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세종 25년인 1443년에는 서른, 심지어 마흔 넘도록 혼인하지 못한 백성이 늘어나자 세종은 이와 같은 어명을 내렸는데,
“가난한 남녀가 때가 지나도록 혼인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한성부가, 지방에서는 감사가 힘을 다해 방문하라."
그들의 사촌 이상 친척들이 혼수를 갖추어 때를 잃지 않도록 하라. 이 법을 어기는 자는 죄를 물라”
여기에서 한성부는 지금으로 치자면 ‘서울시’, 감사는 각 도의 ‘도지사’를 의미한다.
혼인이 당연했던 조선 시대의 평균 결혼 나이는 대략 20세 정도로 추측된다고 함.
당시 평균 수명이 40대 중반이었음을 감안하면 서른 넘도록 혼인하지 못한 백성은 큰 사회적 문제였다.
성종
성종은 아예 전국의 노처녀 노총각 숫자를 모두 파악하는 전수 조사를 명령했음. 이에 따라 전국 25세 이상 노처녀에 대한
‘인구조사’가 시행됐으며, 그 가난의 정도에 따라 쌀과 콩 등의 곡물을 혼수로 지급하며 혼인을 시키기 위해 노력했음.
중종
중종 역시 “가난 때문에 부득이하게 혼인을 못 한 노처녀들에게 관이 혼수를 보조하여 시집가게 하도록 하라” 라는 어명을 내렸음.
정조
정조는 “판관들이 방방곡곡 백성의 집을 두루 돌아다니며 곳곳마다 살펴서 단 한 사람의 홀아비도 없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함.
혼인이 필수였고 아이 없는 것을 상상도 못 하던 조선 시대에는 국가가 백성의 결혼을 걱정하고 챙긴 이유가 있는데,
조선 시대 국왕들은 도의상 국가에 재앙이 들면 “모든 것이 다 과인이 부덕하여 생긴 일이다”라는 말을 많이 했음.
왕이 부덕하여 통치를 제대로 못 하면 백성들의 원망이 생겨나고, 그 원망이 커져 하늘에 닿으면 나라에 역병이 돌거나
천재지변이 생겨난다고 믿은 것이기 때문임.
그렇다면 통치자들 입장에서 봤을 때 어떤 백성들의 원망이 가장 걱정됐을까? 그 대상 중 하나가 바로 ‘솔로들’이었음.
그래서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기에 앞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 결혼 안 한 노총각 노처녀 결혼시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고 하지.
지금처럼 결혼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현대 대한민국의 모습과는 달리, 저 시기는 결혼은 무조건 필수인 시대였기 때문에,
딸이 20대 후반에도 시집을 못 간 노처녀라고 하면, 그 아버지 되는 사람에게 엄히 죄를 물어 관아에서 곤장을 때릴 정도였음.
㈜남산설렁탕 2021/12/31 20:41
여기가 헬조선인 이유입니다.
루리웹-0773275644 2021/12/31 20:42
저래서 못생김을 유발하는 유전자들이 아직까지 전해지는건가....
하동맨 2021/12/31 20:42
휴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사형감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