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음력 4월 15일
임진왜란의 네번째 전투인
동래성 전투
전날 부산진, 다대포진, 서평포진이 대규모의 왜군에게 함락된 사실을 접한
정3품 통정대부 동래부사 송상현 장군은
3000의 병사와 2만의 동래부 백성을 책임지는 현재 부산권 방어의 전권책임자였다
송상현 장군은 부산진을 비롯한 경상좌수영 진들이 무너진 것이
조총병들의 힘이 컸다고 판단,
성벽 위에 목책을 새로 세우는 등 급히 수성 준비를 하였다
사실 동래성은 이미 조선이 전쟁대비를 철저하게 한 매우 튼튼한 성이었다
포루투갈 선교사 프로이스는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음력 4월 15일에 조선의 모든 성채보다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 보이는 다른 성채로 출발하였다."
"이 성채는 동래라고 일컬어지며 최초의 부산포 성으로부터 내륙으로 3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조선인들은 이 성을 최대의 방어 진지로 간주하여 최대의 재원을 투입하였다."
라고 기록하였다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비켜달라.
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그 유명한 팻말을 주고 받은 양군은 본격전인 전투에 임한다
하지만 상상을 초월한 왜군의 규모에 그 동안의 전쟁준비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급하게 세운 나무 목책 역시 조총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왜군은 조선군의 맹렬한 활 사격에 잠시 주춤하였으나
이내 허수아비에 장군복을 입혀 궁수들의 사격을 한곳으로 유도하고,
큰 깃발들을 사다리를 타는 병사들에게 휴대하게 하여 시야를 가리는 등
이를 파훼할 작전을 시도하여 피해를 축소하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이 돌파당하고
2시간여 동안 시가전을 벌였지만 끝내 함락당했다
孤成月暈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
列鎭高枕 여러 진들은 단잠을 자고 있네
君臣義重 군신간의 의가 중하여 여기서 죽게되니
父子恩輕 부모님의 은혜를 소홀히하는 불효를 용서하소서
함락이 가까워지자 송상현 장군은 관아로 들어가
갑옷 위에 관복을 입고 위의 시를 쓴 후,
북향사배를 올린다
송상현과 면식이 있던 마츠우라 시게노부라는 일본군 장수가 그에게 피신하라고 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다시 전투에 임하다가 전사하였다
동래성 해자에서 출토된 인골들과 조선군의 병장기
동래부 병졸들과 백성들은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으며
왜군 1군단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의 충절을 높이 사 그의 시신을
잘 보존하라 명했으나 끝까지 저항하는
동래군민 2만명은 모조리 학살하라 명했다
사로잡힌 포로들 역시 모두 처형되어 동래성 해자에 파묻혔다
제승방략 체제가 작동하여
양산군수 조영규, 울산군수 이언성은 성내에 합류하여 송상현과 함께 싸웠으나,
조영규는 전사하고 이언성은 극적으로 후퇴한다
경상좌병사 이각 역시 합류에 성공하였으나, 이내 승산이 없다 판단하여
'성 외부에서 기회를 노리겠다'는 변명을 하여 성을 빠져나와 도주하였다
경상좌수사 박홍의 원군이 도달했을땐 이미 동래성의 가망이 보이질 않아
동래성의 구원을 포기하고 병력을 돌렸다
프로이스의 기록에 의하면 왜군은 약 500여명이 사상하였다고 전해진다
위의 동래성 해자에서 출토된 유물을 토대로 복구한
당시 동래부 조선군의 무장상태 복원모형
부산박물관
조령에서 철수한 것은 최대한 기병을 살리기 위해서 철수한 것이었음
당시 신립이 대려온 80명의 정예병과 군사 훈련을 전혀 받지 못한 농민군으로 일본 정예 10만군세를 막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고
후퇴하여 조금이라도 더 정예병사를 모아 기병을 만들려고 한 것임.
신립은 500명정예 기병으로 여진의 수천에서 1만이상의 여진군을 계속 물리친 명장 중의 명장이였다.
어떻게든 긁어 모아서 막으려 했으나 수십배 차이나는 병력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이지.
배수진을 친 것에 대한 평가가 많지만
당시 군인이 없이 농민군으로만 이루어진 병력에서 탈영병이 속출했고 탈영병을 만들지 않기위해 배수진을 쳤다는 설도 있으니 어느 한면 가지고 그 장수를 판단하는 것을 옳지 못함.
세계최강급은 너무 나갔어...
당시 바로 위에만 해도 누르하치 버티고 있고
서쪽으로 가면 오스만 제국이 동서 양쪽으로 박살내면서 지중해 꽉잡고 있었고, 유럽 최대 세력 자랑하던 에스파냐 같은 애들도 있었는데
아냐 몽골이더심했어
저때 어느정도 조선도 전쟁 준비를 하고있었긴 있었음
근데 조선은 재정 망할 각오로 전쟁 준비한것도 아니고
당시 일본 군대가 거의 세계 최강급이라... ㅠㅠ
신립이 임진왜란에서 너무 허무하게 깨지긴 했는데
당시 실전으로 실적 쌓아서 최고 무신된 실력파이긴하징
그래도 방위체계가 작동하긴 했네
원군이 오긴 왔다는 거자나
남쪽은 왜구가 자주 와서 그럴ㄹ랑가
왜군이 곧 쳐들어 올거라는 정보는 조선도 이미 알고는 있었거든. 동래성 함락당할때 대구에 경상도 병력이 집결했다가 털리긴했음.
북쪽도 제승방략 작동했는데 신립 뿅뿅이 조령에서 우주방어만 해도 되는걸
탄금대에서 다 꼬라박고 망했지.
조령에서 철수한 것은 최대한 기병을 살리기 위해서 철수한 것이었음
당시 신립이 대려온 80명의 정예병과 군사 훈련을 전혀 받지 못한 농민군으로 일본 정예 10만군세를 막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고
후퇴하여 조금이라도 더 정예병사를 모아 기병을 만들려고 한 것임.
신립은 500명정예 기병으로 여진의 수천에서 1만이상의 여진군을 계속 물리친 명장 중의 명장이였다.
어떻게든 긁어 모아서 막으려 했으나 수십배 차이나는 병력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이지.
배수진을 친 것에 대한 평가가 많지만
당시 군인이 없이 농민군으로만 이루어진 병력에서 탈영병이 속출했고 탈영병을 만들지 않기위해 배수진을 쳤다는 설도 있으니 어느 한면 가지고 그 장수를 판단하는 것을 옳지 못함.
저때 어느정도 조선도 전쟁 준비를 하고있었긴 있었음
근데 조선은 재정 망할 각오로 전쟁 준비한것도 아니고
당시 일본 군대가 거의 세계 최강급이라... ㅠㅠ
신립이 임진왜란에서 너무 허무하게 깨지긴 했는데
당시 실전으로 실적 쌓아서 최고 무신된 실력파이긴하징
신립이 기병전술로 워낙 여진족들 정말 엄청나게 부수고 다녔고
당시 탄금대 에서도 신립이 기병전술 위주로 해서 망했다고 들은...
신립이 상대한건 10만대군이 아냐. 신립이 조령 포기할 시점에서 존재를 확인했을거라고 보이는건 일본군1군과2군3군이었을거고. 그 병력을 합치면 6~7만 정도야. 여기서 문제는 단순한 병력차이가 아니라 저 3개의 군세가 서로 다른 길로 진군하는중이었다는거고 신립은 그시점에서 조선 유일의 야전군사령관으로서 저 3개군을 최대한 빨리 격파해야했음.
그래서 우선 고니시의 군세를 평야지대에서 회전을 통해 격멸하려고 한거고 그 전장으로 선택한게 탄금대임. 당시 신립입장에서는 자신의 병력이 고니시와 해볼만한 수준이라고 생각을 한거였고. 거기까지는 맞았는데 문제는 신립이 닥돌만 할줄 안다는게 문제였지.
내가 알기로는 전혀 대비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음.
당시 부산으로 들어왔을때 부산성책임자 정발은 사냥을 하다가 일본 함대를 보고 한 말이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러 왔다고 했음.
부산성으로 가는데 부산성을 공격하자 그대로 동래성으로 튄 인물
세계최강급은 너무 나갔어...
당시 바로 위에만 해도 누르하치 버티고 있고
서쪽으로 가면 오스만 제국이 동서 양쪽으로 박살내면서 지중해 꽉잡고 있었고, 유럽 최대 세력 자랑하던 에스파냐 같은 애들도 있었는데
신립은 탄금대에서 고니시군과 결전을 치루면서 근처에 후방퇴로에 있는 충주성을 비워놨고. 이 충주성은 우회하던 일본군이 함락시켜. 이로서 조선군은 퇴로가 차단됬고. 신립은 3면에 병력을 배치하고 화망을 형성한 일본군에게 우직한 정면돌격을 감행하면서 패배를 자초해.
정리하자면 신립이 가진건 허접한 병력도 아니었고. 일본군의 1개군과 해볼만한 전력이엇다는것. 탄금대를 전장으로 선택한건 옳았지만. 신립이 고니시보다 한수아래의 지휘능력을 가졌고. 그 결과는 조선의 야전군 소멸임. 어느 한면 가지고 장수를 평가하면 안된다는건 맞지만. 탄금대에서 보여준 신립의 능력은 명장이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함.
거의 세계최강급은 맞음 100년 전쟁으로 만들어진 군대만 50만이고
그중 전투 정예만 십만여명인데 ' 전쟁 '만으로만 보면 충분히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으리라봄
물런 다른거 다 따지면 한참밀리지만
탄금대에서의 신립의 전술적 선택은 분명 문제가 있는게 사실인데, .. 훗날에 보기에는 그렇다는 이야기고 실지로 당시 신립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기가 떨어져서 당장의 신립군 탈영문제부터 걱정해야할 입장에서 문경세제의 잔도를 틀어막는다라는 선택지는 되려 탈영을 가속화 시킬 염려가 있었음.. 잔도 여러개를 틀어막아야하는데 이리되면 당연히 탈영은 가속화될뿐더러 만약에 하나가 뚫렸다? 하면 나머지 군사들 다 고립될테니까..
?? 님 죄송한데
http://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35274287?search_type=member_srl&search_key=1256410
이거 보고 오시면 안될까요
글쌔 닥돌만 할줄 아는 장수가 소수의 병력으로 여진을 계속 물리쳤을거라고는 생각 못하겠어.
그 이외에는 동의해
정발은 최초 교전때 부산진성에서 반나절간 저항하다가 전사했음.
부산진수군첨절제사 정발 장군이 병력을 이용해 사냥에 나섰던것은
유해금수 구제를 통해 치안을 확보하려는 것과 동시에, 병력의 기동훈련이었습니다
복귀 중에 접근하는 왜 선단을 목격하고 세견선으로 잠시 오해하였지만, 이내 침공으로 판단하고 성으로 돌아와 급히 방어하다가 전사하셨습니다
그 전쟁 수행력 때문에 말하는 건데
경험이야 충분했겠지만
임란 중후기, 명군 개입 초기에 겨우 한반도도 제대로 작전수행 범위에 못 넣어서 함경도 즈음부터 보급망 다 작살나고, 현지조달도 못하고, 기병대랑은 제대로 싸워본 경험도 없어서 붙으면 깨졌던게 왜군이었음.
이순신느님의 치트키스런 공적덕이긴 하지만 아무튼
거기에 당시 일본에서 쓰던 화약무기는 서양으로 넘어가면 군용은 커녕 사냥용으로나 겨우 쓰이던 구세대 물품이고
마찬가지로 수십년에 걸쳐서 아프리카, 유럽 곳곳에서 수십만 단위로 전쟁하던게 오스만, 에스파냐 이런 애들인데
내가 알기로는 정발은 도망가고 부산관민만 학살당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ㅊㅊ
몽골보단 쪽바리들이 더해 2번씩이나 쑥대밭을만들고...기식기들...
아냐 몽골이더심했어
몽골이 더해?
둘다 개객이둘 ㅠㅅ ㅠ
몽골침공은 7번이넘었고
그때는 군대가 막는게아니라
그냥 강화도가서 살고있었거든
그래서 몽골침공이전의 목재건물이 남아있는게없음
몽골도 완전 있는데로 다부수고 간걸로 유명하지않나
고려시대때까지있던 황룡사지9층목탑도 몽골군이 불태우고
그래도 두 넘다 개객기란점은 변함이 없네?
침공하는국가가 뿅뿅들인건 변하지않지
조총이 사기구만..
당시 조총은 활보다 성능이 훨신 후달렸음.
조총이 조선에도 왔으나 활보다 성능이 떨어져서 활용하지 않은 것임.
조선이 일본놈들에게 진 이유는 딱 1가지야
조선엔 군대가 없었다.
군대가 없단는게 무슨의미임?..
당시로는 최신예무기이니
군대가 있긴 있었지만 약한군대였지
근데 상대가 당시 통일 일본이 정예군사에
거의 세계탑급 수준이라 ...
상비군이 거의 없고 징집병 위주의 군대라서 훈련도가 너무 떨어졌음. 장비는 비리등에 의해 관리가 전혀 안되서 지급할 장비도 부족했고
당시 조선은 포만납부하면 군역을 면제해줬음.
그래서 모두 포를 납부하거나 노역만하고 실질적인 군인은 없었어
200년동안 내전만한 군대랑
200년동안 평화를 유지했던나라를 비교하면 좀그렇지
전투라고해봐야 북방 여진족들 예방전쟁말고는 제대로된전쟁도없었는데
전쟁할 물자나 병력이 모잘랐단소리지 일본이 기습적으로 전쟁일으켰으니
어제 정발장군 게시물에서 송상현장군이 도망쳤다고 했던 사람 이거보고있냐?
요즘엔 역사교육을 잘 안해서그런가....... 국민학교세대에 부산에서 30년살아서 그런가.... 진짜 충격적이였는데....
(부산엔 송상현장군동상도 오랜기간 존재해오고있고 국민학교때부터 학교에서 배우고 충렬사로 소풍도 많이가고 했었죠. 80년대후반~90년대 초반)
ㅋㅋㅋㅋ 나도 그거 봤고 댓글 달았는데
그거 말한 사람이 자기가 잘못안거라고 사과하더라 ㅋㅋㅋ
생각보다 못싸웠네.. 뭔가 아쉽다
경상도 수군측이 상륙하기전 처음부터 해상전투를 유도했으면 피해가 저만큼 크진않았을텐데 아쉬운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