ㅋㅋㅋ 아 저게 이렇게 된거구만.. 우리 대대 제주도로 훈련가니까 저거 뱅기 꼴아박은 자리에 위령비 세워놓은거 찾아가서 묵념하고 그랬는데 뭔 안타까운 사고처럼 얘기하더니 그냥 꼴통이 꼴같잖은 명령해서..;;
대처도 족같이 했네 으이구 ㅅㅂ 전역하길 잘했지
루리웹-85681453862018/01/02 14:13
군인이 정치한다고 군인을 위한다고 개소리말아야함
엘노페이2018/01/02 14:28
그만! 거기까지!
루리웹-85681453862018/01/02 14:13
군인이 정치한다고 군인을 위한다고 개소리말아야함
그리폰에실망한 영몽이2018/01/02 14:14
ㅁㅊ
그리폰에실망한 영몽이2018/01/02 14:14
진짜 추악하군
야생의소리2018/01/02 14:15
흠. 참 잦같구만
Divid jr2018/01/02 14:17
김영삼이 잘한 유일무이한 일이 군대 개혁 하나회 숙청임.
엘노페이2018/01/02 14:23
금융실명제도 빼먹지 말라고!
답없는사람2018/01/02 14:28
하지만 삼당합당은 어떨까?
엘노페이2018/01/02 14:28
그만! 거기까지!
한방인생2018/01/02 14:29
조선총독부도 시원하게 폭파했지
ceramic2018/01/02 14:30
삼당합당은 대통령 되기 전에 한 일이니 대통령으로써의~ 만 본다면 빼야지
SlowSecond2018/01/02 14:25
ㅋㅋㅋ 아 저게 이렇게 된거구만.. 우리 대대 제주도로 훈련가니까 저거 뱅기 꼴아박은 자리에 위령비 세워놓은거 찾아가서 묵념하고 그랬는데 뭔 안타까운 사고처럼 얘기하더니 그냥 꼴통이 꼴같잖은 명령해서..;;
대처도 족같이 했네 으이구 ㅅㅂ 전역하길 잘했지
다곱2018/01/02 14:30
아직 까지 잔해 찾으면 포상준다하고 최근 까지 올라가서 찾았다는거 보면....
SlowSecond2018/01/02 14:30
더 어이없는건 그 위령비 공사도 다 부대원들 꼴아박아서 그것도 한명당 시멘 한포대씩 저거 높이가 대충 550 미터였나? 그 등산로 입구에서 25키로 군장메고 조빠지게 올라가면 한 1시간 걸렸던거 같은데..
그런식으로 야메로 공구리친거를 아이구.. 돌아가신분들 두번 죽이는 일이지
SlowSecond2018/01/02 14:32
아 그래요? ㅋㅋ 그거 잔해 찾아도 그 본인꺼인지도 확인어려을거 같아요 제주도 스토리가 많은데 다른 중대에서 해골 발견한 적도 있어요 그 때 제가 직접보지는 못했지만 말로만 들어도 쇼킹하던데;;
그거 경찰에 넘겨주고 경위조사 하니까 신원확인 어렵다구러고 뭐 당연한거겠지만;;
그리고 한라산 꼭대기 찍으니까 대대장이 갑자기 행방불명된 청소년 두명 있다고 그것도 몇달전에 없어진 애들을 한라산에서 존내 찾음 한 두시간동안;
달나라시민2호2018/01/02 14:35
아이고 고생 많으셨습니다...ㅠㅠ
다곱2018/01/02 14:35
그 위령비도 원래 찾기도 힘든 깊은 곳에 있다가 비교적 최근에 그 공원 옆으로 옮겼는데....얼마나 꽁꽁 감추려던건지...
SlowSecond2018/01/02 14:36
아뇨 뭐.. 제가 시멘 들고 올라간건 아니구 저보다 훨씬 선임인 담당관급들이 한거라서.. 글고 전 부대에서 꼴통이었던지라 어디서 군대얘기 꺼내면 걍 조용히 듣고만있습니다 ㅎㅎ;;
군대는 원래 자기가 나온데가 젤 힘든데죠~
SlowSecond2018/01/02 14:40
아 그래요? 그거 등산로 일반인들도 잘 올라가던데 ㅋㅋㅋ
그래서 제주도때가 att 전이라서 평일엔 계속 찍었거든요 거기를..
하루는 제가 중대에서 일빠로 올라가서 찍었는데 군장내릴라구 보니까 민간인 어르신들 있더라구요 그래서 군장 탁 던지면서 아 ㅅㅂ 존나 대다 이러고 내려갔는데 나중에 대대장이 부르더니 니 혹시 여단장님한테 욕했냐고.. 물어보더라구요
아차싶었죠 그 사람이 우리 훈련 출발하고나서 바뀐 여단장이었던거임 ㅋㅋㅋ
제주도 끝나고 그 여단장이 호쾌한놈이라고 여단장표창줌 ㅋㅋ
아하... 그때 사진 찍어놓은것 보니까 원점비 라고 되어있네요. 무심코 지나쳤는데 그런 이야기가 있었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리링냥2018/01/02 14:29
팩트:지금도 별반다를게없는곳이 한국 군대이다
Purple//Rain™2018/01/02 14:29
당시 사고 현장
Purple//Rain™2018/01/02 14:32
"6일 새벽 3시경 집으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어요. 다짜고짜 용담1동 동사무소 앞으로 나오라는 거예요. 어디에 간다는 말도 없이 무조건 경찰트럭에 타라고 해서 탔죠. 차에 타보니 동료 2명이 동행했어요. 모두 4·3제주항쟁을 겪은 탓에 아무도 말하지 않고 20~30분 정도 달렸는데, 도착한 곳은 아라초등학교였습니다. 군인들이 교실에 커다란 군 작전지도를 걸어놓고 한라산 전체를 구역별로 나눠놓고 누가 어느 길로 갈지 정했습니다."
"흰 눈 위에 조각난 주검들이"
양송남씨는 50여명의 특전사 대원들과 함께 본부 수색대 안내를 맡았다. 나머지 두 명은 어리목 길과 성판악 코스를 안내했다. 하늘에서는 계속 공군 비행기가 웽웽 거렸고, 바다에는 해군 함정이 왔다 갔다 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한편으로는 놀랐고, 한편으로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증이 몰려왔다.
"도대체 왜 별안간 군인들이 한라산에 떼를 지어 올라가야하는지 몰랐어요. 그냥 안내하라니까 안내했지, 군인들에게 감히 뭘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민간인은 나 포함 우리 직원 2명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모두 군인이었으니까요. 그날도 날씨가 무척 좋지 않았습니다. 책임 인솔자는 최락도 소령, 그 사람이었어요."
관음사 입구를 출발해 산천단 검문소로 향했다. 도로는 빙판이었고 군인들이 탄 버스가 도랑에 빠졌다. 버스를 빼내지 못해 그 때부터 무조건 걷기 시작했다. 그 길에 공주사대 산악훈련팀을 만났는데 최 소령이 "어제 오후 3시경 산속에서 굉음을 듣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양씨는 그때서야 '사고로구나' 직감했다.
새벽 4시부터 걷기 시작해 낮 12시가 돼서야 탐라계곡 흙붉은오름 중간지대에 도착했다. 해발 1200m 고지였다. 점심식사로는 군인들이 짊어지고 올라온 쌀을 항고(코펠)에 넣고 눈을 퍼담아 지은 밥이 준비됐다.
그러던 오후 1시경 최 소령에게 무전이 왔다. 사고가 난 기체를 찾았다는 연락이었다. 양씨와 최 소령, 군인들은 서둘러 방향을 돌려 오후 5시가 돼서야 개미등 계곡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울창한 숲의 나무들을 싹둑 잘랐더군요. 등산로에서 100m 정도 걸어들어가면 움푹 패인 골짜기가 나오는데, 거기 암반을 들이받은 사고현장은 무척 참혹했습니다. 시신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죠. 최 소령이 군인들을 집합시켜놓고 업무를 나눴습니다. 시신 수습팀, 폭발물 꺼내는 팀 등으로 나눠 일에 착수하라고 했는데 군인들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머뭇머뭇 주저하니까 다시 재집합시키고 호통을 쳤습니다."
날은 이미 저물기 시작했고 기체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으며 주변에는 항공기 안에 실었던 물건과 조각난 사체들이 흰 눈 위에 널려 있었다.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검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그 때 최 소령이 양씨에게 다가왔다.
"민간인으로서는 처음 목격한 것이니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줄로만 알고 지금 이날까지 이 사건에 대해서는 쉬쉬하면서 살아왔지요."
양씨는 25년 만에 처음으로 당시 사고에 대해 떳떳하게 털어놓는다면서 말을 보탤 것도 없고 덜 것도 없이 당시 겪고 본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Purple//Rain™2018/01/02 14:37
전 기자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사고소식을 접하고 취재를 온 <경향신문> 기자들과 함께 7일 새벽 빙판길을 달음박질로 뛰어 올라갔다. 아라초등학교에 본부를 차린 수색대는 벌써 출발 채비를 하고 있었다.
"현장에 도착하니 아수라장이었어요. 한쪽에 사체와 불발된 포탄들을 늘어놓은 걸 봤습니다. 시신이 어떤지 확인할 새도 없이 후닥닥 찍고 빨리 내려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혹시라도 군인들과 마주칠까 두려웠죠. 등산객으로 가장해 사진 찍고 내려오는데 사고수습에 동원된 도청 공무원이 계속 '서 기자님, 이거 보도 못하는 줄 알죠? 보도하시며 안 됩니다' 그러는 거예요. 못들은 척 했지만 굉장히 거슬리는 소리였습니다."
서 전 기자는 흑백필름으로 총 6롤을 촬영했다. 죽을 고생을 해서 사진을 찍었지만 당시 그는 단 한 장의 사진도 지면에 쓸 수 없었다. 보도통제 때문이었다.
"회사에 들어가 촬영한 내용을 보고하니 필름을 모두 가져오라고 하더군요. 뭔가 낌새가 이상해 5롤은 회사에 제출하고 1롤만 따로 갖고 있었죠. 나중에 어떻게 될 줄 모르니까요. 제가 제출한 필름 5롤은 몽땅 특전사에 넘겨졌더군요. 그 땐 뭐 다 그랬죠."
김영삼이 잘한 유일무이한 일이 군대 개혁 하나회 숙청임.
금융실명제도 빼먹지 말라고!
ㅋㅋㅋ 아 저게 이렇게 된거구만.. 우리 대대 제주도로 훈련가니까 저거 뱅기 꼴아박은 자리에 위령비 세워놓은거 찾아가서 묵념하고 그랬는데 뭔 안타까운 사고처럼 얘기하더니 그냥 꼴통이 꼴같잖은 명령해서..;;
대처도 족같이 했네 으이구 ㅅㅂ 전역하길 잘했지
군인이 정치한다고 군인을 위한다고 개소리말아야함
그만! 거기까지!
군인이 정치한다고 군인을 위한다고 개소리말아야함
ㅁㅊ
진짜 추악하군
흠. 참 잦같구만
김영삼이 잘한 유일무이한 일이 군대 개혁 하나회 숙청임.
금융실명제도 빼먹지 말라고!
하지만 삼당합당은 어떨까?
그만! 거기까지!
조선총독부도 시원하게 폭파했지
삼당합당은 대통령 되기 전에 한 일이니 대통령으로써의~ 만 본다면 빼야지
ㅋㅋㅋ 아 저게 이렇게 된거구만.. 우리 대대 제주도로 훈련가니까 저거 뱅기 꼴아박은 자리에 위령비 세워놓은거 찾아가서 묵념하고 그랬는데 뭔 안타까운 사고처럼 얘기하더니 그냥 꼴통이 꼴같잖은 명령해서..;;
대처도 족같이 했네 으이구 ㅅㅂ 전역하길 잘했지
아직 까지 잔해 찾으면 포상준다하고 최근 까지 올라가서 찾았다는거 보면....
더 어이없는건 그 위령비 공사도 다 부대원들 꼴아박아서 그것도 한명당 시멘 한포대씩 저거 높이가 대충 550 미터였나? 그 등산로 입구에서 25키로 군장메고 조빠지게 올라가면 한 1시간 걸렸던거 같은데..
그런식으로 야메로 공구리친거를 아이구.. 돌아가신분들 두번 죽이는 일이지
아 그래요? ㅋㅋ 그거 잔해 찾아도 그 본인꺼인지도 확인어려을거 같아요 제주도 스토리가 많은데 다른 중대에서 해골 발견한 적도 있어요 그 때 제가 직접보지는 못했지만 말로만 들어도 쇼킹하던데;;
그거 경찰에 넘겨주고 경위조사 하니까 신원확인 어렵다구러고 뭐 당연한거겠지만;;
그리고 한라산 꼭대기 찍으니까 대대장이 갑자기 행방불명된 청소년 두명 있다고 그것도 몇달전에 없어진 애들을 한라산에서 존내 찾음 한 두시간동안;
아이고 고생 많으셨습니다...ㅠㅠ
그 위령비도 원래 찾기도 힘든 깊은 곳에 있다가 비교적 최근에 그 공원 옆으로 옮겼는데....얼마나 꽁꽁 감추려던건지...
아뇨 뭐.. 제가 시멘 들고 올라간건 아니구 저보다 훨씬 선임인 담당관급들이 한거라서.. 글고 전 부대에서 꼴통이었던지라 어디서 군대얘기 꺼내면 걍 조용히 듣고만있습니다 ㅎㅎ;;
군대는 원래 자기가 나온데가 젤 힘든데죠~
아 그래요? 그거 등산로 일반인들도 잘 올라가던데 ㅋㅋㅋ
그래서 제주도때가 att 전이라서 평일엔 계속 찍었거든요 거기를..
하루는 제가 중대에서 일빠로 올라가서 찍었는데 군장내릴라구 보니까 민간인 어르신들 있더라구요 그래서 군장 탁 던지면서 아 ㅅㅂ 존나 대다 이러고 내려갔는데 나중에 대대장이 부르더니 니 혹시 여단장님한테 욕했냐고.. 물어보더라구요
아차싶었죠 그 사람이 우리 훈련 출발하고나서 바뀐 여단장이었던거임 ㅋㅋㅋ
제주도 끝나고 그 여단장이 호쾌한놈이라고 여단장표창줌 ㅋㅋ
크... 이 곳이죠...
http://mypi.ruliweb.com/mypi.htm?nid=3506329&num=14529
제주도 방문할 때마다 꼭 들려서 선배님들의 명복을 빌고 갑니다...
저번에 관음사쪽으로 내려올때 무슨 특전사 ㅊ사고지점인가? 얼핏 지나쳤던것 같은데 맞나?
네.. 그곳입니다..
아하... 그때 사진 찍어놓은것 보니까 원점비 라고 되어있네요. 무심코 지나쳤는데 그런 이야기가 있었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팩트:지금도 별반다를게없는곳이 한국 군대이다
당시 사고 현장
"6일 새벽 3시경 집으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어요. 다짜고짜 용담1동 동사무소 앞으로 나오라는 거예요. 어디에 간다는 말도 없이 무조건 경찰트럭에 타라고 해서 탔죠. 차에 타보니 동료 2명이 동행했어요. 모두 4·3제주항쟁을 겪은 탓에 아무도 말하지 않고 20~30분 정도 달렸는데, 도착한 곳은 아라초등학교였습니다. 군인들이 교실에 커다란 군 작전지도를 걸어놓고 한라산 전체를 구역별로 나눠놓고 누가 어느 길로 갈지 정했습니다."
"흰 눈 위에 조각난 주검들이"
양송남씨는 50여명의 특전사 대원들과 함께 본부 수색대 안내를 맡았다. 나머지 두 명은 어리목 길과 성판악 코스를 안내했다. 하늘에서는 계속 공군 비행기가 웽웽 거렸고, 바다에는 해군 함정이 왔다 갔다 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한편으로는 놀랐고, 한편으로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증이 몰려왔다.
"도대체 왜 별안간 군인들이 한라산에 떼를 지어 올라가야하는지 몰랐어요. 그냥 안내하라니까 안내했지, 군인들에게 감히 뭘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민간인은 나 포함 우리 직원 2명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모두 군인이었으니까요. 그날도 날씨가 무척 좋지 않았습니다. 책임 인솔자는 최락도 소령, 그 사람이었어요."
관음사 입구를 출발해 산천단 검문소로 향했다. 도로는 빙판이었고 군인들이 탄 버스가 도랑에 빠졌다. 버스를 빼내지 못해 그 때부터 무조건 걷기 시작했다. 그 길에 공주사대 산악훈련팀을 만났는데 최 소령이 "어제 오후 3시경 산속에서 굉음을 듣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양씨는 그때서야 '사고로구나' 직감했다.
새벽 4시부터 걷기 시작해 낮 12시가 돼서야 탐라계곡 흙붉은오름 중간지대에 도착했다. 해발 1200m 고지였다. 점심식사로는 군인들이 짊어지고 올라온 쌀을 항고(코펠)에 넣고 눈을 퍼담아 지은 밥이 준비됐다.
그러던 오후 1시경 최 소령에게 무전이 왔다. 사고가 난 기체를 찾았다는 연락이었다. 양씨와 최 소령, 군인들은 서둘러 방향을 돌려 오후 5시가 돼서야 개미등 계곡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울창한 숲의 나무들을 싹둑 잘랐더군요. 등산로에서 100m 정도 걸어들어가면 움푹 패인 골짜기가 나오는데, 거기 암반을 들이받은 사고현장은 무척 참혹했습니다. 시신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죠. 최 소령이 군인들을 집합시켜놓고 업무를 나눴습니다. 시신 수습팀, 폭발물 꺼내는 팀 등으로 나눠 일에 착수하라고 했는데 군인들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머뭇머뭇 주저하니까 다시 재집합시키고 호통을 쳤습니다."
날은 이미 저물기 시작했고 기체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으며 주변에는 항공기 안에 실었던 물건과 조각난 사체들이 흰 눈 위에 널려 있었다.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검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그 때 최 소령이 양씨에게 다가왔다.
"민간인으로서는 처음 목격한 것이니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줄로만 알고 지금 이날까지 이 사건에 대해서는 쉬쉬하면서 살아왔지요."
양씨는 25년 만에 처음으로 당시 사고에 대해 떳떳하게 털어놓는다면서 말을 보탤 것도 없고 덜 것도 없이 당시 겪고 본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전 기자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사고소식을 접하고 취재를 온 <경향신문> 기자들과 함께 7일 새벽 빙판길을 달음박질로 뛰어 올라갔다. 아라초등학교에 본부를 차린 수색대는 벌써 출발 채비를 하고 있었다.
"현장에 도착하니 아수라장이었어요. 한쪽에 사체와 불발된 포탄들을 늘어놓은 걸 봤습니다. 시신이 어떤지 확인할 새도 없이 후닥닥 찍고 빨리 내려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혹시라도 군인들과 마주칠까 두려웠죠. 등산객으로 가장해 사진 찍고 내려오는데 사고수습에 동원된 도청 공무원이 계속 '서 기자님, 이거 보도 못하는 줄 알죠? 보도하시며 안 됩니다' 그러는 거예요. 못들은 척 했지만 굉장히 거슬리는 소리였습니다."
서 전 기자는 흑백필름으로 총 6롤을 촬영했다. 죽을 고생을 해서 사진을 찍었지만 당시 그는 단 한 장의 사진도 지면에 쓸 수 없었다. 보도통제 때문이었다.
"회사에 들어가 촬영한 내용을 보고하니 필름을 모두 가져오라고 하더군요. 뭔가 낌새가 이상해 5롤은 회사에 제출하고 1롤만 따로 갖고 있었죠. 나중에 어떻게 될 줄 모르니까요. 제가 제출한 필름 5롤은 몽땅 특전사에 넘겨졌더군요. 그 땐 뭐 다 그랬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97182
출처
진짜 불쌍하다 진상규명도 안됐고..
전두환은 머리만 둥둥 뜨게 살려둔다음에 통각중추만 계속 자극해야됨
시각적 효과가 별로니 능지형으로 합시다
전두환이 저정도였으면, 이승만 박정희는 얼마나 더 심했다는 거야?
저것도 전대갈 때문에 났던 사고아니냐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일반 보병도 아니고 특전사가 개죽음 당했는데도 저런 식으로 했구나 ㅋㅋㅋ
군인들도 충성할 대상이 나라인지 독재자인지 잘 파악 해야겠네. 목숨 부지 하려면..
웃기건 장세동이는 훗날 대선에도 출마하려고 했음.
행정병인데 대대 인사실에서 주말에 호출하길래 뭣땜에 부르나 했더니 옛날 문서들 세절하라고 그래서 세절하는데
■■사건이나 사고사건 시신처리보면 가관이던데 거기에 그냥 암매장 해버리고.. 90년대 중반까지 그랬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