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맑은 어느 주말의 오후였다.
이른 아침부터 다른 트레이너들과의 미팅을 진행하고, 길어진 미팅 때문에 점심조차 먹지 못하고 온 그는, 피곤한 기색으로 그의 사무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복도가 길게 느껴진다. 아마도 신체가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기에, 발걸음 또한 그에 맞추어 느려진 것이리라.
마냥 젊기만 했을 때와는 다르게―사실 토키노 미노루를 담당하고 있을 적에도 본인의 체력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하루하루의 피로가 몸에 누적되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아, 우마무스메는 좋겠다. 히토미미처럼 이런 피로감에 짓눌리지는 않을 테니까. 속으로 중얼거리지만 그렇다고 삼 여신이 그를 우마무스메로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렇다고 본인도 우마무스메가 되고 싶진 않다.
지금의 삶에 꽤 만족한다. 첫 담당 우마무스메에게 지은 죄가 조금 있지만, 그래도 커리어적으로는 완벽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훌륭하게 키워냈고, 지금의 담당 우마무스메 아이들 또한 압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실적을 쌓아가고 있다.
메지로 아르당, 유리 다리인 그 아이가 조금 아픈 손가락이긴 하지만, 그 또한 담당 트레이너로서 짊어져야 할 몫이라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밤낮으로 연구하고, 실험하고, 어떤 의미론 아그네스 타키온보다 광기에 젖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자기 몸을 거의 돌보지 않다시피 살아온 것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날을 지내왔다. 제아무리 정신적인 동기부여가 강한 그로서도, 육체적으로 지치는 것을 막을 순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산더미 같은 일이다. 아마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서류들과 수백 개는 더 쌓인 이메일, 담당 우마무스메들의 스케줄 관리, 트레이닝 메뉴 작성, 그리고 중앙 트레센의 업무 이외의 다른 일들―작성해야 할 논문이나 보고서, 만들어야 할 발표 자료 등―이 그를 반겨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니, 더더욱 발걸음이 느려지는 것만 같았다. 십여 년 전에도 근무하던 사무실이건만, 가끔은 저주받은 통조림의 공간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운명을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꺄꺄거리며 뛰노는 우마무스메 학생들과는 달리, 트레이너 쪽은 어른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막중한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다. 물론 권리도 있지만, 권리를 쓸 여유가 없다.
“연차 쓰고 싶다…….”
그렇기에, 그의 작은 중얼거림은 그 어떤 때보다도 더 진심 어린 한탄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참혹하고 냉정하다. 그의 눈앞에 놓인 것은 어느새 도착한 그의 사무실 문일 뿐이었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다시 업무와 끝없는 업무를 시작해야 한다. 오늘도 야근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주말인데 좀 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라고 속으로 투덜거려보지만, 그렇다고 쌓인 일이 수증기처럼 증발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건 그가 한 땀씩 손으로 작성하고 키보드를 두드려야 끝나는 것들이다.
한숨을 푹 내쉬며 열쇠를 꽂고 오른쪽으로 돌린다. 철컥, 하는 소리가 들리며, 자물쇠의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리자, 무기력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손잡이를 돌린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햇살보다 조금 약한 빛이 그의 눈을 간질인다.
“……?”
불을 켜 두고 갔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무실로 들어간다. 문을 닫고, 그의 노트북 가방을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진다. 다시금 하아, 작은 한숨을 내쉬며, 그는 자신의 일터, 그의 책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 트레이너 씨. 다녀오셨어요?”
“타즈나…?”
하지만 그의 책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는 반사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하야카와 타즈나의 목소리다. 그의 모니터 위로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녹색의 모자가 봉긋하게 솟아있다. 분명히 문을 잠그고 갔는데, 어떻게 들어 온 것인가.
―같은 아마추어다운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의 사무실 열쇠를 구하는 것 정도는 손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사장 비서라는 직책은 의외로 중앙 트레센 내에서 이런저런 권력이 많은 법이다.
그래서 동요하지 않는다. 토키노 미노루라면 조금 두려웠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분명히 하야카와 타즈나다. 그 증거로 그를 ‘트레이너 씨’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토키노 미노루라면 격식 따윈 없이 그저 ‘트레이너’라고 불렀으리라.
다만, 궁금한 점이 하나 있다. 평상시의 주말이라면 하야카와 타즈나가 중앙 트레센에 있는 것이, 그리고 그의 사무실에 찾아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하야카와 타즈나도 물론 굉장히 바쁜 사람이지만, 그래도 자신보다는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는 영혼일진대, 그녀가 그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여긴 어쩐 일이야? 너…어제부터 휴가 아니었어?”
그래, 하야카와 타즈나는 어제 연차를 썼다. 연차를 쓸 여유가 있음을 부러워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책임지는 자리가 아님을 부러워해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부러웠다.
옛날, 토키노 미노루를 담당하던 병아리 트레이너 시절에는 좀 더 삶에 여유가 있었건만, 나이를 먹은 지금은 그런 것조차 사치라니.
“연차는 어제였죠, 오늘이 아니라요.”
“그래도, 주말까진 쉴 수 있었잖아.”
“혼자 집에서 쉬기만 하려니까, 좀이 쑤시지 뭐예요.”
“…….”
그거 일 중독 초기 증상인데,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는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가 담당했던 토키노 미노루가 아니라, 하야카와 타즈나니까. 이젠 학생이 아니라 어엿한 성인이기 때문에, 그녀의 일에 그가 이래라저래라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그의 일 또한 하야카와 타즈나가 이래라저래라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하야카와 타즈나는 그의 사무실 안, 그의 책상 앞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래서, 왜 내 컴퓨터를 쓰고 있는 거야, 타즈나?”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하야카와 타즈나를 추궁하듯 물어본다. 아무래도 사적 용도의 컴퓨터는 아니지만, 그래도 타인이 자신의 업무용 컴퓨터를 건드리는 것은 굉장히 실례가 아닌가.
다른 사람이 그러고 있었더라면 굉장히 화를 냈겠지만, 그나마 하야카와 타즈나이기에 차마 화를 내진 못하고, 조금 조심스럽게 묻는 것이 다였다. 이상하리만치 그녀에게는 물러지는 것이 있다.
“딱히 트레이너 씨의 민감한 것들을 보진 않았어요.”
“말이 조금 이상한데…뭐 연구 자료나 그런 것들을 본 게 아니라면야.”
어차피 중앙 트레센 관련 서류들은 전부 하야카와 타즈나의 검수 하에 제출되기에, 그녀가 그런 서류들을 보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 담당 우마무스메들의 트레이닝 자료나 데이터 또한 하야카와 타즈나도 알고 있는 것들이기에, 딱히 문제되진 않는다.
어디 가서 그런 것들을 떠벌리고 다니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할 사람은 아니다, 하야카와 타즈나는. 적어도 그와 하야카와 타즈나 사이에는 그 정도의 신뢰는 형성되어 있다.
물론, 연구 관련 자료들을 본다 해도 그녀가 이해할 수도 없겠거니와 딱히 그런 것들을 빼돌리거나 공개하진 않겠지만, 이건 연구자로서의 본능이다. 그리고 하야카와 타즈나 본인도 트레이너 씨의 그런 본능을 얼핏 이해는 하고 있으리라.
“오늘 중으로 작성해서 제출해야 하실 서류들이 꽤 있었잖아요.”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온다. 언제 다 해야 하나, 미팅 끝나고부턴 그 생각밖에 안 들더라니까?”
“끝내뒀어요.”
“……뭐?”
“전부, 끝내뒀다고요.”
“…….”
갑작스러운 하야카와 타즈나의 선언에, 그는 황당해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하야카와 타즈나는 여전히 그의 의자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해맑은 미소와 함께 말을 정정한다.
“아, 방금 마지막 정례 보고서 제출했으니까, 진짜로 전부 끝냈네요.”
“내가 사무실 떠난 이후에 온 거면, 고작해야 두어 시간 정도인데, 오늘 분량을 다 끝냈다고?”
“뭐어, 매일 하는 일인데요.”
“…하야카와 타즈나 이사장 비서가 이렇게 유능했었다고?”
“저는 트레이너 씨의 서류들만 검토하는 게 아니니까요. 일반적인 서류들이나 회계 관련이라면, 트레이너 씨보다 몇 배는 빠를 거라고요?”
“…….”
그녀답지 않게 엣헴, 하고 가슴을 쭉 내밀며 하는 말에, 그는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장 비서로 재직한 지도 오래됐으니 그럴 수 있다. 그보다 두 배 가까이 빠른 것은 신기할 정도지만, 우마무스메의 월등한 신체 능력은 이런 곳에서도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쪽이었다.
“이러지 말고 그냥 쉬는 편이 너한테 좋을 텐데.”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까요.”
“그렇게 말한다면야 내가 할 말은 없다만.”
어깨를 으쓱인 뒤, 냉장고에서 물병 하나를 꺼내 하야카와 타즈나에게 건넨다. 그리고 다른 하나를 꺼내어 목을 축인다.
“그래도 쉴 수 있을 때 푹 쉬어. 내 일에 신경 안 써도 되니까, 건강 챙겨야지. 너도 이제 나이가―”
“뭐라고요?”
“……아니, 그냥 그렇다고.”
나이, 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느껴지는 살기에, 그는 조용히 말을 돌린다. 그런 트레이너 씨를 보며 하야카와 타즈나는 물병에 입을 대어 목을 축인 뒤,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그에게 말한다.
“그래서, 주말 오전에 나와서 트레이너 씨의 일을 끝내 둔 하야카와 타즈나에게, 트레이너 씨가 해 줄 말이 있지 않나요?”
아차, 하야카와 타즈나의 말에 그의 정신이 퍼뜩 든다. 당연한 말을 아직 하지 않았다니, 그녀에게 굉장히 실례다. 하야카와 타즈나가 듣고 싶은 말, 그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그가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이다.
“미안, 고맙다는 말을 먼저 안 했네. 일 도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오늘은 조금 편하겠어.”
“딱히 감사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가 감사를 표했음에도, 하야카와 타즈나는 그의 말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입을 비쭉 내밀며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그는 이해한다. 당연하다. 감사는 당연히 표해야 하는 것이고, 그녀가 듣고 싶은 다른 말이 있는 것이다.
“그래, 맨입으로 고맙다고만 하면 안 되지. 내가 지금 바로 우마이츠 5천엔 쿠폰을 우마톡으로 보내줄―”
“……진심이에요?”
기가 찬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는 하야카와 타즈나의 표정에, 이것이 정답이 아님을 재빨리 알아차린다. 여심을 알고 모르고 자시고 간에, 눈치는 빠른(아니다) 사람이니까 지금껏 트레이너 업계와 학계라는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 하루치 일당이 고작 5천 엔이어서야 되겠는가. 게다가 하야카와 타즈나 이사장 비서는 비싼 몸이다. 심지어 주말이지 않은가. 그런 그녀의 시간을 고작 5천 엔으로 어물쩍 넘기려 한 것은 그녀에게 있어 상당히 모욕적인 언사일 테지.
“당연히 더 있지. 시세이도 상품권 1만 엔도 보내줄게.”
“어머나 감사해요. 그런데 그게 정답은 아니네요♪”
“…….”
대놓고 정답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하야카와 타즈나가 바라는 정답이 따로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그는 당최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여심이란, 자연의 섭리보다 더 깊고 어둡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그…나중에 나도 일, 도와줄게…?”
본인이 말을 하고서도 자신이 없었는지, 평서문으로 끝내야 할 것을 의문문으로 끝내버린다. 그런 둔탱이 머저리 트레이너 씨를 빤히 바라보던 하야카와 타즈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이렇게 두었다간 끝도 없이 헛소리만 해 댈 것이 뻔하다. 예전부터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인 사람이니까. 그런 담당 트레이너 씨였으니까.
그러니, 결국 하야카와 타즈나가 주도하지 않으면, 이 사람과의 관계는 영원히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그러고 싶진 않다. 노처녀로 늙어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트레이너 씨의 입에서 듣고 싶은 말들이 있어서, 완전한 양보를 하진 못한다. 아직은 조금 덜 급한 것이다.
“트레이너 씨가 무슨 말씀을 하셔야 할지 모르시는 것 같으니까, 힌트를 하나 드릴게요.”
“…….”
하야카와 타즈나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의 이면에는 잘 벼린 칼날이 그의 심장을 노리고 있음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얌전히 하야카와 타즈나의 말을 기다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핀다.
“트레이너 씨는 오늘 더 이상 일 하실 게 없으신 거고, 저는 원래 쉬는 날이었네요. 그리고 공교롭게도, 오늘은 주말이네요.”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아시겠죠? 굳이 뒷말을 붙이진 않았지만, 그녀의 뜻은 트레이너 씨에게 잘 전달되었으리라. 알아차렸다는 듯이 자신감 있고 당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이제야 하야카와 타즈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 같았다.
트레이너 씨가 천천히 입을 열고, 하야카와 타즈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미안. 내가 너무 배려가 없었네. 이런 황금 같은 주말에 말이야. 그러니까 타즈나 너는―”
그래요,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네요. 어서 다음 말을 하세요, 하야카와 타즈나는 올라간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숨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트레이너 씨의 말을 기다린다.
“―어서 퇴근해. 이거 참, 주말에 일도 없는데 나와서 내 일까지 대신해 준 사람을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 뒀네, 얼른 집에 가서 푹 쉬고 월요일에 보자.”
“…….”
하지만 둔탱이 머저리 쓰레기 양아치 같은 트레이너 씨의 말에, 하야카와 타즈나는 입꼬리가 올라간 그 모습 그대고 굳어버리고야 말았다. 이 새끼는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것인가, 알면서도 엿을 먹이는 것인가, 당최 분간이 가질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후자이리라. 그러니까 착하디착한 하야카와 타즈나는, 트레이너 씨에게 기회를 조금 더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얼굴에 그림자가 지는 것까진 막을 수 없다. 오랜만에 그때 그 시절, 토키노 미노루의 성깔이 나와버릴 것만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하야카와 타즈나는 애써 본능을 억누르며, 다시금 좋게 좋게 트레이너 씨에게 말한다.
“틀렸어요, 트레이너 씨. 다시 기회를 드릴게요. 저는 오후에 시간이 비고, 트레이너 씨도 시간이 비게 되었다고요.”
“어어, 음…그러니까, 으음…….”
이게 아니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는 하야카와 타즈나의 눈치를 살핀다. 감사의 인사도 아니야, 감사에 대한 성의 표시도 아니야, 휴일이니 일찍 퇴근해서 푹 쉬라는 것도 아니야, 뭘 바라는 것일까, 이 아가씨는.
“……나도 일찍 퇴근해서 쉴게?”
“어머, 영원히 쉬게 만들어 드릴 수도 있어요♪”
“…….”
이것도 아니라고? 그는 점점 짙어져 가는 하야카와 타즈나의 그림자,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무시무시한 분노의 압력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재빠르게 머리를 굴린다. 하지만 정답은 모르겠고, 일단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려면 뭐라도 던져봐야 하기에 본능에 맡기고 말을 하려 했지만,
“마지막 기회에요, 트레이너 씨. 신중하게 생각하시고 말씀해 주세요.”
“아.”
당근 되기 일보 직전임을 깨닫는다. 하야카와 타즈나는 싱긋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이 무엇보다도 두렵다.
하지만 그가 고민해 봐야, 그녀가 원하는 정답을 알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당연하다. 정답을 생각할 수 있었더라면, 그 옛날 토키노 미노루는 이미 그녀의 연애에 성공했을 것이다. 아니, 실패했더라도 미련이 남진 않았으리라.
그럴진대, 그가 하야카와 타즈나의 최후통첩에도 불구하고 조악한 답안을 내놓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예상된 일이었다.
“집까지…태워 줄까?”
“하아…….”
더는 못 참겠는지, 하야카와 타즈나의 인상이 팍 구겨진다. 깊은 한숨이 그녀의 기분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트레이너 씨가 당근 되는 것이 확정이라는 뜻과도 같았다.
“트레이너.”
더 이상 그에게 트레이너 씨, 라고 부르지 않는다. 상징과도 같은 녹색의 모자를 잠시 벗어, 트레이너의 책상 위에 올려둔다. 하야카와 타즈나는 잠시 휴식이다. 토키노 미노루가, 그의 말괄량이 왈가닥 옛 담당 우마무스메가 우마미미를 뒤로 젖힌 채 그를 눈빛만으로 뚫어버릴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정말로 모르시겠어요?”
그래도 옛 담당 트레이너라고, 최후의, 최후의 최후까지 기회를 준다. 하지만 그 기회가 그다지 소용없음을 깨닫는 데에는 불과 십여 초도 걸리지 않는다.
“미안, 잘 모르겠네.”
“정말…트레이너는 예전이랑 다른 게 하나도 없네요.”
과거에도 둔탱이 머저리 바보였지만, 지금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리고 미래에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의 본성이니까, 하야카와 타즈나가, 그리고 토키노 미노루가 평생 짊어져야 할 업보다.
이 사람을 선택한 죄의 값, 연심이란 것을 품어버린 죄의 값.
그런 하야카와 타즈나의 고통을, 이 사람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도 모르겠지. 그런 사람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언행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여심을 모르면 모르는 죄의 값을 달게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제가 고작 상품권이나 받으려고, 트레이너에게 빚 하나 지워두려고 주말 오전부터 나와서 트레이너의 일을 대신해 드린 줄 아세요?”
그리곤 성큼성큼 트레이너의 앞으로 걸어간다.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트레이너에게 천천히 손을 뻗어 어깨 위에 올린다.
“제 덕분에 오후에 시간이 비었잖아요. 그리고 저도 오후에 시간이 비네요. 무슨 뜻인지 모르시겠어요?”
그리곤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살짝 준다. 너무 강하지 않게, 하지만 토키노 미노루의 기분이 명확하게 전달되도록. 트레이너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
“정말로, 모르시겠어요?”
“미노루…….”
하야카와 타즈나의 물음에, 그는 조용히 담당 우마무스메였던 이사장 비서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곤 침착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녀가 화가 났을 때 그가 달래주던, 옛날 그 방식 그대로. 그런 트레이너의 행동에 토키노 미노루 또한 비쭉 내민 입술을 다시 제자리로 돌린다. 몇 년 만에 트레이너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인가. 마음이 살짝 누그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너무 네게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하네. 오후에 시간이 비었으면 당연히 나와 같이―”
“……!”
드디어, 트레이너가 깨달은 것일까. 토키노 미노루가 원하는, 하야카와 타즈나가 바라던 말을 하려는 것일까. 오후에 둘이 데이트를 하자는―굳이 데이트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도 좋다. 둘이 같이 놀러 가자는, 옛날 담당 트레이너와 담당 우마무스메처럼 외출하자는 의미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그런 말을 드디어 하는 것인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토키노 미노루는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의 담당 트레이너를 바라보았고,
“점심은 먹고 퇴근해야지. 이것 참, 타즈나 너도 아직 점심 안 먹었지? 같이 구내식당에서 밥 먹고 퇴근하면 되겠다. 집까지 태워 줄―”
“야, 트레이너.”
그러면 그렇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내면의 살의를 정갈하게 가다듬는다. 언젠간 이 둔탱이 새끼를 개같이 뾰이하겠다고 10전 10승 신마의 타이틀에 다시금 맹세하며, 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가득 준다.
“지금, 당신의, 담당 우마무스메가, 둘이서, 놀러 가자고, 말하고, 있는, 거라고요?”
“하지만 지금은 내 담당 우마무스메가 아니잖아!”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의, 토키노 미노루…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하야카와 타즈나, 아니, 토키노 미노루의 이마에 실핏줄이 터질 들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본 트레이너는, 그녀의 컨디션이 절부조로 급락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떠올린다. 현역 시절, 토키노 미노루의 절부조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것을 눈앞에서 재현하고 싶지 않다. 당연하다. 황제의 절부조 따윈, 신마의 그것에 비하면 애들 장난일 수준이니까.
이런 상황에서 사지 멀쩡히 살아나갈 방법은 하나뿐임을, 그는 익히 알고 있다. 나이가 몇 살인데 예전, 현역일 때처럼 행동하는 건지, 이 녀석은.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며 침착하게 옛 담당 우마무스메의 머리를 재차 쓰다듬는다.
“알았으니 진정하렴, 미노루.”
“정마알….”
그 손길이 꽤 기분이 좋았는지, 아니면 옛날 생각이라도 났는지,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표정을 살짝 누그러뜨린다. 하여간, 이 사람에겐 화도 제대로 못 내겠다.
“하지만 오늘 둘이서 놀러 가는 건 안 돼.”
“……에?”
이런 분위기에서 갑자기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하는 건가, 이 트레이너는. 얼빠진 얼굴로 그녀의 담당 트레이너였던 것을 올려다보자,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인 뒤에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이 끝났으면, 내일의 일을 좀 해 둬야지. 여유로울 때 조금 더 해두면 나중이 편하잖아. 미리미리 해 둬야지.”
“…….”
“물론, 이건 내 루틴이니까 타즈나 너는 집에 가서 푹 쉬어. 둘이서 놀러 가는 건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 보자.”
“……은, 그게 다예요?”
“응?”
하야카와 타즈나가 방긋 웃으며 말한다. 하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제대로 듣지 못했기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한다. 하야카와 타즈나가 고개를 든다. 토키노 미노루의 눈동자다. 그것도 조금 많이, 화가 난.
“유언은, 그게 다예요?”
“유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니.”
“기뻐하세요, 트레이너는 지금부터 더 이상 일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아니, 내일 일 좀 해둬야 한다고.”
“트레이너의 내일은 없다니까요?”
“그게 무슨 말―”
그렇게 말하는 하야카와 타즈나는 여전히 방긋 웃는 얼굴 그대로였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무서운 말을 뱉어낸 뒤, 트레이너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손으로 그의 팔을 잡는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우마무스메의 힘으로 단단히 옭아맨다.
“아니, 잠깐만, 미노루! 아니, 타즈나! 너도 이제 어른이면 어른답게 떼쓰지 말고 어른스럽게 행동을 해!”
당근 되기 직전임을 직감하다 못해 실시간으로 체험 중인 트레이너가 황급히 정석적이고 논리적인 말로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애초에 그딴 걸로 고집이 꺾일 우마무스메였더라면 퍼펙트란 이름의 신마이지도 못했으리라.
“타즈나? 무슨 소리세요. 지금 트레이너에게 떼쓰는 건, 토키노 미노루인걸요?”
“아니 그래도 이젠 떼쓸 나이가 아니잖…아, 아파! 손에 힘주지 마! 뼈 부러질 거 같다고!”
“…한 번만 더 나이 이야기를 하시면, 그땐 저도 어떻게 될지 몰라요♪”
흥얼거리며, 트레이너의 팔을 잡은 채로 사무실을 나선다. 주머니의 열쇠를 꺼내 문을 잠그고,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는 트레이너에게 말한다.
“그렇네요, 먼저 점심을 같이 먹어요. 메뉴는 특별히 트레이너의 입맛에 맞춰드릴게요. 그다음엔 게임 센터에 가서 인형 뽑기를 하고, 경치 좋은 카페에 가서 차와 다과를 즐기도록 해요. 그리고 오늘 보고 싶은 영화도 있으니까, 영화관도 같이 가셔야 해요. 영화 보고 나서 저녁은 야경이 멋진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는 것으로 할까요? 그리고 나선 트레이너가 집까지 데려다주세요.”
“내…의사는?”
“한번 싫다고 말씀해 보시겠어요?”
우마무스메의 악력이 그의 팔을 덮치자, 그의 소심한 반항은 거기서 끝이 났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얼굴로, 그는 털레털레 하야카와 타즈나…아니, 토키노 미노루의 보폭에 맞춰 걸어간다.
“아 참, 전부 트레이너 씨가 내시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너는 진짜…옛날이랑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다음에는 제가 전부 낼 테니까요.”
“…….”
다음? 그게 무슨 소리니, 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토키노 미노루가 자기 팔로 그의 팔을 휘감는다. 하야카와 타즈나의 말랑하고 폭신한 것이 그의 팔을 뭉클하게 누른다. 그것이 가슴이다, 라고 인식하기까지 일 초도 걸리지 않는다.
곤란한 표정으로 그녀를 떨쳐낼까 하지만, 우마무스메의 힘을 히토미미가 어찌할 수는 없다. 겸허히 받아들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하야카와 타즈나가 옆에서 피식 웃는다.
“어때요, 옛날이랑 많이 다른 부분도 있죠?”
“…쓸데없는 소릴.”
“어머어머, 부끄러워하시긴~♪”
깔깔깔 웃으며 슬그머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트레이너 또한 싫은 내색을 하진 않는다. 그 옛날, 중앙 트레센의 학생일 때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트레이너 또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다른 한 손으로 어느새인가 챙겨 온 그녀의 녹색 모자를 머리에 씌워준다.
“너무 늦게까진 안 된다?”
그러면서 옛날, 담당 우마무스메에게 하듯이 주의를 준다. 하야카와 타즈나가 아닌, 토키노 미노루에게. 그런 트레이너의 말에 토키노 미노루가 웃으며 그때 그 시절, 과거의 토키노 미노루가 했던 대답을 그대로 말한다.
“제 맘이거든요~”
그리곤 피식, 웃어버린다. 트레이너도 따라서 피식, 웃는다. 담당 트레이너와 담당 우마무스메의 평범한 주말 외출이다. 평범한 중앙 트레센의 일상이다.
벚꽃이 떨어지는, 중앙 트레센의 어느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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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기습 개문서 뜌땨아
드디어 보쌈당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