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중 기타를 맡고 있었던 리치 제임스는 똘끼와 천재적인 작사 능력을 지닌
밴드의 핵심 멤버이자 정신적인 지주와도 같았다.

그는 항상 정신적으로 불안했다.
"당신들의 저항 정신이 진짜인가? 어그로 끄는 거 아님?"
이어 자신의 손목을 베어 '4 REAL'(진짜로) 이라는 글씨를 적는 기행을 저지른 적도 있다.
(구글로 ‘Richey James 4 real’이라 검색하면 나오는데 혐오주의)

그의 기행과 우울증, 불안 증세는 영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괴물 명반을 낳았는데,
그것이 바로 1993년 발매된 3집 이다.
‘She Is Suffering’
괴상한 커버만큼이나 위험한 가사들로 가득했던 이 음반은
영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어두운 음반 중 하나로 손꼽히고는 한다.

1995년 2월 1일 매닉 스트릭트 프리처스가 미국 프로모션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날,
리치는 갑자기 사라졌다.
런던의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빠져나가는 모습이 사람들이 본 리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리치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2주 후, 자살 명소로 유명한 사우스 글로스터셔의 절벽 근처에서 리치 소유의 차량이 발견된다.
차 안에는 먹고 남겨진 햄버거 용지와 한 달 전 찍은 가족사진 뿐이었다.
또한 사람이 최소 일주일 정도 생활한 듯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분명 그의 모습이나 혹은 시신이 그 주변에 있을 거란 판단을 한 경찰은 장소 일대를 샅샅이 뒤졌으나,
놀랍게도 정말, 아무런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보컬 제임스 딘 브래드필드, 베이스 니키 와이어, 드러머 션 무어
멤버들은 패닉에 빠진 채 6개월 간 서로 연락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
과연 리치 없이 이 밴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지 또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나 슬픔이 계속되던 도중, 베이시스트 니키가 보컬 제임스에게 새로운 가사를 보냈다.
그리고 완성된 곡은 바로 영국의 노동 계급을 찬양하며
브릿팝 시대 최고의 명곡으로 손꼽히는 ‘A Design For Life’.
그리고 이 곡을 만드는 과정에서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는 밴드 활동을 이어가기로 결정한다.
절망 속에서도 계속 이어가야 할 무언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리치가 실종되고 난 지 불과 1년 후, 4번째 정규 앨범이 발매된다.

‘모든 건 떠나보내야 해’
팬들은 이 앨범 발매 소식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밴드의 주축이었던 멤버가 실종되고 불과 1년 만에 새 음반을 발매했다는 점.
그런데 그 앨범이 전작과 견줄 만한 엄청난 명반이었다는 점.
이 앨범을 기점으로 밴드의 스타일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어둠의 끝을 달렸던 리치가 사라졌기에
멤버들은 당시 브릿팝 시대의 슬픈 서정성을 받아들여
좀 더 말랑말랑한 스타일의 곡을 쓰기 시작했다.
특유의 사회 비판적인 가사는 리치를 떠나보낸 이후에도 여전했다.
위의 ‘A Design For Life’도 그러하고, ‘Kevin Carter’라는 곡도 그러하다.

그리고, 적응하는 기간 중 잡음도 많았으나
결국 팬들은 바뀐 음악 스타일에도 환호하게 되었고
마침내 이 음반은 1997년 브릿 어워즈에서 최고의 앨범상을 받게 된다.
음반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200만 장이 팔렸다.
밴드의 근간이 되었던 리치 없이도 90년대를 대표하는 브릿팝 명반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앨범의 전체적인 밝은 이미지 속 곳곳에는 여전히 리치를 향한 그리움과
힘들더라도 헤쳐나가겠다는 의지
언론들의 추측과 세간의 루머로 인해 받은 상처의 흔적들이 가득 묻어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고, 2008년 영국 경찰은
리치를 법적 사망 처리하며 공식적으로 사건은 종료되었다.
록 음악 역사상 가장 미스테리한 사건은 이렇게 미제사건으로 끝을 맺게 된다.
자살의 정황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고,
또한 실종 전 거액의 현금을 인출한 사실도 있어
멤버들은 지금도 여전히 리치가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믿는다.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는 지금도 공연을 할 때 무대 한 켠 자리를 비워둔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리치 얘기를 꺼내기만 해도 바로 눈물을 쏟을 정도로, 리치는 남은 멤버들에겐 애절한 존재이다.
남은 세 멤버는 리치 실종 이후 그 긴 시간 동안 벌어들인 수입의 1/4을 꼬박꼬박 리치의 계좌에 입금한다고 한다.
리치가 언제라도 다시 밴드로 돌아와 같이 공연을 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It was no surface but all feeling
Maybe at the time it felt like dreaming
실체는 없지만 느껴지는 게 있어
그럴 때마다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아
- 마지막 트랙인 ‘No Surface All Feeling’ 가사 중
And I just hope that you can forgive us,
But everything must go
네가 우릴 용서해주길 바래.
하지만 모든 건 떠나보내야 해
- 5번 트랙 ‘Everything Must Go’ 가사 중
오호 이런 사정이 있었구나
많이 듣지는 않은 밴드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