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원 5천만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오는 일본 교토
이곳에서 재특회의 첫 시위가 열렸다.
교토역 바로 옆
당시 재특회가 습격한 곳은 바로 재일동포들이 모여사는 히가시구조 마을의 초등학교였다.
이곳은 1920년대부터 교량 터널공사를 위해 징용된 동포들이 가모강변에 터를 잡은 곳이다.
전기도, 상하수도도 없이 빼곡히 들어선 판자집.
화재와 하천범람의 우려에 늘 시달리며 살아와야 했다.
상하수도는 1982년이 돼서야 들어섰다.
왜 이곳에 터를 잡아야만 했을까?
근처에 천민부락이 있었기에 일본인들이 오기 꺼려하는 지역이었고, 근처에 강이 있어 생활용수를 얻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락차별에 인종차별이 더해져서 재특회의 첫 타겟이 된 것이다.
90년대 말, 강변정리사업으로 천변 생활은 끝이 났다.
결혼 후 이곳에 정착해 네 자녀를 키워낸 이가해 할머니.
화재와 홍수로 당시의 사진 한장조차 남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들을 위해 평생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을 해왔다는 할머니.
너무 힘든 나머지 고생을 고생이라고 생각할 틈도 없다고 하셨다.
동포 1, 2세대와 지역 주민들을 위한 쉼터.
아주 오래 전의 일이지만, 일본으로 왔을 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하셨다.
일본 생활 90년, 하지만 고향 모습을 어제처럼 기억하신다.
103세 이홍달 할머니의 인터뷰.
이 마을에 식민지 시대의 고통을 안고사는 분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80년대 이곳으로 이주해온 김영란 씨.
한국식품 공장을 운영하며 사업도 꽤 잘 됐다.
동포들이 부락민으로 차별받고 살아왔다는 것은 한참이 지난 뒤에서야 알았다.
차별 속에서도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고 한다.
정착하고 이주하는 일이 쉬운일도 아니었지만,
이 마을에는 그녀의 가족을 붙잡은 특별한 것이 있었다.
재특회의 첫 습격이 있었던 곳으로 향했다.
당시 초등학교는 마을 공원을 주민과 구청의 동의 하에 일부 사용하고 있었다.
재특회는 학교 수업 중에 이곳을 기습했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귀를 막아 못 듣게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차별에 '분노'가 아닌 '공포'를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26년간 이어져온 마을축제를 위한 연습시간.
전 주민이 참여하는 다문화축제 '한마당'.
"마당은 넓어졌지만, 차별은 아이들에게까지 확대된 것 같다"고 한다.
5대에 걸쳐 살아온 100년. 고향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것 없는 마을에서 "돌아가라"는 고함은 언제쯤 그칠 수 있을까?
나뭇잎 마을 현실 답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중요한건 그 졸렬 마을은 해피엔딩이라도 났지만 이건...
재특회 놈 1ㅡ1 맞다이 까도 이기겟다
ㅈ같은건 저 마을은 피해자고 옆마을 닌자새기들이 괴롭힘
김성근 감독도 아마 여기 출신일걸
나뭇잎 마을 현실 답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중요한건 그 졸렬 마을은 해피엔딩이라도 났지만 이건...
ㅈ같은건 저 마을은 피해자고 옆마을 닌자새기들이 괴롭힘
저긴 나루쩌둥없나
재특회 놈 1ㅡ1 맞다이 까도 이기겟다
김성근 감독도 아마 여기 출신일걸
재특회 등 일본 극우의 문제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재일동포. 왜 한국인(조선인)들이 일본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생각을 전혀 안하고 있다는 것.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일본제국'의 명백하고 생생한 증거가 바로 재일동포인데 저러는 꼴을 보면 밥 먹고 팬티에다 똥 싸는 똥싸개 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