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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칼부림의 각색 : 호호리가 죽은 시기.jpg

제가 방금 전에 올린글이 베글가서 추하지만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추천 주면 감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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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칼부림』은 1623년 인조반정을 시작으로 하여, 17세기 초중반 격동기의 조선- 그를 넘어 명과 후금등 동아시아권 일대를 무대로 기구한 사연과 운명을 지닌 주인공 '함이'의 길을 조명하는 사극 서사시이다. 역사적 이야기에 어울리는 유려한 그림체와 고일권 작가의 탁월한 연출, 서사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절묘하게 맞물린 본 작품은 첫 연재로부터 11년여에 가가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당시 시대와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필자 역시 본 작품의 팬이고, 그렇기에 해당 작품의 장면을 역사 글을 작성할 때에 자주 이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칼부림이라는 작품을 본격적인 주제로 삼아 글을 적어 본 적이 적다. 정확하게는 글의 골자로 삼기보다는, 다른 주제로 글을 쓸 때에 곁가지 정도로 언급하는 정도에 그쳤다.

필자는 이를 기회로 삼아 작품에서 인상이 깊었던 각색을 주제로 하여 글 몇 개를 적어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로는 후금의 5대신(sunja amban), 호호리의 사망 연대의 각색이다.

호호리(hohori)는 안피양구(anfiyanggv, amba fiyanggv) 숑코로 바투루, 어이두(eidu) 바투루, 후르한(hvrhan) 다르한 히야, 피옹돈(fiongdon) 등과 함께 누르하치의 건주 통일 전쟁중 그에게 귀부한 그의 공신이자 인척이다. 동고부의 암반으로서 형 둔주로를 계승한 그는 1588년 누르하치의 세력의 건주내 영향력이 확연히 대두되고 통일이 가시화된 시점에서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누르하치에게 귀부했다. 본래 동고부와 누르하치의 닝구타 연맹 세력은 얼기 와르카의 죽음과 그로 인해 촉발된 전쟁으로 인해 원한이 심대했으나 호호리는 그 원한을 접고 세력의 안녕과 본인의 가문을 위해 누르하치에게 신속한 것이다.1

누르하치는 귀부한 호호리를 후히 대접하였고, 그에게 자신의 장녀를 시집 보내어 그를 자신의 어푸(efu, 부마)로 맞이했다.2 그것은 자신 역시 지난 원한을 해소하는데에 동의하고 호호리의 귀부를 받아들이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동시에 서열 관계를 확실히 한 것이다. 이로 인해 호호리는 흔히 동고 어푸(donggo efu, 동고 부마)로 호칭되는 동시에, 어푸 중의 으뜸이라는 의미로 대어푸(amba efu)로도 호칭되는 등 누르하치 내부 세력 관계도에서 그 입지가 확실해 졌다.3


호호리와 그의 동고부 세력은 누르하치 세력에 편입되었으며, 이후 호호리는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과 명을 상대로 한 전쟁등에 적극적으로 조력했다. 4비록 후금 건국 이후 누르하치의 버일러, 왕족 중심 국정 운영에 의하여 호호리를 비롯한 오대신들의 권한과 역할 자체는 축소 수순을 밟았다곤하지만5, 또한 버일러들과 기존의 암반들간 충돌에서 버일러가 우세를 점유했다곤 하지만 호호리 자체를 누르하치가 완전히 숙청하거나 하진 않았다. 도리어 호호리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관직을 삭탈한 뒤 결국 다시 관직을 주어 임용하기도 했으며6 , 호호리 역시 그런 상황에서 죽기 몇 개월 전 까지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7

호호리 본인과 자식들이 누르하치의 심기를 거스르는 여러 잘못을 저지르거나 또는 자칫 가문 자체가 숙청될 수 있는 명분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8호호리는 누르하치에게 있어 여전히 자신의 구추(gvcu, 종사)와 같은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내부에 부족/혈연 기반 세력을 두고 있는 공신 암반을 숙청하는 것은 다소 꺼려지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누르하치는 그를 제거치 않았고, 가문 역시도 예우했다. 그런 그가 죽은 것은 1624년 8월 10일 이다.9 누르하치를 초기부터 따르던 다섯 공신 중에서는 가장 늦게 죽은 것이었지만, 누르하치보다는 빨리 죽은 것이었다.

이 때 누르하치는 호호리의 집에 직접 조문을 위해 행차하진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대리할 푸진들을 대신 보낸 뒤, 궁에 남아 홀로 통곡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나와 어깨를 맞대고 나의 구추로서 살던 대신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나의 뒤에 남아 나를 전송해 다오!-『만주실록』 권7, 천명 9년 8월 10일

자신과 함께 건주를 통일하고, 여진을 통일한 이들이 모두 자신보다 먼저 떠난 것에 대한 누르하치의 개인적인 감정의 표출이었다.

실제 역사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웹툰 『칼부림』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호호리는 본 작품에서 단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다. 다만  몇 번 간접적인 언급(5대신, 순자 암반)등으로 언급이 되거나, 아니면 이름만 등장할 뿐이다.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칼부림 4부 24화이다. 이 때 누르하치는 대아문(大衙門)10에서의 의정 회의에서 버일러들의 대명(對明) 전략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면서 마뜩치 않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회의가 끝난 뒤 누르하치는 버일러들을 '하나같이 답답한 놈들'이라고 지칭하며 무엇이 되었든 자신의 일을 빨리 끝내고 싶다고 읊조리며 걸음을 옮긴다.

그러던 순간, 누르하치에게 '총병관이자 한의 어푸인 호호리 장군이 병환으로 오늘 아침 숨을 거두었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누르하치는 얼굴에 음영을 드리우며 보고를 올려온 이를 물리고, 이 직후 호호리의 죽음으로 자신을 호종하던 순자 암반이 모두 이승을 떠났음을 실감하며 뒤늦게 충격으로 쓰러진다.

뒤에서 자신을 호위하던 함이에게 부축을 받던 누르하치는 눈물을 흘리며 "나의 벗들이 모두 떠났구나! 거병할 때부터 함께 했던 나의 충성스런 구추들이...! 야속한 자들아! 이 늙은이만 남기고 모두 가버리느냐! 너희 중 누구라도 남아서 나를 먼저 보내줬어야지!! 그러고도 개국공신이고 충신이더냐!" 라며 자신의 슬픔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함이에게 자신의 '한으로서의 모습' 이 아닌 '인간 누르하치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야속한 자들.PNG

 

 


누르하치 20.PNG

 

 



웹툰 『칼부림』 4부 24화 中
 
 
작중에서 해당 일이 일어난 정확한 시기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최소 1625년 1월 이후의 일임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미 칼부림 4부 18화에서 당시의 시점이 1625년 1월임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즉 그로부터 최소 몇 개월 이상의 시간이 경과한 것으로 보이는 4부 24화는 그보다 뒤의 시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11 

이 부분에서 실제 역사를 상기해 보자. 앞서 언급했듯 실제의 호호리는 1624년 8월에 죽었음이 기록으로 확실하게 명시된다. 그러나 작중에서는 그보다 오래 생존하여 1625년, 작품의 주인공 함이가 바야라(bayara, 호군)가 된 이후에야 숨을 거둔다. 고일권 작가가 실록에 기술된 누르하치의 호호리의 죽음에 대한 절망을 웹툰의 대사로 녹여내어 오마주한 만큼, 이는 의도적인 각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에서 호호리의 생존연대를 몇 개월 정도 연장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누르하치를 보는 함이의 시각에 변화와 요동을 주기 위함일 터다. 

당시까지 함이는 누르하치를 만난 이래로 그의 인간적 면모를 본 경험이 적다. 물론 첫 대면에서 자신을 시험한 뒤 이어 장난을 겸하여 자신을 주먹으로 툭 치는 모습에서 그의 인간적 면모를 약간은 접했을 수 있을 터지만 고작 그것으로는 인간 누르하치라는 존재를 명확히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도리어 누르하치에게 복수와 관련해 계도받고, 그에 의해 다시 손에 부러진 검이 쥐어쥐며, 새로이 벼려진 함이에게 있어 누르하치는 신봉의 존재로까지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호호리의 죽음에 그와 같이 사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절망하고 슬퍼하는 누르하치를 보았다. 그것도 바로 자신의 코 앞에서. 자신에게 부축을 받으며 그리 외치는 누르하치를 보았다. 그러한 누르하치의 면모, 인간관계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는 인간으로서의 면모는 산해관 너머에 존재하는 복수 그 이상을 바라보려하며 함이에게 자신을 지켜보라고 한 누르하치의 이색적 면모이다. 함이는 그런 누르하치의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누르하치) 역시도 자신과 같이 감정과 사적인 인간관계에 묶인 한 인간임을 인식하거나, 또는 최소한 인식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식된다.

함이 혼자만이 누르하치의 이런 모습에 영향을 받았을까. 작품외적 시선에서, 작품을 보는 독자들 역시도 누르하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았다. 강력한 군주, 격변기에서 태어났으면서 스스로 또 다른 격변을 일으킨 전사, 호전적이며 교활한 여진의 한과 같은 면모는 4부 24화 이전까지도 '칼부림'이라는 작품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사적인 관계에 대한 감정표출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의 인간적 면모 역시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4부 24화의 본 장면은 독자들에게 누르하치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며, 그의 입체성을 부각했다. 그로서 독자들로 하여금 누르하치라는 등장인물에 대해 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호호리의 말년 행적은 거시적인 역사적 흐름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가 실제 역사보다 몇 개월 뒤에 죽는다 하여 역사적 흐름에 큰 영향을 주거나 하진 않았다. 실제로 작품에서의 호호리의 영향력은 전무하다. 하지만 '함이'라는 한 인간에게는 그의 죽음이 영향을 주었다. 그의 죽음을 들은 누르하치가 함이의 앞에서 처음으로 군주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보였고, 함이는 그것을 직시했다. 작품은 그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아래는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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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고부와 닝구타 연맹 세력간 전쟁 문제는 본글 참조 : https://bbs.ruliweb.com/etcs/board/300780/read/52220943
2.『만주실록』 권1, 무자년
3.『만문노당』 천명 6년 8월 12일, 9월 1일등.
4.『청사고』 권225 열전 12 호호리 열전, 『흠정팔기통지』 권264등.
5.유소맹, 『여진부락에서 만주국가로』, 이훈·이선애·김선민 역, 푸른역사, 2015, 289쪽.
6..『만문노당』 천명 8년 1월 27일, 3월 11일.
7.『만문노당』 천명 9년 정월 10일, 20알.
8.『만문노당』 천명 8년 7월 4일.
9.『만주실록』 권7, 천명 9년 8월 10일.
10. 청 건국 이후 흔히 대정전(大政殿)이라고 호칭된다.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018, 163쪽.
11.심양이 후금의 수도로서 기능하고 대정전이 건립된 것을 통해 1625년 8월 이후로 시기를 특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심양이 수도가 된 시점 역시도 칼부림 내에서는 실제 역사와 다르게 보다 앞당겨 졌고 그로서 칼부림 작품 내의 대정전의 건립 시기 역시도 불명확하며, 그렇기에 확실한 근거로 삼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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