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입장에서는 중국이 미국에 일방적으로 굴복하고 빨리 무역전쟁이 해결되면서 중국의 지재권 침해와 기술이전 강제 및 자국기업 보조금 등의 문제가 국제기준으로 해소되는 것이 베스트입니다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갈수록 매우 희박해져 가고 있습니다. 중국은 처음에는 비교적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며 엎드리는 듯 했으나, 점차 응전태세를 가다듬는 모양새입니다.
현재 분위기로는 무역전쟁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가장 높고, 비교적 이른 시일 내에 협상이 타결된다면 우리의 이익에 부합하는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중국의 국제시장질서 공정 편입'을 강제하는 딜이 아니라 트럼프의 체면을 세워주는 선에서 중국이 미국의 콩 등 농산물 수입을 확대하고 장기적 제도개선을 선언적으로 약속하는 수준의 딜에 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이것도 칼을 빼든 미국이 원하는 타결책은 아니지요. 미국은 현재 활황중인 자국 경제를 무기로 세계 경제의 침체 가능성을 무시하고 압박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대선 이전에 자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치적으로 중국의 상징적 양보를 받아내는 선에서 멈출 것인가를 놓고 선택해야 하는데요.
그럼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서 중국이 쉽게 굴복하지 않는 이유를 좀 정리하면
1. 미국이 원하는 수준의 무장해제는 중국에게 더 큰 패배이다
중국은 말하자면 불공정한 무역관행, 보조금지급, 지재권무시, 외국기업차별 등등 여러 가지 법적, 관행적 요소들을 이용해서 자국 산업을 키우고 있는데요.
중국이 수출주도형이긴 한데... 숫자로 보면 중국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 이하, 이 중에서 대미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다시 20% 이하 정도입니다. 전체 경제에서 미국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3퍼센트대, 4퍼센트 이하이지요.
이는 물론 엄청나게 큰 물량이긴 합니다만, 이에 대한 접근을 유지하기 위해 무장해제를 하는 것은 나머지 전체 - 미국과 맞먹는 20% 정도의 대EU 수출, 두배 이상의 40%대의 대아시아 수출, 그리고 수출보다 더 큰 비중의 중국 내수시장까지 - 에서 중국의 산업전략이 붕괴되는 것을 뜻하는데요.
당연히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게 되는 게 좋죠. 그러나 중국이 이렇게 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요.
2. 중국은 미국의 보장을 믿을 수 없다
당장 우리 경우만 봐도, 이미 체결된 FTA 를 미국이 관세를 가지고 협박하니 재협상에 나서야 했습니다. 이란 같은 경우는 훨씬 심해서, 안보리 차원에서 인준된 국제협약을 정권이 바뀌자 미국이 싹 무시해 버리고 저 국제협약을 지키는 기업들은 제재하겠다고 나서서 이란 딜을 형해화시키고 있는 판국입니다.
설사 1번의 문제를 제쳐놓더라도 중국이 미국의 보장을 믿고 광범위한 포괄적 무역협약을 맺을 수 있을까요?
중국이 협약을 어기면 미국은 다시 관세인상이나 제재 카드를 꺼내들 수 있지만 미국에 다른 정권이 들어섰을 때 기존 협약의 내용을 계속 보장해주도록 강제할 수단이 중국은 딱히 없습니다.
3. 국제적, 다자적 해결노력이 없다
1,2번과 연결된 문제인데.. 현재 EU, 일본, 한국 기타 무역대국들은 팔짱끼고 바라보면서 빨리 무역전쟁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인데요.
트럼프의 국제관계 시각이 다자관계 협의를 혐오에 가깝게 경멸하며 미국이 단독적으로 협박하는 것으로 딜을 끌어낼 수 있다는 식의 자세를 보여왔죠. 특히 EU 는 트럼프의 다자관계 무시에 대해 치욕감 수준의 깊은 분노를 삼키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진지하게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한 중국의 항복을 얻어내고 싶다면, EU 일본 기타 미국의 동맹국들을 포괄하는 다자적 압박의 강도를 점차 끌어올리는 것이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봅니다. 중국이 미국 단독의 압박은 버틸 수 있어도 미국+EU+아시아의 미국동맹들이 보조를 맞출 경우 이를 버텨내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실제로 EU 나 일본에서는 트럼프에게 중국의 지재권 침해와 보조금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조를 맞출 의사를 정권 초기에 거듭 표시했지만 트럼프는 쌩깠죠 - 얘들도 자기가 손봐줘야 할 대상이고, 중국은 미국 단독으로 충분히 굴복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4. 게임이론적인 접근 또는 위신의 문제
2번에서도 언급했지만 중국은 설사 협약을 맺더라도 미국에게 협약의 준수를 강제할 수단이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의 '선의'를 믿고 무장해제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리비아, 이라크, 우크라이나 등의 선례가 있죠.
무역분쟁을 끝내는 것이 중국의 국익에 부합하므로 쉽게 생각하면 명분에 집착해서 실리를 놓치는 자존심 싸움을 하고 있다고 한심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게임이론적으로 풀이하면 자존심싸움은 굉장히 당연한 선택입니다. 이를테면, 일진이 '야 빵사오면 안때린다' 고 협박할 때 빵을 사오는 게 맞는가 아니면 두들겨맞고 한대라도 때리면서 버티는 게 맞는가 라는 문제죠. 역사적으로 보면 '양보'가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오판한 체임벌린의 사례가 있습니다.
물론 미국이 일진일지언정 히틀러 수준의 깡패는 아닙니다만, 선악에 대한 판단을 버리고 게임으로만 본다면 남는 건 거의 비슷한 문제죠. 상대가 힘을 내세워 협박할 때 단기적 화평을 바라고 이에 응하는 게 이익인가? 응하는 순간 나는 상대가 주먹쥐고 째려보기만 해도 다시 빵을 갖다바칠 호구로 인식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딜레마를 피하고 국제관계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다자간 협정의 틀로 묶는 것인데, 트럼프는 이런 접근 (파리 기후협약, 이란 협상 등)을 미국의 주권에 대한 침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중국 내부정치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중국이 일단 미국과 맞먹는 강대국 행세를 하겠다는 야망은 버리고 납작 엎드린 모양새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강대국의 압력에 일방적으로 굴복하는 모양새는 중국 공산당의 통치 정당성의 근간을 위협할 수 있고 중국 지도부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고 싶은 선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