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이니까 되도록 폰으로 보자.)
시뮬랑카에서 여름 이벤트는
잘들 즐기고 계신감?
나도 실컷 즐긴 뒤에
이번 이벤트의 서사에 대한
해설문을 좀 (길게) 써왔음.
요약부터 하고 가자면,
내 추측으로 시뮬랑카는
시뮬라크르로 기능하기 위한
티바트 서사의 모의실험장이며,
마녀회는 이 시뮬라크르를 통해
'더 나은 티바트'를 욕망하는 중.
시뮬라크르를 아는 사람에게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겠지만,
모르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테니
하나씩 풀면서 차근히 갑시다.
먼저, 수메르에서의 후일담..
이게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고
원성들이 아주 자자하던데,
이건 그냥 시뮬랑카라는 세계의
구상에 대한 비유라고 보면 됨.
(*룩카데바타님의 은혜로운 자장가.
1시간 반복 영상이니 틀고 가자.)
달리 말해, 호요버스 작가진이
우리에게 이벤트 맵의 기획 의도를
일부러 복습시켰다는 얘기임.
(길면서 노잼이라 용서가 안 되더라.)
수메르 후일담 임무의 내용을
순서대로 되짚자면..
1) 시답잖은 추리 소설 책에
카베가 어느 등장인물의 이름을
무심코 강조 표기한 낙서가
결말의 핵심 유출(스포일링)이 됨.
(소설 내용 자체는 중요하지 않음.)
2) 알하이탐을 시작으로
위 유출에의 물타기를 위해서
무작위 등장인물들에 대한
별도의 표기가 덧쓰이기 시작함.
결국 여러 사람을 거친 후에는
표기의 의미가 희석되며 모호해졌고,
해당 서적에의 억측이 퍼졌음.
(애초에 의미가 없긴 했지만.)
3) '원본이 이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낙서로 점철된 사본에 대한 평가에
과해석이 더해지고, 사태가 커짐.
여행자가 그 경위를 파악하고
결국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카베가 그 사본을 구입하며 마무리됨.
결말에 상당히 맥이 빠져 보이는데,
사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건
바로 '원본'이 따로 있었다는 점임.
정작 깔끔한 원본에 대한 평가는
일체의 변동이 없었는데도,
사람들은 낙서가 된 사본만 찾아서
사본의 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았지?
즉, 간단한 표기의 반복만으로
[원본과 사본]의 가치가 서로 달라졌음.
이 관계를 [티바트와 시뮬랑카]의
관계에도 한 번 적용해볼까?
웬만큼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번 이벤트를 즐긴 사람들은
시뮬랑카의 서사가 티바트 편 결말의
모의실험, 즉 시뮬레이션임을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야.
하지만 후일담의 소설 사본처럼,
시뮬랑카라는 동화 세계는
원본인 티바트의 서사와는
다른 방향과 다른 가치를 부여받았음.
그래서 시뮬랑카라는 사본은
원본인 티바트의 시뮬라크르가 되지.
*시뮬라크르란, 원래 플라톤에게서부터
'복제의 복제'라는 의미로 쓰였음.
(*Simulacre : 모방, 모사)
그가 제시한 이데아론을 바탕으로
이데아를 원본이라고 한다면,
이 원본을 복제한 그림자가 복제본(Copy),
그리고 이 복제본의 복제가 시뮬라크르임.
즉, 플라톤에게 시뮬라크르란
'거짓에 거짓을 더한 흉물'인 거지.
사람 속만 썩이는 애물단지처럼
진리(이데아, 본질)에 대한 파악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라고.
그러나 이게 현대철학에 이르며
플라톤으로부터의 본질주의를
탈피하려는 시도와 맞물려서
완전히 다른 의미로 거듭났음.
대표적으로 질 들뢰즈가 있는데,
이 양반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알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지.
들뢰즈에게 시뮬라크르라 함은
‘차이’를 기반으로 의미를 생성하는,
원본과는 전혀 다른 복제본임.
달리 말하면 플라톤이 제시한
이데아와의 위계를 부수는 셈.
아마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겠음.
철학자 플라톤은 이데아론으로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펼쳤는데,
시뮬라크르까지 끼우면 결국
삼원론이 되는 셈이잖냐고.
답부터 말하자면 '아니다'인데,
그 이유는 이데아를 우리가
감각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임.
그래서 '이데아의 사본'과
'사본의 사본(시뮬라크르)'의
이원론으로 보는 게 맞음.
정리하면 [이데아를 닮은 사본과
닮지 않은 사본]의 대결이란 거지.
그럼 본론으로 돌아와,
플라톤에게 사본의 '차이'라 함은
동일성으로 원복시켜야 할 대상,
즉 교정해야 할 오류였으나,
들뢰즈에게는 몇 번을 깨물어도
안 아플 손가락의 하나였음.
[이데아의 복제와 시뮬라크르]에 대해
플라톤은 [우월함과 열등함]이라는
가치판단을 덧씌우고 있었지만,
들뢰즈를 비롯한 현대철학자들은
이런 사유를 부정한다는 얘기임.
이 구상을 들뢰즈는 예술에 접목하는데,
플라톤이 예술행위를 놀거리와 같은
모방에 지나지 않다고 봤다면,
들뢰즈는 예술을 ‘모델(원본)이 없는
시뮬라크르(혹은 판타즈마)’라고 본다.
여기서 들뢰즈의 사유가 참 독특한데,
그는 플라톤 철학을 비롯한 본질주의가
절대적 동일성으로 온갖 ‘차이'를 가진
개체들을 끌고 가는 시도에서,
오히려 동일성의 아래에 둘 수 없는
차이를 은밀히 드러낸다고 본다.
(*예전에 다른 게시글에서
구조주의를 언급했는데,
혹시 이항대립을 떠올린다면
당신은 또또칸 청년이다.)
자신은 얼굴을 가렸다고 믿게 하지만,
이걸 보는 이로 하여금 가면 아래에
숨겨야 할 것이 있음을 드러내듯이
모순성을 내포한다는 얘기임.
즉, [같음]을 구상해버리는 순간,
사람은 불현듯 [다름] 또한 연상한다.
그래서 플라톤에게는 거짓일 예술 작품이,
들뢰즈에게는 ‘형식은 어쨋든 작품’인 것.
시뮬라크르가 가진 '차이'는
더이상 차별의 대상이 아니니까.
재미있게도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에 '차이'를 강조하는 만큼
'반복'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이 반복은 '동일성의 반복'이 아님!
뭇사람들에게 반복은 그냥
똑같은 일을 되푸는 작업이겠으나,
들뢰즈에게는 이전과는 다른
'차이'를 여러 번 덧입히는 작업임.
그는 이런 반복을 특별히
'*옷 입은 반복'으로도 부른다고.
(*혹은 정신적 반복이라고도 함.)
자, 어때?
들뢰즈에게 있어 시뮬라크르는
거짓으로 점철된 무가치함 대신,
'차이'를 통해 존재 의미를 덧쓰며
'반복'을 통해 독립된 개체가 됨.
그래, 마치 수메르 후일담의
여러 사람이 낙서한 소설 사본처럼.
때문에 시뮬랑카도 다를 게 없다.
영지주의의 설정을 감안하면
티바트의 거짓 하늘 위로는
원래의 '진정한 하늘'이 따로 있어
이를 원본이라고 봐야 하고,
거짓된 하늘인 티바트의 별하늘은
그렇게 원본을 베낀 사본이 되며,
시뮬랑카는 그 사본의 사본이 된다.
그래서 난 본 게시글의 제목대로
시뮬랑카를 티바트의 시뮬라크르라 봄.
그럼 시뮬랑카의 서사를 되짚으며
저 구상이 어떻게 구현됐는지 보자.
우리가 처음 도착하면서
닐루와 만난 축복의 숲은
마녀 앨리스의 작업공간이었다.
그녀는 세 여신 중 '창조의 여신'.
종이 생명체들에게 생명을 주고
이들에게 여러 색을 선사하여
각자의 존재로서의 활력도 부여하지.
하지만 시간의 마모에 따라서
색이 빠지는 퇴색증이 나타났음.
뭔가 생각나지 않나?
그렇다! 이나즈마에서 본,
안수령으로 신의 눈을 잃은 자들의
욕망 및 의지의 상실과 똑같다.
무엇을 바라고 살았는지를 잊거나,
잊지 않았다고 해도 의지가 없어
마치 마른 나무나 굳은 돌처럼
도무지 인간성을 찾기 힘든,
말 그대로 목석 같은 사람이 됐지.
신의 눈 소지자의 별칭이 다름 아닌
게임 제목인 원신(原神)인 만큼,
시뮬랑카에서 본 퇴색증 현상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원신 티바트 편의 전체적인
구상을 담은 PV 에선
티바트의 일곱 원소를 신들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자
덧입힌 빛깔이라고도 했다고.
즉, 시간의 마모에 따른 퇴색증은
결국 리월에서 본 불변(계약)의 와해,
그리고 이나즈마의 영원에의 집착이
찰나(염원)에 대한 압제가 된 걸
약간 순화하여 담은 요소임.
그럼 개구리들이 뛰놀던 빗노래 연못과
방울바람 왕국의 이야기도 감이 오지.
빗노래 연못에서 원래의 힘을 잃어
좌절하던 용사가 여정을 통해서
힘을 되찾고 공주를 구하러 떠나고..
방울바람 왕국의 공주는
왕국에 벌어진 위협을 제거하고는
이후로 왕국을 떠나려는 의지가
아주 강하게 엿보이던 존재였지.
그렇다, 위 두 인물의 서사는
바로 주인공 쌍둥이 남매의 얘기임.
둘의 의무와 감정선이 그대로 담겼음.
패배하고 힘을 상실했으나
다시 여정에 오른 아이테르,
그리고 오빠를 잃고는 다시금
왕국을 부흥시키려는 루미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실패자들의 역사를 간직한 채로
못 다 이룬 꿈에 대한 회한이 서린,
배경음악마저 음산하던 동굴!
이 동굴은 시련에 굴복한 실패자들이
자신의 기록을 들추어 실마리를 얻고
후대에서 실패를 극복하길 바라며 잠든,
은밀한 희망도 품은 공간이었음.
그렇다, 누가 봐도 켄리아의 복제다.
아직까지 그 역사나 설정이 안 풀려
많은 부분들이 불분명하지만,
켄리아는 일곱신 체계를 부수고자
심연에 접촉하여 대가를 치른 망국,
셀레스티아에게 패망한 문명이지.
주인공 쌍둥이가 해결할 시련에
먼저 도전했지만 꺾인 곳이었음.
정리하면, 개구리 용사 플로베르가
날다람쥐 공주 프룬을 구출하고,
(내 눈에는 오히려 플로베르가
코 꿰이는 걸로 보였다만 어쨋든)
'동굴의 실패자'의 염려를 뿌리치며
축복의 숲을 구원한 건
아이테르와 루미네의 미래임.
그 와중에도 흥미로운
진술이 계속 나왔는데,
제일 중요한 진술은 바로..
"이야기는 규칙에 따라
끝없이 반복되지만,
각 장에는 자신만의
길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신만의 길'..
그렇다, 실존적인 사유다.
어떻게 보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 철학 역시
약간씩 담은 문장이기도 한데,
뭐, 그보다는 실존주의가 짙음.
'이야기의 규칙'이 대략
세계의 법칙이자 [본질]이라면,
그럼에도 자신만의 길을
꿋꿋이 걷는 주인공은 [실존]이다.
실존주의 철학은 흔히 '나'를
세상에 피투한(던져진) 존재라 보며,
'나'는 미완에서 완성으로 나아가며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거꾸로
세상에 기투한다(던진다).
물론 미래를 알 수 없기에
불안한 방황이 거듭되지만,
그럼에도 걸음을 옮기라고 독려함.
시뮬랑카의 동굴 속 실패자인
낡은 날개의 개구리 시브레루스와
하염없이 수호자만 기다리다가
허망하게 실패한 시오아 공주는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나'가 아닌 다른 것에만 의존했으니
*비본래적인 인물이 되고 만 셈.
(*불안을 직시하지 않고
회피하는 실존을 의미함.
즉, 정진하길 포기한 인간.)
그래서 다시 따져보면,
하필 이 얘기가 '창조의 여신'의
구역에서 펼쳐진 건 정말 공교로움.
많은 유저들이 원신 티바트 편을
순애근친 현관합체의 아름다운
쌍둥이 남매의 상봉이 목적인 줄로
착각하고들 계시던데, 틀렸다.
티바트 편 서사 속 주인공의
진정한 임무는 진주의 노래,
그러니까 기원의 노래가 말해주는데,
바로 ‘티바트의 창조 원리의 탐색’임.
"한때, 하늘엔 영광의 왕국이 있었어.
그 나라의 왕은 첫째 왕녀를 보내
어둠의 나라(티바트)로 가서
창세의 진주를 찾아오도록 했지."
여기서 언급한 창세의 진주가
바로 아이테르의 임무 대상임.
이후의 노랫말까지 들어보면
스스로를 어둠의 나라의
여왕이라고 착각한 공주를
찾아나서는 건 언급조차 안 되고,
(물론 그런다고 안 찾는 건 아니어야지.)
뒤늦게 출발한 둘째 왕자께서
칠흑에 물든 조개 속 진주를
찾으러 떠난다고 한다.
각종 신화나 전설에서 '진주'는
조개 속에 숨은 비밀을 뜻하며,
아이테르는 티바트 창세의 진주,
즉 티바트가 형성된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 주임무라는 것.
그런데 하필 그 임무의 완성을
본뜬 이벤트 서사가 창조의 여신인
마녀 앨리스의 공간에 놓이다니..
내게는 아주 의미심장했음.
앨리스는 티바트의 비밀에 대해,
특히 언어의 신비에 통달한 마녀지.
마녀회 인물들은 하나같이
막강한 존재인 모양인데, 정말 기대됨.
자, 그럼 다음 지역인 별길 왕성은
뭘 복제해서 시뮬라크르를 빚을까?
크게 두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백성들의 운명이고,
다른 하나는 이 운명에의
반격수단이라고 할 수 있음.
시뮬랑카의 주민들은
종이 동물과 블록인형이지?
근데 이 주민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는지 기억함?
축복의 숲 주민인 종이 동물들은
각자 종이에 쓰인 내용이
서사적인 운명으로 주어졌지.
가령, '동굴의 실패자'들은 이미
퇴색증을 거쳐 외형마저 잃고는
원고지로 돌아간 상태였지.
그리고 별길 왕성의 블록인형은
살점은 블록이나, 뼈대는 태엽임.
말할 것도 없이 이 태엽은
정해진 구동 방식으로만 움직이고,
애초에 삶의 길이 미리 정해진다고 했음.
즉, 시뮬랑카의 주민들은
모두 '정해진 규칙' 등으로
'정해진 운명'만을 따른다.
..근데 정말로 그렇던가?
예언의 여신이 선물했다는
블록인형의 '선물받은 태엽'은,
얼핏 보기에는 시간을
되감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저 이전 행적을 되풀이할 뿐임.
그럼에도 '선물받은 태엽' 덕분에
블록인형들은 이전의 실수를
얼마든지 만회할 기회가 주어짐.
(*폰타인의 대홍수는 푸리나의 신좌를
오페라 하우스의 피고석과 맞바꿔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음.)
달리 말하면 미래가 결정되어
정해진 운명을 못 피한다는
운명론이나, 과학적 근거까지
제시하는 결정론에의 반격수단임.
예언의 여신이라면 보통
정해진 운명을 미리 알려도
그 운명이 틀어지지 않게 하는데,
오히려 운명을 바꿀 선물까지 준 셈.
라이덴 마코토의 시간 역행까지
감안하면, 최종 결전에 나설
우리에게 이는 중요한 힌트임.
폰타인에서도 봤듯이 운명론은
마지막까지 우릴 괴롭힐 텐데,
그걸 뒤집을 수 있다는 얘기니까.
이로 말미암아 별길 왕성은
결국 티바트의 비극적인 운명에
두가지 해답을 내고 있었음.
먼저 살필 건 나비아와의 모험,
뭇별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놔
블록인형 보수파의 반대도 무릅쓰고
별하늘의 운행을 정상화했지.
이때, 보수파가 반대한 이유는
예언의 여신이 '선물 태엽'을
거둘 것에 대한 불안감이었고,
더이상 미래에의 예언이 없던 게
이 불안감을 증폭시켰음.
여기서 나비아의 방어논리는
실존주의로써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걸 답으로 내세웠지.
월드 임무에서 키라라를 따라
블록인형 삼총사와 함께
별길 왕성의 문명을 이룬
세 가문의 시초를 추적한 것도
주제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음.
내레이션으로 나온 탐정,
그리고 주석으로 나온 운명의 여신,
즉 안데르스도테르의 메아리는
[진실과 거짓]의 이원론을
역전시키며 허물고 있었지.
들뢰즈가 시뮬라크르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를 뒤집었듯이,
주석인 운명의 여신은 동화세계에서
현실세계로의 역류를 긍정함.
티바트에서 '허구 속 진실'은
간접적이지만 꾸준히 등장했음.
특히 불교적인 사유와 함께
그 대변자인 호두, 요이미야 등의
전설임무에서 중요하게 다뤄졌고.
'거짓 안에서도 진실을 찾을 수 있다.'
이게 두 인물의 핵심 주제임.
호두의 경우에는 저승과
이승 사이 경계 속 윤회의 동굴,
요이미야는 거짓 섞인 동심과
현실적인 좌절 사이를 다뤘지.
그리고 별길 왕성은 위 구상을
동화적인 설정으로 푼 셈임.
다만, 별길 왕성에서 뭇별이
낙하한 사건 자체는 아마
1.1 버전의 이벤트와 관련있을 듯.
무려 2020년 11월에 출시된
이벤트는
몬드 근방에 어느 산악 탐험가의
운명의 별자리가 떨어진 사건임.
당시까지 스카라무슈이던 방랑자는
티바트의 별하늘이 거짓임을
우리에게까지 친절히 알리며
영지주의적 서사기반을 암시했지.
그러니 별길 왕성 서사의 마지막에
별하늘로 유성을 되돌려 놓은 일은
아마 운명의 별자리의 복구겠지.
단, 주의할 게 하나 있음.
어쩌면 별길 왕성의 하늘은
'티바트의 거짓된 하늘'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고 보임.
낙하한 별을 기껏 원래대로 놓아
별하늘의 운행을 정상화하는데
굳이 거짓 하늘에 또 박는다고?
어쩌면 별길 왕성의 하늘은,
축복의 숲 이후의 서사인 만큼
티바트의 문제가 해결된 뒤,
쌍둥이 남매가 티바트 주민들과
함께 개벽한 '진정한 하늘'일 수 있음.
(*덧붙여, 콧수염만 단 나비아는
솔직히 가능성이 아주 낮지만
진주의 노래 속 국왕일 수 있겠고.)
마지막으로, 본 게시글의 주제와는
거리가 있어서 여담이지만,
블록인형 삼총사의 가문 얘기는
티바트의 '셋의 구도'와 비슷함.
몬드, 리월의 건국신들은
각각 세 인물들로 이뤄졌고,
옛 수메르도 평탄한 외교관계를
세 명의 마신으로써 유지했지.
최근에는 폰타인의 삼위일체도 있다고?
자, 이제 슬슬 끝낼 때임.
'부서진 바다'에서 방랑자 일행이
두린을 사면하며 축복한 일,
그리고 시뮬랑카 바깥으로
떠난 모험가들이 복귀한 건
뭘 복제한 이야기일까?
사실 시뮬랑카에서 벌어진
모든 일은 거의 '미래'였음.
축복의 숲의 플로베르와
프룬의 모험 성공기도 그렇고,
별길 왕성에서 별하늘을
정상으로 되돌린 일도 그런데,
하나같이 티바트에서 없던 일들이지.
다만, 시뮬랑카의 전체적인
맵 구성은 얘기가 좀 다른데..
가령, 숲의 요정인 닐루는
티바트의 선령 종족 출신인
꽃의 마신, 화신을 모티브로
삼은 인물인 만큼, 축복의 숲이
티바트의 선사시대라 할 수 있고,
별길 왕성을 역사시대라고 보면,
부서진 바다는 아마 티바트의
서사로서의 종말점이겠지?
그러니 부서진 바다의 이야기는
티바트 서사의 '찐막'일 것임.
티바트의 대결 구도는 이원론의
역전과 와해로 귀결되는 만큼,
먼저 두린의 사면과 축복부터가
티바트 이원론의 역전이었음.
티바트의 두린은 500년 전에
페보니우스 기사단과 드발린에게
이미 토벌당한 '악룡'이었지.
하지만 이름은 이름일 뿐이다.
악룡이라는 별칭부터가
언어의 악의적인 폭력임.
왜냐하면, 이름 자체에
가치판단까지 담아버려
그 대상에의 이해를 제한하니까.
가령, 라이덴의 신명인 바알세불은
현대의 레반트 지역 신화인
우가리트 신화 등에 등장하던
하늘의 신 바알이 그 기원임.
원래도 경외심을 사기도 하나
농경을 돕기도 하던 신인데,
이후로 유대교 등의 아브라함계
종교에서 배척하는 의미로
멸칭을 붙인 게 베알제붑 등의
마왕 이름으로 와전된 것이지.
말하자면 이름에서부터
저주를 담아버린 셈.
그러니 마지막에 블록 두린을
아기 두린으로 바꾼 축복은
'저주'를 푸는 해주의식이었겠고.
방랑자도 비슷한 처지였으나
스스로의 존재 말살까지 시도해
겨우 속죄할 기회만 얻었으니,
그가 시뮬랑카의 두린을 구한 건
결코 우연이라고 볼 수 없음.
결국 우인단과 심연교단은 물론,
우리와 적대한 존재들은
티바트의 결말에서 우리가
포용할 대상들이란 점임.
정리하면, 호요버스가 이런 서사를
그다지 매끄럽게 풀지 못하거나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 아쉬운데,
중요한 건 [선과 악]의 구분은
또 하나의 착각일 뿐이란 얘기임.
폰타인의 엘리나스도 두린처럼
라인도티르의 실수 중 하나였고,
우인단의 총괄인 피에로는 원래
켄리아의 충신이기도 했으며
심연교단의 침공 저지에 일조했음.
즉, 티바트에는 [선과 악]이 아닌,
입장의 차이만 존재하고 있었음.
특히 '아를레키노'는 전향한 게 아닌데도
전임자와 후임자가 서로 명칭을
달리하며 입장이 갈린 경우였다고.
어쩌면 이원론의 양극을 모두 포용한다는
니체 철학적인 사유라고도 볼 수 있겠네.
그리고 시뮬랑카를 떠난
모험가 주민들의 귀환 얘기..
솔직히 말해 나는 줄곧
티바트를 떠날 일만 생각했는데,
귀환하는 것도 자유로워짐을
체험한 덕분에 감회가 새로움.
어쩌면 티바트의 미래 역시
진정한 하늘이 열린 뒤에는
다른 세계와 왕래가 가능하겠지?
그 마지막 지점을 다름 아닌
시뮬랑카의 세 여신께서
축복하고 계시기도 했으니까.
그럼 에스노어가 우려한
티바트에서의 '가치' 얘기는 뭘까?
이건 다시 수메르에서 겪은
추리 소설 사본의 얘기로 돌아감.
여기서도 '차이'의 누적으로 인해
'가치'에 극적인 변화가 있었잖아?
즉, 에스노어가 우려하는 건
허구인 자신들이 현실에 나갔을 때,
시뮬랑카 주민인 본인들 입장에선
'가치'의 변화에 두려움이 든 거지.
보다 정확한 해설을 하자면,
우리는 장 보드리야르라는
현대철학자 한 명을 또 모셔야 함.
보드리야르도 시뮬라크르를 철학했지만,
현대사회의 소비 행태에 비추어
현대인이 생산하고 소비한 이미지,
즉 시뮬라크르에 가치가 더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원본인
'나 자신'을 복속시킬 것을 우려함.
ㅇㅇ, 들뢰즈랑은 좀 다르지?
그리고 이미지의 소비로 인해
마침내 '나 자신'에의 주관을 잃으면
자기 인식(Identity)마저 불가능해지지.
보드리야르는 이걸 '소외'라 불렀음.
한마디로 주객전도라는 얘기.
그러나, 우리의 비상식량께서
누가 먹보 아니랄까 봐
친절하게 먹거리 얘기로
오해를 불식시켜주신다!
이 말을 듣고 에스노어도
안심이 좀 됐는지 말을 바꾸지.
자.. 그래서 시뮬랑카의
전체적인 내용 정리를 마쳤음.
이 동화세계에서 벌어진 일은
모두 티바트의 복제판이면서
동시에 예고편으로 보임.
마치 수메르 후일담의
시뮬라크르가 된 서적처럼
시뮬랑카는 티바트와는 다른
구상을 품은 '차이'의 세계이고
들뢰즈가 사유한 것과는 다르지만
어느정도 '반복' 또한 담고 있었지.
그의 철학처럼 시뮬랑카의 반복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의 발현이었음.
원본과의 비교가 무의미한
독립적인 사본이란 말이지.
내 생각엔 '차이와 반복'을 통해
새 의미를 부여받을 티바트가
마녀회의 세 여신을 통해서
시뮬랑카로부터 출발할 듯함.
내 경우에는 예전에도 해설한
많은 게시글에의 확신이 서서
개인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웠음.
시뮬랑카의 서사는 시뮬라크르로서
'앞으로의 티바트'를 향해 내놓는
여러 세력의 해답을 예감시키는데,
마녀회의 이 은밀한 모의실험은
당연히 실험으로 그칠 게 아니겠지.
벌써부터 시뮬랑카는 영업종료하고
주민들이 티바트로 튀어나오겠다며
여기저기에 기웃거리고 있었잖아?
'자신만의 길'을 걷겠다는 [실존]이
동화로부터 영적인 앎(靈知)을 쫓는
[본질]에 편향하던 세계로 나온다니.
나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전쟁의 규칙'을 다룬다니까
슬슬 결전 이후 '보상'의 기준도
세울 거라는 예감이 드는 중.
그럼 이번 이벤트 후기도 끝~.
p.s. 혹시 내가 써놓은
다른 글들 보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이용하면 됨.
https://m.ruliweb.com/game/85342/read/23474
요건 각종 유래, 모티브 관련 글,
https://m.ruliweb.com/game/85342/read/27930
요건 이번 게시글 같은
각종 서사해설 글 모은 거임.
반디집
2024/08/07 01:18
원신으로 논문 쓰는 유게이다
갤럭시프라이드치킨
2024/08/07 01:21
맞다 생각해보니 두린 떡밥도 있었지
그냥 마녀회의 여흥같은 건줄 알았는데
생각외로 많은 떡밥을 남긴 이벤트였다고 생각함 ㅇㅇ..
펀치기사
2024/08/07 01:21
으윽.... 아직 3장 초입이라 읽을 수 없는 내가 밉다...
이런 해석글은 그저 무지성 개추
굳건이
2024/08/07 01:24
카놀레라가 보던 계시의 책에 나온 멸망한 티바트가
원래 역사일려나
리월행은 설산루트로
2024/08/07 01:28
폰타인 월드 임무 말하는 거지?
시뮬랑카에서는 그 [원본과 사본]의
구분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보는 셈이니,
결국 계시의 책도 다시 쓰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