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대규모 폭격 기간 동안 폭발물, 방화 폭탄, 네이팜탄과 같은 재래식 무기는 건물의 약 85%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국가의 도시와 도시를 파괴했다. 민간 인구 가운데 사망자는 약 2백만명으로 추정되며,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 폭탄 공격(40만 ~ 60만명의 민간 사망자)과 일본 (33만 ~ 30만명 의 민간 사망자)의 사망자 그 이상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2차 대전 중 일본이나 독일의 폭격으로 인해서 파괴된 도시보다 북한의 폭격으로인해서 파괴된 도시가 더 많다는 사실을 완전히 모르고 있다.
Cumings는 북한 도시에 대한 무차별 카펫 폭탄 테러로 미국을 비난했다. 미국인들은 한국 전쟁에 대해 많이 이해하거나 알지 못한다. 반면에 북한은 1945년 미국에 점령된 이래로 일어난 모든 일에 시시각각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미군은 인구가 많은 도심에 대한 미국의 공중 폭격 외에 적어도 100명 그리고 아마도 수백명의 난민을 살해한 노근리 학살 사건과 같은 민간인의 직접 표적 작전에도 관여했다.
북한 민간인 사망자에 대한 가장 완전하고 문서화 된 최근의 추정은 남북 전쟁 연구 센터 (CSCW)와 국제 평화 연구소인 오슬로 (PRIO) 연구원이 개발 한 PRIO 전투 사망자 데이터 세트 (PRIO Battle Deaths Dataset)이다. PRIO Battle Deaths Dataset 연구원은 다양한 출처를 가진 자료를 평가한 결과 북한의 민간인 사망자는 995,000건이라고 결론 지었다. CNN은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Encyclopædia Britannica)이 북한 민간인 사상자가 60만명이었고 민간인 사상자가 100만명에 달했다고 언급하면서 보도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총 990,968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추정했으며 콜롬비아 대학 한국 연구센터 소장인 찰스 암스트롱 (Charles Armstrong)은 전쟁에서 북한 주민의 12-15%, 약1,167,000 명에서 1,459,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추정했다.
미국은 32557 톤의 네이팜탄을 포함하여 총 635,000 톤의 폭탄을 한국에 떨어 뜨렸다. 비교해보면 제2차 세계 대전중 태평양 연안에서 503,000 톤이 떨어졌고, 롤링 썬더 작전중에는 1967년 12월 31일까지 북 베트남에서 864,000 톤이 떨어졌고 1969년에서 1973년까지 캄보디아에 50만톤이 떨어졌다. 1950년 10월, Stratemeyer 총사령관은 "도시의 가장 넓은 지역에서, 경고없이, 네이팜탄으로 인구 6만명의 가장 큰 도시이자 수도인 신의주를 공격 할 수 있는 권한을 요청했다." 트루만은 한국에서 원자 폭탄 사용을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했지만, 중국인은 이 위협에 감동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커티스 르메이 (Curtis LeMay) 미 공군장은 "우리는 그곳으로 가서 싸우면서 어쨌든 북한의 모든 마을을 어떤식으로든 불태웠다, 그리고 일부는 한국에서 태웠다"고 밝혔다.
석기류 화합물은 도시를 가로질러 동시에 불규칙하게 도시를 휩쓸었다.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가는것이 불가능할정도로 폭탄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둘째날까지 7,812명의 시민들의 집이 날라갔다. 미국인들은 평양에 어떠한 군사적 목표도 없다는 것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공군 사령관인 커티스 르메이 공군 장군은 1984년 공군 역사 담당관에게 3년 정도 동안 인구의 20%를 죽였다. 전쟁의 후원자이자 국가 비서관 인 딘 러스크 (Dean Rusk)는 미국이 북한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을 폭격했다고 말했다.
사용된 폭발물의 수는 놀라울정도이다. Tom O'Connor가 Newsweek에서 언급한것처럼 "미국 32557톤의 네이팜탄을 포함 해 635,000톤의 폭탄을 북한에 떨어 뜨렸다. 두 도시를 파괴하기 위한 일본의 핵폭탄을 훨씬 뛰어넘는정도라고 하였다. 32,000톤의 네이팜탄을 포함하는 카펫 폭격은 때로는 민간 및 군사 목표를 의도적으로 겨냥하기도 하였다. 미국 조종사는 "북한에서 그냥 폭탄을 터뜨린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전투기는 농장, 댐, 공장 및 병원을 폭격했다. 은퇴한 미군 요원을 인터뷰를 해본 결과 북한 폭격의 실태는 듣던것과는 다른것이였다 "모든 것을 없애라"고 들었다.
2차 세계대전 중 영국 인구는 0.94%, 프랑스는 1.35%, 중국은 1.89%, 미국은 0.32% 감소했다, 한국 전쟁 중에 북한은 인구의 30% 가까이를 잃었다, 북한의 인구는 1950년 한국 전쟁 이전에 8천 900만 명이었다. 미국의 소식통은 북한의 민간인 사망자가 15만 5천명이며 전투 사망자는 215,000명임을 정식으로 인정했다.
한국의 군사 소식통은 민간인 사망자 수/부상자/실종자 수를 250만명으로 추산했으며 그 중 990,900명은 한국(남한)의 사상자로 추측했다. 르메이가 20%의 사상자를 냈다고 추측한것과 다른 자의적인 추측으로 나온 결과였다.
North Korea:
NoKo Military
130,000 KIA (Pentagon: ¼ “KWM”) 294,151 (Nahm93) 214,899 KIA + 101,680 MIA (Wallechinsky; Clodfelter, citing [“highly suspect”] Defense Dept. est.) [=316,579] 316,579 (COWP) 350,000 (Rummel) 520,000 (Small & Singer, FAS) [MEDIAN: 316,579]NoKo Civilian
406,000 killed + 680,000 missing (Nahm93) Up to 1,000,000 (Wallechinsky; Clodfelter) 1,185,000 (Rummel) [MEDIAN: 1,000,000]NoKo Military + Civilian
500,000 (Britannica) 700,000 (Dictionary of 20C World History) 926,000 (Compton’s) 1,316,579 (Wallechinsky; Clodfelter) 1,380,151 (Nahm93) 1,535,000 (Rummel) [MEDIAN: 1,316,579]https://users.erols.com/mwhite28/warstat2.htm
이 사상자 수는 전쟁 자체에서 사상자 수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입증 가능한 사실에 관한 것이다.
북한지역 폭격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해당지역주민들의 진화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소이탄 투하 후 전폭기의 기총소사를 실시하거나 다양한 시간간격의 시한폭탄을 소이탄과 동시에 투하했다는 것이다. 극동공군은 표현 그대로 북한 도시와 농촌의 '초토화'를 기도했다.
미군인들이 노근리에서 400명의 민간인을 살해하도록 한 정책 (7월 26일 - 29일) 1950년),
남한지역 초토화 작전의 진행과정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시술 중 하나는 이 시기 폭격기 조종사들이 남한 내 작전구역 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사실상 적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적지않는 전폭기 임무보고서의 적정 항목에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people in white)이 기록되어 있었고, 이 같은 지역에는 어김없이 대규모 네이팜탄 폭격이 진행되었다.
산성동 폭격에 관여한 또다른 정찰관 네빌은 "우리는 지상의 움직이는 모든 사람이나 물건은 아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51년초, 미공군은 적 점령하의 남한지역 민간인들을 사실상 적 병력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뉴욕타임즈의 종군기자 배럿(G. Barrett) dms 1951년 초 경기도 한양부근의 어느 농촌 마을을 방문한 후 다음과 같은 기사를 작성했다
중국군이 마을을 점령하기 3~4일전에 마을에 대한 네이팜탄 공격이 진행되었다.
마을 어느 곳에서도 시체가 매장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를 행할 사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연히 1명의 늙은 여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곳에 생존한 유일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 4명의 시신으로 가득 찬 검게 그을린 마당 안에서 몇벌의 옷을 부여진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주민들은 마을 전체와 들판에서 발견되고 사살되었다.
그들은 네이팜탄 공격을 당했을 때 취했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한 남성은 막 자전거를 타려는 참이었고, 50명의 소년과 소녀는 고아원에서 뛰놀고 있었으며, 한 가정주부는 이상하게 아무 상처도 없었다. 약 200구의 시체들이 그 작은 마을에 놓여있었다.
"나는 임무에서 돌아온 조종사들이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가는 여인을 쏘아서 그녀의 몸이 터지는 장면을 보았다고 으스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상군의 후퇴에 따라 극동공군의 초토화작전의 범위도 자연스럽게 남한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학살 조사 사례 중에는 1951년 초 미공군의 소이탄 공격에 의한 대규모 집단희생 사례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주로 1951년 1월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강원 · 경기 · 경북 · 충북 지역 폭격 피해 사례들은 사실상 1950년 11월 맥아더의 지시에 의한 초토화작전의 남한지역으로의 확대를 의미했다.
Reference :
https://en.wikipedia.org/wiki/Bombing_of_North_Korea_1950-1953
https://en.wikipedia.org/wiki/Korean_War
https://www.vox.com/2015/8/3/9089913/north-korea-us-war-crime
Strategic Air Warfare : An Interview with Generals (1988)
https://www.newsweek.com/us-forget-korean-war-led-crisis-north-592630
태풍 관련으로 겁나게 뇌절하는 와중에
요즘도 르메이를 저런 이유로 빨고 있는 사람들이 보여서
한번 읽어보라고 올림
애초에 르메이도 일본 민간인 지구 불태운걸 깔깔대고 박장대소하라는게 아니라 전쟁중에 불가피한 비극적인 희생이라고 말했는데 인터넷으로 전쟁배운 사람들은...
저새끼 쉐프님 ㅇㅈㄹ하는 놈들함테 뭐라하니까 비추박히던데
일본에서 전쟁 가볍게 얘기하면 비웃으면서 똑같은 짓을 하는데 한-심
일본 우익 보고 인터넷으로 전쟁 배운 세대라면서 비웃으면서 정작 지들 얼굴에 묻은 똥은 안 보이나 봄ㅋㅋ
도쿄핫이 아니라 조선핫이었던거임
도쿄핫이 아니라 조선핫이었던거임
애초에 르메이도 일본 민간인 지구 불태운걸 깔깔대고 박장대소하라는게 아니라 전쟁중에 불가피한 비극적인 희생이라고 말했는데 인터넷으로 전쟁배운 사람들은...
일본에서 전쟁 가볍게 얘기하면 비웃으면서 똑같은 짓을 하는데 한-심
일본 우익 보고 인터넷으로 전쟁 배운 세대라면서 비웃으면서 정작 지들 얼굴에 묻은 똥은 안 보이나 봄ㅋㅋ
저때의 북한쪽 민간인은 10년도 안된 분단되었던 서로의 가족들이었겠지...
저새끼 쉐프님 ㅇㅈㄹ하는 놈들함테 뭐라하니까 비추박히던데
지금도 박히네
사람 죽는 걸 아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