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은 내가 그린 조선군)
참고로 3줄요약 있으니까 읽기 귀찮은 사람은 맨 밑으로 가도 됨.
개인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차라리 좋았으면 좋았지 나쁘게 생각하진 않는데, 그와 별개로 전쟁에서 보여준 임팩트는 전 왕조들에 비해 크지 않은 것도 사실임.
물론 이순신 장군이 일방적으로 일본 수군을 갈아마신 사례, 조선군이 쪽도 못 쓰고 털렸다는 인식이 강한 병자호란 때 전투들을 청나라 측 기록과 교차검증해보면 의외로 대단히 선전했음을 알 수 있는 사례 등등
'일반적인 대중의 인식' 보다는 상당히 선전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무려 중국 통일제국의 주력부대 수십만~백만을 몇 번이나 갈아마신 고구려-수나라 전쟁, 고구려-당나라 전쟁이나 한반도 국가 중 최약체였던 신라가 당대 세계 최강국을 이겨낸 나당전쟁, 동아시아의 판도를 뒤집은 여요전쟁 등
이전 왕조들이 보여준 군사적 업적에 비하면 다소 임팩트가 부족한 것은 사실임.
이순신 장군은 선조가 갈궈댄 거 때문에 조선이 잘났다기보다는 이순신이 잘난 거라는 이미지가 강하고(이순신 장군의 대활약에는 조선의 시스템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이미지는 그렇지),
병자호란도 몇몇 전투는 잘 싸웠을지 몰라도 결과가 대폭망인데다 조선 이전에 쳐들어왔던 '중국 통일제국', '발해와 송나라를 모두 제압한 군사 강국 거란' 같은 친구들에 비하면 아무래도 북경 입성도 못한 청나라는 좀 약체라는 이미지도 있고 그래서 말이지
근데 그렇다면 왜 조선군의 전적이 유독 이전 왕조들에 비해서 안 좋을까?
여기에 대한 내 개인적인 생각은
'부적절한 실전경험' 임.
이렇게 얘기하면 바로 들어오는 말이
"역시 역알못이었구나! 을묘왜변과 니탕개의 난도 모르고 실전경험 운운하는걸 보니! 임진왜란은 예상 이상의 규모가 상륙한 탓에 초반에 졸전했을 뿐이지 조선은 나름대로 대비를 했으며 병자호란은 블라블라" 가 시작되는데
물론 이 말도 맞는 말이지만 내 말은 '실전경험이 없어서 실전경험 풍부한 일본군, 청군에게 밀렸다' 가 아니라
'조선군이 쌓아온 실전경험이 부적절했다' 에 가까움.
을묘왜변 당시 왜구들은 분명 화약무기를 사용하고 깃발로 신호를 보내는 등 정규군과 유사한 수준의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고, 머릿수도 수천 명이나 되었지만
그냥 해적떼치고는 제법 조직을 잘 짰다 수준이지 결국 진짜 정규군 수준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음.
그래서 을묘왜변 도중 왜구 1000명이 제주도를 공격한 적이 있는데,
이때 왜구의 10분의 1도 안 되는, 74명의 제주도 기병이 돌격하자 왜구들은 겁먹어서 그대로 방진이 무너졌고 74명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했음.
이 제주대첩이 하도 유명해서 그렇지 사실 을묘왜변의 주 전장이었던 전라도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꽤 있음 ㅇㅇ
이 영상 보면 초반에 니탕개의 난 당시 벌어졌던 종성 전투가 나오는데, 이때도 상황은 비슷했음.
여진족 수천 명이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가지고 고작 수백 명이 주둔 중인 조그마한 요새 하나를 못 뚫고 쩔쩔매는 동안 신립이 이끄는 정예 기병대가 들이받자 그대로 패주하는데,
종성 전투만 이랬던 것이 아니라 니탕개의 난 당시 벌어진 전투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전개됨.
즉 조선군이 임진왜란 이전까지 만난 적들은 다들 조선군보다 전투력이 매우 뒤떨어지는 약탈자 집단, 즉 허접들뿐이었다는 거고,
얘네를 상대로는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아 왔지만 막상 정규 군대를 마주하자 이때까지 쌓아온 실전경험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임.
흔히 군대에게 실전경험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 다들 그러는데, 정확히는 전쟁이 터졌을 때 이전에 경험한 전쟁과 유사한 조건이 갖춰져야 그 실전경험이 유의미한 것이지
조건이 아예 다른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냥 아예 경험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님.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
현대에는 멍청하다고 비판받지만 얘네라고 뭐 아무 생각 없이 이걸 했던 게 아님. 얘네도 중일전쟁에서 풍부한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전술을 썼던 거임.
물론 화력이 훨씬 우월한 상대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전술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피로 피를 씻으며 새로 실전경험을 쌓아야 했음.
저때 일본군이라고 "야 중국군이랑 미군이 같냐? 전술 수정해야함" 이라고 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거따 대고 "너 실전에서 싸워봤냐? 나는 직접 총 들고 싸워보고 이야기하는 건데?" 라고 반박하면 뭐 솔직히 할 말이 없었을걸?
우러전 초기 러시아군의 대졸전?
러시아군은 분명 시리아에서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아 왔음.
하지만 시리아에서 경험한 실전은 정규군보다 훨씬 화력이 떨어지는 소규모 민병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편성한 군대로 대규모 정규군인 우크라이나군과 싸우니까
'높은 기동력' 이라는 장점은 사라지고 '떨어지는 체급과 화력' 이라는 단점만 부각되면서 전략적 목표를 거의 달성하지 못하는 추태를 보여야만 했음.
(이거도 내가 그린 조선군 정확히는 부산진성 전투 당시 전사한 정발 장군을 그린 건데 여기도 올린적 있음)
즉 조선군은 '실전경험이 없어서' 졸전을 한 것이 아니라
'실전경험 한번 쌓고 나면 이 경험이 이후의 전쟁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아서' 졸전을 했다는 거 ㅇㅇ
이건 병자호란도 마찬가지인데,
'보병 위주 정규군' 인 일본군을 상대로 실전경험을 무지하게 쌓고 그에 맞춰서 시스템도 쫙 개편해 놨더니
정작 그 다음 쳐들어온 적은 '기병 위주 정규군' 인 청군이었기 때문임.
게다가 일본군은 화약무기라고 해봐야 조총 정도였고, 대포도 서양 상인으로부터 사온거 몇 문에 조선군으로부터 노획한 거 몇 개 정도여서 대포의 화력이 큰 위협은 되지 않았는데
청군은 조선 대포보다 고성능인 홍이포로 무장한 터라 이쪽으로도 전혀 달랐음.
그나마 사르후 전투 당시 생존한 장병들이 꽤 있었다면 그 사람들로부터 데이터를 좀 확보할 수도 있었을 수도 있는데 이거는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생존자들도 대부분 포로로 잡혀가는 바람에 뭐...
현대 스포츠로 비유하자면 씨름판에서 실전경험 풍부한 선수를 킥복싱 시합에 내보내더니, 그 이후로는 MMA 경기에 내보낸 격인데
이걸 보고 '씨름으로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았으니 킥복싱, MMA도 잘하겠지?' 라고 할 수는 없는 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럼
이 점에서 고려의 대승으로 끝난 여요전쟁과 조선이 처한 상황이 정말 180도 달랐다고 할 수 있음.
일단 '서희의 외교 담판' 으로 유명한 거란의 1차 침입이 있는데,
요새는 소손녕이 진지하게 고려를 잡아먹으려고 한 것은 아니고 그냥 블러핑 한번 쳐봤고 그걸 간파한 서희가 말빨로 물리쳤다는 게 너무 유명해서 이 1차 침입이 가볍게 여겨지는 느낌이 좀 있는데
중요한 것은 '거란이 싸움까지 해가며 고려 영토를 침공했다' 는 사실 그 자체임.
이거 때문에 고려 정부는 거란과의 전면전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국왕부터 말단 신하까지 모두 몸으로 직접 체감할 수 있었으니까.
본격적인 거란의 침략은 사실상 2차 침입부터인데, 이때는 소손녕의 블러핑으로부터 10년도 훨씬 지난 시점이었고 실제로 고려군은 '대규모 기병대를 대상으로 한 실전' 에 대비를 꽤 해놓은 상태였음.
뭐 강조가 통주 전투에서 군대 30만을 가지고 패배하는 바람에 그 준비가 좀 빛이 바래긴 했지만....
중요한 건 전쟁이 벌어지니까 철저히 보병이 기병을 상대하는 데에 특화된 장비인 검차로 무장한 병력이 30만 명이나 동원이 가능했다는 거임.
이 30만이 정확한 수치인지 아닌지는 뭐 갑론을박이 많지만 그건 이 글의 주제와 큰 상관은 없으니 적당히 넘어가고
설사 뻥이 섞인 수치라고는 해도 그 뻥의 단위가 30만이라면 일단 어마어마한 숫자가 동원된 거 자체는 사실이니까 ㅇㅇ
그리고 대망의 귀주대첩이 있는데,
귀주대첩이 벌어진 거란의 3차 침입은 흔히 3차 침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거란이 잊을 만하면 쳐들어와서 실제 침입한 횟수로만 따지면 6차 침입이라고도 할 수 있었음 ㅇㅇ 그래서 요새는 6차 여요전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편
아무튼 중요한 건 귀주대첩 이전까지 고려군은 수십 년간 거란군과 실전경험을 끊임없이 쌓았다는 거임.
지난 수십 년간 아웅다웅하며 싸웠던 적을 상대로 야전을 걸어본 게 귀주대첩이었고, 그게 성공했다는 거지.
(내가 그린 고려군 다크-귀쟁이. 이거도 여기 올렸었음)
즉 고려의 빛나는 승리로 끝난 여요전쟁은
고려가 '거란과의 전면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는 상황을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기 10년도 더 전부터 인식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2차 침입이 벌어졌고,
현종의 기적적인 나주런 성공 + 양규의 대활약으로 2차 침입이 마무리된 이후로도 수십 년간 끊임없이 '거란군과의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그 결실을 맺은 것이 '귀주대첩' 이었던 거임.
고려군이라고 무슨 아무 준비 없이, 경험도 없는데 난데없이 조선군보다 잘 싸웠던 게 아니라는 거.
물론 그렇다고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 대처가 적절했던 것도 아니고, 여요전쟁 당시 고려의 전적을 비하할 필요도 없음. 다만 두 나라가 처한 상황이 아예 달랐다는 건 분명 짚어볼 지점이 있다고 생각함 ㅇㅇ
3줄요약
1. 흔히 군대는 실전경험이 짱이라고 하는데 실전경험도 경험 나름이지 기존에 겪어본 전쟁과 전혀 다른 조건에서 벌어진 전쟁에서는 실전경험이 큰 도움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
2. 조선군 역시 실전경험이 없는 군대는 아니었지만, 전쟁만 났다 하면 이전에 만나본 적과 전혀 다른 놈들을 상대해야 했던 탓에 실전경험이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3. 빛나는 승리로 끝난 고려-거란 전쟁 역시 '대규모 전면전이 벌어질 수 있다' 는 점을 고려 정부에서 명확하게 인식했고, 이후 수십 년간 거란군 하나만을 상대로 한 실전경험을 쌓아왔기 때문에 귀주대첩이라는 역대급 승전으로 끝낼 수 있었던 것 ㅇㅇ
600년동안 안망했던 나라의 군대를 그냥 못싸웠다고 말할수 있나?
루리웹-3096984951
2024/06/24 18:38
600년동안 안망했던 나라의 군대를 그냥 못싸웠다고 말할수 있나?
죄수번호-4151019490
2024/06/24 18:41
와 방상시탈! 원본은 푸근한 웃음인데 눈이 4개인게 인상이 강해서 조금만 만져주니 엄청 무서워지네
레이오트 C호크
2024/06/24 18:41
그래서 조선군은 그야말로 죽음의 이지선다에 제대로 갈려나간 군대라는 평이 있지요.
봉완미
2024/06/24 18:42
병자호란때도 "정묘호란의 경험"을 기반으로 전쟁을 준비하기는 했어.
문제점은 청군도 정묘호란의 경험을 기반으로 침공작전을 전면 재검토했었고 여기서 청군이 기존의 작전으로는 안되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정묘호란을 기준으로 전쟁 준비한 조선의 카운터를 쳐버린게 컸지.
기똥차네
2024/06/24 18:42
왜란에 한정해서 이야기 하자면 . 대 여진특화 부대라 왜에 대한 정보및 전술이 완전 부제했으나, 여진족 대항 메뉴얼로 기고 만장하게 판금대에서 한타각을 너무 쎄게 잡아버린것 때문에 더 고생한것... 물론 시대가 길어지면서 군역의 기능이 무너져서 더 고생한것도 맞음
비얌Biyam
2024/06/24 18:45
본문에서도 언급했지만 탄금대 전투 이전에 만나본 왜구들이 하나같이 기병이 달려들기만 하면 방진 무너지는 오함지졸들이라 더 그랬던 것도 있을 거임...
어쩌면 신립은 일본군이 돌격하는 기병을 상대로 방진이 안 무너지는 걸 보면서 이미 아차 싶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