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조선 말의 야담집인 청구야담에 실린 내용 중 일부입니다.
현종 임금 때, 안동 부사와 가선대부를 지낸 맹주서(孟冑瑞)는 산과 물을 좋아하여 자주 등산을 했는데, 한 번은 금강산에 올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산 깊은 곳에는 웬 암자가 있었는데, 그곳은 어느 늙은 승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늙은 승려는 나이가 족히 100여 세는 되어 보였으나, 매우 건강하고 정신도 맑아 사람을 대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맹주서는 암자에 며칠 동안 머물렀는데, 어느 날 그 승려가 상좌승을 불러서 “내일은 내 스승의 제삿날이니 준비를 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제사를 지내는데 늙은 승려는 지극히 슬퍼하며 울기에, 맹주서가 이상하게 여겨 “스님을 가르친 스승님이 누구이며 무슨 연유로 제사를 지내며 이리 슬퍼하는 것인지요?”라고 묻자, 승려는 놀라운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본래 조선 사람이 아니라 일본 사람이오. 나의 스승도 중이 아니라 조선의 어느 선비였소. 임진년 이전, 일본에서 조선을 침범하기 위해 미리 첩자 8명을 보내 조선 8도의 자연 지형과 도로와 내부 사정 등을 염탐했는데, 내가 그 첩자들 중 한 명이었소.
나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일본에서 미리 조선말을 배웠고, 조선 승려의 복장을 입고서 조선으로 침투했소. 처음에는 조선의 금강산이 명산이라고 하니, 그 산에 들어가 일이 잘 되기를 기도한 후에 각자 흩어지자고 뜻을 모으고 금강산으로 들어갔소.
그렇게 해서 약 열흘 동안 일행과 함께 동행을 했는데, 회양 땅에 도착하자 어느 조선 선비 한 명이 황소를 탄 채로 우리 앞에 가까이 오는 모습이 보였소.
그러자 나와 함께 동행한 첩자들 중 한 명이 '우리가 연일 굶주려 배가 고픈데 저 선비를 죽이고 그가 탄 소를 잡아먹어 배를 채우자'라고 말하며 선비에게 달려들더이다.
그러자 그 선비는 분노하여 ‘너희들이 어찌 이리 무례하게 구는가? 너희들이 왜국의 간첩인 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너희들은 모조리 죽여야 마땅하다.’라고 외쳤소.
그 소리에 나와 다른 동료들이 모두 크게 놀라서 일제히 칼을 빼어들고 달려들자, 그 선비는 귀신 같이 다리를 날리고 주먹을 휘두르며 우리들 중 다섯 명의 머리를 부수고 사지를 부러뜨려 죽였소.
나를 포함한 남은 세 명은 간신히 살아남아 땅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빌었고, 그 선비는 너희들 세 명이 진심으로 항복하려 든다면 나를 따르라, 고 말하며 우리 셋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소.
그리고 ‘너희가 비록 왜국의 첩자이나 진심으로 항복하였으니 해치지 않겠다. 내가 너희에게 검술을 가르칠 테니, 만일 왜군이 쳐들어오면 너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적을 막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들도 이 나라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다.’라고 설교하면서 우리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같은 집에서 먹고 자고를 하였소.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선비가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로 죽임을 당했더란 말이오. 나는 너무나 놀라서 어찌된 일인지 두 명의 동료들에게 영문을 물어보니 그들은 ‘비록 저 자를 섬겨 검술을 배웠으나 같이 온 다섯 명의 동료가 형제 같은 사이였은즉 원수를 갚을 틈을 오랫동안 엿보다가 이제야 저 자에게 빈틈이 보여 죽였다.’라고 말하였소.
나는 그 소리를 듣고 화가 치밀어 올라 ‘우리가 저 선비 덕분에 목숨을 건져서 이렇게 살아남았고 그 은혜가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 같은데, 어찌 원수를 갚는다 하여 이런 나쁜 짓을 하였느냐?’하고 꾸짖으며 그 둘을 모두 죽이고 금강산에 들어와 이렇게 중이 된 거라오.
암자를 얻고 나이가 백여 세가 되었지만 아직도 내 스승의 재주와 뜻을 안타깝게 여겨서 슬픔이 크고, 스승이 죽은 날을 기려 지금까지 계속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오.”
다 듣고 난 맹주서는 감탄하여 늙은 승려에게 “혹시 검술을 잠깐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고, 승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늙고 몸이 쇠약해져 검술을 그만둔 지 오래되었으나, 보기를 원한다면 며칠 동안 기다리시오. 그동안 내 몸에 어느 정도 힘이 되돌아 왔을 것이오.”
그리고 며칠 후, 승려는 맹주서를 불렀습니다. 그는 열 그루의 잣나무 앞에 서서, 소매 속에 감춰둔 길이 두자 남짓한 칼 한 자루를 꺼내고는 그것을 들고서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 칼을 휘둘렀는데 마치 공중에서 번갯불이 일어나는 듯 했으며, 잣나무 잎이 비처럼 떨어졌습니다. 아래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맹주서는 너무도 놀라서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검술 보여주기를 다 마친 늙은 승려는 나무 아래 내려와 가쁜 숨을 쉬며 말하기를 자신의 힘이 쇠약해져 젊었을 때만 못하다, 내가 젊었을 적에 이 나무 아래서 칼춤을 추면 잎을 가는 실처럼 베었는데 이제는 온전한 잎이 많구나,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맹주서가 승려를 가리켜 “선사께서는 참으로 신기한 재주를 가지셨습니다!”라고 감탄하자, 늙은 승려는 “내가 얼마 후에 죽을 것인데, 차마 내 재주를 썩힐 수가 없어서 그대에게 보여준 것이오.”라고 겸손한 자세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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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금강산 왜인 승려’ 편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조선인이 아니라 외국인이라는 점에서 조선 시대의 야담들 중, 다소 특이한 경우에 속합니다.
뛰어난 칼솜씨를 지닌 일본군 병사가 중이 되어 금강산으로 숨어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실제 역사적 사건인 임진왜란 무렵, 조선에 귀순한 일본군 병사들인 항왜(降倭)들의 사례에서 동기를 얻어 탄생한 듯합니다.
임진왜란 관련 기록들을 살펴보면, 항왜들의 검술을 보고 충격을 받은 조선인들의 일화가 자주 등장합니다. 1594년 8월 2일자 에 보면 사고수계(沙古愁戒)와 간내비운소(幹乃飛雲所)라는 항왜들이 검술에 뛰어나 조선의 검술을 보며 “어린이들 놀이 같다.”라고 비웃었다고 하며, 1594년 12월 27일자 에서는 선조 임금도 “왜인의 검술은 대적할 자가 없다.”라고 감탄했다고 언급되었습니다.
이는 그동안 조선군이 지나치게 활쏘기에만 집중하다 보니 검술 같은 근접전 전투 기술 연마에 소홀히 하였던 탓이었습니다.
이처럼 탁월한 검술을 지닌 항왜들은 임진왜란 이후, 청나라에 대비하기 위해 북쪽으로 옮겨져 장수 이괄의 휘하로 들어갔다가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그를 따라 반란에 가담하여 관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고 한때 수도 한양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정황을 묘사한 기록에 의하면, 반란군의 선봉에 선 항왜들이 날카로운 일본도를 휘두르며 돌격해오자 관군들이 모두 달아나버려 도저히 맞서 싸울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그만큼 왜인들의 검술은 조선인들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한편 금강산 암자에 살던 승려가 일본군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약간 비현실적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임진왜란 와중에 항복하여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땅의 백성으로 남은 왜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맹주서와 승려 이야기도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조선에 항복하거나 혹은 숨은 왜인들 중에서 일부가 금강산으로 흘러들어가 승려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겁나 재밌네 !!!!!!!!
너무 재미있게 잘 읽어쑴다
이런 얘기 저아~ ㅎ
우왕 또 올려주세요ㅎㅎ
잼!!!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재밌어요 감사합니다ㅎㅁㅎ!!
유튜브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사에 임진왜란편에 항왜 이야기가 조금 나왔었는데 재미있던데요.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불만을 품은 왜군중 일부가 조선에 투항한게 항왜인데,
신하들이 잡아 죽이자고 하는 것을 선조가 기회를 주자고 해서 살렸다는군요.
칼솜씨가 뛰어나고 전투를 잘하니까 반란 일으키면 위험하다고 신하들이 끊임없이 난리쳐서
결국 북쪽에 보내서 여진족 소탕하는데 투입하는데,
감독역할로 같이간 조선관료가 보고서를 올리는데, 진짜 칼솜씨가 귀신같고 용맹하게 잘싸워 여진족이 상대가 안된다고,
결국 너무 위험하니까 일찍 죽이자고 건의했다네요.(조선은 중기부터 진짜 문제가 많아진 듯...)
이괄의 난에 가담한게 아마 자의반 타의반일 듯하네요.
하도 조선에서 푸대접 받으며 계속 죽이려고하니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하면서
반란군쪽에 들어간 듯 싶어요.
이런거 좋다 많이 올려주세요
지나가는 선비가 또....
무예도보통지에도 왜검 관련 언급이 있더군요 ㅎㅎ
한중일, 3국의 대표 무예가 궁술, 봉술, 검술이고
왜가 검술에 뛰어난 이유는 틈만나면 칼을 휘둘러보고 연습을 하기 때문이라고 적혀있었던 걸로 기억이 나는군요.
책에서도 왜검 한 파트 따로 줘서 왜검을 익히게 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