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신라 때 일본은 신라 쳐들어 올 국력이 안됐고
고려땐 식민지 상태라 몽고의 간섭으로 군대 운용을 맘대로 못한데다 그나마 있는 군대도 북방으로 몰빵된 상태였으니 왜구들한테 하이패스로 뚫렸지. 제대로 맘 먹고 군대 파견했을 땐 왜구 몰살 당함.
마이트2019/04/09 09:47
심지어는 조선시대도 조선군의 주력은 북방에 있어서 임진왜란때 쉽게 털림...
루리웹-98974352942019/04/09 09:47
신라때부터 쳐들어옴. 신라때 왜구때매 개털려서 고구려보고 도와달라고 한 기록도 있다.
으아!!!2019/04/09 09:56
그때는 쭈구리 신라 시절이고 일본에 멀티 깔았던 가야가 사주했다는 설이 있지. 저 내용은 통일 신라 얘기.
통일신라 시절. 신라에 의해 멸망한 백제, 고구려에서 망명한 사람들에 의해 신라를 원수처럼 여겼고 신라를 쳐서 복수하자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현실성 없는 얘기라 실행하진 못함. 대신 일본서기에 신라에 쳐들어가 신라왕을 무릎꿇렸다는 소설을 써서 정신승리함.
不動明王2019/04/09 09:45
저당시도 가만보면 중2병 오졌었네. 그것도 무려 왕이 나는 용의 후예다~!!! 나는 용이 될것이다~!!! 이랬다는거아님???
파이널 파이트★포이즌2019/04/09 09:48
"왜"가 무조건 일본은 아닙니다. 문무왕이 막고자했던 했던 왜의 정체는 백제군이나 야마토군이고 이미 사이메이여왕이 육성해서
보낸 백제군, 야마토군이 몰려오는 걸 봤기때문에 다시 또 보낼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작용했죠.
구당서에서는 일본과 왜를 따로 구분했죠.
"일본은 왜국의 하나로 나라가 태양이 뜨는 곳에 있다하여 일본으로 불렀다. 또는 말하기를 왜국 스스로가 그 이름이 우아하지 못하므로 일본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혹은 이르기를 '일본은 원래 소국이었는데 왜국을 병합하였다'.
『구당서』
파이널 파이트★포이즌2019/04/09 09:48
"(영락) 9년(399년) 기해년에 부여(백잔)의 잔당들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통한후 한 무리가 되자, 왕이 평양 아래로 순수하였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께 고하여 말하길, '왜인이 나라의 지경에 가득하여 성과 못이 부셔지고, 깨져 백성이 노비로 되니, 왕의 군대가 돌아와 저희들의 목숨을 구해주십시오.'하였다."
눈에 띄는 것으로 백제(반도부여)와 왜가 한무리가 되었다는 말이 있군요. 특히 왜인이 나라의 지경에 가득하다는 말이 눈에 띕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한국의 사학계는 도무지 대응할 길이 없죠. 겨우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백제의 지원군으로 동원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적어도 신라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전쟁의 주도세력이 백제가 아니고 왜로 분명히 나와있습니다. 글쎄요. 백제는 고구려의 극심한 침공으로 꼼짝을 못하고 왜가 이를 대신하고 있는 걸까요?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
"(영락) 10년 경자년에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오만을 파견하여, 가서 신라를 구하였다. 남거성에서 나아가 신라성에 이르렀는데, 왜인이 그 가운데 가득하였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라성 즉 경주 인근에 왜인(倭人)들이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즉 "(영락) 14년 갑진에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의 경계에 침입하였다."라는 말입니다. 원래 대방이라는 곳은 요동과 만주, 황해도 등 여러 지역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위의 비문에 있는 말은 이후의 말들로 봐서 오늘날 평안도나 황해도를 가리키는 말로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백제가 아니라 왜가 황해도 지역까지 고구려를 공격해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전에 고구려가 왜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복수전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이것은 일본학자들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위의 기록은 한반도 남부를 원래 일본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고구려군의 침공에 대한 일본(왜)의 반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견해는 에가미 나미오의 '왜한연합왕국설(倭韓聯合王國說)'설의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죠.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한국의 사학계는 입을 꾹 다물고 있거나 궁색한 변명만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기껏하는 얘기가 이 전쟁은 백제가 주도했을 것이며 왜군은 지원군이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비문에 왜가 백제의 지원군이라는 얘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한국사의 연구 수준이나 패러다임이 얼마나 부실한 지를 보여주는 한 대목입니다. 제가 보기엔 왜라는 말이 한국인의 다른 이름 같은데요.
이것은 '왜 = 일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들입니다. 왜 = 가야인 또는 규슈지역의 가야인 또는 요동과 한반도에 이르는 해안 지역민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 이해하면 간단한 일입니다.
자 이제 이 문제에 대해 한번 생각해봅시다.
광개토대왕 시대라면 5세기 초입니다. 만약 왜가 고구려를 상대로 싸웠다고 하면 수천에서 수만의 군대가 전략적으로 신속히 동원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왜가 현재의 일본지역 사람들이라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는 강력한 고구려군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2만 이상의 군대가 동원되어야 할 것인데 이 많은 병력을 일본 열도에서 누가 조직하고 동원했으며 그 보급로는 어떻게 구성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열도에서 그 많은 병력을 단기간에 동원하여 이동시킬만한 항해술이 4세기 말에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2만 이상의 군대를 동원하려면 동원되는 배만 해도 (사이메이 천황기의 기록과 대비한다면) 대형 선박으로 4백~5백여척이 필요한데 이것을 누가 어떻게 동원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에 그 많은 군대와 큰 배가 동원되었다고 하면 행정조직이 고도화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4세기 말의 일본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습니다. 특히 4세기에서 5세기초까지 일본에는 어떤 기록도 없어, '신비의 4세기'라고 할 지경입니다.
그 동안 유라쿠 천황(곤지왕)까지의 여러 가지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야마토에 의한 일본 열도의 정치적 통합이 거의 6세기에 이르기까지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열도는 각종 정치세력들의 각축장이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상태에서 무슨 군단급 해외파병이 가능한 일입니까? 항공모함이 있는 것도 아닐텐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바꾸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한다는 것이죠.
'왜(倭) = 일본(日本)' 이라는 것 자체가 착각이죠. 원래 왜(倭)라는 말이 일본의 중심 지역인 현재의 오사카 - 교토 지역에 나타난 것은 최소로 잡아도 5세기 이후로 봐야합니다. 중국의 문헌 사료에서는 266년경부터 413년까지 약 150년간 왜에 관한 기사가 보이지 않지요. 그 이전 기록들은 주로 만주 - 한반도 등지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왜라는 말은 한국인들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건 용왕후손 아닌 이성계가 잘못했다
남해용왕이라도 포섭했어야 되는건데..
알고보니 이순신 장군님이 남해 용왕이 아니셨을까???
입에서 번숨나오는것 자체가 증거인데
남해 용왕 없길래 용왕으로 스스로 초진화
그래서 이순신장군께서 남해에서 연전연승?!
신라 말 호족들이 서해안가 중심으로 성장함
대표적인게 청해진 장보고의 성장이 두드러짐
왕건 또한 출신이 그쪽으로 알고있고
병자왜란은 또 뭐임
수정함
아니 씨벌;;;ㅋㅋㅋㅋㅋ
그럴듯한데
용왕에게 뇌물을 안바쳐서 그런거였구먼
뭔가 일리가 있긴 있다
한국 역사상 투탑 병1신 두명이 지도자엿던것도 팩트고
이건 용왕후손 아닌 이성계가 잘못했다
남해용왕이라도 포섭했어야 되는건데..
그래서 이순신장군께서 남해에서 연전연승?!
이거 포섭한 거였구만ㅋㅋㅋ
남해 용왕 없길래 용왕으로 스스로 초진화
알고보니 이순신 장군님이 남해 용왕이 아니셨을까???
입에서 번숨나오는것 자체가 증거인데
그럼 일제강점기는 왜 당함? 이순신이 생각해도 조선이 넘ㅈ같았나
강철의 연금술사에 따르면 인간이 신의 힘을 얻게되면 단명하지...
강화도조약이 서해에서 일어났기 때문
그땐 대한제국이였거든
걔네 다 서해로 왔어.
한반도 최후의 용왕신화...
푸스로다!!!
킹리적갓심
이래서 조상을 잘둬야 한다
서해는 뭔데
신라 말 호족들이 서해안가 중심으로 성장함
대표적인게 청해진 장보고의 성장이 두드러짐
왕건 또한 출신이 그쪽으로 알고있고
송악이 서해인가?
왕건 할머니가 서해용왕 딸이잖아. 왕건 할아버지 작제건 아내
사실 왕건은 해적 세력이 성장한 것으로 추정됨
고려왕들은 서해용왕의 후손이라는 고려건국설화가 있음. 고려 망할때 우왕이 실제로 저 얘기로 드립친 기록도 있고
ㅇㅇ 개성이 송악임.
그럴 듯 하다
임진왜란은 그렇다쳐도 병자호란은 조선이 걍 빡대가리라 그리당한것
여진은 해적생활도 잘하는 국가라 몽골처럼 토낀다고 이기지 못한다.
여진족은 몽골이랑 다르게 해안가 영토도 있어서 수전도 가능함.
애초에 강화도는 수비하기 좋은 땅이 아니라 해전 못하는 몽고군은 막아도 여진족은 못막음.
섬에 커멘드 옮겨놓고 버틴다고 이긴거라고ㅠ보긴좀.... 섬에 못간 백성들 생각도
당시 여진 대기근으로 ㅈ망해서 조선처들어간건데 강화도로 토끼면이기는각이었음.ㅈㄴ여진입장에서 마지막 피짜내서 공격한거라 방어만해서 체력빠지길 기다리면 이기는각인데 그걸못함.
그게 장기전을 못한다는거지.
강화도 전력으로 여진의 상륙을 막는다고?
차라리 진주정도되는 곳으로 파천가는게 승산이 더 있어보임
전쟁 보고한놈이 패전했다고 사실대로 안쓰고 승전했다고 해서 대피 안했던가 그러지 않음?
강화도는 지형이 안좋아서 방어가 안됨. 인조가 튄 남한산성이 수비하기엔 더 좋음.
1차 침임 때 강화도로 토끼는거 보고 2차 침입땐 미리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막아 버렸음.
강화도 가나 남한산성 가나 지는건 확정이고 며칠 걸리냐 차이지. 항복선언하기 전에 강화도도 점령당한거 모르냐?
포위당하고 굶었지만 함락은 강화도가 먼저됬음. 남한산성은 버텼는데 강화도는 뚫렸다? 이거시 퐥뚜
조선이 무슨 고려도 아니고 임금이 혼자 튄다음 백성이 죽건말건 버티자 이런 나라인줄 아나 그리고 인조가 항복한건 정규군이 전부 개박살나서 이길 방법이 없으니 항복한거지 남한산성은 끝까지 사수했음
송나라 밟은 전력은 중국에 남아있었고 고려 쳐들어온건 2군임. 그리고 여진은 만주쪽에 사는데 지도보면 나오지만 만주는 해안가가 넓음. 완전 내륙지방인 몽고랑 비교ㄴㄴ.
이괄얘기 할거면 인조가 ㅂㅅ라 전쟁준비를 못했다고 까아하고 그건 반박할게 없음. 지금 주제늣 강화도로 튀냐 남한산성으로 튀냐임
명나라가 아무리 뿅뿅이라도 금보단 쌤. 그리고 송 시대 유목민들도 산해관 넘은적 없음. 송나라가 자진해서 다 념겼줬거든요. 북송 내내 유목민한테 털린게 그것때문
강화도 못튄거는 솔찌 니말맞음. 근데 조선이 진짜 임진왜란과는 다르게 병자호란떄 뭐도 못해보고 털리고 ㅄ테크탄건 사실이라 넘 안타까움
그리고 강화도가 트롤하나때문에 ㅈㅈ친게 아님 뚫려서 몇번 싸우고 못이기니까 ㅈㅈ친거.
두번째로 시간끌면 이긴다고 하셨는데, 강화도에서 시간끌면 포위만 하고 전라도랑 경상도 털어가면 됨. 몽골군이 그랬음
맞음 인조 ㅂㅅ임 ㄹㅇ 선조보다 못한
근데 까고말해서 인조도 광해군이 ㅄ짓해서 기회잡고 그리된거니 광해군이 만악의 근원아니냐ㅋㅋㅋㅋ
걔는 군이라 왕이랑 비교 안해줍니다.
.
그러게 이경규가 조선을 건국했어야 됐다니깐!!
전주이씨 효령대군파임
그럼 지금 나라 새로 세운 뒤니까 동서남북으로 왕급 지박령 하나씩 박아야 하는 거임?
사실. 신라 때 일본은 신라 쳐들어 올 국력이 안됐고
고려땐 식민지 상태라 몽고의 간섭으로 군대 운용을 맘대로 못한데다 그나마 있는 군대도 북방으로 몰빵된 상태였으니 왜구들한테 하이패스로 뚫렸지. 제대로 맘 먹고 군대 파견했을 땐 왜구 몰살 당함.
심지어는 조선시대도 조선군의 주력은 북방에 있어서 임진왜란때 쉽게 털림...
신라때부터 쳐들어옴. 신라때 왜구때매 개털려서 고구려보고 도와달라고 한 기록도 있다.
그때는 쭈구리 신라 시절이고 일본에 멀티 깔았던 가야가 사주했다는 설이 있지. 저 내용은 통일 신라 얘기.
통일신라 시절. 신라에 의해 멸망한 백제, 고구려에서 망명한 사람들에 의해 신라를 원수처럼 여겼고 신라를 쳐서 복수하자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현실성 없는 얘기라 실행하진 못함. 대신 일본서기에 신라에 쳐들어가 신라왕을 무릎꿇렸다는 소설을 써서 정신승리함.
저당시도 가만보면 중2병 오졌었네. 그것도 무려 왕이 나는 용의 후예다~!!! 나는 용이 될것이다~!!! 이랬다는거아님???
"왜"가 무조건 일본은 아닙니다. 문무왕이 막고자했던 했던 왜의 정체는 백제군이나 야마토군이고 이미 사이메이여왕이 육성해서
보낸 백제군, 야마토군이 몰려오는 걸 봤기때문에 다시 또 보낼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작용했죠.
구당서에서는 일본과 왜를 따로 구분했죠.
"일본은 왜국의 하나로 나라가 태양이 뜨는 곳에 있다하여 일본으로 불렀다. 또는 말하기를 왜국 스스로가 그 이름이 우아하지 못하므로 일본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혹은 이르기를 '일본은 원래 소국이었는데 왜국을 병합하였다'.
『구당서』
"(영락) 9년(399년) 기해년에 부여(백잔)의 잔당들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통한후 한 무리가 되자, 왕이 평양 아래로 순수하였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께 고하여 말하길, '왜인이 나라의 지경에 가득하여 성과 못이 부셔지고, 깨져 백성이 노비로 되니, 왕의 군대가 돌아와 저희들의 목숨을 구해주십시오.'하였다."
눈에 띄는 것으로 백제(반도부여)와 왜가 한무리가 되었다는 말이 있군요. 특히 왜인이 나라의 지경에 가득하다는 말이 눈에 띕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한국의 사학계는 도무지 대응할 길이 없죠. 겨우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백제의 지원군으로 동원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적어도 신라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전쟁의 주도세력이 백제가 아니고 왜로 분명히 나와있습니다. 글쎄요. 백제는 고구려의 극심한 침공으로 꼼짝을 못하고 왜가 이를 대신하고 있는 걸까요?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
"(영락) 10년 경자년에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오만을 파견하여, 가서 신라를 구하였다. 남거성에서 나아가 신라성에 이르렀는데, 왜인이 그 가운데 가득하였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라성 즉 경주 인근에 왜인(倭人)들이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즉 "(영락) 14년 갑진에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의 경계에 침입하였다."라는 말입니다. 원래 대방이라는 곳은 요동과 만주, 황해도 등 여러 지역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위의 비문에 있는 말은 이후의 말들로 봐서 오늘날 평안도나 황해도를 가리키는 말로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백제가 아니라 왜가 황해도 지역까지 고구려를 공격해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전에 고구려가 왜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복수전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이것은 일본학자들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위의 기록은 한반도 남부를 원래 일본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고구려군의 침공에 대한 일본(왜)의 반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견해는 에가미 나미오의 '왜한연합왕국설(倭韓聯合王國說)'설의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죠.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한국의 사학계는 입을 꾹 다물고 있거나 궁색한 변명만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기껏하는 얘기가 이 전쟁은 백제가 주도했을 것이며 왜군은 지원군이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비문에 왜가 백제의 지원군이라는 얘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한국사의 연구 수준이나 패러다임이 얼마나 부실한 지를 보여주는 한 대목입니다. 제가 보기엔 왜라는 말이 한국인의 다른 이름 같은데요.
이것은 '왜 = 일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들입니다. 왜 = 가야인 또는 규슈지역의 가야인 또는 요동과 한반도에 이르는 해안 지역민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 이해하면 간단한 일입니다.
자 이제 이 문제에 대해 한번 생각해봅시다.
광개토대왕 시대라면 5세기 초입니다. 만약 왜가 고구려를 상대로 싸웠다고 하면 수천에서 수만의 군대가 전략적으로 신속히 동원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왜가 현재의 일본지역 사람들이라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는 강력한 고구려군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2만 이상의 군대가 동원되어야 할 것인데 이 많은 병력을 일본 열도에서 누가 조직하고 동원했으며 그 보급로는 어떻게 구성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열도에서 그 많은 병력을 단기간에 동원하여 이동시킬만한 항해술이 4세기 말에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2만 이상의 군대를 동원하려면 동원되는 배만 해도 (사이메이 천황기의 기록과 대비한다면) 대형 선박으로 4백~5백여척이 필요한데 이것을 누가 어떻게 동원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에 그 많은 군대와 큰 배가 동원되었다고 하면 행정조직이 고도화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4세기 말의 일본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습니다. 특히 4세기에서 5세기초까지 일본에는 어떤 기록도 없어, '신비의 4세기'라고 할 지경입니다.
그 동안 유라쿠 천황(곤지왕)까지의 여러 가지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야마토에 의한 일본 열도의 정치적 통합이 거의 6세기에 이르기까지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열도는 각종 정치세력들의 각축장이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상태에서 무슨 군단급 해외파병이 가능한 일입니까? 항공모함이 있는 것도 아닐텐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바꾸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한다는 것이죠.
'왜(倭) = 일본(日本)' 이라는 것 자체가 착각이죠. 원래 왜(倭)라는 말이 일본의 중심 지역인 현재의 오사카 - 교토 지역에 나타난 것은 최소로 잡아도 5세기 이후로 봐야합니다. 중국의 문헌 사료에서는 266년경부터 413년까지 약 150년간 왜에 관한 기사가 보이지 않지요. 그 이전 기록들은 주로 만주 - 한반도 등지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왜라는 말은 한국인들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의 하나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