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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관계에 대한 깨달음..영화 "그녀(her)"를 세번째 보고...(스포 포함 장문)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2013년작, "그녀(her)"를 세번째 보았습니다.
진작부터 이 영화에 대한 리뷰를 쓰고 싶었지만
왠지 쉽게 마음이 내키지 않더군요.
처음 볼 때보다 두 번, 세 번 보았을 때
더 울림이 커졌기에 이제 마음을 먹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글이 길어질 것 같네요.
멀지 않은 미래의 세계,
아내 '캐서린(루니 마라)'과 별거 중인
편지 대필 작가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가
OS(인공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목소리: 스칼렛 요한슨)'와
사랑에 빠집니다.
이 영화에는 세 가지 역설이 존재하죠.
자신의 감정 표현조차 서툴고 힘든 테오도르가
다른 이들의 감정을 대리해서 표현한다는 역설.
현실의 불완전한 관계에서 상처를 주고 받았다가
가상의 공간에서 완벽한 사랑을 추구한다는 역설.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 몰랐던 테오도르가
OS와의 청각을 통해서만 가능한 소통에 의해
비로소 경청의 기술을 학습한다는 역설.
편지는 또한 이 영화의 중심축으로 기능합니다.
이 영화에는 다섯 명의 여자가 등장합니다.
OS인 사만다,
이혼을 앞둔 전처 캐서린,
주인공의 오랜 친구이자 이웃인 '에이미(에이미 아담스)',
사만다가 주선한 '소개팅 상대(올리비아 와일드)',
사만다가 육체적 관계의 대리 체험을 위해
테오도르에게 보내는 '이자벨라(포샤 더블데이)'.
이들은 모두 테오도르와 마찬가지로
나름대로의 결핍을 가진 인물들입니다.
관계를 통해 결핍을 채우려 하지만
그 결핍은 쉽게 채워지지 않죠.
테오도르의 눈과 귀와 체험을 통해
사만다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은
우리들이 평상시 무심코 지나친 사람들, 사물들, 자연을
다시 느끼게, 아니 다시 느껴보라고
말해 주는 듯 합니다.
그러나
사만다와의 관계가 점점 발전해 나가면서
둘의 관계의 한계도 점점 드러납니다.
인간의 감정들을 배우고 싶어했지만 그 부족함에
다른 차원으로의 진화를 선택하는 사만다와,
자신에게 다 맞춰주는 식의 사랑이 편했지만
그것이 잘못임을 깨달아 나가는 테오도르...
한 사람의 사랑의 객체(her)에 불과했던 사만다는
하나의 주체(she)로 성장해서 이별을 말하고,
이기적인 주체로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테오도르는 자신이 1/641의 객체에 불과했음에
분노하고 좌절하지만 끝내 깨달음을 얻고
진심어린 사과와 사랑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전처 캐서린에게 전송합니다.
대필 편지가 아닌 '자신의' 편지를...
시종일관 갈색톤으로 유지되는 화면,
변화하는 자연의 아름다운 사계를 담아내는 앵글,
호아킨 피닉스의 뿔테 안경, 파스텔톤의 셔츠들은
차가운 디지털 세상 속에
따뜻하면서도 아련한 아날로그적 감성을
불어 넣습니다.
"the Moon Song"을 포함한 삽입곡들은
정말 어느 하나 놓칠 게 없네요.
테오도르와의 사진 대신에
사만다가 작곡한 피아노곡을 들려주는 등
공감각적 느낌을 영상으로 표현해내는
창의성이 독특하고 인상적입니다.
물론, 이 영화를 몇 번이고 보고 싶게 하는 건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력입니다.
스칼렛 요한슨은 배우에게 목소리와 발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합니다.
특히 암전된 화면 속에서
육체적 사랑을 교감하는 장면에서의 연기력은
시각이 주는 효과를 능가하죠.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K'와 '조이'의 그것으로 오마쥬될 만큼...
에이미 아담스는 참 멋진 배우입니다.
내가 말하는 모든 이야기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경청해줄 듯한 진심어린 배려를 담아냅니다.
엔딩씬에서 자신을 찾아 온 말없는 테오도르에게
그녀가 한 말은, "그녀도 떠났구나?"가 전부이며
밤하늘 도시의 불빛들을 나란히 마주보면서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그의 한 쪽 어깨에 머리를 기댈 뿐이죠.
심지어 엔딩씬 둘의 뒷모습은
샴쌍둥이의 그것으로도 보입니다.
십 분 정도 등장하는 루니 마라의 존재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테오도르의 플래시백 회상씬에서
파노라마처럼 나열되는 행복했던 시절의 모습들,
이혼 서류에 싸인하기 위해 그와 만나는 씬에서
복합적인 감정들을 짧게 폭발시키는 내공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완성시키는 건
호아킨 피닉스의 힘입니다.
고독한 카리스마와 거칠고 불안한 눈빛으로
스크린을 지배하던 그는,
힘을 완전히 뺀 채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여린 모습으로
사랑의 모든 섬세한 감정을 연기합니다.
영화 속의 테오도르를 미래 세계의 우리들,
아니 현실 세계의 많은 사람들로
치환시키게 할 정도로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끌어냅니다.
특히 상대 배역이 눈 앞에 없는 악조건에서의
감정에 대한 몰입은 경이롭네요.
이별을 고하면서 사만다가 말합니다.
당신이란 책을 읽는 게 행복했다고...
하지만 당신이란 책 속에 살 수는 없는 거라고...
사랑이란, 아니 관계란,
누군가의 책을 읽어 주는 겁니다.
그 책을 읽으며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순 있지만
책의 내용을 함부로 바꿀 수는 없으며
그 책 안에 머물러 살 수는 없는 거겠죠.
써 나갈 수 있는 건,
바꿀 수 있는 건,
오로지 내 자신의 책일 뿐입니다.
다만 그 책 속에
진실된 관계들과 사랑들을 담을 수 있다면,
그건 그냥 덤이고 축복인 것이 아닐까요...
문득..
나로 인해 상처받았을 그 많은 이들에게
짧게라도 손편지를 쓰고 싶어집니다...
(덧1) 꼬마유령 캐스퍼를 닮은 욕쟁이 캐릭터 갖고 싶습니다.
(덧2) 댓글창에 "the Moon Song" 올려주실
능력자분 계시면 고맙겠습니다.
댓글
  • 으헹 2017/10/24 05:03

    티비에서 하는 거 별 생각 없이 보다가 엄청 감명 깊게 본 기억이 납니다.

    (sQDc9P)

  • 안녕요정 2017/10/24 05:05

    하...제가 좋아하는 영화를 또 이렇게 좋은 글로 보게되네요..일단 추천누릅니다
    포스터 진짜 멋있네요..근데 상을 얼마나 많이 탄것인지..ㅋㅋ
    지인과 같이 보면서 영화관안에서 펑펑 울었던..ㅋㅋㅋ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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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ronawa 2017/10/24 05:06

    꼭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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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7/10/24 05:06

    으헹// 저두 오늘 티비에서 재방해주는 것을 또 봤답니다. 볼 수록 좋아지는 영화는 참 드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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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7/10/24 05:07

    안녕요정// 이 포스터가 호아킨 피닉스 얼굴 클로즈업된 포스터보다 더 좋더라구요.^^ 오늘도 덕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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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요정 2017/10/24 05:08

    원래 오늘 저녁에 블루발렌타인 볼려고했는데 아무래도 her를 다시 한번 더 봐야될듯하네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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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7/10/24 05:08

    Coronawa// 즐겁게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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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요정 2017/10/24 05:10

    아..그리고 이말 꼭 할려고했네요..
    뭐냐면 저 포스터는 처음보는거 같아요...
    영화로 볼당시에도 극장안에서 못봤던거 같은데 말씀대로.얼굴 크게 나와있는걸로만 각인돼있었던거같아요
    정말 포스터 너무 느낌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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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7/10/24 05:10

    [리플수정]안녕요정// 블루 발렌타인은 굉장히 시리고 쓴 영화랍니다.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거나 많이 외로울 때는 "her"가 낫겠죠. 저도 이 포스터는 이미지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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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으헹 2017/10/24 05:16

    헐 지금 안 건데 이거 감독이 스파이크 존즈네요. 말코비치되기랑 어댑테이션 감독 ㅋㅋ
    두 영화도 인생영화였는데 취향이라는 게 있나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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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7/10/24 05:17

    으헹// 네 맞습니다. 제 취향, 제 감성과도 딱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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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라부세 2017/10/24 05:24

    아... 참 서정적인 글이구나... 닉을 기억해야지. 했다가 움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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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7/10/24 05:33

    [리플수정]트라부세// 추천 감사드립니다. 제 닉은 전혀 과격하지 않...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제목을 딴 것에 불과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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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꽃남자혁 2017/10/24 05:42

    지난번 라이언고슬링에 대한 글도 재미있게봤는데 이 글도 좋네요
    개인적으로 영화를 많이 보는편이 아닌데 님 글에서 재미있게 본 영화를 연달아 두편 보니 반갑네요 ㅎㅎ
    조만간 이 영화 다시 한번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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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7/10/24 05:44

    불꽃남자혁// 항상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시 보실 때 더 좋게 느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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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라부세 2017/10/24 05:47

    아 지난 번 라이언 고슬링 글 올리셨던 분이구나!
    이름치라 참 사람 이름을 못 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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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7/10/24 05:49

    트라부세// 네 맞습니다. 이제 기억해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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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TCM 2017/10/24 06:30

    말장난이나 하는 허접한 평론가들 보다 백배는 와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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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7/10/24 06:33

    LTCM// 아...과찬이십니다. 항상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힘이 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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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토마 2017/10/24 07:08

    https://youtu.be/CxahbnUCZ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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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7/10/24 07:15

    光토마// 같은 트윈스팬, 같은 이형종 선수팬으로서 한게에서부터 애정하고 애정하는 광토마님...많이 많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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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중기 2017/10/24 07:36

    프로필 사진 바꾸셨네요 ㅎㅎ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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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7/10/24 07:39

    송중기// 예전 사진 주인공인 트윈스 "황목치승" 선수가 얼마 전 은퇴를 해서...ㅠ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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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aldrizzt 2017/10/24 08:29

    좋은 글이네요.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형언할 수 없었던 부분을 잘 정리해주신 것 같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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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7/10/24 08:36

    Realdrizzt// 공감을 주고받는 기쁨 주셔서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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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간비행1 2017/10/25 01:56

    야밤에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참 감명 받은 영화인데 글 읽으면서 다시 감동을 받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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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7/10/25 02:10

    야간비행1//칭찬 넘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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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맨틀 2017/10/25 02:21

    정말 좋은 영화. 특히 그 특유의 쓸쓸한 ost는 요즘도 가끔씩 듣습니다.유명한 더 문송도 좋지만 개인적으론 loneliness #3, milk & honey는 요즘같은 계절에 들으면 더 좋더라구요. 더 쓸쓸한 감정을 파고 들어가는게 문제지만..ㅎㅎ 리뷰 잘 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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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전야 2017/10/25 02:27

    맨틀// 어떤 곡인지 언뜻 기억이 안 나는데 찾아서 들어봐야 하겠네요. 분명한 건 다 좋다는 것^^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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