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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악당과 악당의 거래

도둑 장인은 흔치 않다.

죄다 경찰에 잡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사고 15년인 그는 장인이라고 할만했다. 
그는 어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재벌가를 털었다. 그 도둑질을 끝내면서 그는 은퇴를 결심했다. 

한데 하필 마지막에 덜미를 붙잡힐 줄이야? 
오늘 그를 찾아온 형사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 도둑질 솜씨가 정말 훌륭하더군. 아마 내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널 잡을 수 없었을 거야. "

그는 절망했다. 역시 악당에게 좋은 은퇴란 없는 것일까.
한데?

" 교도소를 피할 방법이 있는데, 어때? "
" 예? 그게 무슨.. "
" 네가 어제 훔쳐간 모든 것을 내놓고, 어떻게 훔쳤는지 모든 과정을 상세하게 적어줘. 그러면 내가 다른 사람이 저지른 것으로 해주지. "
" 예에?! "

형사는 선심 쓰는 듯이 말했지만, 그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왜? 왜 그런 짓을 해주지? 

" 어째서...? "
" 아무런 조건이 없어. 그냥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거라는 것만 알면 돼. "

그는 긴장하며 집중했다. 아마추어같이 쉽게 넘어가선 안 된다. 혹시 증거가 없어서 떠보는 것일 수도 있었다.

" 제가 왜 형사님 말씀을 들어야 하죠? "
" 뭐라? 허 참! 그럼 잡혀갈 건가? "
" 증거는 있으세요? "
" 당연히 있지! 지금 이 집을 수색만 해도 수두룩하게 나올 텐데? "
" 글쎄요? 여기 있을까요? 영장은요? "

그는 잔뜩 경계하며 형사의 말에 하나하나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조금 화가 오른 듯한 형사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목소리를 낮췄다.

" 좋아, 내 솔직하게 얘기하지. 내가 원하는 건 자네의 알리바이야. "
" ...뭔 소리예요? "
"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누군가가 어젯밤 살인을 저질렀어. "
" ?! "
" 경찰 수사가 들어간다면 아마도 그는 잡힐 거야. 하지만 말이야, 만약 그가 어젯밤에 누군가의 집을 털고 있었다면? "
" 아! "
" 그는 자네에게서 받은 장물을 들고 오늘 자수할 거야. 그렇게 되면 그는 '어젯밤'에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생기는 거야. 살인할 시간이 없지! 살인보다는 도둑질이 낫잖아? 게다가 양심의 가책을 들먹이며 자수한다면 도둑질도 어느 정도는 정상참작이 될 거야. 어때? 이제 이해하겠나? 내가 왜 자네를 도와주려고 하는지? "
" 허 "

그는 감탄했다. 확실히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경계를 완전히 풀 순 없었다.

" 그 누군가가 누군데요? "
" 그건 말해줄 수 없어. 다만, 내가 이 정도까지 해야 할 정도의 집안이라고만 알아 둬. "
" ...죽은 사람은요? "
" ...이래도 될 정도인 집안의 여자. "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 햐. 돈이란 게 정말 대단하긴 대단하네요. 있는집안 인간들은 사람을 죽여도 빠져나갈 길이 있군요. 죽은 여자만 불쌍하게 됐네. "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 말대로 할 거지?! "

그는 고민했다. 형사의 말이 사실이라고 치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나 15년 무사고의 도둑 장인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정말 뜻밖의 말을 꺼냈다.

" 그냥은 안 돼요. 돈을 주면 내 도둑질을 팔게요. "
" 뭐라고?? "

형사는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가 분노했다.

" 미친! 지금 네가 그런 말을 할 처지라고 생각하나?! "
"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왠지 그 누군가가 지금 굉장히 급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안 그래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급하게 저를 찾아와서 매달리실까. "
" 미친...! "

형사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지만, 그의 얼굴은 느긋했다. 
그 얼굴을 노려보던 형사는 곧 포기하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 거참! 도둑질을 팔겠다는 건 살다 살다 처음 듣네. 좋아! 얼마를 원하나? "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 형사님까지 움직여서 이럴 정도면 정말 대단한 집안의 분이시겠죠? "
" 이봐! "
" 그렇다고 너무 큰 돈을 요구했다가는 형사님께 죄송하니까... 제가 훔친 장물에서 골드바만 가질게요. "
" 뭣?! 그건 안 돼! 장물이 있어야 자수를 하지! "
" 골드바 몇십 개 정도는 그쪽에서 만들 수도 있잖아요? "
" 그건...! "
" 그 정도는 되는 집안일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사람을 죽이고도 이렇게 피해가지. "
" ... "

형사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상의를 해야겠다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 좋아. 골드바는 모두 가져. 나머지 장물을 모두 넘기고, 도둑질을 어떻게 했는지 아주 상세하게 모든 과정을 적어 줘. 조금도 틀림이 있어선 안 돼! 알리바이로 써야 하니까. "

그는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 걱정하지 마세요! 저의 어젯밤을 통째로 들어내 드릴 테니까! "

.
.
.

재산을 정리한 그는 밀항선을 타고 해외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어차피 그날 밤 은퇴를 결심하면서 정해진 일정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에서는 지금 떠들썩한 사건에 대해 사회자들이 토론하고 있었다.

[ 이번 사건이 참 논란입니다. 일의 순서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 거죠? ]
[ 예 그러니까 일의 순서로 보자면, 'ㅁㅁ기업'의 차남 최무정 씨가 경찰에 자수했습니다. 술에 취해 자산가 '김 모 씨'의 집을 털었다는 얘기였는데요, 경찰 조사결과 모든 증거와 상황이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경찰은 다음날 바로 자수를 한 점과 몹시 반성하고 있는 점을 들어 정상참작을 해주려고 했습니다. 문제는, 자산가 '김 모 씨'의 방 침대 밑에서 '김 모 씨'의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겁니다. 사망추정 시각을 생각해보면 최무정 씨가 도둑질 도중 들켜서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최무정 씨는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지만, 증거와 알리바이는 모두 최무정 씨를 가리키고-. . . ]
댓글
  • 복날은간다 2017/09/24 14:15

    이번 이야기는 그래도 읽기 쉽고 가볍지요?;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남은 주말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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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닉넴이음슴 2017/09/24 14:26

    첫추천!
    재미있어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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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거지요정 2017/09/24 16:25

    살인을 저지른 것까지 통째로 넘겨준다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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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남해 2017/09/24 16:35

    재밌어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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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닉결정장애 2017/09/24 16:57

    살해당한 자산가 김 씨가 김남우씨 인거죠?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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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_v) 2017/09/24 18:37

    거짓말 사냥꾼 바쿠(도박마 라는 제목으로도 있는걸로 알고있습니다)에 약간 비슷한 소재가 나옵니다 하루의 알리바이를 걸고 내기해서 이긴사람은 알리바이를 이용해 빠져나가고, 진사람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간다는.... 복날님글과는 아예 다른내용이긴 하지만 알리바이를 놓고 서로 속고 속인다는 점에서 둘다 재미있네요^^나중에 시간되심 한번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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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우걸 2017/09/24 18:50

    재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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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작나무주작 2017/09/24 19:44

    와... 씨...도둑질이 아니라 사기꾼을 했어야 햇네! 조 노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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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oNpl 2017/09/25 01:16

    이해가 안되요 ㅠㅠ
    도둑이 살인까지 했다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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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날은간다 2017/09/25 01:56

    앗 조금 불친절 했나요! 죽은 사람이 두 명이 나와서 헷갈릴 수도 있겠네요. 좀 더 명확하게 표현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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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venteen 2017/09/25 04:13

    근데 경찰이 처음 도둑 신고받고 김모씨 집에 갔을 때 범인 흔적 찾느라 이미 집을 조사했을텐데 고작 침대 밑에 있는 시체를 몰랐을까요? 큰 저택일테니 눈에 잘 안띌  곳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사실 경찰이 최무정의 살해를 덮어줄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명을 씌우려는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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