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살인자란 말입니까? "
" 그렇습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이 정도면 확실히 무서운 이야기 아닙니까? "
기름진 얼굴과 퉁퉁한 몸매, 수염이 덥수룩한 30대의 사내가 히죽 웃었다. 그의 말이 진짜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기분 나쁜 인상을 남긴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뭐, 애초에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씩 해보자는 얘기에서 나온 말이었으니, 미친 사람이라며 매도할 필요는 없었다.
이곳은 폭우가 쏟아지는 산속의 임시 대피소. 비를 피해 하룻밤을 보내야 할 4명의 타인은, 바닥에 모여 앉아 심심풀이로 무서운 이야기를 하기로 한 것이었다.
마른 체형에 눈이 날카로운, 야구모자를 쓴 30대 남자가 '수염남'을 향해 말했다.
" 믿고 말고를 떠나서, 성의 없는 이야기란 건 알겠습니다. 할만한 이야기가 참 없었나 봅니다. "
그는 수염남의 왼편에 앉아, 비에 젖은 가방을 정리 중인 상태였다.
수염남은 과장되게 손사래를 쳤다.
" 무슨 말씀을! 정말입니다! 1년 전 오늘, 저는 이 산에서 한 여자를 죽였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고, 여태껏 시체조차도 발견되지 않고 있지요. "
그러자, 맞은편 20대의 청년이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 쩝. 그런 사실을 이 자리에서 고백한단 말이죠?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사람들에게? "
" 그건 이유가 다 있습니다. 흐흐흐. "
손을 흔들며 기분 나쁘게 히죽거린 수염남은, 다른 셋을 둘러보며 말했다.
" 어떤 경우에도 저는 100% 안전하기 때문이지요. 지금만 봐도, 제 말을 진심으로 믿고 계신 사람이 이곳에 있습니까? 없지요? "
" 으음... "
" 내일 경찰에 신고라도 하실 분 계십니까? 아니면, 지금 당장 저를 비난하며 벌하실 분이라도 계십니까? 없지요? "
셋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수염남의 말대로 그럴 생각은 없었으니까.
다만, 이곳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던 30대의 단발머리 여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치고요. 지금 그 이야기를 해서 기쁘신가요? 좋아요? 막 희열이 올라오고 그래요? "
" 희열까지야 으하하하! 뭐, 솔직히 말하자면 나쁜 기분은 아닙니다. 일종의 해방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이야기였으니까 말입니다. "
수염남은 끝까지 자기주장을 밀고 갈 모양새인 듯했다.
가방 정리를 마친 '마른 남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 아무리 그래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군요. 그저 장난이라고 믿겠습니다. "
" 허허~ 참! "
수염남은 가슴을 치며 과장된 답답함을 표출하더니, 양 손목을 걷어 올리고 상체를 앞으로 숙여 본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 그럼 제가 1년 전의 일을 아주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처럼 등산이 취미인 사람입니다. 주로 혼자서 등산을 하곤 하는데, 그날도 오늘처럼 기상이 안 좋아서 산에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는 혼자 산을 전세 낸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어디선가 사람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겁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는 소리가 말입니다. "
다른 셋은 수염남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굳이 수작 부리지 말라며 이야기를 막기에는, 이곳에서 딱히 할 일도 없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밖으로 나갈 것도 아니고.
대피소 건물을 줄기차게 내려치는 거센 빗소리 덕분인지, 수염남의 이야기는 퍽 분위기가 살았다.
"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보니, 웬 여자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더군요. 아마 근처 경사에서 굴러버린 모양인데,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녀는 저를 발견하자마자 살려달라고 소리치더군요. 저는 황급히 다가갔고 곧, 우리가 구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누구였는지 상상이나 되십니까? "
수염남은 이야기를 멈추며 셋을 돌아보았다. 그 집중시키는 솜씨가 나쁘지 않았는지, 뿔테 안경 '청년'은 손에 든 초코바를 아까부터 뜯지 못하고 있었다.
수염남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 아나운서 홍혜화! "
" 홍혜화? 홍혜화...? "
" 아! 홍혜화라면 작년에 실종되었던 그-! "
각각 시간차는 있었지만, 사람들은 홍혜화의 정체를 눈치챘다. 1년 전에 갑자기 실종되어 현재까지 깜깜무소식인 공중파의 유명 아나운서였다.
꽤 화제성이 있었던 사건이었고, 그녀와 '스토커'를 연관 지은 특집방송이 편성되기도 했었다.
단발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 그러니까, 1년 전에 실종이 아니라 1년 전에 사망이었다고요? 범인이 아저씨고? "
" 딩동댕! 흐흐흐~ "
" ... "
수염남의 낮은 웃음소리는 단발녀의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마른 남자는 여전히 믿지 않는 듯, 놀랍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반면, 완전히 집중한듯한 청년은 다급하게 물었다.
" 어, 어떻게요? 왜? 뭣 때문에요? "
그를 돌아본 수염남은 씩 웃으며 다시 가다듬은 목소리로 사람들을 집중시켰다.
" 자, 들어보시길. 제가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다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상태로 방치된 지 꽤 된 듯했는데, 제가 돕지 않는다면 그대로 죽었을 운명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소리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
[ '불만 먹거리' 방송에서 왜 우리 가게를 공격했습니까? 몸에 나쁘지 않은 기름인 걸 알고도 일부러 조작한 이유가 뭡니까? ]
" 불만 먹거리? 불만 먹거리라면... "
" 예. 홍혜화 그녀가 MC로 있던 식당 고발 프로그램이었지요. 제가 10년간 운영하던 가게를 망하게 만든 그 프로그램 말입니다! 저는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왜 조작방송을 보내서 내 가게를 망하게 했냐고. 왜 정정보도를 해주지 않았냐고. 그때 그녀가 뭐라고 했을 것 같습니까? "
" ... "
" 자신은 그냥 방송국에서 시킨 대로 할 뿐이라며 살려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또 물었죠. 그럼 왜 제가 보낸 이메일을 무시했냐고, SNS는 왜 차단했고, 방송국에선 왜 한 마디 말을 들어주지도 않고 경비원을 불렀느냐고요. 그것도 방송국에서 시킨 대로 한 거냐고 말입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울며불며 애원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도 동정심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면...믿으실까요? 하지만 저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그녀를 그대로 두고 떠났습니다. 그때 폭우가 쏟아졌고, 저는 이 임시 대피소로 피했죠. 저기 저 벽에 돌로 긁은 흔적이 1년 전에 제가 그런 겁니다. "
모두의 시선이 한쪽 구석의 벽으로 향했다.
" 솔직히 비가 쏟아질 때 갈등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녀를 구하러 갈까 말까... "
벽의 흔적을 바라보는 수염남의 얼굴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이 굳었다.
청년은 침을 꿀꺽 삼키며,
" 그래서 아, 안 구한...? "
" 뭐 보시다시피? 안 구했죠. 하하하 "
피식 웃은 수염남은 청년에게 손을 내밀며,
" 혹시 초코바 남는 거 좀 있습니까? 배가 출출한데. "
" 아.. "
청년은 반사적으로 손에 든 초코바를 수염남에게 내밀었다.
" 어이구 감사. "
수염남은 초코바 비닐을 벗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투로 말했다.
" 다음날 비가 멈춘 뒤, 저는 다시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녀는 무너진 토양에 반쯤 묻힌 채로 죽어있더군요. 막상 그 모습을 보니까,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하하하하. "
" ... "
" 그런데 저는, 그녀를 감춰야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그녀가 사망한 산에서 제가 갔었단 사실이 밝혀지면? 제가 그녀가 하는 방송 때문에 피해를 봤었단 사실이 밝혀지면? 분명 귀찮아지겠죠. 그래서 저는 그녀를 아무도 모를 땅속에 묻었습니다. "
" ... "
수염남은 이야기를 끝냈다는 듯, 초코바를 한 입 베어 물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 설마, 그곳이 어딘지 묻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으하하하 "
" ... "
잠깐 할 말을 잃은 셋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마른남자는 무표정하게 변화가 없었고, 단발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청년은 진심으로 믿는 듯 심각한 표정이었다.
청년은 무언가 말을 할 듯 말 듯 한 입 모양이었는데, 그보다 먼저 마른남자가 입을 열었다.
" 이번엔 제가 무서운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까? "
셋의 시선이 마른남자에게로 향하고, 마른남자는 양손을 귀 근처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 빗소리를 잘 들어보십시오. "
" ...? "
" ? "
다른 셋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지만, 시키는 대로 소리에 집중했다.
' 두두두두두두둑- '
대피소를 거세게 두드리는 빗소리에 모두가 집중할 때, 마른남자가 낮게 물었다.
" 비닐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빗물이 비닐을 때려대는 소리 말입니다. "
셋은 미간을 찌푸렸다.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잘 들어보시면 들릴 겁니다. 이 대피소 뒤편에 있는 비닐 가방을 두드리는 소리가 말입니다. "
" 으음...? "
" 비닐 가방...? "
마른남자는 한순간, 빙긋 웃으며 말했다.
" 시체가 담겨있는 비닐 가방 말입니다. "
" ?! "
" 시, 시체?? "
셋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빗소리에 더 집중하게 되는 셋,
' 투두두둑투두두두두두- '
마른남자는 손을 써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 저는 흥신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처리해줍니다. "
" 흥신소... "
" 이번에 아주 큰 건이 들어왔는데, 죽은 여자의 시체를 처리해달라는 의뢰였습니다. 원래 저희가 살인까지는 하지 않지만, 시체 유기정도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보수만 좋다면야...저는 고민해봤습니다. 이번 보수가 시체 유기죄를 감수할 정도인가?"
마른남자는 펼친 손바닥을 쥐어 보이며,
" 보수는 차고 넘쳤습니다. 저는 흔쾌히 의뢰를 받아들였고 이렇게,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이 산을 올랐습니다. 여기만큼 시체를 유기하기 좋은 장소가 없기도 하고, 예전에도 이 산에 한번 신세를 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여 일부러 폭우가 쏟아지는 날을 골랐는데...사람 한 명 없을 줄 알았던 이 산에, 이렇게나 사람이 많을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여러분. "
" 으음.. "
" 아.. "
" ... "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확실히 우연치고는 너무하긴 했다.
마른남자는 손을 뒤로 뻗으며 물었다.
"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무서운 이야기 아닙니까? "
셋의 얼굴이 굳었다. 마른남자의 덤덤한 모양새가 왠지, 거짓이 아닌 느낌을 주었다.
청년은 조금 겁에 질린 듯, 귀에 손을 대고 바깥의 빗소리에 계속 집중했다.
수염남은 '크흠!' 고개를 작게 흔들며 말했다.
" 나가서 확인만 해보면 거짓말인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는 이야기군... "
마른남자는 문을 향해 손을 으쓱했다. '얼마든지'라는 듯.
수염남은 굳이 엉덩이를 떼진 않았다.
이윽고 잠깐의 침묵, 그것을 견딜 수 없었던 건지, 청년이 자기 가방에 손을 집어넣어 사탕들을 쏟아냈다.
" 사, 사탕 드실 분? "
청년은 사양하지 않는 모두에게 사탕을 건넸고, 마지막으로 사탕을 받은 단발녀가 입을 열었다.
" 이번엔 제가 이야기해도 되죠? "
셋은 단발녀를 돌아보고, 단발녀는 사탕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 귀신 얘기나 할 줄 알았는데, 진짜 무서운 얘기들을 하시네요... 그럼 저도 어쩔 수 없죠. 하나 털어놓을 수밖에... "
말을 꺼내는 그녀의 시선은 수염남을 향하고 있었다.
" ? "
그녀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 1년 전, 저는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었어요. "
" 아이고 저런! "
" 저는 이혼을 결심했고, 남편은 한 번만 용서해달라며, 뭐든지 하겠다고 빌었어요. 그래서 저는 남편에게 증명해보라고 했죠. 그랬더니 남편이...1년 전에 저를 이 산으로 데려왔어요. "
셋은 움찔 놀랐다. 특히 수염남의 반응이 컸다.
" 1년 전에...? "
" 예. 저는 도대체 무엇 때문이냐고 따져 물었지만, 남편은 대답이 없었어요. 그러다 남편이 어느 장소로 저를 데리고 갔는데...그곳에서 남편이 당황하며 그러더군요. "
[ 어, 어디 갔지? 어디, 어디에...? 분명히 여기인데..! ]
" ... "
수염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단발녀는 그를 똑바로 직시하며,
" 그곳은 뒤로 경사가 진 곳이었어요. "
" ... "
창백해진 수염남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단발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이었다.
" 제가 남편에게 뭘 보여주려는 거냐고 물어도, 남편은 아무 대답도 못 했어요. 그래서 끝내 저는 남편과 이혼했어요. 그런데 만약 그날 남편이 제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지금 제가 생각하는 그것이었다면...어쩌면 전... "
단발녀의 입이 닫히고,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가만히 수염남을 보았고, 수염남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땅만 보았다.
"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네요. 내 남편이 누구와 바람을 피웠었는지... 그리고 왜 그날 나를 이 산으로 끌고 왔는지...오늘에서야 말이에요. 당신이 발견한 그녀를 절벽에서 밀어버린 게 제 남편이었군요. 그것을 외면하고 지나친 것이 당신이고... "
" ... "
" 그럼, 누가 살인자죠? 제 남편인가요, 당신인가요? "
" ... "
말없이 부들부들 떨던 수염남은 갑자기, 크게 반전하며 웃어 재꼈다!
" 노, 농담이었어! 내 말을 믿었단 말이야? 으하하하! 아니, 무서운 이야기 하자면서?! 당연히 다 지어낸 이야기지! 마침, 1년 전에 실종된 홍혜화 아나운서가 생각나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낸 겁니다! 그게 진짜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거 다들 이렇게나 감쪽같이 속았으면, 내가 대성공한 건가? 으하하하하! "
" ... "
" ... "
모두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수염남은 급히 화제를 돌리려는 듯, 청년을 돌아보며 음성을 높였다.
" 이, 이봐! 거기가 할 차례지? 무서운 이야기! 모두 한 번씩 했으니까 그쪽도 해야지! 나처럼 잘 지어내 보라고! 으하하 "
" 예? 아...예에.. "
청년은 뿔테안경을 고쳐 쓰며 말을 입에 머금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궁리하다가 하는 말,
" 사실 저는요...태어나서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요. "
" 응? 정말? "
" 정말로 한 번도요. "
" 세상에! "
수염남은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맞장구쳤다.
" 요즘 시대에 그러기가 쉽지 않을 텐데! 무슨 사정이라도 있나? 어디 문제 있어? "
" 예에 뭐..성격탓도 있는 것 같고 좀... "
" 얼굴은 나쁘지 않은데 말이야. 거참~! "
" ...근데 실은 말이죠. "
" 응? "
청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무표정하게 돌변했다.
" 작년에 제가 경찰 조사를 굉장히 많이 받았거든요. 왜일까요? "
" 그, 글쎄? "
" 사실은 제가...작년까지 어떤 여인을 스토킹하고 있었거든요. "
" 스토킹?? ...설마?! "
순간적으로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특히 수염남은 말까지 더듬으며,
" 스토킹이라면 호, 혹시...? "
" 예. 아나운서 홍혜화 실종 사건 때, 기억하시죠? 특집으로 다뤘잖아요. 스토커 용의자...그게 저예요. "
" ... "
대피소 안에 갑작스러운 침묵이 흐르고, 거센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데, 그 적막을 깨며 청년이 말했다.
" 저는 여러분이 오늘 왜 이 산에 오셨는지 알고 있어요. "
" ... "
" ... "
" ... "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청년은 수염남을 바라보며 말했다.
" 아저씨. 그날, 정말로 통쾌했어요? "
" ... "
" 사실은 후회했죠? "
" ! "
정곡을 찔린 듯, 수염남의 눈이 흔들렸다!
" 아저씨는 분명 다시 그녀를 구해주러 달려갔을 거예요. 그러나 그녀가 이미 죽어있는 걸 보고...후회했죠? "
" ... "
" 누군가에게 들키기 싫어서 묻었다고요? 아니요. 무덤을 만들어준 거였죠. 그래서 이렇게 올해도 그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무덤을 찾아온 거고요. 제 말이 틀렸나요? "
" ... "
" 아저씨가 사람을 죽였다고 한 말은 틀렸어요. 진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따로 있죠. "
청년의 고개가 마른남자에게로 돌아갔다.
" 최무정 씨. "
" ... "
" 뭣?! "
다른 둘이 놀란 눈으로 청년과 마른남자를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대피소에 모인 넷은 통성명을 한 적이 없었다.
청년은 수염남을 바라보았다.
" 1년 전 그날, 이 산에는 아저씨만 있었던 게 아니었어요. 실은 여기 최무정 씨도 있었죠. "
" 뭐...? "
모두의 시선이 최무정에게로 돌아가고, 그는 땅에 시선을 둔 채로 입을 다물었다.
청년은 그를 보며,
" 1년 전 그날에도 최무정 씨는 시체를 유기하러 가는 길이었어요. 비닐 가방에 시체를 넣고 산을 오르는 중이었죠. 그러다 최무정씨는 발견하고 만 거예요. 살려달라며 소리치는 홍혜화 씨를 말이죠. "
" 뭐? 다, 당신도...? "
수염남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최무정을 바라보며 묻지만, 그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침묵했다.
" 최무정 씨는 멀리서 그녀를 보고는 구해주려 하다가,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시체 때문에 그러지 못했어요. 갈등하던 최무정 씨는 얼른 시체를 처리하고 다시 와서 도와줄 생각을 먹었죠. 멀리서는 그녀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몰랐거든요. 그게 틀렸던 거예요. 아저씨처럼...최무정 씨도 뒤늦게 도착했을 땐 이미 늦어있었던 거죠. "
" ... "
" 아... "
최무정은 한 마디의 부정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있었다.
청년은 두 남자를 돌아보며,
" 두 분 다 그녀를 구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두 분 다 구하지 않았죠. 이건 살인일까요? 그럼 제가 두 분을 증오해야 하는 걸까요? 제 모든 것이었던 그녀를 죽게 만든 두 분을요? "
" 그...! "
" ... "
질문한 청년은, 대답도 했다.
" 아니요. 원망하지 않아요. 최무정 씨는 홍혜화 씨의 죽음을 확인하고 도망가긴 했지만, 이후 죄책감 때문인지, 흥신소 능력을 무료로 발휘해서 유력한 용의자를 찾아냈어요. 그게 바로 저였죠. "
" ... "
" 그리고 아저씨는, 지난 1년간 몇 번이나 그녀의 무덤을 찾아와 사과했죠. 알아요. 후회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거. 일부러 자신을 살인자라고 소개하면서 우리에게 욕을 먹으려고 한 것도, 죄책감 때문이었겠죠. "
" ... "
" 이렇게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그녀의 기일을 챙기기 위해 찾아온 걸 보면...그 가방 안에 꽃이죠? "
" ... "
수염남은 고개를 떨구고 말이 없었다.
그때-,
" 그럼 이 가방 안에는 뭐가 있을까요? "
" ? "
청년이 단발녀의 가방을 가리켰다.
의아하게 미간을 좁히는 단발녀.
" 내 가방? "
" 그 안에 편지 있죠? "
" ?! "
청년의 말에 단발녀의 눈이 흔들렸다!
" 뭐, 뭐라고...? "
청년이 물었다.
" 누나는 오늘, 여기 왜 온 거예요? "
" 아 그건...! "
눈에 띄게 당황하는 단발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고,
" 미스터리하죠. 저 누나는 여기 왜 왔을까? 이렇게 폭우가 쏟아지는 산에 위험하게 왜? 혼자서? "
" 아.. "
" 그 답은 그 편지에 있죠. "
사정없이 흔들리는 단발녀의 두 눈!
" 그 편지의 내용을 제가 그대로 읽어 볼까요? 이렇게 쓰여 있었을 거예요. "
[ 난 홍혜화야. 모든 사실이 밝혀지는 게 싫다면 그곳으로 와. ]
" 뭐야?! "
놀란 수염남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창백해진 단발녀의 입술이 떨릴 때, 청년이 무심하게 말했다.
" 그 편지 제가 보낸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죠? 누나는 왜 그 편지를 받고 이곳으로 왔을까요? 누나는 이 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잖아요? 그냥 1년 전에 남편이 억지로 끌고 왔던 거잖아요? 이 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죽었는지 같은 건 전혀 모르잖아요? "
" 아, 아... "
" 어쩌면...사실 그 날 산으로 끌려 온 사람은, 누나가 아니라 남편이 아니었을까요? 누나가 남편을 산으로 끌고 온 거죠.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
" !! "
새파랗게 질린 단발녀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충격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수염남,
" 그, 그럼 홍혜화를 절벽에서 밀었던 사람이...? "
단발녀는 덜덜 떠는 고개를 흔들었지만, 입에선 소리를 내지 못했다.
청년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 남편의 내연녀를 살해하고, 그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주려고 데려왔겠죠. 그런데, 도착해보니 시체가 사라진 상태였어요. 아저씨가 그녀를 묻어주었기 때문이죠. 누나가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누나는 지난 1년간 정말로 불안했을 거예요. 이렇게 생각했겠죠. 혹시, 홍혜화가 어딘가에 살아있진 않을까...? "
" 으..으으... "
" 그래서 제가 보낸 편지를 받았을 때, 바로 이곳으로 찾아온 거예요. 그래서 저는 확신할 수 있었어요. 그날 홍혜화를 밀었던 건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 그녀였다는 사실을. "
" 으으.. 으으...! "
단발녀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부들부들 떨리고, 수염남은 아연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턱을 덜덜 떨던 단발녀가 " 나, 나난, 난, 나...난...! " 무언가 말을 하려 할 때,
" 쉿! "
청년이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는 귀에 손을 올린 뒤,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조용히... 바깥에서 들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여봐요. "
" ...? "
' 투두두둑두두두두둑- '
대피소를 때리는 거센 빗소리가 넷의 귓가에 들어왔다.
의아하게 청년을 바라볼 때,
" 아까 들렸어요? 빗줄기가 비닐 가방에 부딪히는 소리 말이에요. 잘 들어보세요 누나. "
" 으..으...? "
단발녀의 의문에 찬 얼굴이 일그러질 때, 청년이 낮게 중얼거렸다.
" 들리죠 누나? 그럼, 소리로 구분할 수 있겠어요? 저 가방 안에 정말로 시체가 들어있는지, 아니면 아직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지 말이에요. "
" ...... "
단발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고, 청년은 무심하게 웃었고, 최무정은 그냥 고개만 숙이고 있었고, 수염남은 혼란스러운 눈초리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윽고 청년의 손이, 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의 누구도 청년을 막지 못했다. 혹은 막지 않았거나.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전에 '모닥불에 모인 사정들'이란 이야기에서 가독성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도 제일 걱정되는 게 가독성이네요.
그리고 또, 너무 복잡하지 않을까? 어딘가 헛점이 있지 않을까? 설득력의 구멍은 없나??
걱정거리가 많은 이야깁니다 ㅎㅎ;
항상 재밌게 봐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행복하세요!
와오....
가독성 쩔어요 ㅋㅋㅋㅋ굿
빗소리를 들어보라 할 때 뭔가 소름돋았어요..ㄷㄷ
오늘 글은 흠 잡을곳 없이 좋았어요
개연성도 굿 ~~
워 대박..
머릿속으로 장면들이 다 그려졌어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항상 느끼지만 정말 미친듯한 필력이네요... 잘 읽었어요!
와 안심이 되는 댓글 감사합니다!
사실 저번에 모닥불에 모인 사정들은 소재가 너무 아까웠었거든요; 소재는 너무 마음에 들었었는데 가독성이 망치는 바람에...으흐;
불꺼진 방안에서 핸드폰으로 보고있었는데..
무섭네요. 날씨도 그렇고.. 밖에 비오는것 같은데ㅠㅠ
평소에도 재밌게 봤는데 오늘은 으스스한게 너무 잘봤어요!!!
와.... 이건 명작인데요.
정말 재미있습니다!
이야기에 몰입이 확 되네요!!
으앙ㅠㅠ 지금 비오는데ㅠㅠ 소름돋았어요ㅠㅠ 청년은 단발녀를 죽이러 온거겠...죠? ㄷㄷㄷ
와 진짜 잘쓰심...ㄷㄷㄷ
와...진짜 무섭네요ㅜㅜㅜㅜ
마지막에 좀 더 정확하게 쓰지 않은 게 후회되네요;
가방이라는 단어를 두 번 넣었더니 오해의 소지가 있네요. 차라리 마지막 줄은,
[ 이윽고 청년은 품에서 날카로운 것을 꺼냈다. 이곳의 누구도 청년을 막지 못했다. 혹은 막지 않았거나. ]
복날님 혹시 저희대학교 영화동아리에서 한번 이내용으로 찍어봐도 되나요??
아 마른남자의 시체가방은 아직 비어있었군요ㄷㄷㄷ
아침에 눈뜨자마자 또 보러왔다가 새롭게 깨닫고 갑니다 진짜 잘 쓰인 이야기에요!!
군더더기 문장이 하나도 없어서 사건이 급박하게 전개되는것 같아요. 지루할틈없이 진짜 재밌게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