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으로 나가 성을 파는 여성을 일본에서는 가라유키상이라고 부른다.
가라유키상은 14세기 포르투갈 등 유럽 선박이 드나든 나가사키와 구마모토 항구에서 처음 생겼으나 16세기 말부터 크게 위축된다.
천하 통일로 전국시대를 마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여성이 인도 등지로 팔려나가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가라유키상은 메이지 정부 천황이 집권한 1868년 이후 부쩍 늘어난다.
이들은 중국, 홍콩, 대만,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파푸아뉴기니 등 아시아는 물론, 러시아 시베리아, 하와이, 아프리카 탄자니아 등으로도 나갔다.
대부분 빈민 출신인 가라유키상은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모집했다.
먼저 제겐이라는 인신매매 브로커가 나선다.
제겐은 농촌이나 어촌 등을 돌며 가정 형편이 어려운 소녀들에게 일자리 알선을 미끼로 외국행을 제안한다.
이들이 동의하면 급여 선지급 등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부모에게 제공한다. 부모는 딸을 브로커 등의 처분대로 맡기겠다고 약속하는 증서에 서명한다.
주로 14~16세인 여성들은 이렇게 해서 선박에 몸을 싣는다.
외국에 도착하는 순간 감언이설에 속은 사실을 깨닫지만,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부모가 받은 선금은 물론, 브로커 수수료, 교통비 등을 전부 빚으로 떠안은 상태라 성매매를 거부할 수 없다. 돈 올가미에 걸려 성노예가 되는 것이다.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례도 적잖다.
가라유키상 모집과 집단송출은 명백한 불법행위인데도 일본 경찰은 묵인했다.
서양 열강을 따라잡는 데 필요한 외화를 벌어주는 애국자라는 인식에서다.
일본은 제국주의 확장 정책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군인으로 비유해 가라유키상을 낭자군으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1920년 성매매 금지 이전까지 가라유키상은 약 50만 명이 1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가라유키상은 일본군이 직접 관리하는 공창에 들어가거나 민간 집창촌 등에서 일했다.
공창에서는 일본 헌병이 매독 등 성병을 검사했다.
가라유키상 역사는 장기간 은폐됐다가 1972년 '산다칸 하치만 사창가'라는 책이 발간되면서 일반인에 알려지게 된다.
가라유키상 실태를 담은 이 책에는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칼리만탄) 집창촌 사례가 자세히 소개됐다.
주로 서양인이 이용한 이곳에서는 가라유키상과 포주가 몸값을 절반씩 나눠 가진다.
승객을 가득 태운 배가 항구에 들어올 때는 일 인당 하룻밤 손님이 30명을 넘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뜸했다.
한 달 동안 손님을 20명 이상 받지 못하면 채무 상환과 생필품 구매에 어려움을 겪는다.
싱가포르에서는 일부 여성이 첩자로 활동하며 점령군이던 영국군 정보를 빼내 본국에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정보는 일본군이 1941년 12월부터 두 달간 말레이반도를 놓고 영국군과 벌인 싱가포르 전투에서 완승하는 데 기여한다.
그런데도 이들은 귀국 후 끔찍한 차별과 천대를 받는다.
돈에 눈이 멀어 몸을 더럽혔다는 이유에서다.
1905년부터 중국 상하이와 싱가포르, 인도 뭄바이 등에서 일한 시마키 요시라는 여성은 귀국 후 주변 냉대 탓에 목숨을 끊었다.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서 여생을 마친 여성도 적잖다.
싱가포르와 홍콩, 말레이시아, 시베리아 등에는 가라유키상이 죽어 묻힌 묘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나이에 속임수에 넘어가 몸을 팔다가 가족을 만나지도 못하고 외국에서 생을 마감한 이들의 무덤이다.
이런 묘지에 안장된 여인은 그나마 낫다.
말라리아를 비롯한 풍토병이나 성병, 폐병 등에 걸려 죽은 뒤 바다나 정글에 버려진 여인이 부지기수다.
가라유키라는 단어는 원래 외국에서돈을 버는 남녀를 모두가리켰는데 모리사키 카즈에가 가즈유키상이라는 책을 내면서 가라유키상이 해외로넘어가 몸을 파는 여성이라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는데 그당시 이문제를 다루는 가라유키상의 모리사키 카즈에 산다칸 하치방 창관에 야마자키 토모코 모두 가부장적이고 계급화된 일본을 비판하기 위해 책을 썼지만 현대 극우세력들이 이런부분만 인용하여 위안부문제를 해외판 가라유키상이다 라고 물타기를 하려하고 있죠 특히 가라유키상은 기본적으로 대부분 가난과 가부장적인 문화를 싫어해 본인이 직접지원하였기 때문에 위안부도 그렇다 라는 식이죠 하지만 저자인 야마자키 토모코 모리사키 가즈에 모두 제국주의를 비판하는의도로 책을썼죠
애국이라는 개소리는 여기서도 빠지지않고 등장하네요.
작성자 덕분에 새로운 내용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본문 내용 중 천황이라 쓰신 내용은 일왕 정도로 바꾸시면 조금 더 편히 글이 읽힐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 시기이므로 우리 백성들이 상당수 포함되었겠네요
이새끼들은 자기나라 사람들한테도 저러는것 보면
진짜 유전자에 뭐가들어있는거냐 ㄷㄷㄷ
우리나라한태만 그랬던게 아니라 자국민까지도.....
미.친놈들
뭐 이러니까 우리나라및 타국민 대상 성노예 범죄에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없는 거겠죠
저도 일본은 싫어하지만
화냥년 이란 단어가 생각나서 막은 못까겠어요...
윗글에도 적혀있지만 메이지유신후 패망후 일본의.경제발전의.원동력중 하나는.확실히.여자수출이였죠.
본인들은 그런일 없다고 정신승리중이지만 그당시.팔려나간 여성들은 상당히.많습니다.
일단 국가를 떠나서 저건 좀 불쌍합니다라고 느끼고 이샛퀴들이 한국에.사과를 안하는.이유를 다시한번 알았다고 전 정리하죠
속아서 팔려간 여성을 매춘부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원하지 않는 강O을 수없이 당한거라고 생각되네요.
일본의 용병 수출은 꽤나 역사가 깊습니다.
이 일본 용병들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와 동남 아시아 일대에 출몰하던 시기부터 동남 아시아에서 용병질을 하고 살았습니다.
적은 병력으로 다수의 원주민들을 폭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포르투갈과 같은 유럽인 총독들은 일본 용병들을 적극 고용해서 활용했습니다.
이 일본인 용병들은 여자들도 데리고 다녔는데 대게 유녀들이라고 불리우던 창녀들입니다.
이들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심지어 인도 동부에서 일종의 정착촌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비극적인 일이 하나 있었는데...
도쿠가와 가문이 도요토미 가문을 멸족 시키고 일본을 통일한 뒤에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돌아서는데 에도 막부는 기독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일본내 이미 있는 기독교도를 철저하게 학살하고 또 외부에서 들어오는 기독교도들은 무조건 적발시 사형 시켰습니다.
이걸로도 모자라서 아예 외국에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입국 금지 시켰습니다.
외국에서 살다가 몰래 들어오면 적발시 사형.
이러다보니 ...... 고향으로 가고 싶어도 못가는 비참한 일이...
사족으로 저 여자들이 한국에도 들어 온 적이 있습니다.
조선 말...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목적으로 거문도를 무단으로 3년간 점령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영국 지휘관은 거문도 주민들의 협조를 얻고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일본 여자들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서 영국군들의 성욕을 해결하게 했습니다...영국 지휘관 생각에 "이 말썽쟁이 잉글랜드 야만놈들이 분명 밤에 조선 여인들을 건드릴 것이 뻔했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거문도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크게 문제가 생길 게 뻔할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삼가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런데 일본애들은 어떻게 교육을 받은건지.. 패망 후 몸을 팔아서 다시 일으켜 세우고 지킨 나라라고 자부심 가지듯 말하던데 저런걸 알려나 ㅎ
미친 새끼들; 조국의 여성 50만을 평생 강O에 밀어넣고는 애국이라 하다니... 진짜 할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