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과 고2인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비문학 강의하다가 연관 지문이 나와서 롤모델에 대한 이야기를 제자들과 나눠봤습니다.
남고반이어서 다들 남학생이었는데 거의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아버지'를 롤모델로 꼽더군요.
그래서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아버지가 너무도 성실하셔서.
아버지가 어머니랑 결혼하신 것이 부러워서.
아버지가 조부모님, 외조부모님 양쪽 모두에 너무도 효자라서.
뭐 이런 당연히 존경하고 롤모델로 삼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유들이 나오는 가운데 한 녀석이 좀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회사일로 좀 늦으시는 날이면 집에 오실 때 양손 가득 비닐봉지를 들고 오세요.
퇴근길에 만난 노점하는 노인분들 남은 물건 떨이로 막 사오시거든요.
진짜 가끔 놀랄 만큼 많이 사오세요.
그런데 어머니는 그걸 보시면 항상, 우와 일주일 찬거리 생겼네. 혹은 야식 먹고 싶었는데 우리 자기가 최고야.
이렇게 맞으세요.
이런 아버지도 좋고 또 저렇게 맞아주시는 어머니도 좋은데 그런 어머니를 알아보고 결혼한 아버지가 최고로 성공한 남자 같아요."
그래서 흐뭇하게 듣고 내심 감탄한 저는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아무개야, 적어도 그런 훌륭한 부모님을 보고 자란 너는 정호승의 시 '슬픔이 기쁨에게'에 나오는 사람처럼 좌판 귤장수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고 기뻐하는 그런 사람은 안 되겠구나. 축하한다."
비혼주의자인 제가 할 말은 아니겠으나.
불펜에 보면 너무도 많은 분들이 결혼 무용론을 말씀들 하시고 유부남의 삶을 노예로 생각하시는 듯 하던데
적어도 저 아이들 보면 결혼하고 자식도 낳아 길러볼만 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렇게 고딩 정도로 머리가 제법 굵은 아이들이 자신의 부모님을 존경하고 롤모델로 생각하는 이유를 보며 모든게 완얼이고 돈이 최고라는 글을 쓰는 분들도 저런 소년기가 있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정호승의 시를 하나 올리고 갑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가장 존경하는 분이 부모님이군요.
흐음, 역시 나는 비슷한 유형의 학생들에게만 인기가 있는 선생인 것 같습니다.
대중성이 약해서 대강사가 못 되었나 봅니다, 하하하핫.
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착각하시는게요.
결혼안한다는사람 99.9프로가
위처럼 좋은사람맍나면 다하고싶어할겁니다.
문제는그사람이 없다는거고.
정확히는 있는데 학벌이나 집안 등 물질적인 차이로 가까워지기전부터 서로 가까워질수가없는 구조이고 세상이 살기어렵다보니 애초에 그런맍남기회자체가적지요
그것보다 고1 고2가 자신이 생각하는 근거들이 멋지네요. 현상의 이면도 잘보구요
바이낸스// 흐음..말씀하신 경향성이 존재하겠으나 다들 꼭 그렇게만 짝 맞춰서 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만해도 뭐 불펜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는 여건에서 연애 시작해서 15년을 이어가고 있거든요.
살아온 여건, 가정환경, 집안 경제력 등등이 다 달라도 인연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조건으로 보지 않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불가능은 아님을 저는 경험했으니까요.
뭐, 물론 저는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행운이 결코 그냥 오지는 않았기에.
엥 어디서 많이 본 내용인데 ㅋㅋ
NO.28// 님 혹시 Y고 다니세요? ㅎㅎ
결국은 존경받을만한 부모 밑에서 자라기에 제대로 된 존경심을 갖춘 아이가 나오는게 아닐까요. 사실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대답하는 사람은 많아도 왜 존경하느냐에 대해 제대로 대답하는 이는 의외로 드무니까요. 외모와 재물이 모든 것이라 진심으로 생각하는 부모 밑에서 남을 올곧게 존경할 수 있는 아이가 자라날 확률이, 그야 없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런 아이는 정말 존경받을만한 인물로 성장하겠지요
베레타//고등학생 ㄷㄷ 아니요 ㅋㅋ 다만 '아버지가 밤늦게 오실 때 노점상에서 푸정거리들 한가득 사오면 어머니가 와 일주일 반찬이다 한다는 얘기' 를 어디선가 들어본 내용 같아서요ㅋㅋ라디오였나 봅니다.
그 제자 가정은 행복이 넘쳐날듯....
사람냄새 그득해서 좋네요
엘트// 좋으신 말씀이세요.
chaniya88// 네. 그런 부모님답게 아이에게 성적도 강요하지 않으시더라구요.
세대가 많이 바뀐다 어쩐다 해도 저렇게 예쁜 애들의 맥은 이어져 가는군요. 대중성과 상관없이 대강사이신듯요.
RSCport// 저는 세상이 어떻네 저떻네 해도 제자들 보면서 삶에 대한 희망과 인류에 대한 애정을 회복합니다.
제 직업이 꽤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랄까요.
가끔 제자들 순수한 말들 들으며 반성도 많이 합니다.
소설을 쓰시는 분인가요????
배부른강쥐// 아뇨.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