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은 경주 용명리 석축형 제련시설 유적의 상상도.
조선시대에 저런 대형 제련시설이 적지 않게 있었으며 일본보다 양질의 철을 제련하고 다듬는 기술이 있었음.
그리고 조선의 경우 강철과 주철을 구분하여 생산하고 공정하는 반면 당시의 왜국은 그런거 없었음.
참고로 저 짤 속 유적을 발굴하는데 일본 학계 1인자가 헐레벌떡 쫓아와서 참관함.
왜냐? 임진왜란 이후에 새로 생긴 공법을 실시한 유적에다 일본의 석축형인줄 알고 까봤더니 당시 왜국엔 없던 완전환원로 였음ㅋㅋ
----
여기에 더불어 대장장이들 중에 장인이 그냥 감으로 두들겨서 칼 만든다고 인식이 파다한데 사실은 아님.
조선시대 중기부터 대장장이들이 검을 만들 때는 확실히 규격화된 방법으로 때리고 담금질 함.
선조...선조 그새끼만 아니었어도
아니 원균 그새끼만 아니었어도
실제로 임란때 초기진압만 잘 되었어도 지금 한일간의 격차는 역전되었을걸
명나라 망하고 서양 도자기 공급이 끊기니까 그걸 일본에서 사가면서 엄청난 양의 귀금속이 일본쪽으로 흘러들어감... 그걸로 온갖 자금 대고 근대화 성공
이게 끔찍한거지. 백성들 고생 안시키려고 고려의 수도와 왕궁까지 추가 증축공사 없이 이어 온 나라가 조선인데, 망할땐 친원파 비스무리한 놈들로 망하니..
애초에 지금도 북한 위쪽은(조선족 거주구)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석유&광산지
우리나라도 환도는 예비무기
선조...선조 그새끼만 아니었어도
아니 원균 그새끼만 아니었어도
실제로 임란때 초기진압만 잘 되었어도 지금 한일간의 격차는 역전되었을걸
명나라 망하고 서양 도자기 공급이 끊기니까 그걸 일본에서 사가면서 엄청난 양의 귀금속이 일본쪽으로 흘러들어감... 그걸로 온갖 자금 대고 근대화 성공
하지만 원균의 후손은 지금 ㅋㅋㅋ
코레일 선정 역사적 위인 원균의 생가 방문 하쉴?
선조는 왕으로서는 좀 그래도 인간으로서는
그래 그럴수도 있다 칠 수 있는데
원균...원균 그새끼는 안돼
초기대응 운운 어처구니없네 조선에보낸 전투병만 20만에 보급병30만을 동원한
적벽대전수준의 큰전쟁이었는데
무슨 초기대응 운운 50만대군을 초기대응 잘하면 피해없이 막았다고?
개소리 ㄴㄴ
이거 나만 오인사격으로 느끼는거 아니지?
원균이 경상좌수사였는데 여기 경상도쪽에 조선해군전력 대부분이 몰집되있었는데 원균이런한다고 판옥선 100여척 물에 다 담궜음... 이게 썩은거다 관리 소홀로 못쓴다 말이많긴했는데 만약 이순신장군이 경상좌수사였음 상황이 좀 달라졌겠지?
참고로 임진왜란당시 왜군초기 해상전 전투교리는 총각후 적배에 승선해서 싸우는거
그래봐야 쇄국정책한다거 어차피 망하지않앗을까...
선조는 나름대로는 일잘함
주변새끼들이 잡고뒤흔든게문제지
지금쇄국정책이 튀어나올 이유는 없어보이는데...
전쟁초창기 일본군대가 아직 모두 상륙하지 않았을때 동래성함락되자마자 원균이 제대로 휘하부하를 통솔하지 못하면서 경상도쪽 수군을 전혀 써먹지도 못하고 버리게 됩니다. 개전초창기 대부분의 조선수군 해상전력이 그쪽에 있었고, 일본수군과 조선수군의 전력차이가 매우 컸던것을 생각한다면 개전초기 제대로 초기대응을 했더라면 모든 일본의 전력이 온전히 상륙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학계의 평가가 있습니다.
헛소리 그만하자..... 천하의 이순신장군이 부산항 공격하라는 선조명령을 왜 실행안했다가 파면당했는데
부산항앞바다같이 섬도없고 탁트인 바다는 교역하기에 둘도없이 좋은 항구지만
판옥선이 싸우기에는 지옥같은 바다였음.
실제로 이순신장군이 싸운 전투를 살펴보면 적이 무조건 일자로밖에 못오는 지형에서
일방적으로 포격해서 이긴전투가 대부분임.
그 원균도 전투시뮬레이션 돌려보고 안된다 이거가면 우리전멸한다고 말했다가
권율한테 곤장치기 당했고
조선시대 지도부들이 전부다 멍청해서 임진왜란초기에 바다에서 싸우지말고 땅에서 싸워야한다고한지아나?
실제로 판옥선이 노약질하던 왜구들이랑 싸웠을때 승률도 그닥이었음.
왜구애들은 빠르게 판옥선에 붙어서 갈고리걸고 배로기어올라가 백병전을 주로벌엿거든.
오히려 이순신이 경상우수사가 아니라 전라좌수사로 있었기에 이긴거임.
침공 초기 이야기하는데 적병 다 상륙하고 점령돼서 요새증축한 뒤 이야기를 하면 어떡함...
그리고 왜선에서 판옥선으로 빠르게 갈고리걸고 올라감....? 이건 무슨 근거도 없는 재패니즈 판타지
쇄국정책이 튀어나오는게 임란 이후 조선으로 들어가는 서양세력을 일본에서 막은적이 있음
따지면 우리가 쇄국을 한게 아니라 일본이 쇄국을 만든거지
경상도쪽에 있던 수많은 수군전력이면 일본측 수군과 충분히 전면전할 수 있는 전력이었음. 그것들이 다 부서지고 몇척이 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수적 열세로인해 이순신이 그런 전략을 쓸 수밖에 없었던겁니다. 이순신이 만일 자신의 전력이 왜군에 비해 압도적이었다고 판단했으면 좀더 과감하게 싸울 수 있었겠지요.
음... 판옥선이랑 적 왜서 체급차이 고려해보고 명량해전 당일날 난중일기 기록보면 어느정도 접근을 허용해도 오래 버텄잖음. 그래서 무조건 발리진 않았을듯. 난중일기 보면 왜구들 해상전 전법이 현측 접근 후 강제로 계류해서 선상 백병전 위주로 갔다는걸 이미 알고 있서, 그거에 대비해 현측으로 올라오는 왜구들 조지는 용도로 대낫 비스무리한 무기도 제작해서 판옥선마다 준비시켰던거로 보면 모를 일임
누가보면 쪽바리들이 선전포고 먼저하고 쳐들어온줄
갑자기 쳐들어와서 중간에 바다에서 요격이고 뭐고 할시간 없었고
상륙후에는 하루만에 수십Km를 전진함.
부산이점령된 시점에서 해군운용을 못하니 원균이 배안넘겨줄려고 태우고 빤스런한거고
이거외에는 별다른 선택지 없었음. 실제로 위에서도 원균이 판옥선 불태웠다고 크게 뭐라안함.
그리고 판옥선 백병전벌인게 근거가 없긴 무슨 헛소리인지 애초에 거북선만든이유가 왜군들이 기어올라와서
자꾸 백병전벌이고 사상자가 많이나니깐 만든거고 조선에서 배를 더높여서 판옥선을 만든거자체가
왜구들 못기어오르게한건데
그리고 원균이 깨진 전투만봐도 왜 부산항에서 싸우면 안되는지 보여주지.
사방이 탁트여있고 포격에 된통당한 왜군이 안싸우고 보일락말랑한 자리에서 계속 도망다니니
그거 쫒아가다가 지치고 물떨어져서 보충하러 섬에갔다가 왜군들 습격에 전멸하는데 알고나말하자
ㅋㅋㅋㅋ 보면 원균이 최선을 다해서 싸운것처럼 말하네
작전 초기부터 개삽질로 시작하는데 꼭 일본군의 신묘한 전술에 말려들어간것처럼 말한다?
부산앞바다에서 초전하고나서도 깨진 배는 거의 없었고 밤중에 정신놓고있다가 칠천량에서 몰살당한건데 이건 또 웬 원균맹장론인지
이걸 원균 맹장론으로 읽는 너는 뇌는 존재하냐?
부산앞바다에서 초전? 깨진배가없어? 왜군배들이 애초에 상대안해주고 도망만다녀서 그런건데
누가보면 수십 수백척 침몰이라고 시킨줄알겠다?
이순신장군이 경상도에 있었다면 바다에서 그냥 왜군들 다죽고 아무피해없이 전쟁이겼을것으로 믿습니다!!!
라고하길래 아니다라고 했더니 거품쳐무네 내글 어디에 원균이 명장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혹시 조상님이...원...?
위에서 뭐라 안 한건 선조가 원균 감싸서 나온 결과물이고
선조가 원균 감싼 이유는 선조가 이순신 잡아들이고 원균 배치해서
나온 꼬라지가 그거라서 그런건데?
그짝에서 싸웠으면 어찌 됐을진 몰라도 적어도 이순신이
원균마냥 해군 주력을 그렇게 말아먹진 않았을텐데
그리고 원균이 곤장치기 당한 이유는
그 자리 가기 전엔 빨리 쳐야 되는데 이순신이 겁쟁이라 공격 안 한다고 언플하다가
정작 지가 그 자리 가니까 안 가고 뻐팅기다 곤장 맞은건데 중요한건 쏙 빼고 말하네?
약을 팔려면 적어도 니가 말하는대로 알고나 말하자
원씨세요?원원원원 원할머니 보쌈?
팩트 : 북방에서 근무하다가 위에 보고도없이 자기부하들 이끌고 여진족 습격했다가
부하들 다죽고 본인도 큰부상입은거 군법으로 목을베야한다는 이순신상관의 요청을 거부한것도 선조
그런 이순신 유성룡이 추천하자 전라좌수사로 특급승진 시켜서 임명한것도 선조
거북선 만들어야한다고 무기보강해야한다고하니 허가해주고 지원한것도 선조지만
선조는 그냥 연산군급 개객기
그리고 이순신 잡아들인건 부산항 공격하라는 명령 실행안하고 거부해서임.
원균 임명한건 지는 할수있다고해서 그런거고
물론 원균 본인도 지가직업 지형보고 전투시물레이션 돌려보니 답없어서 안되겟다고했다가
권율한테 부려가서 곤장 쳐맞고 막무가내로 부산항 공격햇다가 전멸
이순신 까고 싶은건 알겠는데 너무 비약이 심하다
판옥선 대형화 이유도 그렇고 이순신장군이 부산포 공격 거절한 이유도 그렇고
죄다 전후관계를 이리저리 바꿔놔서 결론이 이상하게 나오는거야
니가 내놓은 가정이 맞다고 할거 같으면 적어도 이순신의 전투활약상이 일본군보다 저열했다는 이야기라도 들고와야되는거 아니냐
이야 한국에서 이순신 까려는 인간은 처음 봤네 나카무라상
전장에서 지 할 일 잘하던거 거둬들이고 원균 내보낸게 선조라서
원균 잘못인걸로 인정해버리면 걔 내보낸 내 잘못이오하고 인정하는게 되니까 막았다는건데
뭔 선조가 이순신 목 치라는 이순신 상관 요청 거부했네, 전라좌수사로 특급승진시켜줬네..
말 돌리는 뽄새가 아주 햄스터 궁디 흔드는 수준이랑 비슷하네
됐다 잠이나 자러 간다
임진왜란 조선뿅뿅 ㅜㅜ 선조 뿅뿅 ㅜㅜ
이순신이 경상도에 잇었으면 왜군 50만 전부다 부산앞바다에 수장시키고
전쟁승리! 인데 ㅜㅜ
라고하길래 아니라고했다가 일본인 취급까지 당하네 ㅋㅋㅋ
그럼 선조가 임명해줬지 이순신이 고스톱쳐서 전라좌수사 자리따냄?
잠이나 쳐자러가
원균이라...
뭐 가장 간단하게 조선의 칼은 의장도에 가까웠지만, 왜도는 실전으로 쓰였다는거지. 왜구는 불랑거를 수입해와야 하는데 우린 대포 만드니까 ^오^
심지어 시간이 갈 수록 제련기술에서 일본과 더 차이가 벌어지지만 나라가 망했슴다.
이게 끔찍한거지. 백성들 고생 안시키려고 고려의 수도와 왕궁까지 추가 증축공사 없이 이어 온 나라가 조선인데, 망할땐 친원파 비스무리한 놈들로 망하니..
뭔 조선칼이 의장도... 조선은 깃발과 창을 제외한 냉병기 및 조총의 민간보유가 합법인 나라였는데, 의장용 칼을 쓰겠냐? 특히나 군대가?
글고 왜구 불랑거는 뭔소리냐. 애초에 함선엥대포도 못 실고, 육상에서 대포 쓰지도 않는 애들인데? 관상용으로 쓸거면 왜 수입함? 명이야 썼다만.
미안 해전 얘기하는거였음.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정보가 잘못된거일수도 있지. 조선의 무기와 뭐시기라는 책이였는데, 해군 지휘나 이런거에 대해서 써있더라
일본도가 실전에서 쓰였다니...걔네 기본적으로 전쟁하면 창, 활, 나중에는 총으로 싸우고 일본도는 바위에 내리쳐서 날 나가게 만들고 둔기로 쓰지않았나? 뭐 장군용 도는 달랐겠지만
그 책은 나도 있음. 지나고 나서 보면 그 책도 오류가 좀 있다고 하드라.
아무튼 일분 수군은 전술 자체가 원거리 화포 쓸 여건이 안되었음. 대구경 조총정도가 한계고 근대이전 해군들처럼 선상 백병전을 선호했지. 근데 불랑거는 네가 명하고 헷갈린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 동아시아 3국에서 대구경 화포 주로 쓴 나라가 명, 조선인데 조선은 화약 수급 문제로 구경이 점점 낮아졌거든. 명은 수입, 개발에 적극적이었고.
검이 보조, 관상용인건 일본이였음. 연철로 만든 존나 비싼 검을 실전에서 쓴다?
일본도는 그냥 말 그대로 권력의 상징용임. 그래서 화려한거고.
사실 내가 알기로 가장 위협적인 무기라고 기록된건 나기나타라고 알고있음. 그리고 이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우선 조총을 먼저 쐈다고 알고있긴한데
ㅇㅇ 오류가 있었다고 인정하는 바임. 이런 자료는 너무 예전에 봤던걸 맹신했다는 생각도 든다. 좋은 자료 있으면 공유 좀 부탁해도 될까 싶은데
일본도가 실전에서 안쓰였다고?
뭔소리여? 타치를 비롯하여 무로마치 막부 시대 이후부터 우치가타나(지금의 일본도 형식인 카타나) 형태로 발전해오면서 계속 쓰였는데
오히려 아시가루(농민 징집병)체제가 늘어나면서 휴대하기 편한 우치가타나의 수요는 계속 늘어남
무기 관련 쪽으로는 별로 없어. 화약병기류는 그래도 화포식언해 같은 게 있는데, 냉병기 쪽으로는 간혹 나오는 논문 보는 정도지. 아니면 장수들 기록에서 나온 부스러기 보는 정도. 임진 직전에 북방 진관 정리한 책이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 하여튼 무기 자체에 대한 건 찾기 어려움.
https://m.blog.naver.com/lord2345/221093572836
주로 조선시대 역사 논문 소개해주는 사람인데, 훈련도감 편제 관한 논문임.
사실 학계에서 군사편제, 무기는 많이 안 다루거든. 논문 검색해가면서 찾던가 인터넷 뒤지는 수 밖에 없더라고.
나기나타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한물 갔던 무기임
거기에 기병 양성비용이 비싸져서 아시가루가 대세가 되었던 오닌의 난 이후에는 나기나타는 거의 사양세가 되고 야리(일본창)나 우치가타나가 주력 보병무기가 됨
조총은 전국시대 막바지에 쓰였긴 한데 에도 막부 이후 총기 발전이 거의 사장되어서
감사감사. 강호의 도리에 예의를 표한다.
이것도 고마운 자료네
흐음..난 일본사에 대해 잘 몰라서 일본도의 변천사 같은건 모름 내가 윗댓에서 말을 잘못한거 같은데 실전에서 안쓰였다고 하면 확실히 말이 안되긴 하겠네 주력으로 안쓰였다고 하면 몰라도 ㅇㅇ
솔까 진영 갖춘 보병대가 창들고있으면 칼이 할수있는게 있음? 그냥 창 위에서 내려다 찍기만 해도 머리통 깨질거같은데
그러니까 주력무기가 아닌거겠지
우리나라 검은 호신용이였지 의장도는 아니였음.
우리도 의장도는 만들었지만, 실전에서 사용 못할 만큼 길게 만들어서 의장도지
환도는 말 그대로 최후의 수단이자 호신용
애초에 지금도 북한 위쪽은(조선족 거주구)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석유&광산지
단군할배 : ㅎㅎㅎ(찡긋)
무관들이 실전에서 쓸만큼 긴 칼은 무겁다고 짧은 칼로 자꾸 바꿔서 왕이 개빡친 기록도 있다 그리고 일본도보다 환도가 워낙 짧아서 실전에선 환도가 발렸다
우리나라도 환도는 예비무기
길이 문제도 있지만 그냥 가볍고 날카로워서 좋았지만 막상 몇 번 베고 나면 이빨 나가서 버렸다는 기록이 많음
애초에 역할이 다르자너
롱소드랑 아밍소드 비교하는 격
그 소리 이전에 세조반란이후 군제개편하면서 개판 만들어서 그 영향탓이 더 큼
무겁다고 칼만 안찬게 아니라 갑옷도 제대로 안입고 깝치다 죽은 놈도 많음.
음, 조선 전기 주력병종이 팽패수인 일종의 중무장 보병이었는데, 방패로 진형 짜면서 차근차근 압박으로 들어가는 스타일이라 긴칼이 불편했을 수는 있음. 거기에 화포 및 원거리 무기 발달도 있고. 기본적으로 조선의 국방은 북방 중심이었는데, 대체로 수세지향이었으니까. Pdw같은 게 되었는데 길 필요 못 느낀괴 아닌가함.
유럽에서 아밍소드는 주무기로 애용되기나 했지, 환도는 그 아밍소드만도 못한 길이였고 조선 무관들이 검술 익히는 걸 꺼리는 풍조까지 더해져서 제련기술이 아무리 좋아봤자 실전에선 별 빛을 못 봤어
영조때 영조가 제발 군인들은 갑옷 입으라고 닥달하는데 군인들은 "어차피 총에 맞으면 갑옷 입어도 한방, 안입어도 한방" 하고 거부함. 어찌보면 시대를 앞서나간 거일수도 있지
엥? 사무라이들 칼 2~3자루씩 들고다니던거
툭하면 부러져서 그런거 아니었나?
타치는 마상용, 카타나는 보병 주무기, 와키자시는 비상용 혹은 할복용. 애초에 전장의 주무기는 창, 활, 총포였지 칼은 메인이 아니었음.
아니 미친 할복용이라고?ㅋㅋㅋㅋㅋㅋㅋ 난죽택 일상화 실화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보통 일본의 할복은 위에서 시켜서 하는 스스로 하는 처형 같은거
■■을 명받는 거라고 생각하면 됨
정답임 그당시 사무라이들보면 칼을 무슨 5개씩 차고있는걸 볼수있는데
거의 1회용 수준 ㅋㅋㅋㅋ
정확히 이야기하면 지금의 권총 같은 느낌이고(긴 칼 쓰기 힘들 때라든가), 할복을 정식으로 하나의 사형으로서 진행한다면 보통 전용 단도를 씀. 여튼 잘 부러져서 여러 자루 들고 다니던 건 아니고, 나중엔 그냥 그 자체가 하나의 정장 차림이 되는 바람에 가난한 무사들은 대나무 칼날 넣어 다니기도ㅋㅋ
그건 용도가 달라서 그런거고 서양도 용도에 따라서 여러자루를 들고 다니기도 함
아니 대체 무슨 사무라이가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님;;
벤케이라도 읽었는갑지
근데 뭐 타치 카타나 와키자시 이렇게 3자루에 카타나는 여벌 하나 들고다니는 경우도 있다 하니 그럼 4자루도 되긴 함 ㅎㅎ
걍 조선은 기술자를 너무 천대했기때문에 기술 뛰어나봤자 죽써서 개준꼴이지
실제론 잘대해 줬어
기술자들 끼리 살라고 마을이랑 죽지말라고 전국이 가뭄이라도 쌀은 꼬박꼬박 줬으니까
현대기준으로 봐도 엄청 잘해준거임 그래서 저런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기술도 나오는 거고
기술자를 천대했다니
실력이 뛰어난 기술자는 관직 주고 대우해주는 등 공장에 대한 대우가 나쁜편은 아니었음
내가 살면서 조선시대 기술자 대접이 좋다는 글을 보게 될줄이야
그 대접 좋던 장영실도 내쳐지고 나서 모든 기록 사라져서 어떻게 됬는자 아무도 모름
근데 저렇게 실외라면 비 오면 어쩌지?
실내였던건가?
갑자기 비 내리면 진짜 큰일 나는거 맞을걸?
우리나라꺼 좋다고 남에꺼 까내리고 그러지 말자
일본이 마케팅 하나는 정말 오지게 잘했지
쓰레기 칼 들고다니던 깡패 집단을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명예 전사들로 만들어놨으니
무릇 장병기의 왕은 창이지 일본하면 사무라이 사무라이하면 일본도가 떠오르겠지만 임란당시 일본군 보병의 주무기는 창이었음
창이 제 위력을 발휘하려면 밀집대형으로 운용해야 하는데 밀집대형은 움직임이 둔해지고 측후방 공격에 취약해지며 지형을 많이 타는 약점이 있어서 부무장으로서의 도검 수요는 꾸준히 있었다고 함.
사실 무기의 강함은 제료빨이 99%라서 ..
유물 나오는거보면 우리나라 금속 다루는건 세계에서 놀아야지 덜떨어지는 일본이랑 비빌정도는 아닐거 같은데
조선이 망한 이후긴 하지만 일제시대의 만철도와 비교하면 환도가 꿀릴거 같은데
일제시대랑 비교하면 안됨
그때는 엄연히 근대라 재련기술이 지금과 하늘과 땅 차이로 발전한때였음
일본도가 철의 품질이 조악해서 성능이 낮았던 건 사실이지만 실제 전쟁터에서는 거기서 거기였고
산악지형이 많아서 궁병비율이 높았던 조선으로서는 휴대성을 위해 환도의 도신이 짧아질수밖에 없었고 백병전 전문인 일본군 및 일본도랑 부딪히면 발렸던게 사실임
이건 일본도가 뛰어나단게 아니라 무기는 각 지역에 맞춰 발전해왔다는 말이지 실제로 조선에서는 일본도의 날카로움 및 백병전 효율에 눈독들이고 노획한 일본도가지고 실전투입해봤는데 말했듯이 산악지형이 많아서 궁병이나 궁기병이 발달했던 조선군 측에서는 곧 '잘들어서 좋기는 한데 솔직히 계륵인듯...'하고서 금방 도태됨
그리고 어차피 도쿠가와 막부 이후 일본도는 실전보다 예술품이나 미술품 취급을 받아서 실전성은 더욱더 떨어짐
하지만 조총이라는 시대의 흐름앞에서 졌지ㅠㅠ
위 본문은 임진왜란 이후의 애기
그때 유럽은 총개발하고 풀아머도 있었는데 뭐 이런걸가지고...
조선무기 관심있어서 이것저것 찾아봤었는데
이성계가 쓰던 검도 약간 특이하게 생긴거고
조선왕실 무기로 메이스가 남아있고 정몽주나 김종서 암살 모두 철퇴로 한거보면
일반적으로 알려진것보다 둔기랑 특이한 모양의 도검을 많이 썼을거같음
임진왜란때 조선 기병들이 쓰던무기로 유명한것도 창이 아니라 장대에 철곤 달려있는거고
쭝국놈들도 왠진 모르겠는데 한국인 비하할때 까오리빵즈라고 하는데
그것도 고려봉자인데 몽둥이쓰는 고려새끼란 뜻인거같고 뭐 이건 걍 내생각임..
철퇴는 훈련이 많이 필요없고 숨기기도 쉬워서 반역도당이나 암살자가 애용하는 무기였다더라...
지금처럼 국제배송 있는 시대도 아니고 그 지역에서 전쟁하는데 그 지역에서 나온 자원으로 쓸만한 병기면 됐지 뭐... 왜 그런 형태로 발전했는지 같은것도 아니고 누가 더 쓰레기고 누가 더 좋고 비교하는게 의미가 있나?
그냥 동아시아 자존심싸움
뭔소리임.근대이전 보병무기는 창임. 다만 일본은 조총이란 신식무기가 있어서 육전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했을 뿐임. 왜냐면 게릴라전에선 활이 나았기 때문임. 곽재우의 의병군이 활약했던 것도 기습 후 빠지는 게릴라전이 먹혔기 때문임.
애초에 임란에서 일본도가 활약한 사실이 없음.임란 때 조선군도 노획한 일본도를 사용할 정도로 명품이었던 것은 맞지만 임란에서는 사용할 상황이 많지 않았음.
임진왜란 패전이유는 일본군은 전국시대를 겪으며 단련된 강군이었는데 반해 조선은 오랜 평화기였던데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문에 치중했기 때문에 훈련 등 양병 자체가 되지 않았음. 게다가 조선의 수군은 왜구를 막기위해남쪽에 배치되었으나 육군은 여진족 등 기마족들과 싸우기위해 북쪽에 배치된 상태였기에 육군 병력이 상대가 안 된것이었음. 이이의 십만양병설이 괜히 나온것이 아님.
개인적으로 선조의 가장 큰 잘못은 도요토미가 전국통일했을 때, 위기감을 가지고 양병과 훈련에 힘쓰지 않은게 제일 큼.
물론 의병장들의 낮은 대우 등 전쟁 중에 일어난 실정도 잘 못이 있지만 광해군의 활약으 로 다행이 봉합되었다고 생각됨
https://blog.naver.com/euphoria98/220693382217 사진 출처는 여기인거 같은데 블로그 설명에서는 19세기 중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이라고 나와있고 관련 기사나 논문을 찾아봐도 일본 학계 1인자가 왔다는 내용은 못찾았는데 출처좀 보여줄수있음? 경주 용명리 석축형 제련시설로 검색했는데 일본 학계 1인자가 왔다고 주장하는 글은 1월 17일에 올라온 정치유게글 밖에 없는거같은데
???: 니뽄카타나가 세계에서 제일로 스게에에 하거등요?!
조선에 들어서서 지하자원의 채굴 제련이 조정에 의해 금압되었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1596년(선조 29) 임진왜란 후 병기의 부족을 느껴 철광석의 채굴을 명했지만 육성조차 없이 당시 병기용 주물마저 부족한 정도였으며, 1607년까지도 무기조차 완전히 갖추지 못했을 정도였으므로 제철 분야도 정체상태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600년대에 이미 중화기의 철통(鐵筒)에서 발사되는 각종 탄환에 철탄자·진천뢰(震天雷) 등 철제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철의 생산용 용해로나 주물용 기구 등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수법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그 상세한 내용은 할 수 없다.
19세기에는 수령수세제(守令收稅制)로 바뀌어 광산 경영은 민채(民採)가 주가 되었으며, 철광물도 다른 광물과 더불어 채굴이 활발하였다. 제철기술·주조기술·단야기술 등 전통적으로 내려온 우수한 기술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근대적 기술의 기초를 형성하는 일 없이 발전하지 못한 채 개화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조선에서는 광물의 채광 자체를 조정에서 금지시켜 온 결과 제철 분야도 정체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의 제철기술은 15세기를 고비로 점차 그 비약의 기운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전후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은 조선에 극심한 피해를 입혀 절정에 달했던 15세기 조선의 과학은 거의 복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하게 위축되어 갔다. 모처럼 자리잡혀 가던 과학기술이 안정을 잃은 것이다.
출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dataType=0201&contents_id=E0051504
글쎄 이거보니 본문 글의 출처가 많이 의심스럽네
님꺼 젤다 들어가 봤는데 참고문헌 연도 보면 좀 오래된 글이네...
얘가 보여주는게 좀 더 요즘건 맞긴함
근데 나도 제철 복원 실험 참여했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100% 딱 이거다 식으로 복원된거 아님
아직 밝힐 것이 많음
개인적 바람으로는 학계로 들어와서 같이들 연구했으면 좋겠음...
중국 박도와 부딪치면 왜도는 박살이 났지..
철 질이 나무 안좋아
겉 철은 단단하고 속철은 물러서 충격을 흡수해야 안깨진다고 서로 다른 성질로 결합시키는 방법도 결국 잘 안되었다지
정작 조선군은 임진왜란때 저 일본도를 든 일본군에게 한번도 대규모 회전에서 이겨본적 없음. 화포나 활같이 원거리 무기가 발달했기 때문에 수성전에서는 꽤 선전했지만 평지에서 싸우는 회전에서는 싸우는 족족 지기 바빴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