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혼자 얼음낚시를 하러 떠났다.
직장은 무단결근에 핸드폰도 꺼놓았다. 충동적인 결정이었지만, 미래에 대한 고민이 절실했다.
다행히 사내가 도착한 얼음 호수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사내가 생각을 정리하기에 도움이 되었다.
사내는 끌로 25cm 구멍을 뚫고, 곧바로 낚싯대를 드리웠다.
" ... "
가만히 입질을 기다리는 동안 그의 신경은 전혀 낚싯대에 가 있지 않았지만, 강력한 입질이 올라오자 얘기가 달라졌다.
" 음?! "
빙어의 간질거리는 느낌도 아니었기에, 송어를 기대했다. 한데,
" ?! "
25cm 구멍에 머리가 걸려 올라오지 않았다!
게다가 얼핏 보인 모습은 송어라기보다는 문어 같았다.
호수에 웬 문어가 있지하는 의문도 잠시, 사내는 얼른 끌로 구멍을 넓히고 줄을 들어 올렸다!
한데,
" 으아악?! "
낚싯대에 걸린 건 문어가 아니었고, 물고기도 아니었다.
[ 안녕하십니까? ]
문어 같은 머리에 눈코입과 팔다리가 달린, 작은 괴생물체였다. 사내가 기겁을 하고 뒤로 넘어지자, 괴생물체는 말했다.
[ 심하군요. 낚시였다니? 저는 지렁이의 신이 나타나서 저를 잡아가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 ]
말을 하며 입에 걸린 바늘을 빼내는 괴생물체. 사내는 놀란 눈으로 쳐다만 볼 뿐, 벌어진 입으로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괴생물체가 인상을 찡그리며 입천장을 만지작거릴 때에, 사내가 겨우 말을 짜내었다.
" 뭐, 뭐세요? "
[ 음! ]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는 얼굴이 된 괴생물체는,
[ 저는 외계인입니다. ]
" 아아...! "
사내는 납득했다. 예전에 돌아다니던 외계인의 이미지와 비슷해 보였으니까.
괴생물체는 사내가 믿는 듯 하자,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 저희 별은 지구에서 수억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곳은 사계절이 모두 겨울이지요. 제가 거기서 이 지구로 온 이유는, 이혼 때문입니다. 저희 별에서는 이혼을 하려면 4년간의 조정 기간이 있는데, 그사이에 각자 다른 별로 여행을 떠나서-. . . ]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진정이 된 사내는, 눈앞의 외계인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 저, 저기! 혹시, 우주선을 좀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스타워즈의 광팬이라... "
[ ... ]
주절거림을 멈춘 괴생물체의 표정이 묘해졌다. 다음 순간,
[ 외계인이란 건 거짓말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요정입니다. ]
" 엑? "
사내의 얼굴이 황당해졌고, 괴생물체는 다시 주절거렸다.
[ 저는 사실 호수의 요정입니다. 죄송합니다. 정체를 들키면 이 호수의 평안이 깨어질까 봐 거짓말을 해버렸군요. 사실, 저희 집안은 53대째 이 호수를 지켜왔고, 모든 송어와 빙어들의 존경을 받는-. . . ]
다시 주절거림을 듣고 있던 사내는, 또 얼굴이 상기되어 끼어들었다.
" 저, 저기! 요정이시면, 저를 요정계로 데려가 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릴 적에 제가 가장 사랑했던 동화책의 내용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걸 보면서 주인공이 어찌나 부러웠었는지, 항상 요정계로 여행을 떠나는 것을 꿈꿔왔었습니다! "
[ ... ]
괴생물체의 표정이 다시 묘해졌다. 다음 순간,
[ 요정이란 건 거짓말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지저세계의 인간입니다. ]
" 잉? "
사내의 얼굴이 황당해지고, 괴생물체는 다시 주절거렸다.
[ 이 지구 밖의 주인은 인간이겠지만, 지하 세계의 주인은 바로 저희입니다. 저는 깐따시 시청의 공무원으로, 새로운 주거지역의 확장공사를 시행하던 도중에 우연히 이 호수의 바닥을 뚫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희 세계에서 호수의 물은 부의 상징과 같았기 때문에, 몰래 이 호수를 제 별장 삼아 이용해왔지만, 제 비리를 눈치챈-. . . ]
사내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끼어들었다.
" 지저세계! 그 말이 정말이라면, 우리의 인연은 필연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저는 무역업을 직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저세계의 특산물과 지상의 특산물을 서로 무역할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상상만으로도 짜릿하군요! "
[ ... ]
또다시 표정이 묘해진 괴생물체는,
[ 지저세계 인간이라는 건 거짓말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악마입니다. ]
" ... "
사내는 이젠, 할 말을 잃었다.
[ 저는 악마이지만, 더위에 약한 특이체질입니다. 유황불로 가득한 그곳에서 생활하는 건 영 젬병이죠. 그래서 이 차가운 호숫가에 휴가를 나오곤 하는데-. . . ]
사내는 괴생물체의 주절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믿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조금 퉁명스럽게,
" 진짜 악마라면, 제 소원을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제 영혼을 받고 말입니다. "
[ ... ]
괴생물체의 표정이 또 묘해졌다. 한데?
고개를 끄덕이는 괴생물체!
[ 이런 데서 계약을 맺게 될 줄은 몰랐군요. 어차피 실적도 안 좋았었는데 참 좋은 일입니다. ]
" 엑? "
사내는 당황했다. 진짜 악마였단 말인가?
[ 그래, 소원이 무엇입니까? ]
" 어, 어어..! "
사내는 급작스러운 사태에 놀라 취소를 하려고 했다가, 문득.
" ... "
나쁘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자신은, 자살을 고민하며 이곳에 오지 않았었던가?
"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줍니까? "
[ 물론이지요. ]
사내의 얼굴이 굳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 시간을 되돌려 주십시오. 학창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다신 이렇게 살지 않을 겁니다. 바람피우는 아내와 결혼하지도 않을 거고, 왕따 당하는 직장에 취직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공부를 핑계로 스타워즈 애장품들을 모두 버리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래, 만약 과거로 돌아가서 로또에 당첨이 될 수 있다면! "
말을 하면서 점점 얼굴이 밝아지는 사내.
" 스타워즈 박물관을 만들 겁니다! 모두가 좋아하겠죠! 그리고 저는 이런 일을 할 필요도 없이, 어릴 적 꿈이었던 동화 작가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돈 걱정 없이! 요정 세계 이야기를 마음껏 풀어낼 수 있겠죠! 어떤 아이들은 내 책을 보며 꿈을 키울 겁니다! "
[ ... ]
상기되어 떠드는 사내를 바라보던 괴생물체의 얼굴이 묘해졌다. 다음 순간,
[ 악마라는 건 거짓말이었습니다. ]
" 아...! "
사내의 얼굴에 어마어마한 상실감이 몰아쳤다. 곧, 그 자리에 분노가 떠올랐다.
" 지금 도대체-! "
[ 저는 사실, 당신의 상상입니다. ]
" 뭣..? "
화를 내려다, 괴생물체의 고백에 멈칫하는 사내!
[ 잘 생각해 보시죠. 지저세계와의 무역을 이뤄내고, 직장에서 인정받아 왕따를 벗어나고 싶었습니까? 괴로운 인생에서 벗어나 어릴 적 꿈이었던 요정계로 도피하고 싶었습니까? 어릴 적 놓았던 스타워즈로 다시 두근거리는 일이 있었으면 싶었습니까? 사실은 자살하긴 싫어서, 누군가 기적처럼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었으면 싶었습니까? ]
" 그건...그건...! "
사내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괴생물체는 사내에게 점점 다가갔다.
[ 저는 당신이 만들어낸 상상입니다. 어느 요정이, 외계인이, 악마가, 낚싯바늘 따위에 걸려서 이렇게 당신과 대화를 나누겠습니까? 세상에 이렇게 생긴 괴생물체가 어디 있겠습니까? ]
" 그, 그런...! "
[ 이제 그만, 상상에서 깨어나시죠. 더 늦기 전에 말입니다. ]
" ?! "
괴생물체가 손을 뻗어 사내의 가슴을 압박했다.
" 무, 무슨...! 무슨...! "
강력한 압박에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하던 사내는 곧-,
.
.
.
" 쿨럭-! "
" 이봐! 정신이 들어?! "
" 커헉 컥..! "
사내가 물을 토해내며, 희미한 시야로 주변을 확인했다. 호숫가 옆에 흠뻑 젖어 누워있는 자신. 낯선 중년인이 호통쳤다.
" 어휴~! 당신 죽을 뻔했어! 알아?! 아니, 아직 호수가 제대로 얼지도 않았는데 무슨 얼음낚시야?! 내가 안 봤으면 당신 그대로 물에 빠져 죽었어! "
" 아... "
사내는 머리를 정리하며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이 덜 얼은 빙판에 구멍을 뚫다가 호수에 빠졌구나. 그래서 정신을 잃었구나. 괴생물체를 만났던 일은 모두 자신의 상상이 맞았구나.
" ...감사합니다. "
" 어휴~ 정말 나 없었으면 진짜 죽었어 진짜!! "
" 감사합니다.. "
입으로는 감사하다 말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사내의 머릿속으로는 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자살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차라리 그대로 죽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사내는 그래도 고마운 중년인에게 뭐라도 보상을 해주기 위해 한쪽에 놓아둔 가방으로 향했다.
" 응? "
지갑을 열어본 사내의 얼굴이 갸웃했다.
" 동화 작가 김남우?? "
자신의 이름으로 된 이상한 명함이 있었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급히 핸드폰을 꺼내 드는 사내!
전원을 켜자마자 무수한 부재중 연락들이 떠 있었다. 사내가 통화를 걸자,
[ 아 선생님! 도대체 지금 어디세요?! 새로 발매한 동화책 사인회 하기로 한 걸 잊으신 거예요?! ]
" 아...아? "
[ 선생님의 스타워즈 박물관에서 사인회 하기로 하셨잖아요! 어디세요?! 예?! ]
" 스, 스타워즈 박물관?? 사인회...?? "
[ 아 왜 그러세요 선생님?! 아이참, 어서 오세요! 다들 기다리고 있다고요! 빨리요! ]
혼란스러워진 얼굴로 급히 호수를 돌아보는 사내!
괴생물체의 위치를 쫓고 있었지만,
[ 아 정말! 어디세요?! 제가 갈까요?! 선생님 동화책 들고 기다리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지금?! ]
" 아.. 아! 어, 얼른 가겠습니다! "
사내는 얼떨결에 급히 짐을 챙겼다. 떠나기 전에 중년인에게 '동화 작가 김남우' 명함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제가 급해서...! 꼭 사례하겠습니다! 연락해주세요! "
" 응? 아아 뭐~ 꼭 사례를 받자고 한 일은 아니었는데 흠 흠~! "
낚싯대와 가방을 챙겨 달려가는 사내의 얼굴에 왜인지 모를 웃음이 띄워져 있었다.
모든 게 혼란스러우면서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
.
.
호숫가 물속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괴생물체. 사내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휴! 저 인간 때문에 지구정복 계획에 차질이 생길 뻔했네! 이젠 혹시 저 인간이 나를 만났던 것을 얘기하더라도, 동화작가의 상상력으로 치부하겠지? ]
의기양양하게 스스로를 칭찬하는 괴생물체. 곧,
[ ... ]
당신을 바라보는 괴생물체의 얼굴이 묘해졌다.
[ 지구정복이란 건 거짓말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천사입니다. 우리들 천사는 사춘기를 지날 때 한차례 허물을 벗게 되는데, 그때의 몰골은 주변에 보여주기가 창피하므로, 지상으로 숨어들곤 합니다. 가급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극지방으로 가곤 하지만, 저는 저희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 . ]
그냥 한 번 써보고 싶은 방식으로 막 써갈겨 봤어요.
소심하지 않아요! 당당합니다! 200개가 넘는 이야기를 쓰다보면 이런~ 저런~ 글이 있는 거겠죠! 하하하하!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복날님 글을 읽고 하루를 시작하게 되서 기쁘네요 ^^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뭔가 이거 자체만으로 동화같은 이야기네요 ㅋㅋ
마지막에 유일하게 괴생물체가 혼잣말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 그 지구정복이 진실인듯 하고
'당신' 즉 독자를 바라보고 다시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는듯 싶어요
ㅋㅋㅋ귀엽다 쓸데없이 디테일하게 설명해
아 유쾌해 너무좋아 ㅎㅎ
이것도 딱 취향입니다 *
진짜... 귀여워요 괴생물체!ㅋㅋ
저 괴생물체의 멘트 하나하나가 복날님 마인드에서는 제각각 한 개의 세계를 담은 소설로 태어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이야깃거리들이겠죠?? (얼쑤 좋다 ㅋ)
음... 그렇게 보면 저 괴생물체는... 복날 님의 아바타 아닌가여?! ㅎㅎㅎㅎ
이글의 주제가 뭐에여????
와아.. 이런 고퀄과 저퀄이 공존하는 의식의 흐름 방식의 동화같은 소설같은 툭 뱉어 낸 글 너무 좋아요.
그럼 저도 저 괴생물체한테 소원 빌면 됩니까? 애인 생기게 해주세여!!!!
저는 꿈속에서 살고시퍼요
공게에 이렇게 귀엽고 훈훈한 얘기를 쓰시다니!
천사라는건 거짓말입니다. 사실 저는 로봇입니다. 로봇 물고기들이 낚시바늘애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
항상 눈팅만 해왔는데 정말 감명깊게 읽었어요 ㅎㅎ
가슴이 따듯해지고 동화같은 이야기 좋은데요~
저에게도 저런 일이 일어나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