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갈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의가 있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물론 수강생이 없는 토요일이지만 나는 그런 핑계로 가지 않았다.
아버지께선 꼭 와서 얼굴이라 비추라고 하셨지만 난 가지 않았다.
늦은 결혼 때문에 또는 잘 안풀리는 직장의 이야기, 아니 얼마전 헤어진 여자친구의 이야기를 꺼내기 싫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단 한 사람 때문이었다.
28년 전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때 우린 큰 아버지댁에 가서 자주 놀았다.
거긴 형 두 명과 장녀인 누나가 있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 형제와 터울이 크지 않아 자주 어울려 놀았고 그 날도 그런 비슷한 날이었다.
그 날은 내가 몸이 별로라서 동생과 사촌들은 놀러 나갔고 나는 할머니가 한 숨자라고 비켜주신 할머니 방에서 뒤척이며 누워 있었다.
그때 나가 놀러간줄 알았던 누나가 들어왔다.
아픈지 물어보고 내 얼굴이나 이마에 닿아야 했을 그 손이 내 바지 언저리에 있었다가
'재미 있는거 알려줄게.'라며 속삭이며 속옷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그렇게 얼마인진 기억나지 않는 수분 혹은 수십분의 시간은 할머니의 인기척이 문밖에서 날때까지 이어졌고
나는 그 누나가 싫어졌고 무서워졌다.
그 뒤 어쩔 수 없이 가야하는 큰집은 무조건 어른과 같이 있거나 동생과 붙어있었고 다행히 얼마후 우리집 사정으로 우린 큰집으로 놀라가지 않을 거리의 다른 집으로 이사를 했다.
누군가에게 말을 했어야 하는 상황인지도 몰랐을 나이였고 그 뒤 사춘기를 거치며 그 행동들이 뭘 의미하는지 알게 됐을때 나는 그 누나를 저주했다.
그날 오후의 햇살이나 할머니방의 냄새, 천장의 전등과 단순히 반복하는 무늬가 아직도 생각나는 나는 지금도 그날의 꿈을 꾼다.
그렇게 보고 싶지 않은 누나였기에 누나의 결혼식과 형들의 결혼식도 가지 않았고 심지어 할머니가 돌아가셨을때도 나는 가지 않았다.
오늘, 아버지는 본인이 전화를 하셔서 직접 나를 바꿔 주시며 큰 아버지에게 인사를 시켰고
바로 뒤에 'XX 누나도 있는데 바꿔줄까?' 하셨다. 당황스러웠지만 난 피하고 싶었다. 서둘러 다시 강의를 들어가야 한다고 전화를 끊었고
한 40여분뒤 잔치 끝났다시며 아버지가 다시 연락을 해오셨다.
'앞자리에 XX 누나 앉아 있는데 바꿔줄까?'라시며 다시 말을 하시길래
'저 아직 강의 중이에요.'라며 다급히 끊어 버렸다.
어찌 사는지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날이다.
아니 그냥 죽어버렸으면 했던 날이 많았던 사람인데 내 속내를 30년 가까이 모르시는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그런 전화를 권유했다.
아버지가 미웠지만 미워해야할 대상은 그 쪽이 아니니까 난 오늘도 그 사람이 빨리 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죽으면 내가 전화 받을 일이 없을테니까 오늘은 잠들기 전까지 XX누나가 죽기를 바라고 내일 아침의 난 이 더러워진 기분이 사라져 일상의 나로 돌아가면 좋겠다.
나쁜년.
님도 그 기억을 털어 버릴 수 있게 되길 바래요.
토닥토닥
잘 했어요. 잘 하고 있어요.
아이상대로 저질러지는 모든성범죄는
나이.성별을 막론하고
극형에 처해야함.
님 행복하시길 ..
진짜 저런일은 평생 트라우마예요
저는 어릴때 동네 아저씨가 길가던저를 끌어안고
뽀뽀하자며 입술을 들이미는데 싫어서 얼굴돌리고 피했거든요
근데 얼굴을 못움직이게 딱잡더니 입안에 혀를..
거의 50가까이 된 아저씨가 초등학교 저학년붙들고 미친새끼가
너무나 생생한 그 더러운 느낌
저도 작성자님처럼 그날의 날씨 풍경 모든것이 선명하게 남아있고 아직도 자다가 소름끼치는 꿈을꿔요
성범죄자들 형량이 늘어나야해요 진짜
사람의 영혼을 상처내는 범죄니까요
쳐죽일 개객끼들
쳐죽일년
생판 모르는 사람이어도 힘든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마주치는거 진짜 끔찍하죠....작성자님이 겪어왔을 고통에 마음이 아리네요...
사촌간
친지간
이런일 정말 많습니다
상상이상으로요
애기있으신 부모님들은
조심 또 조심..
세상미친
저는 사촌오빠에게 비슷한 경험있어요. 정말 그 불쾌함은 20년이 훨씬넘은 지금도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요 ㅠㅜ
가해피해 성별이 바뀌어도 불쾌한 기분은 다르지않을것같네요 ㅠㅜ
미췬년이네;;;;사촌 동생한테;;;;어우
참 그지같은게 가해자는 기억조차 못하죠 짜증나게...
억울한건 그년은 기억 못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