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는 본인의 대단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여러 결함 덕분에 결국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성격이 벌인 최악의 막장짓인 서주대학살은 그의 인생에 여러가지 장애물을 안겨주었다.
즉 조조쉴더들의 서주학살 전략설을 따른다면 그 전략 아주 처절하게 실패한 전략이라는 소리다.
1. 근거지의 반란유발
당시 조조의 근거지는 연주지방이 였다.
헌데 조조는 연주에서 명망있던 변양을 살해하는 등 딱히 연주의 호족들을 배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조가 연주를 오랫동안 비우고 서주를 2번 공격하면서 백성들을 학살하는 동안
연주의 반 조조세력들은 세력을 결집시킬 시간을 얻게 된다.
그래서 결국 땅이 필요했던 무력 담당 애비셋,
조조가 자기 고향 연주 호족을 막대하자 화가 난 지략 담당 진궁,
원소와 척을 져서 원소의 부하격이었던 조조가 자기를 죽일까 불안했던 인덕 담당 장막이
힘을 합쳐서 연주지역에 반란을 일으키고 성 3개를 제외한 모든 연주 땅을 차지해버렸다.
결국 조조가 승리하긴 하지만 조조는 서주는 서주대로 얻지 못하고 본거지만 날려먹을 뻔했다.
2. 서주에 있던 인재들의 이탈
당시 서주는 대단히 풍요로웠고 장안과도 비교적 가까웠기에
당시 난리를 피해서 많은 사람들이 피난와 있었다.
헌데 거기서 조조가 30만명을 학살하면서 땅과 가축 등의 경제 기반까지 박살내자
많은 사람들이 살기위해서 형주와 강동으로 피난가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렇게 피난간 인물들 중에는
유비와 함께 촉나라의 기틀을 닦은 제갈량,
오나라의 충신들인 장소, 노숙, 제갈근이 있다.
결국 이들의 활약으로 세워진 촉과 오는 조조의 남진을 번번히 저지하기에 이른다.
한마디로 조조가 거기서 개판 좀 덜 쳤으면 이 인재들이 조조 밑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서주를 얻고도 제대로 쓰지 못하다.
훗날 애비셋의 등신짓 덕분에 조조는 결국 서주를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서주 사람들은 자기들을 도륙한 조조를 좋아할리가 없었고
훗날 유비가 조조를 배신하고 서주에서 세력을 모으자 금방 수만명의 병사를 얻을 수 있었고
원소와 싸울 당시에는 안그래도 원소보다 세력이 약한데
서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병력을 쪼개야 했다.
덧붙여서 더 훗날 오나라의 손권도 조조가 서주에서 인기 없음을 고려해서
서주를 얻기 위해서 합비를 여러번 공격했다.
뭐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였지만 말이다.
4. 민심을 아주 결정적이게 잃어버리다.
조조의 서주 대학살로 백성들에게는 조조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크게 나빠졌다.
그래서 조조가 점령한 지역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버리고 탈주하곤 했는데
첫번째는 조조에게 패한 원상이 오환족의 우두머리 답돈에게 피난하자 수만의 백성들이 그를 따라갔고
유비가 형주에서 피난갈 때 10만명의 백성들이 그와 함께 피난갔다.
물론 조조는 백성들의 인식 그런거 신경 안쓰고
원소군 수만명을 생매장시키거나 유비를 추격할 때 백성들도 같이 갈아버리는 짓을 저질렀고
이러한 조조의 행동은 조조가 세운 백성에게 친화적이지 않은 법률과 더불어서
위나라가 심심하면 민란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5. 유비의 대두
조조의 아치에너미 유비가 본격적으로 군벌로 성장한 계기도 서주대학살이다.
당시 유비는 공손찬의 객장 A 정도의 인지도만 가지고 있었지고
갈수록 막장짓만 골라서하는 공손찬을 손절할 각만 보고있었다.
그리고 조조가 서주를 공격할 때 공손찬의 동맹인 도겸을 도우러 파견되어 조조와 맞서 싸운다.
거기서 유비는 천명의 유민들을 구하면서 최후까지 남아서 조조군과 격렬하게 전투했고
서주 백성들의 인심을 크게 얻어서 마침내 본격적인 군벌로 독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유비는 그 후에도 조조를 기가막히게 엿먹이는 행보를 자주 보인다.
조조를 죽이라는 천자의 밀명을 빌미로 서주를 먹튀하기도 했고
원소와 싸울 때는 별동대를 이끌고 천자가 있던 허창 인근을 공격하기도 했으며
적벽대전과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의 천하통일 시도를 저지시킨 것도 유비였다.
결국 조조의 최대의 적이었던 유비를 성장시킨건 조조가 벌인 악행이었던 것이다.
저기에 두가지 더 하자면
저때의 일 때문에 서주에서 형주나 강남으로
백성들이 많이 도망치고
조조의 악명이 천하에 다 퍼져
이후 점령 지역의 민심 다스리기가 많이 힘들어짐
그리고 유비가 형주에서 도망칠때
형주 백성들이 조조의 악명을 무서워해
유비군을 따라 같이 형주에서 도망침
서주대학살 안 했으면..
유비고 손권이고 뭐고 그냥 다 조조 아래 찌끄래기들이었겠지
서주대학살이 없었으면 삼국지가 아니라 관도대전이후 조조의 한황실 찬탈기가 됐을수도 있었던건가...
서주가 장안이랑 가깝진 않은데;;
형주 익주 강남 등에 비하면 가까움
지도 열어보니 장안 서주사이는 뤄양만 지나가면 평야지대네 그나마 피난가면 서주긴 했겠군
그리고 옛날 춘추시대 제나라 땅이라
개발도 잘 되어있었고 물자도 농산물 생산도 풍부함
서주대학살 안 했으면..
유비고 손권이고 뭐고 그냥 다 조조 아래 찌끄래기들이었겠지
서주대학살이 무조건 실패다! 라고 단정지어 말할순 없음 왜냐면 그때 당시 조조는 사방이 적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세력은 약해서 언제 죽을지 몰랐음 본인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서주공략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는데 가능성은 매우 낮아보였음 오죽하면 서주 공략에 나서기 전에 조조가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울고불고 짜며 유서까지 준비해놓고 나갈 정도였음 본문에서 말한대로 서주는 풍요로웠기 때문에 당시 도겸의 능력은 조조의 몇배였고 이런 서주를 공략하기 위해 싹을 말려버릴 필요가 있었음 그리고 대학살은 그 효과를 발휘했고 조조는 그걸 기반으로 중원에서 살아남고 힘을 키워 위나라를 세울 수 있었음
하지만 본문에서 말한대로 서주대학살은 본인 미래에 큰 악영향과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성공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실패한 전략이라고 평하는게 가장 맞다고 생각함
대학살이란게 보통 점령후에 점령지에서 진행 가능한것 아님?
도겸이 몇배 더 강했다면 조조가 대학살하고 밀고 들어오는거 못막은게 이상한건데 ㄷㄷ
도겸은 조조에게 회전에서 패배하고 본거지에 틀어박혀서 안 나오고 있었음. 그 후 조조는 서주백성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고
서주 대학살은 한번하고 끝난게 아님 정확한 숫자는 기억 안나는데 약 5번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진행된거임 이것만 봐도 서주대학살은 감정적, 우발적으로 한게 아니고 서주를 파멸시키겠다는 철저한 의도 아래서 행한 짓임
대빵이 발려서 박혔으면 점령지를 구슬려서 뜯어내야 정상이라 보는데
감정적,우발적이란 커버도 없이 의도적으로 학살했다면 나비효과 먹을만한 진짜 진성 개객기였넹.
저기에 두가지 더 하자면
저때의 일 때문에 서주에서 형주나 강남으로
백성들이 많이 도망치고
조조의 악명이 천하에 다 퍼져
이후 점령 지역의 민심 다스리기가 많이 힘들어짐
그리고 유비가 형주에서 도망칠때
형주 백성들이 조조의 악명을 무서워해
유비군을 따라 같이 형주에서 도망침
추가해야겠군
서주대학살이 없었으면 삼국지가 아니라 관도대전이후 조조의 한황실 찬탈기가 됐을수도 있었던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