 이었으니까.
" 선생님이 한참 목숨 걸고 공부하던 시절의 이야기야. 그때 난 노량진에서 잘 가르치기로 소문난 스타 강사의 수업을 듣고 있었지. 그 수업이 얼마나 대단한 수업이었냐면... 한 시간 수업료가 너희 한 달 학원비보다 비싸다고 하면 와 닿을까? "
" 으아~! "
아이들은 놀란 얼굴로 감탄사를 내뱉었고, 김남우 선생님은 그 반응에 만족한 듯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 그런데 어느 날. 수업시간에 이 강사가 들어오는데, 모양새가 좀 이상했어. 눈은 퀭하고, 복장도, 머리도,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었지. 술 냄새도 조금 풍기는 것 같았고... 이 강사는 교탁에 서서 잠시, 아무 말도 없이 학생들을 바라만 보았어. 그러니까 학생들도 이상하게 쳐다봤지. 왜 저러지? 하고 생각하면서. 계속 그러니까, 누가 나서서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 하나 싶을 타이밍에~ 강사가 이렇게 말했어. "
[ 첫사랑 이야기해줄까? ]
김남우 선생님은 이게 엄청난 말이라는 듯, 과장 된 얼굴로 입을 벌렸지만, 이 학원에서 놀라는 아이들은 없었다.
선생님은 쩝! 입맛을 다시며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 아무튼, 학생들은 이제 어리둥절해졌지. 저 선생이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서 보고 있는데, 강사가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거야. "
[ 나는 평생 공부만 하느라, 여자친구를 아주 늦게 사귀었어. 31살에 처음 만났으니까... 나는 그녀에게 정말로 빠져들었지. 2년 만에 그녀와 결혼했을 정도니까 말이야. 그녀는 예뻤고, 착했고, 가정에 헌신적이었어. 그녀와 결혼할 수 있어서 나는 정말 행운아라고 생각했지. 그녀는-. . . ]
" 강사는 그렇게 자기 아내의 좋은 점을 계속해서 자랑했어. 우리에겐 염장질이나 마찬가지였는데도..이상했던 건, 말하는 강사의 얼굴이 슬퍼 보였다는 거야. 뭐, 그건 이유가 있었지만... 아무튼, 계속 강사가 그렇게 자기 사랑 얘기를 떠들고 있으니까~ 한 학생이 말했어. "
[ 선생님! 수업 안 하십니까? ]
" 엑! 정말로 그렇게 말했어요? "
한 아이가 믿을 수 없다며 소리치자, 김남우 선생님도 웃으며 동의했다.
" 그러니까 내 말이! 우리처럼 이렇게 수업 따위는 재끼고 노닥거리는 게 완전 개이득인데! "
아이들은 크게 웃었고, 선생님은 다시 표정을 고치고 이야기를 이었다.
" 강사는 학생의 말에 잠깐 말을 멈췄지만..무시했어. 마치 못 들은 것처럼 전혀 대응하지 않고, 그녀의 칭찬을 계속했어. 학생들은 웅성거렸지. 우리들은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해하고 있었어. 그때, 그 강사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변했어. 아주, 싸늘해졌지... 강사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어. "
[ 아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얼마 전이었어. 퇴근하고 집에 갔는데, 아내가 화장을 지우고 있는 거야? 이상했지. 결혼 후에는 외출할 때가 아니면 화장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거든. 어디 갔다왔냐고 물었더니, 그냥 심심해서 해봤다더군. 그래서 그냥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더군. ]
" 강사는 썩소를 지으며 점점 흥분하기시작했어. "
[ 그날 이후 아내의 외출이 늘었어. 내가 출근한 시간에 집으로 전화를 걸면 받지 않을 때가 많았지. 가끔은 밤에도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오는 경우도 있었어. 나는 불안했지. 그렇게 착한 아내가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생각했지만, 최근 들어 너무 변한 아내의 모습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어. 헤어스타일도 바꾸고, 짧은 치마를 입고, 화장을 자주 하고, 집안일에 소흘했어. 그러던 중에... 친구 놈이 그러더군. 시내에서 아내를 봤다고. 모르는 남자와 있었는데... 누군지 아냐고. ]
" 말을 하던 강사의 눈이 점점 시뻘게져서 무언가, 미친 사람처럼 변했어. 우리는 그 분위기에 압도당해서 침묵했지. 강사는 격해진 톤으로 말했어. "
[ 그래도 난 믿지 않았어. 절대로 믿고 싶지 않았지! 내 인생 유일한 사랑인 그녀가 그럴 리가 없다고, 그럴 순 없다고 생각했어.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엔 절대 믿지 않으리라 생각했어. 그래서, 어제 직접 아내의 뒤를 쫓았고... 내 눈으로 직접 봤지. ]
" 이 대목에서 강사는 눈시울이 붉어져 썩소를 지었어. "
[ 아내가 남자랑 모텔에 들어가더군. 난 1시간 동안 밖에 서 있었어.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그러다가 봤어. 그래 봤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그새끼 팔짱을 끼고 나오던 아내의 행복하게 웃는 얼굴을 말이야.. ]
" 으~ "
이야기를 듣던 아이들의 얼굴이 안 좋아졌다. 김남우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 그래. 그때 우리도 너희들 같은 표정이었지. 강사는 어느새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 "
[ 미칠 것 같았어. 누구에게도 그 심정을 말할 수 없었어. 밤새 혼자서 술을 마시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지.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를 찾았어. 그런데... 나를 본 아내는 그렇게 웃질 않았어. 어제처럼 웃질 않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어. 마치 귀찮은 생물을 보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었어.. 어질러놓은 장난감들을 보는 것처럼 나를 보고 있었어.. ]
" 여기까지 말한 강사가 말을 멈추는 순간, 우린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어. 잠시 뒤, 강사는 이렇게 고백했어. "
김남우 선생님은 잠깐 말을 멈추고 굳은 얼굴로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고, 한 줄의 대사를 던졌다.
[ 나는 달려가 아내의 목을 졸랐어. ]
" 으아?! "
아이들은 깜짝 놀라 저절로 소리가 터졌다.
김남우 선생님은 굳은 얼굴로, 마치 자신이 그 강사인 것처럼 몰입했다.
[ 내가 목을 조르자, 놀란 아내는 버둥거리고, 부릅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팔을 휘젓고, 내 팔을 쥐어뜯고, 캑캑거리고, 침을 흘리고, 시뻘게졌지. 그래도 난 끝까지 이를 악물고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어. 아내는 점점 힘이 빠지더니, 결국 움직임을 멈췄어. 내가 손을 놓아버리자, 마네킹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지. ]
" 으으...! "
[ 나는 움직이지 않는 아내를 쳐다보며 무서워졌지. 당장 욕실로 달려가, 아내의 침이 묻은 손을 씻었어. 다시 돌아와도, 아내는 그 자세 그대로 일어나지 않고 있었어. 내가 아내를 죽인 거야. 내 손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 거야. 혼란스러웠어. 무서웠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나는 무작정 집을 도망쳤어. 도망치며 시계를 봤어. 시계를 보고,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생각났어. 오늘은 수업이 있는 날이었거든. 너희들에게 수업을 해야 하는 날이잖아? 그래서 나는 여기로 왔어. 집에서 도망쳐 곧장, 여기로 왔지... ]
" ... "
아이들은 심각한 얼굴로 집중했다. 김남우 선생님은 다시 보통의 목소리로 돌아가,
" 그렇게 말한 강사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멈춰있다가, 핸드폰을 꺼내서 112에 신고를 했어. 자기가 아내를 죽였고, 지금 어디에 있다고 모든 걸 자수하더라고. "
" 와... "
" 강사는 전화를 끊고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교탁을 짚고 서 있었어. 강의실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지. "
" 와~ 진짜 무서웠겠어요 쌤! "
아이들은 머릿속에 그 광경이 그려지는 듯, 몸서리를 치며 떠들어댔다.
한데, 김남우 선생님은 아까보다 더 심각한 얼굴이 되어,
" 그런데 말이야... 그때. "
" ? "
" 한 학생이 그 적막을 깨며 말했어. "
[ 수업 안 하시나요? ]
" !! "
아이들은 경악한 얼굴로, '말도 안 돼!' 라며 믿을 수 없어 했다.
피식 웃은 김남우 선생님은 물었다.
" 그런 말을 한 학생이 어떤 사람일까? 어떤 얼굴이라고 생각해? "
" 음... "
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떠올리며 대답을 못 할 때, 선생님이 말했다.
" 평범했어. 아주 평범한 얼굴이었어. 노량진에서 돌아다니다 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얼굴이었어. "
" ... "
" 강사는 그 학생을 가만히 보다가, 이렇게 말했어. "
[ ...책 펴세요. ]
" 와-? "
" 강사는 교탁에서 책을 펼치고, 수업을 시작할 준비를 했어. 그때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주변에 수많은 학생들이 책을 펼치는 소리가 들렸다는 거야... "
" ... "
아이들은 할 말을 잃은 얼굴이 되었다.
" 강사는 수업을 시작했어. 필기를 하고, 강의를 하고, 평소와 똑같은 수업을 했어. 나중에 경찰들이 와서 강사를 연행해갈 때까지 말이야. "
" 와... "
" 다음날, 내가 다시 학원에 갔을 때, 나는 어제와 똑같은 학생 수를 확인했어. 어제와 똑같은 교실에서, 똑같은 학생들이, 새로운 강사의 수업을 똑같은 자세로 들었지. 어제 못다 한 보충까지 열심히. "
" ... "
김남우 선생님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 나는 무서웠어. 아무렇지도 않은 학생들이 무서웠고, 나도 그래야한다는 현실도 무서웠고, 그게 당연한 구조도 무서웠고... 그냥 다 무서웠어. "
" ... "
" 너희는 목숨 걸고 공부하지는 마라. 여기가 노량진도 아니잖아? "
김남우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지만, 아이들은, 이번엔 그 말에 웃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음... 저와 약간, 미세하게 싱크가 맞아야 느낌이 오실 것 같은 그런 느낌?;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이게 뭐라고?' 라는 반응이 올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오오 첫댓이다 ㅎㅎ 잘봤습니다~
웬지 섬뜩하면서도, 기계처럼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는거 같아 안타깝기도 하네요 ...
선추천 후감상입니당~~~
소름...김남우 선생님 이야기는 다 소름인듯.....
와...실제로 그러고도 남을 법하다는게 더 소름...
개소름....
이번 이야기는 어디에선가 일어날 법한 느낌 때문에 여운을 주네요......
목숨걸고 인생걸고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남의 죽음이 어떤식으로 다가 올지....
저는 절대 모르겠네요
정말 좋습니다.
폭력 등의 위협이 아닌 일상화된 부조리가 주는 섬찟함.
이게 복날님 스타일이 아닌가 싶네요.
언제부터 이런생각을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되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저 선생님의 사연도 안타깝고
그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수업을 받아야하는 학생들의 인생도 참으로 안타깝네요.
무엇이 이렇게 만든걸까요.
학생들의 이기심에 화가나지만
한편으로는 마냥 화만낼수 없는 현실이 가혹하네요..
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제가 저 상황이라면 그냥 책 펴고 강사 강의 들을 것 같아서 더 소름돋아요. ㅠㅠ 우린 공부하는 기계도 가르치는 기계도 아닌 사람인데......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드려요
그런데 제가 이번에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작명소에서 "남우" 라는 이름을 지어주더군요. 예상하시겠지만 저는 김씨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으로는 못하겠다고 하고 다른 이름으로 지어줬습니다.. ㅠㅠ
헐 대박... 진짜 잘읽히고 넘넘 재미있어여...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당!
감사합니다~ 공감 결여가 걱정됐는데, 그래도 꽤 공감이 갔나보네요;
감사해요~
노량진에서 공부해봤어서 다녔던 학원이 배경으로 그려지고 막ㅋㅋㅋㅋ
재밌네요
그런데 무서운 이야기는 또 안올리시나요?
노량진역 내려서 육교 건너면 다들 비슷한 츄리닝에 패딩을 입고 백팩을 멘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저도 그중 하나였어서 그런지 많이 공감되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