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꽃비가 내렸다. 분홍빛 하늘에서 꽃잎들이 흐트러져 내린다. 세상을 덮은 꽃잎들이 때론 솟아오르고 춤을 추듯 하늘거렸다. 나는 어린애처럼 세상을 뛰어다녔다. 꽃잎들은 나를 감싸고 보듬어주며 간질였다.
쏟아져 내린 꽃잎들 사이로 누군가 다가왔다. 누군지 몰라도 반가웠고, 아름다울 게 틀림없어 보였다. 알록달록한 꽃잎들이 길을 열 듯 흐트러지며 다가오는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함지혜.
잠에서 깼다. 눈을 떴는데도 눈앞에 함지혜가 있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봤지만, 아직도 함지혜가 보인다. 왜 꿈에서 깨질 않는 걸까.
“일어났어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내가 함지혜와 같은 침대에 있었다. 여전히 누워있는 함지혜는 차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발가벗고 있다는 걸 알고 이불을 당겨 가렸다.
“뭐.......뭐야?”
“진정해요. 기억 안나요?”
속옷차림의 함지혜가 천천히 일어나 컵에 물을 따라 내게 건넸다. 내가 물을 받아 마시는 동안 함지혜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모텔이긴 한데 상당히 높은 층에 위치한 모양이다. 창밖으로 꽤 멀리까지 보였다.
내가 물을 다 마시고 컵을 내려놓을 때까지도 함지혜가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어제는 그렇게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기억이 난다.
함지혜가 후배친구의 것을 쥐고 흔들었다. 나를 빤히 보면서 그랬다. 후배는 자기 바지위에 있던 내 손을 잡고 함지혜처럼 해주길 바랐지만, 내가 손을 뺐다. 후배도 강요하진 않았다. 나와 후배는 함지혜가 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나가 있었던 다른 두 명이 돌아왔다. 보인 광경에 놀란 듯 잠시 우리와 함지혜를 번갈아 보더니.......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소릴 지르며 소란스럽게 뭐라고 떠들어댔다. 누군가 술을 따라 함지혜에게 건넸고, 함지혜는 여전히 쥐고 있는 걸 흔들면서 술을 받아 마셨다. 나도 양주를 받아 마셨다. 술은 독했고 정신은 아득히 멀어져갔다.
지저분한 일들이 있었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함지혜가 쥐고 흔들어 준 건 한 남자애가 아니었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자니 목이 탔고, 후배친구들이 계속 건네는 술을 쉼 없이 마셔댔다.
함지혜가 하는 것들이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느껴져 부끄러웠다. 당장에 박차고 나가야 한다는 걸 떠올렸을 때는 이미 다리에 힘이 없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겠냐는 생각은 나도 저럴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이 되었다.
그런 날 만지작거리던 후배가, 내가 반응을 하지 않으니까 일어났다. 후배도 저 정신 나간 파티에 참여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 후배를 잡으려다 함지혜가 다른 녀석의 걸 입에 담는 걸 봤다. 후배를 잡는 대신 내가 직접 양주를 따라 마셨다. 술에서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억이 좀 나요?”
“........”
흐릿하지만 아예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토했다는 것은 확실히 기억난다. 간신히 쓰레기통을 찾아 게워냈고, 후배가 물수건으로 나를 닦아줬다. 아주 어수선했고 또 음란함으로 혼잡하며 혼란스러웠다. 누군가 다시 건네주는 술을 또 마셨다.
다툼이 있었던 것 같다. 남자애들끼리 싸운 걸까?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함지혜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던 것도 기억난다. 몇몇 애들이 나를 부축한다며 내 몸을 만지는데 함지혜가 다가왔었다.
기억을 더듬으니 피로가 몰려왔다. 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들을 헤집느라 머리가 아팠다. 쉬운 방법을 앞에 두고 있는데 쓸데없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제가 언니를 구했죠.”
“나를? 그런데 왜 내가 벗고 있지”
“제가 고생한 보상이 필요했어요. 아니, 그건 좀 나중에 이야기하고, 그 후배와 사귀는 사이는 확실히 아니더군요.”
“그래서”
“괜찮아요? 그런 식으로 학교후배랑 놀아나는 게? 게다가 그 녀석 보통은 확실히 아닌 거 같은데요. 위험하잖아요.”
네가 훨씬 위험해 보인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약탈자가 다른 약탈자를 위험하다며 충고하는 건, 더 많은 걸 빼앗기 위한 것이라는 걸 역사시간에 배웠다.
다른 적에게서 보호해주겠다는 명목으로 더 끔찍한 요구를 해왔던 강대국들의 이야기는 역사 속에 흔했다. 함지혜는 내게서 뭘 얻을 게 있다고 이러는 걸까.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눈동자다. 마치 끝이 보이질 않는 심연의 그것처럼 공포가 느껴질 정도로 짙고 깊은 함지혜의 눈이 먹잇감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걸 감추려는 듯 부드럽게 속눈썹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저 도톰한 입술에 담긴 탐욕은 감춰지지 않았다.
나를 기다리는 함지혜에게 말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야”
“제가요? 언니 부자에요? 아닌 거 같은데~ 제가 언니에게 원하는 게 있겠어요?”
“설명해봐”
“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 너무 좋아요.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은 필요하지 않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원하는 것도 없으면서 왜 구했는지~ 또 왜 접근했는지 설명하라는 거잖아요?”
“지금 넌 자질구레한 것들을 떠들고 있어.”
“맞아요. 제가 그렇게 떠드는 편이라, 다른 사람들이 제게 그러는 게 싫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자신이 갖지 못한 걸 동경하기 마련이잖아요. 전 사소한 것들도 설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며 살아요.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꾸 오해하고 잘못된 판단들을 하거든요. 그런데 언니는 제가 얼마나 이해할지 믿고 확신에 찬 말투로 요구하고 있잖아요. 너무 좋아요.”
“그럼 나 같은 사람들은 얘기가 길어지면 피곤해한다는 것도 잘 알겠네.”
“아~ 어쩌죠? 제가 지금부터 떠들 이야기들은 무척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언니는 많은 얘기들을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요. 듣고 판단하고 제게 원하는 질문을 해주시면 되요. 피곤하고 지루하게 떠드는 건 제가 할게요.”
“아니. 너도 간단히 얘기해주면 좋겠어.”
“그럴 수 있을까요? 저도 언니처럼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저는 언니와 같은 직관이 별로 뛰어난 편이 아니에요. 아! 물론 사람을 알아보는 눈은 괜찮은 편이긴 하지만, 음~ 뭐랄까 누구라도 알아들 수 있게 설명하지 못하면 내가 오해받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되거든요. 뭐 아시겠지만, 저 같은 여자애는 상당한 오해를 받는 편이에요.”
“.......한 번에 하나씩.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면 돼”
“그래요. 그런데 제가 원한 건 언니에요. 그걸 그냥 이렇게 간단히 답해버리면 제가 뭘 얻을 수 있겠어요. 언니에게 거부감만 생기게 하잖아요. 그러니까 길게 설명해서라도 언니가 저를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싶거든요. 제 간절함이 조금 전달되나요?”
“많은 사기꾼들이나 정치인들이랑 비슷하네.”
“와~ 신기해요. 정말 제가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한 거 같아요. 여자들 중에 언니처럼 직관적인 판단이 가능한 사람은 정말 드물거든요. 꼭 나이 많은 남자가 말하는 거 같아요. 보통의 여자들은 이해나 공감. 아니면 거부하거나 의심하며 한꺼번에 복잡한 사고를 하잖아요. 언니는 이미 절 사기꾼이라 생각하고 그 증거를 찾고 있는 거죠?”
“그래. 그게 나를 원하는 이유야?”
“대단해요.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들에서도 지금 언니는 남들과 자신이 다른 이유 때문에 내가 언니를 원하는 것이라는 이유를 찾아낸 거죠? 언니만 가진 특별함에 내가 끌렸다는 걸 알아채신 거잖아요. 내가 더 설명할 게 있는지 모르겠어요.”
“.......알았어. 난 널 원하지 않아.”
“저도 알아요. 그래도 아직 궁금하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아직 옷도 입지 않고 제 설명을 듣고 싶은 거잖아요? 당장 일어나 옷을 입고 나가 버리는 게 가장 확실한 답이 된다는 걸 이미 알고 계시면서도 아직 기다리고 있다는 건 호기심이 있다는 얘기죠.”
“아니. 이제 듣고 싶은 건 어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야. 네가 계속 이렇게 대화를 질질 끌면, 그냥 나가겠어. 상대가 사기꾼이라는 걸 알아챘는데도 자릴 지키고 있는 건 멍청하다는 걸 알면서도 참고 있는 거야”
“아니요. 언니가 절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미 일어났을 거예요. 언니는 지금 제가 무섭잖아요. 제게 먹힐까봐 걱정하고 있는 걸 알고 있어요. 제가 얼마나 어떤 걸 알고 있고 그걸로 어떻게 할지 궁금한 거예요. 어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고요? 언니는 지금 이미 자신이 물어 뜯겼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잖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언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직설적으로 말할게요. 전 맛만 봤어요. 그리고 언닐 삼킬 생각은 없어요. 언니는 쥐가 될 생각이 없잖아요. 언니는 고양이에요. 고양이들이 서로를 그루밍하는 이유를 알아요?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거예요. 왜 흔적을 지울까요?”
숙취가 몰려온다. 지금 당장 게워내면 좋겠다. 이 아이는 내 얼굴을 보면서 내 뒤통수에 담긴 것들까지 꺼내서 읽고 있다. 함지혜의 진짜 나이가 궁금해질 지경이라, 내가 스무 살 때를 떠올렸다. 난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을 위해 어떻게 했더라.
내가 유성현에게 얘처럼 이랬으면 어땠을까. 아니, 나도 얘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했다.
함지혜가 나를 삼키지는 않겠다는 걸 알겠다. 얘는 내게 원하는 걸 반드시 얻어낼 것이라는 것도 알겠다. 얘가 절대로 그루밍하는 고양이는 아니다. 고양이가 쥐를 잡는데 다른 고양이를 필요로 하진 않는다. 물소를 잡는 사자무리가 되자는 얘길까.
갑자기 말을 안 하니까, 침묵도 두렵다. 함지혜가 찬찬히 나를 보고 있는 게 마치 생각을 읽히는 기분이 들었다.
“난 고양이도 아니고, 너랑 어울릴 생각도 없어.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을 거라면 이제 그만해”
“어제 언니는 남자애들 네 명에게 당할 뻔 했어요. 후배 놈이 어제 친구들을 부른 게 그냥 친구들이었을까요? 제가 걔들을 전혀 몰랐을까요? 걔들처럼 반반하게 생긴 애들이 클럽에서 룸까지 잡고 여자들을 만나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게 이해가 되요? 그 녀석들 강남에서 꽤나 유명했던 날라리들이에요. 그냥 양아치가 아니라 진짜 날라리요.”
“그런데 네가 날 구했다고?”
“네. 뭐 지금 언니랑 얘기해보니까, 어쩌면 그냥 뒀어도 언니가 크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드네요. 하지만, 어제는 그걸 몰랐으니까요. 그 놈들은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전혀 모르거든요. 지들 욕심만 채우는 목적에 충실하죠. 뭐 그게 그런 놈들의 장점이자 단점이겠지만, 혹시 모를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어요. 아까 말했잖아요. 제가 언니를 원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언니를 구했어요.”
“어떻게”
“힘들더군요. 넷이랑 하는 건.”
침착하기 어려웠다. 여태 함지혜의 기에 눌리지 않으려 애썼는데, 이제는 힘들었다. 뭐라도 걸치고 있었다면 나았겠다. 발가벗은 채로 이런 얘길 듣는 게 견디기 어려웠다. 어떻게 저런 말을 이렇게 침착한 말투로 떠들 수 있을까.
마치 함지혜는 길가다 꽃을 꺾은 걸 후회하는 말투였다. 게다가 다시 컵에 물을 따라 내게 내밀었다. 아까도 그랬지만, 얘가 내미는 걸 거부할 수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까.
“네가 가진 보상이라는 건 뭐야.”
“설마 제가 언니를 강O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너무하시네요. 아니에요. 아름다운 걸 보고 싶었어요. 더불어 간직하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서 맛만 봤다고 한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함지혜가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보였다. 저 휴대폰에 뭐가 저장되어 있을까. 아니 이미 전송해서 저장했겠지. 함지혜도 내가 자신의 휴대폰에 해코지를 하진 않을 걸 알았는지, 내 앞에 자신의 휴대폰을 내려놨다.
지난밤 네 명의 남자와 했다는 여자애가 저렇게나 밝은 얼굴로 명랑하게 말하는 게 가능할까. 함지혜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다. 난 지금 미친 사람과 한 방에 있다.
미친 여자애가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이걸 이용해먹고 그러진 않을 거예요. 그러지 않아도 되잖아요. 언니는 이미 절 충분히 이해하고 협조할 생각이잖아요? 그게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죠.”
“.......”
“쥐를 잡는 건 이미 잘 알고 계시죠? 더 큰 걸 잡아보고 싶지 않아요?”
“아니”
“아니요. 언니는 그렇게 될 거예요.”
내가 고양이라면, 함지혜는 미친 사자다.
계속.
오늘도 잘 읽겠습니다 ㅎㅎ
잔존사념// 읽을만 하길 바랍니다.
지혜의 맹랑함이 맘에 드네요.
가만 보면 여기 캐릭터 중에 미운 애가 없어요.
그래도...후배 놈은 참 정이 안가요.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70편이 넘는 시리즈중 가장 빠르게 읽어 내려갔네요. . ..
북풍님 글 읽을수록 십대시절 야한장면 읽으려고 펼쳐들었다가 푹 빠져버린 상실의시대 접했을때 느낌이듭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막바지로 간다기보다는 중반쯤 넘고있는것 같은데요?ㅎ 저야 감사한일이고 부디 그러길 바랍니다
함지혜는 케릭터가 너무 어렵고 무서워요 ㄷㄷㄷ
오늘도 잘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함지혜가 이렇게 말이 많은 캐릭터였군요...
예전부터 느낀건데 효정이를 보고 있으면 아이즈원 김민주가 생각나요 ㅎㅎ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함지혜의 말을 글로 읽어도 이해하기 힘든데 실시간으로 듣는다 생각하면.. 정신없겠네요 효정이 말대로 미친이라 생각할 꺼 같아요ㅋ 무도에서 홍철이가 가끔 눈 희번덕 거릴 때 모습이 생각나네요 ㅎㅎ
함지혜는 좀 무서워 지네요~
함지혜 어디서 봤는지 ㅎㅎ;;
여러분들의 소중한 댓글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여자 감독 얘기 생각나네요
김민주라는 분을 찾아봤습니다. 제가 상상한 인상과 닮았네요. 여자 감독 얘기는 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