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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만에 장군으로 진급한 대령.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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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3월 12일,

미국 켄터키주 메이스릭에서

흑인 노예 출신인 부모 슬하에 태어난

찰스 영.

 

(위 짤은 육사 생도 시절의 모습)

 

 

 

 

노예였던 아버지 가브리엘은

남북전쟁 와중에 탈출,

제5유색중포병연대에 입대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군복무를 계속했다.

 

 

 

오하이오주 리플리로 이사한 영은

부모의 지원을 받아

백인만 있던 고등학교에

유일한 흑인 학생으로 입학했으며

 

1881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리플리에 새로 생긴 흑인 학교에서

2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

 

 

 

1883년 군인 출신 아버지의 권유로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 입학 시험을 친 결과

관할 지역구에서 2번째로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그 해 합격자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합격자들 중에서

중도 탈락자가 나옴에 따라

이듬해 1884년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해

흑인으로서는 9번째 육사 생도가 되었다.

 

 

 

노예제도가 철폐되었다곤 해도

인종차별이 여전했던 당시 미국의 현실에 더해

가혹행위가 만연했던 웨스트포인트 특유의 악습까지 겹쳐

영은 다른 생도들보다 훨씬 어렵게 지냈다.

 

 

 

멸시와 따돌림을 묵묵히 견딘 영은

1889년 졸업 당시 기준으로

3번째 육사 출신 흑인 소위로 임관했는데

 

소위 임관과 동시에 자대에 배치된 동기들과 달리

흑인 장교가 백인 병사를 지휘하는 걸 꺼린 지휘부는

졸업하고 3개월이 지난 뒤에야

네브래스카주 포트로빈슨에 있는,

흑인으로 구성된 제9기병연대에 배치해

영 소위는 군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1년 후 1890년 유타주 포트듀신으로 이동한 영 중위는

4년 동안 복무하는 과정에서

훗날 1940년 흑인 최초로 준장이 되는

벤자민 데이비스를 멘토링하기도 했다.

 

 

영 중위는 1894년 오하이오주 윌버포스 대학교로 배정되어

새로운 군사과학 및 전술과정을 개발 및 교육하는 임무를 맡아

4년 동안 교수로 활동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영 중위는 지원병 제9오하이오대대를 지휘할 소령이 되지만

부대가 파병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

정규군 계급인 중위로 복귀했고

1901년 제9기병연대에 배치되면서 대위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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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영 대위, 1903년

 

 

1903년 여름, 영 대위는 캘리포니아 북부에 있는

세쿼이아 국립공원 감독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미국 육군은 모든 국립공원을 보호, 감독했기 때문에

영 대위와 그의 부대 역시 주어진 임무를 따랐는데

 

영 대위는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도로와 산책로 건설을 주도해

낙후된 공원 환경을 크게 개선시켰다.

 

 

1903년 겨울, 흑인으로서는 첫 국립공원 감독관 업무를 마치고 

제10기병연대로 부대를 옮기기 전 영 대위는

내무부장관에게 세쿼이아 국립공원 관련 보고서를 보내

 

'후세를 위해서는 더 넓은 공원 면적을 확보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 공원 인근의 사유지를 정부가 매입해야 한다'고 권고했는데

나중에 하원에서 영 대위의 권고를 반영해 법률로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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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영 소령, 1912년

 

 

1904년, 미국 정부가 군사정보과를 신설하면서

영 대위는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의

재외공관 무관으로 발령되어 3년간 근무했다.

 

 

1908년, 필리핀으로 파견된 영 대위는

9연대에서 중대 2개를 지휘했고

미국으로 복귀한 뒤

와이오밍주 포트D.A.러셀에서 2년간 복무했다.

 

 

1912년,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한 영은

외국에서의 복무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와 인종의 군사적 사기

(Military Morale of Nations and Races)'라는 책을 출판했다.

 

 

영 소령은 이 저서에서

인종차별적인 편견에서 벗어나

역사학, 사회과학을 토대로 연구해

 

흑인이나 유대인처럼 노예로 여겨지거나 

군인으로 부적합하다고 여겨진 인종이라도 

민주주의 사회를 위해 싸울 때

군인으로서 충분한 능력을 발휘했음을 입증하며

 

다양한 인종에 다양한 언어를 쓰는 미국이

효과적으로 군대를 양성하려면

국가에 대한 봉사와 그에 대한 보상의 이행을

민주주의적 질서와 결부시킴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 바,

 

지금이야 당연하다고 여겨질 주장이지만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선 선견지명을 선보였다.

 

 

 

 

영 소령은 자신의 저서를 출간한 이 해에

라이베리아 재외공관 무관으로 발령되어 3년 동안 근무했는데,

 

라이베리아 정부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군사 훈련 및 기반시설 건설 감독을 맡아

1916년 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NAACP)로부터

탁월한 지도자상(Spingarn Medal)을 받기도 했다.

 

 

 

1916년, 멕시코 혁명 당시

판초 비야를 잡겠다며 미국이 멕시코를 침공했을 때

영 소령은 제10기병연대 2중대를 지휘해

탁월한 지도력을 보인 공로로 중령으로 진급했다.

 

 

 

당시는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와중이었는데

미국의 참전이 임박하자 

영 중령도 별을 달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하지만 자신들을 앞질러

흑인이 장군으로 진급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은

남부 출신 장교들과 백인 장교들이 반발했고

 

뉴턴 베이커 전쟁부장관은

그동안 복무한 공로와 함께 고혈압을 이유로

영 중령을 대령으로 진급시킴과 동시에

복무 부적합을 명목으로 현역에서 제외시키고

은퇴하라고 명령했다.

 

 

 

영 대령은 1918년 윌버포스 대학교로 돌아가

군사학 교수로 재직하며 강단에 섰지만

 

자신은 아직도 현역으로 복무할 만큼 건강하다며

윌버포스에서 워싱턴 D.C.까지

말을 타고 500마일을 달려 이동해

복무 부적합은 철회되어 현역으로 복귀했으나

베이커 장관은 은퇴 명령을 철회하지 않았다.

 

 

 

영 대령은 유럽으로 파병되어 참전하는 대신

전선으로 나갈 흑인 신병들의 훈련을 맡았고,

 

1919년 국무부의 요청을 받아

라이베리아 재외공관 무관으로 재파견되었다.

 

 

 

1921년 말, 영국령 나이지리아를 정찰하다가

중병에 걸려 쇠약해진 영 대령은

1922년 1월 8일 57세를 일기로

라고스의 영국 병원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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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eral-Cropped.jpg

 

 

나이지리아 라고스에 매장된 영 대령의 유해는

사망 다음해인 1923년,

아내 에이다와 많은 흑인 저명인사들이 나서서

미국으로 운구해 제대로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여론을 환기해

라고스에서 대서양을 건너 뉴욕으로 운구되었다. 

 

 

영 대령의 유해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많은 인파가 연도로 나와

영 대령의 군복무 경력에 경의를 표했고

 

조문객들이 운집한 가운데

군장으로 장례식을 치른 후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위 짤)

 

 

 

미국 최초의 흑인 대령이라는 개인적 성취와 더불어

육사 생도 시절 이래 인종차별로 인해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장성이 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인종차별 철폐를 이야기할 때

영 대령의 사례는 빠지지 않고 등장해왔다.

 

 

 

영 대령의 100주기 기일인 2022년을 앞두고

그의 고향인 켄터키주를 중심으로

영 대령을 1계급 특진해 준장으로 추서하자는 움직임이 커져

 

2020년 앤디 베시어 켄터키 주지사가

영 대령을 켄터키 주방위군 명예 준장으로 추서하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미합중국 연방군 차원에서도 특진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에서 심의에 착수한 끝에

2021년 11월 1일 승인되고

2022년 2월 1일 발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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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대령 사후 100년이 지난

2022년 4월 26일,

 

고인의 모교인 웨스트포인트에서는

고인의 후손들이 참석한 준장 진급식이 열렸다.

 

 

유족을 대표해 영 준장의 종손녀인 레노타 영이

진급 인사명령서와 훈장,

장군을 상징하는 금도금한 가죽 벨트,

별 1개가 그려진 준장기를 대신 받았다. (위 짤)

 

 

 

국방부를 대표해 준장 진급식에 참석한

게이브 카마릴로 육군차관은

 

"고인의 준장 진급은

비록 오래 지연되었지만

이제 더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다"며

 

영 준장의 생애가

모범적인 리더의 것이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영 준장의 종손녀 레노타 영은

 

"고인은 이곳 웨스트포인트에서

차별을 받으며 고통스러워했지만

결코 포기하지도, 타인을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고인은 조국을 지극히 사랑했기에

우리나라가 인종차별이라는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그냥 두고보지 않았습니다."리고 말해

 

참석자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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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찰스 영과 아내 에이다의 무덤 묘비 뒷면.

 

이번에 1계급 특진함에 따라

대령(Colonel)이라고 새겨진 계급이

준장(Brigadier General)으로 교체될 예정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SNS에

 

"이로써 고인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장군이 되었다"며 

축하 메시지를 올렸다.

 

 

 

현재까지 미국 최초의 흑인 장성은

1940년 준장으로 진급한 벤자민 데이비스,

영 준장이 포트듀신에서 복무할 때

멘토링을 해줬던 사람이었는데

 

이번 추서가 소급 적용됨에 따라

찰스 영 준장이 미국 육군 역사상

첫 흑인 장성으로 기록되었다. 

 

댓글

  • 푸레양
    2022/05/01 14:27

    헐... 그럼 지금까지 흑인 장성이 없었던 거야?

    (pHSRGa)


  • 스워드소드블레이드나이프
    2022/05/01 14:29

    호러스 워필드도 있는데

    (pHSRGa)


  • RTX4030
    2022/05/01 14:29

    흑인 대통령보다 늦었네

    (pHSRGa)

(pHSRG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