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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슈뢰딩거의 화장실

휴일의 낮. 컴퓨터 게임을 즐기던 사내의 원룸에 예정 없던 벨 소리가 울렸다.

' 띵-동 '

인터폰 너머의 여인은, 사내도 알고 있는 여자였다.
3층 집 여자.

" 무슨 일이시죠? "
[ 저, 저기.. 죄송한데, 화장실 좀 쓸 수 없을까요? 저희 집 화장실을 지금 쓸 수가 없어서요.. ]

많이 긴장한 듯한 여인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사내는 고민했다. 솔직히 대화 한 번 나눈 적 없었던 낯선 이웃을 집 안에 들인다는 게 꺼려졌다.
그래도, 같은 건물에서 그 정도 배려는 해야 한다는 판단에,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 예 들어오세요.. "
[ 감사합니다.. ]

집 안으로 여인이 들어왔을 때,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여인의 몸을 보았다.

뚱뚱했다. 
가끔 지나다니면서 볼 때도 느꼈지만, 3층 여자는 정말 뚱뚱했다.

" 저기가 화장실입니다. "
" 예에...감사합니다.. "

거의 창백하다시피 한 여인의 긴장된 얼굴은, 사내에게 많은 짐작을 하게 했다.
여인이 황급히 화장실로 들어가고, 사내는 곧바로 두 가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나는 안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물을 트는 소리였다. 후자는 사내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대변이구나! 
사내는 자신의 집 변기 위에 앉아 변을 볼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기분이 안 좋아졌다.
그렇게까지 깔끔을 떠는 성격도 아니었건만, 이상하게도 그랬다. 

찜찜한 얼굴로 돌아서, 컴퓨터로 가 앉는 사내. 게임 동료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뚱뚱한 3층 여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농담처럼 해대면서 말이다. 
어차피 얼굴도 모를 온라인이고, 3층 여자가 볼일도 없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뚱뚱함을 소재로 떠들어댔다.

그러길 5분, 10분, 15분.

" ? "

사내는 미간을 찡그리며 화장실을 돌아보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싸는 거야?
짜증이 피어났다. 게임 동료들은 빨리 게임에 합류하라고 난리인데, 화장실에 들어간 여인은 깜깜무소식이니!
귀를 기울이면 들려오는 물소리는, 아직도 여인이 대변을 보는 중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혹시 화장지가 없나? 아니, 아침에도 있었다.
그러면 변비? 남의 집에서 그럴 리가.

사내는 얼굴에 노골적인 짜증을 드러내며, 다시 채팅으로 시간을 때웠다. 
좀 더 노골적으로, 뚱뚱한 3층 여자에 대한 욕설을 토해내며 말이다.
한데, 

" 뭐야 진짜...? "

30분이 넘도록 여인은 나오지 않았다.
한가지, 무서운 가능성이 사내를 중얼거리게 했다.

" 아씨, 변기 막힌 거 아니야? "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처럼 뚱뚱한 여자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그게 아니라면, 여태껏 안 나올 이유가 없었다. 물까지 계속 틀어놓고!

사내는 진심으로 짜증이 났다. 끔찍할 변기의 광경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밀려왔다.
거기서 10분의 시간이 더 흐르자, 사내는 확신했다. 

변기가 막혔구나! 저 뚱뚱한 여자가 우리 집 변기를 막아버렸구나!

" 아~씨...! "

어쩔까? 가서 말을 걸어봐야 할까?
망설여졌다. 짜증 나는 일은 저 여자가 저질렀는데, 왜 민망함은 자신의 몫이란 말인가?!
사내는 여인이 알아서 수습하고 나오기를 바라며 조금 더 기다렸다.
그러면서 게임 채팅으로 여인을 욕하며, 이 상황을 어떻게 할까를 물었다.

그때, 게임 속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 계속 들린다던 그 물소리가 혹시, 욕조에 물 받는 소리 아니야? ]

" ? "

사내는 의아한 얼굴로 잠깐 생각해보다가,

[ 맞네! 욕조에 물 받았네 ㅅㅂ! 물값 내고 가라고 해야 하냐? ㅋㅋㅋ ]

장난스럽던 사내의 채팅과는 달리, 돌아오는 채팅은 충격적이었다.

[ 그럼 그거, 변기 막힌 게 아니라... 욕조에서 자살한 거 아니야? ]

" 뭐?? "

일순간, 사내는 멍해졌다. 자살? 자살이라고??

[ 뭔 개소리야 그게? ]
[ 욕조에 물 받아놓고, 손목 그어서 자살한 거 아니냐고. 자살할 때 다들 그렇게 하잖아. ]
[ 미친! 누가 남의 집 화장실을 빌려서 자살을 해? ]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내의 머릿속에는 아까 전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딘가 창백해 보이고, 불안정해 보이던 모습. 단순히 대변이 급해서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불안해졌다.

[ 아 ㅅㅂ! 개소리하지 마! 누가 남의 집에서 자살을 하냐고! ]
[ 모르지? 혹시 너한테 복수하려고? 짐작 가는 일 없어? ]
[ 무슨! 그 여자랑 얘기도 한 번 해본 적 없는데! ]
[ 한번 잘 생각해 봐. 네가 아까 그 여자 욕한 것처럼, 현실에서도 막말한 거 아니야? ]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억지로라도 3층 여자와의 마주침을 떠올려봤다.
그러다 순간,

" ! "

한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며칠 전의 일이 생각났다. 계단 위로 지나간 그 여자를 보고 무심코 내뱉었던 그 말,
 
' 와~ 저렇게 뚱뚱하면 살기 힘들겠다 진짜. '

들었을까? 그게 들렸을까? 그것 때문일까??
그렇다고 해도!

[ ㅅㅂ! 그깟 말실수 한번 했다고 우리 집에서 일부러 자살을 한다고?! 그게 말이나 되냐?! ]
[ 말실수했다고? 그럼 그럴 수 있지. 우울증인 사람들이 얼마나 예민한 줄 알아? 너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말 한마디였어도, 상대방은 죽고 싶어질 만한 상처로 느껴질 수도 있어. ]

" 아 시바... "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도 희미하게 계속 들리는 물소리가 더욱 불안감을 고조시켰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화장실로 향하는 사내! 문 앞에서 잠깐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 저기요...? "
" ... "
" 저기요? 저기요? "
" ... "

사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아무 대답도 없단 말인가?
얼른 컴퓨터로 돌아가서 떨리는 손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사내!

[ ㅅㅂ! 불러도 대답이 없다! 뭐야 이거? 진짜 자살이라도 한 거야? ]

한데,

[ 모르지? 그냥 변기 막힌 게 수습이 안 되니까, 창피해서 말을 못 하는 걸지도. ]
[ 뭐라고? ㅅㅂ! 아까는 자살이라며! ]
[ 아무리 그래도, 남의 집 화장실을 빌려서 자살한다는 건 이상하잖아? ]
[ 아 ㅅㅂ 진짜! ]

사내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장난을 받아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한데 더 어이없는 것은,

[ 슈뢰딩거의 고양이 알지? 지금 화장실 안의 상태는 자살일 수도 있고, 변기가 막힌 걸 수도 있어. 네가 문을 열기 전에는 알 수 없지. ] 

" 뭐라는 거야?! "

사내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욕설을 치려던 그 순간-,

[ 그 안의 결과는, 네 마음에 달린 일이 아닐까? ]
[ 뭐? ]
[ 생각해 봐. 처음에 네가 변기가 막혔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뭐야? 그녀가 못생기고 뚱뚱해서? ]

" ! "

[ 그다음에, 내 말을 믿고 자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이유는 뭐야? 네 말실수가 정말로 큰 상처를 줬을지도 모른단 죄책감 때문에? ]

" 아... "

[ 그 문을 열기 전에는 자살인지 변기가 막힌 건지 알 수 없어. 하지만, 네 두 가지 생각 중에 어떤 것을 믿을지는 문을 열기 전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

" ... "

사내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름도 모를, 처음 보는 누군가의 채팅을 가만히 보았다.

말없이 돌아선 사내는, 화장실 앞으로 향했다. 
정중하고, 친절하게 말했다.

" 저기-, 혹시 변기가 막혔습니까? 괜찮습니다 원래 자주 막힙니다. 제가 나중에 처리하겠습니다. 혹시 조금 민망하시다면, 저는 지금부터 근처 슈퍼에 갔다 올 예정이니, 그사이에 나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
" ... "
" 괜찮습니다. 다 괜찮습니다.. "

사내는 괜찮다는 말을 몇 번 더 하다가, 현관문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갔다.
사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화장실 안에 여인은 없었다.
다만, 

" ... "

변기는 깨끗했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너무나도 깨끗했다. 

부끄러운 사내는, 그녀에게 감사했다. 
댓글
  • 복날은간다 2017/02/18 09:01

    벌써 2월 중순;
    머리가 복잡해지네요;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잘 하고 있는 건지ㅎㅎ;;
    항상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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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nebwbxksk 2017/02/18 09:32

    으. 자살했을까봐 무서웠다는....
    저도 잘 살고 있는 것 같지가.... 숨쉰다고 다 사는 거 같지가 않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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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베 2017/02/18 09:36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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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이내린미모 2017/02/18 10:03

    복날님!!! 그거 아세요? 네이버에서 오유 검색하면 제일 위에 오유 복날은간다 완성 떠요ㅎㅎ그만큼 복날님 글을 보기위해 오유 오는 사람이 많다는 인증이 아니겠어요? 애독자들 생각하며 힘내세요!! 재밌는 글 보게 해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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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뿔82 2017/02/18 10:26

    아싸! 오랜만에 토했다 나를 통해 베슷흐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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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nz 2017/02/18 10:37

    잘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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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rmione 2017/02/18 10:51

    으앙ㅠㅠ
    이런 느낌의 글도 좋네요...
    저도 자살한걸까봐 조마조마했는데
    마지막 부분 보면서 그 여자분이 살아줘서 고맙다 싶었어요. 자살할 마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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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가가 2017/02/18 10:56

    채팅창의 이름모를 누군가가 화장실 안의 그녀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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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금둥둥섬 2017/02/18 11:00

    알고보니 게임속 동료가 3층 여자....
    (모바일이거나 , 3층 여자의 친구)
    상상한번 해봤네요ㅎㅎ
    전 또 뭐 어때. 어차피 온라인상이고
    여자랑도 모르는사이인데 이거보고 관련있는지 알고.
    오랜만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다시 정주행하러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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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풍의라빈 2017/02/18 11:26

    잘봣습니다 복날님 ^^
    첨엔 잘 이해가 안됐는데, 사내가 나갔다 들어왔다는 내용이 있었네요 ㅎㅎ; 어디로 사라졌나 했네
    사라진게 아니면, 욕실과 화장실이 분리되어 있어서, 화장실은 깨끗한데 욕실은 피바다(헐!) 라고 상상했음...
    변기가 깨끗하다라고 강조가 되서, 욕조는 엉망인걸로 상상했더니 섬뜩하네요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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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포는없다 2017/02/18 11:54

    어쨌든 뭔가에 의도는 있었던것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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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르륵소년 2017/02/18 12:20

    그니까 사내가 자살이라고 생각했다면
    여자는 안에서 그때 자살을 하려 했던건가요?
    하지만 사내가 친절하게 나갔다 오는 사이에 나가라고 히서
    여자는 자살을 하지않고 나간듯....
    사내가 나오라고 막대했더라면
    자살을 했을 수도 있는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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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끼맘 2017/02/18 14:37

    복날님 작품들 이제 거의 다 봐가는중인데 정말 재미있고 좋네요ㅠㅠ
    따뜻한 감동이 있는 이야기들도 많고 교훈도 얻어가고 항상 상상력에도 놀라게돼요
    무엇보다도 재미있습니다 글이
    이런글들을 몇일 간격으로 써내시는것도 대단하시고..
    어렸을때 자기전에 재미있는 이야기책 읽던 기분을 다시 느끼고 있어요
    항상 잘보고있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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