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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불펜에 제가 사랑하는 수필을 한 편 소개합니다.

 

이태준은 오랜 시간 우리 문단에서 금지된 이름이었습니다.

월북 문인이었기에 이름 세 글자를 다 부르지 못하고 교과서에도 '이x준'과 같은 형태로 실리던 작가죠.

제가 대학 시절에 이 양반이 해금되어 마침내 그 작품들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전설의 '문장강화'와 '무서록'을 손에 들게 되었던 그 때의 감동이란!

특히나 수필집 '무서록'을 읽고는 그만 반해버려서 그 책을 수십 권 사서 수 년간 제 지인들은 생일에 저에게 강제로 그 책을 선물받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창비에서 나온 얄팍한 문고판이었던 그 멋드러진 책에 실려있던 수많은 수필 중 그 책과 너무 잘 어울렸던 '책'이라는 제목의 수필을 소개할까 합니다.







 책(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더 책답다.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 책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건 책에게 너무 가혹하고 원시적인 평가다. 의복이나 주택은 보온만을 위한 세기는 벌써 아니다. 육체를 위해서도 이미 그렇거든 하물며 감정의, 정신의, 사상의 의복이요 주택인 책에 있어서랴! 책은 한껏 아름다워라, 그대는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또한 제왕이기 때문이다.

물질 이상인 것이 책이다. 한 표정 고운 소녀와 같이, 한 그윽한 눈매를 보이는 젊은 미망인처럼 매력은 가지가지다. 신간란에서 새로 뽑을 수 있는 잉크 냄새 새로운 것은, 소녀라고 해서 어찌 다 그다지 신선하고 상냥스러우랴! 고서점에서 먼지를 털고 겨드랑 땀내 같은 것을 풍기는 것들은 자못 미망인다운 함축미인 것이다.



 서점에서는 나는 늘 급진파다. 우선 소유하고 본다. 정류장에 나와 포장지를 끄르고 전차에 올라 첫 페이지를 읽어 보는 맛, 전찻길이 멀수록 복되다.

집에 갖다 한번 그들 사이에 던져 버리는 날은 그제는 잠이나 오지 않는 날 밤에야 그의 존재를 깨닫는 심히 박정한 주인이 된다.



가끔 책을 빌리러 오는 친구가 있다. 나는 적이 질투를 느낀다. 흔히는 첫 한두 페이지밖에는 읽지 못하고 둔 책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에게 속삭여 주려던 아름다운 긴 이야기를 다른 사나이에게 먼저 해 버리려 가기 때문이다. 가면 여러 날 뒤에, 나는 아주 까맣게 잊어버렸을 때 그는 한껏 피로해져서 초라해져서 돌아오는 것이다. 친구는 고맙다는 말만으로 물러가지 않고, 그를 평가까지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경우에 그 책에 대하여는 전혀 흥미를 잃어버리는 수가 많다.

빌려 나간 책은 영원히 노라가 되어 버리는 것도 있다.



이러는 나도 남의 책을 가끔 빌려 온다. 약속한 기간을 넘긴 것도 몇 권 있다. 그러기에 책은 빌리는 사람도 도적이요 빌려 주는 사람도 도적이란 서적 윤리가 따로 있는 것이다. 일생에 천 권을 빌려 보고 999권을 돌려보내고 죽는다면 그는 최우등의 성적이다. 그러나 남은 한 권 때문에 도적은 도적이다.



책을 남에게 빌려만 주고 저는 남의 것을 한 권도 빌리지 않기란 천 권에서 999권을 돌려보내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빌리는 자나 빌려 주는 자나 책에 있어서는 다 도적 됨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책은 역시 빌려야 한다. 진리와 예술을 감금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책은 물질 이상이다. 영양(令孃)이나 귀부인을 초대한 듯 결코 땀이나 때가 묻은 손을 대어서는 실례다. 책은 세수는 할 줄 모르는 미인이다.



책에만은 나는 봉건적인 여성관이다. 너무 건강해선 무거워 안 된다. 가볍고 얄팍하고 뚜껑도 예전 능화지(菱花紙)처럼 부드러워한 손에 말아 쥐고 누워서도 읽기 좋기를 탐낸다. 그러나 덮어 놓으면 떠들리거나 구김살이 잡히지 않고 이내 고요히 제 태(態)로 돌아가는 인종(忍從)이 있기를 바란다고 할까.

                                                                                                                                                    

                                                                                                                                                                                                                              “무서록(無序錄)”(1941)







이 글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이태준의 유머와 혜안에 그냥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며 읽던 젊은 날이 떠오릅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정서들을 어쩌면 이렇게도 재미나고 멋스럽게 써내는지 제가 아마 평생토록 따르고 배우고 싶은 문체를 발견한 순간이었을 겁니다, 그 이십 대의 젊은 날들은.

책을 여성에 비유하였으나 전혀 불쾌하지 않았고, 돌아오지 않는 책을 노라(아마도 '인형의 집'의 여주인공을 일컬음이겠지요)라고 칭하는 것도 너무도 웃겼고, 서점에서의 급진파라는 것에 동지애를 느꼈고, 양장본보다 페이퍼백의 문고판을 좋아하는 것까지도 어찌나 공감이 되던지요.

불펜에도 은근히 독서광들이, 거기에 애서가들이 있다고 느껴 제가 정말정말정말 사랑하는 수필(김진섭의 '백설부'와 더불어 최고의 읽을 맛이 난다고 생각하는 이태준의 수필들이올시다!)을 한 편 불펜에 올려봅니다.

댓글
  • 전광인 2019/11/14 03:43

    뭔가 지적이신분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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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레타 2019/11/14 03:44

    전광인// 걍 작가를 꿈꾸다가 국어선생이 된 사람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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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코와몰리 2019/11/14 03:47

    [리플수정]완전 공감되네요 ㅎㅎ 본문 읽다보니 간만에 책 한 권 읽고 싶어집니다. 요즘 들어 책을 멀리했었던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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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아지 2019/11/14 03:47

    가끔씩 그 네모난 존재감을 참을 수 없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읽다보니 아마도 그런분 아니였을까 싶네요
    저도 어릴적 좋아하는 책이 속해있는 공간을
    기다리면서 상상하면서
    시간 보내는것 조차
    너무 좋아했던적이 있어서그런지
    본문을 읽으면서
    즐겁다는 기분이 오래간만에 드는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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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코와몰리 2019/11/14 03:50

    이태준은 월북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인해 우리 문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입죠. 근현대 한국 단편 소설의 대부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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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레타 2019/11/14 03:50

    로코와몰리// 이태준의 '무서록' 한 권 들이시죠. 지금은 범우사에서 문고판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 열심히 영업중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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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레타 2019/11/14 03:51

    송아지// 공감해주시는 분이 있어서 글을 올린 보람이 있습니다그려.
    이것이 불펜 새벽반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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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레타 2019/11/14 03:52

    [리플수정]로코와몰리// 시는 지용이요 문장은 상허-라고 불리던 분이죠.
    소설들도 정말 훌륭합니다. 하지만 역시 저는 수필 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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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bridMan 2019/11/14 03:54

    이름은 많이 들어서 찾아보니 복덕방 패강랭 읽어보았었네요 올려주신 수필은 참 많은 죄책감을 덜어주네욯ㅎㅎ 쓰신 글 둘째문단이 와닿습니다 인테리어가 되는 책들이나 빌려온 후 십년이 지난 책들이나 물론 빌려주고 못받은 아이들도 있고 나는 아직 안읽었는데 빌려간다할때의 조바심 같은 겈ㅋㅋㅋ 정말 재밌네요!!!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지만 요즘 거의 안읽는데 참 멋진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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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몰츠보미 2019/11/14 03:54

    책은 저에게 마트 같은 곳. 저는 지인들에게 맞는 책을 한참을, 몇달을 그렇게 이따금씩 생각해보다가 마침내 찾아서 선물해주기 직전이 가장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 저는 진짜 재밌는 책은 선물안합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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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레타 2019/11/14 03:55

    HybridMan// 독서가라면 진짜 공감할 수밖에 없죠 그 부분..ㅋㅋㅋ
    그리고 글이 되게 유쾌하지 않습니까.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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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레타 2019/11/14 03:57

    스몰츠보미// 저랑 반대시군요.
    저는 학생들에게 책선물 참 많이 하는데 고심 끝에 그 녀석에게 도움되면서 재미있을 만한 책을 선물하거든요. 재미없어서 제 선물이 라면받침이나 마우스패드가 될까봐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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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ㅊsk 2019/11/14 04:29

    고등학생 시절, 이태준의 달밤이 교과서에 수록되었는데요. 수업에서 달밤이란 소설을 배우고서는 그날에만 수십번을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수필을 썼다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있었군요. 본문 글은 내일 일과 마치고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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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레타 2019/11/14 04:32

    ㅇㅊsk// 이태준의 소설이 좀 그런 경향이 있죠. 패강랭도 읽다보면 이거 수필인데 싶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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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ㅊsk 2019/11/14 04:35

    베레타// 개인적으로 그런 류의 소설들을 좋아하는지라.. 취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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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엘트 2019/11/14 04:43

    도서관 의문의 상도적 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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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짱슈 2019/11/14 04:46

    이런 지적 허영 혹은 사치를 맘껏 표현할 수 있는 저 천재성과 자유가 부럽네요
    요즘은 조금만 깊게 파고들어도 오글거린단 말을 듣는 시대라 오히려 자유가 구속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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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레타 2019/11/14 04:52

    짱슈// 저도 엠팍질 십여 년 하면서 '오글거린다'는 말에 첨에는 상처 좀 받고 그랬는데 그냥 당당하게 오글거리는 글을 쓰며 오글오글 행복하기로 맘 먹었습니다.
    그 '오글거린다'와 '세줄요약'과 '쿨'이 끼치는 해악이 상당하다고 종종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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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똑똑 2019/11/14 05:01

    오 좋네요~ 저런 류의 수필 저도 좋아라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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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데쿠 2019/11/14 06:31

    좋은 수필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
    음악도, 영화도, 그림도 디립다 예전 구닥다리 고전만 좋아하는 아재가 왠지 사물로서의 책에 대한 애착만큼은 그닥 공감하지 못하는 건 무슨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책과 글은 구분해야 하고, 글은 세대를 넘어 공유되어야 한다고 믿으나, 책은 이제는 떠나 보내야 하는, 사유와 감정을 소통하던 매개체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좋아하던 특정 상업 모델인 모바일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튕기면서 읽어 내려가는 좋은 문장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사물로서의 폰과 PC 에 대해서 이태준씨의 이 수필과 비슷한 애착을 느낀다면 다른 분들이 공유하기 힘든 감정일까요.
    기우에 보태는 말씀인데, 글 쓴 분한테 딴죽 걸 의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한번 더 해볼 기회가 되어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무서록(無序錄) 이라는 제목이 참 좋네요. 수필집 제목에 너무 어울립니다. 부담없이, 순서도 없이, 그저 떠오르는데로 써 나가 보노라, 이런 뜻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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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풍선빈 2019/11/14 08:17

    덕분에 오랜만에 다시 한 번 읽게되네요.
    잘 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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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빈과영하 2019/11/14 09:57

    [리플수정]좋은 글 감사합니다.
    출퇴근시간 손에 책을 들고 읽는 저로써 너무 무거워 안된다는 말에 너무너무 공감하고 갑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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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ustin 2019/11/14 10:33

    책은 세수를 할줄 모르는 미인이란 글귀가 눈에 들어오네요 ㅎㅎ
    좋은글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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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r라됴헤드 2019/11/14 11:33

    좋은 글 잘보았습니다...한때는 저도 문학소년이었는데 ㅎㅎ
    오랜만에 기분 좋은 수필 읽었네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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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은혐 2019/11/14 13:49

    이 수필 ㅇㅈ합니다 공부하다 본게 다긴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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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언93호 2019/11/14 15:02

    문장강화 명저죠... 지금 시대에 봐도 통용되는 훌륭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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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멜라니로랑 2019/11/14 15:11

    중학생 때 책을 빌려간 친구놈이 있었죠. 일반 모조지가 아닌 아트지 부분을 붙였던 본드가 그 우악스러운 손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왔습니다.
    페이지 사이에 가지런히 간수되지 못하고 삐뚤빼뚤 나온 흐트러진 책의 자태를 보면서 흡사 뫼르소의 살의를 느꼈었는데
    아마 그 때 어떠한 위해를 가했더라도, 이태준 선생께서는 저를 변호해줬으리란 믿음이 서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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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lythew 2019/11/14 15:15

    좋은글에 좋은 댓글.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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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ajra 2019/11/14 17:44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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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냉동참치 2019/11/14 17:46

    결이 조금 다르지만 서정주 시인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어요. 시만 보면 정말 어떻게 저렇게 쓰지 하는데 악마의 재능이 저런 걸까 싶네요. 요즘 학교에서는 서정주 시인 가르칠 때 어떻게 가르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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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도사줄게 2019/11/14 17:47

    감사합니다. 자주 좋은 책 추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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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eatime 2019/11/14 18:02

    수필 재밌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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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르륵 2019/11/14 19:03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태준 작가 책 빌려봐야겠네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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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나대로 2019/11/14 19:44

    제목만 보고 베레타님일까 생각했습니다.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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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대문구장 2019/11/14 22:15

    성북동에 있는 이태준의 고가를 여러번 찾았던 적이 있어요.
    저렇게 다정다감한 작가가 월북작가로 쫏겨가야 했던 해방전후의 잔혹한 현실이 마음을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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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현종 2019/11/14 22:40

    이태준의 문장강화
    대학시설 텍스트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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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냉커피 2019/11/14 22:53

    잘 읽었습니다.
    책 냄새, 표지의 재질, 손에 느껴지는 무게, 책장 넘기는 느낌과 소리...책읽는 즐거움의 일부죠.
    혹시 서재 결혼시키기(앤 패디먼) 아직 안읽으셨으면... 재미있어요...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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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레타 2019/11/15 01:37

    읽어주시고 좋은 말씀들 남겨주신 분들, 조용히 추천 주신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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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수리V2 2019/11/15 02:59

    좌담 제목만 보고 닉네임 하나가 스쳤는데 제 촉이 맞았네요 ㅎㅎ 좋은글 감사합니다 잘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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