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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영화 "강원도의 힘"을 보고.. 대체 강원도의 힘이란 무엇인가... (스포 포함 장문)


홍상수 감독의 1998년작, "강원도의 힘"을
20년 만에 다시 보았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에 내성이 생기고
그의 작품을 읽는 독해력이 어느 정도 쌓인 상태에서
다시 보게 된 이 영화는
정말 엄청난 무게로 다가오네요.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충격적인 데뷔를 했던 감독의 두번째 작품이자
본인 혼자서 각본을 맡은 최초의 작품입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구효서'의 소설, "낯선 여름"을 원작으로 했고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각본, 각색에 참여했죠.
따라서 "강원도의 힘"은
대한민국 영화사에 하나의 혁명을 이루어낸
'홍상수표 리얼리즘'의 출발점이자
2017년 "밤의 해변에서 혼자", "그 후"까지 이어진,
어마어마한 그의 작품들을 읽는
독법의 기준점을 제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할 말이 너무 많아
리뷰가 아니라 논문을 쓰는 게 나을 정도지만
최대한 절제해서 쓰겠습니다.
유부남 대학강사 '상권(백종학)'과
22세 대학생 '지숙(오윤홍)'은
선생과 학생으로 만나 사귀다가 헤어집니다.
영화의 1부에서 지숙은 두 명의 친구와,
영화의 2부에서 상권은 후배, '재완(전재현)'과
각각 강원도로 일박이일 여행을 떠납니다.
우연히도 같은 날...
해변, 낙산사, 오색약수터, 비룡폭포, 권금성 등을
찾는 그들의 여행에서
지숙과 상권은 스쳐 지나갈 뿐 만나지 못하죠.
먼저 1부...
지숙은 친구들과 함께 강릉행 야간열차를 타고
강원도에 도착합니다.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다
해수목욕을 하겠다는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낙산사를 방문합니다.
설악산에서 숙소를 찾던 중
한 '경찰관(김유석)'을 만난 일행은 산행에 나서죠.
산길에서 살아있는 금붕어를 발견한 지숙은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산 채로 금붕어를 땅에 묻습니다.
우연히 불륜으로 보이는 커플과 지나치는데
지숙은 여자의 눈이 예쁘다고 말합니다.
이어진 경찰관과의 술자리에서
지숙은 한 친구와 언쟁을 하고 취해서는
경찰관과 하룻밤을 보냅니다.
그 날 설악산에서 있었던 어떤 사고에 대해서
듣게 되는 시점도 이 때입니다.
서울로 돌아온 후 목욕탕씬...
카메라는 쓸데없이
체중계에 올라선 지숙의 몸무게에 시선을 고정시키죠.
목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다가
자신의 집 현관문 옆 벽에 새겨진 문구,
'조금만 더 긴 호흡으로 기다리자'를
발견하고 애써 지웁니다.
며칠 전 함께 강원도에 갔던 한 친구에게 말을 하고
이번에는 혼자 강원도로 가죠.
자신을 마중나온 경찰관에게
늦었다는 이유로 필요 이상 화를 냅니다.
무의미한 대화들로 이어지는 저녁을 보내고
하룻밤을 보내지만 이번에도
육체관계만큼은 완강히 거부합니다.
다음 날 홀로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지숙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오열을 합니다.
2부는 상권과 후배, 재완의 강원도 여행과
그 전후 시점 상권의 이야기인데,
상권이라는 인물의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자신보다 먼저 교수가 된 후배에게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지니고 있죠.
산행에서 마주친 여자에게
인상이 깨끗하다면서 지분거리고
그 여자가 지키지 않은 약속에 분노합니다.
돈으로 사는 O스에 무감각하며
학생들과의 술자리가 아무렇지 않습니다.
길거리의 개가 무서워 전전긍긍하고
교수 임용 청탁을 위해 뇌물도 서슴지 않죠.
청탁의 자리에서는 해야 할 말을 못하고
벌레가 빠진 콜라도 그냥 마십니다.
신문에서 발견한 설악산 실족사 기사에
여자의 불륜남을 경찰에 전화해 신고합니다.
출판사에서 다른 사람들이 놓아두고 떠난
금붕어 두 마리를 발견하고는 세숫대야에 담아두지만
막상 책임지지는 않죠.
영화를 보기 전과 관람이 끝난 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궁금증은,
왜 영화의 제목이 "강원도의 힘"인가 입니다.
아예 영화의 영어 제목까지도
"The Power of Kangwon Province"죠.
홍상수의 영화에서
제목이 갖는 비중이 매우 큼을 상기한다면
궁금증은 배가됩니다.
다음 궁금증은,
지숙이 묻어준 금붕어와
상권이 세숫대야에 넣어준 금붕어의 의미,
둘이 우연히 마주친 한 여인의 죽음의 의미,
두번째 강원도행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
지숙의 오열의 의미 등이 되겠네요.
홍상수의 영화에서
함부로 낭비되는 씬은 없으니까요.
1, 2부에서의 서사의 진행이 뒤죽박죽 섞여있고
편집이 거칠고 불친절하기에
의미 파악이 어렵습니다.
인물들에 대한 클로즈업은 한 번도 없고
롱숏도 없습니다.
오로지 적당한 거리를 둔 미디엄숏으로만
인물들에 개입하지 않고 관조할 뿐입니다.
이 모든 의문들을 파악하기 위한 열쇠는
영화의 끝에서야 드러나는 지숙의 낙태입니다.
지숙은 대체 왜 강원도에 간 걸까요?
낙태와 자살 사이의 고민 때문이었습니다.
혼자서 찾은 낙산사에서 기와에 적은,
2부에서 상권에게 발견되는,
'어머니 건강하세요.'라는 문구는,
따라서 지숙의 유서로 읽어야 합니다.
이 고민은 분명 살아있는 금붕어를
산 채로 묻어주는 지숙의 행위로 표출되죠.
몇 걸음만 걸어가도 계곡이 있을 텐데
친구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굳이 근처 땅에 묻으면서 지숙은 되묻습니다.
'그럼 밟혀죽게 놓아 둬?'
금붕어를 매장하며 낙태의 각오를 다진 셈이죠.
지숙이 마주친, 눈이 예쁘다는 여자의 죽음은,
그것이 자살이든 실족사이든 살인이든
지숙의 사실상의 죽음을 대신합니다.
혼자서가 아니라 친구들을 데리고 온 이유도
자살 결심을 친구들이 막아주었으면 하는,
은근한 바람에서 비롯됐을 것입니다.
다만 그 바람은 뜻하지 않게 친구들이 아니라
경찰관과의 하룻밤으로 이루어지고
다음 날 아침 경찰관에게 하는,
'아저씨가 너무 고마워요'라는 대사는
얼마든지 이해가 갑니다.
그 남자의 직업이 경찰관이었던 것 역시 의도적입니다.
경찰관이 막은 건 범죄나 사고가 아니라
지숙의 죽음이었던 것이죠.
지숙은 첫번째 강원도행이 있은 후
낙태시술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목욕탕 체중계에 보여지는 42kg의 몸무게는,
지숙의 몸무게가 아니라
지숙에 의해 죽임을 당한 태아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집 현관문 옆 상권이 남긴 문구는
다시 자살에 대한 충동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긴 호흡의 기다림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고)
죽음의 그림자에 두려움을 느낀 지숙은
혼자서 경찰관을 만나러 강원도로 갑니다.
약속에 늦은 경찰관에게
지나칠 정도로 화를 낸 것은
지숙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요?'
그러나 결코 상권을 대체할 수 없는 경찰관에게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허락할 수는 없었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마침내 오열하죠.
그 오열은
자신이 죽인 태아에 대한 죄책감과 애도,
끝나버린 사랑에 대한 절망,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안도가
함께 뒤섞인 오열입니다.
교수 임용에 성공한 후 만취한 상태로 자신을 불러내
다시 자신의 육체를 탐하려는 상권에게
지숙은 말합니다.
'나 수술 받았어요. 애 떼는 수술.
자기 애 아니니까 괜찮아요.
실수였어. 난 맨날 실수만 해.
나도 좀 살아야 되겠어요.'
이제 지숙은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상권 없이...
그렇다면,
강원도의 힘은,
한 인간을 죽음의 공포에서 다독이고 보듬어
다시 삶으로 돌려보낸 힘이라 보아야 하겠고,
영화 속 강원도라는 공간은
일탈의 공간이 아니라
(일탈은 어차피 서울에서부터 존재했습니다.)
결단과 구원의 공간으로 보여집니다.
반면,
그 강원도에서 아무런 삶의 힘도,
각성도 구원도 얻어내지 못한 상권은,
세숫대야에 넣어 둔 두 마리 금붕어들 중
한 마리가 왜 없어졌는지를 영원히 알 수 없는 채로
비루하고도 위선적인 삶의 굴레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겠죠.
세숫대야 속에 홀로 남겨진 금붕어는,
살아있어도 산 게 아닌,
상권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마추어 감독의 조악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 영화는,
이렇게 치밀한 구조와 함의를 품고 있습니다.
한 씬 한 씬, 모두가
논리적으로 정밀한 구성으로 엮여 있는데,
이 모든 것이
한 감독의 직감과 직관으로 만들어졌음은
홍상수의 천재성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인물들의 감정과 심리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영화의 쓸쓸한 정조와 결도 몰입을 돕습니다.
이후로 만들어지는 홍상수 감독의 모든 영화들은
이 영화를 잣대로
그 반복, 차이, 중첩, 변주가 측정됩니다.
물론, 홍상수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진화하지만,
홍상수 영화의 원류에 해당하는 이 작품이
나는 가장 좋습니다.
마치 먼 길을 돌고 돌아 제 자리로 온 듯한...
이 엄청난 걸작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20년 만의 재평가를 소망합니다...
댓글
  • udit_kiss 2018/01/12 05:10

    애정이 깊으시네요
    공감하는 부분도 있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 보면
    반복 차이 중첩 변주
    -> 자기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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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8/01/12 05:13

    udit_kiss// 글쎄요. 때로 매너리즘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홍상수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게으른 자기복제'로 매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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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족발 2018/01/12 05:19

    글을 참 잘 쓰시네요.
    공감하는 내용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는데,
    확실히 초기작들이 신선하고 홍상수다운 담백한 맛이 있는것 같습니다.
    오래전에 본 작품이라 다시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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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8/01/12 05:20

    스페인족발// 칭찬 고맙습니다. 제 글로 한 번 더 관람하시고 싶은 마음 느끼셨다니 기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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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이빈 2018/01/12 05:22

    할일없는 대학생이 하루종일 의미없는 불펜질만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잠이 들기 직전에 이 글을 클릭하고 깊은 내공의 영화평론을 읽게되서 다행이네요ㅎㅎ 닉넴기억하고 자주 찾아볼테니 좋은평론많이 써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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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응그래서 2018/01/12 05:24

    [리플수정]대학 때 포스터로만 보고 제목이 강렬해서 아직 기억하는데 이게 홍상수 감독 작품이었군요...그리고 내용도 전혀 생각하던것과 다르네요...어디 3류 에로 영화인 줄 알았는데...ㅠㅠ.지금까지...ㄷㄷ.한번 제대로 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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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8/01/12 05:24

    소이빈// 힘과 용기를 주시는, 따뜻한 말씀 고맙습니다. 좋은 리뷰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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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8/01/12 05:28

    응그래서// 저도 20년 전 보았을 때는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 글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구요. 무엇보다 영화가 재미(?)있습니다. 완전히 몰입할 수 있구요. 한 번 시간내서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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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니네 2018/01/12 05:49

    영화관련글 잘 보고 있습니다. 영알못이라 홍상수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어영부영 건성으로 보면서 무슨 이야기 하자는건지.. 되게 꿉꿉한 기운의 영화네.. 하면서 지나친 작품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화보는 눈은 달라진 게 없지만
    ㅋㅋㅋㅋ (이 영화 기억나는 거라고는 오비집에서 술 먹고 거기 접대부?
    레지?들이랑 콘도가서 또 술먹던 장면뿐이니 말 다했..)
    이 리뷰 토대로 한번 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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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니네 2018/01/12 05:49

    이 추천을 드리고 싶은데 오류발생이라고 자꾸 뜨네요 마음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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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8/01/12 05:52

    키니네// 말씀만으로도 추천받은 것으로 느낍니다. 한 번 다시 꼼꼼하게 보도록 하세요. 참, 영화 속 여자주인공 오윤홍 배우가 드라마 미생에서 이성민 배우 아내로 등장했던 것 아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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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인구 2018/01/12 06:00

    제목만 수없이 들었고 볼까말까 망설이다가
    제목이 별로여서 선택하지 않은 영화였는데
    혁명님의 글을 읽고 영화 한편을 감동 깊게 본 느낌입니다.
    일반인은 아니시라는 필이 글 속에서 팍 꽂히네요.
    (혁명전야님을 최근에 알게 된 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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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8/01/12 06:06

    유인구// 유인구님 닉넴 기억하고 있습니다.^^ '팬'이라 말씀해주시니 영광입니다. 제 글 말고 영화 꼭 한 번 보세요. 충분히 만족하실 겁니다. 영화계와 아무런 관계없는, 단지 영화를 많이 보는 '일반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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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인구 2018/01/12 06:27

    혁명전야//'일반인'이라 하시니 더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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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8/01/12 06:35

    유인구// 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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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andG 2018/01/12 08:02

    몇 분 보다가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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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8/01/12 09:09

    HandG// 그랬던 분들... 꽤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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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noKid 2018/01/12 09:14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정성어린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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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8/01/12 09:16

    EnoKid// 글 쓴 보람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추천도 감사드리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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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요정 2018/01/12 23:58

    와우...진짜...글 넘 좋습니다..
    요 며칠전에도 강원도의 힘 다시 볼까 생각했거든요
    왜냐면 그의 데뷔작인 돼지는 어느정도 무슨 이야기인지 다 기억이 나는데..유독 강원도의 힘만 잘 기억이 안나서요
    그당시에 봤을땐 이게 대체 뭐야 이런 느낌이었던거 같아요
    그 후의 홍상수영화들은 한때 푹 빠져서 ㅋㅋ 봤던 격이 생생하고 다 기억이 나는데 유독 강원도의 힘만..
    역시나 스포일러만 제외하고 다 읽었습니다..근데 또 글에 빠져서 중요한 스포일러를 읽게됐다는..ㅋㅋ
    암튼 이렇게 좋은 글 써주셔서 역시나 또 한번 감사드려요!!!
    수년전 영화보기에 완전 푹 빠져있다가 이후 또 수년간 소원해졌는데...
    혁명전야님의 글을 접한 이후로 다시 영화보기의 재미에 푹 빠져있습니다!!ㅎㅎ
    항상 잊어버렸던 추억속의 영화들 그리고 좋은 작품과 배우들의 글들..
    다시 한번 진심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말 즐겁게 보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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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요정 2018/01/13 00:00

    이후로 만들어지는 모든 영화는 이 영화를 토대로...그 반복 차이 중첩 변주가 측정된다는 정말 의미심장한 말씀이시네요!!
    그리고 마지막 문장의 20년만의 재평가를 소망한다는 말씀도 너무나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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