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 중에는 특이한 녀석들이 많은데 (물론 녀석들은 나를 평가할 때 한국말에 능숙한 특이한 외국인이라고 한다....) 그중 한 녀석은 미친 듯
여행을 다니는 녀석이 있다. 녀석의 여행과 관련된 기행은 학창 시절부터 유명했는데 수업을 받다가 동해가 보고 싶다며 갑자기 동해로
떠나기도 했고, 수학여행 기간에 아프다는 핑계를 댄 뒤 부모님과 선생님을 속인 뒤 그 돈으로 자신이 떠나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가는 등 혼자
대한민국의 방방곡곡 여행을 다닌 학교에서 유명한 똘아이였다.
그런 녀석은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긴커녕 오히려 도움이 되는 편이었는데, 여행을 떠날 때나 아니면 낯선 곳에 갔을 때 녀석에게 연락하면
그 지역의 맛집을 포함한 관광정보를 제공해 알고도 속는 * 인터넷 맛집 * 보다 더욱 유익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해 주고는 했다.
우린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역마살이 낀 놈, 전생에 추사 김정호였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고는 했다.
(아! 추사는 명필 김정희의 호인데 친구 중 가장 유식한 녀석이 아는체한다고 "저 녀석은 전생에 아마도 추사 김정호였을 거야!" 라고 했고
우리는 김정호의 호가 추사가 아니라는 것을 그 당시에는 몰랐다. 그러면... 추사 김정호의 글씨체는 대동여체인가 아니면 한반도체인가...)
우리는 녀석을 다양한 별명으로 불렀지만 대한민국 각지의 정보와 특산물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6시 내 고향" 으로 통일해서 부르기로
했다. 그러나 6시 내 고향의 가장 큰 단점은 비행기를 탈 수 없어 (겁이 많다. 더럽게 많다. 그러면서 여권은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내수용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외국을 나갈 기회가 많지 않은 우리에게 녀석은 국내 여행을 떠날 때 가장 유용한 정보처였다.
그러던 어느 날 6시 내 고향이 한 친구 녀석의 생일날 평소처럼 만나 술만 마시지 말고 우리도 가까운 서울 근교라도 가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녀석은 우리와 의논하지도 않고 미리 여행 코스를 구상해뒀고, 간만에 녀석이 칭찬받아 마땅한 행동을 했다며 녀석의 계획대로
우리는 9인승 승합차를 렌트한 뒤 가까운 서울근교로 여행을 떠났다. 마치 녀석은 차 안에서 그리고 차에 내려 돌아 다닐 때 6시 내고향의 리포터처럼 생생하게 리액션과 지역 사투리라며 처음 듣는 말들을 섞어가며 뭐가 그리 신이났는지 친절하게 우리에게 가이드 역할을 했다.
저런 뛰어난 인재가 물류 창고에서 재고 관리를 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하긴... 방송에는 부적절한 임꺽정 외모니 어쩔 수 없지만...
그리고 밥 먹을 시간이 되었을 때 녀석은 오늘을 위한 비장의 카드라며 욕쟁이 할머니 식당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당시 우리는 너무 배가
고파 근처에서 일단 해결하고 저녁을 제대로 먹자는 분위기였지만, 녀석은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 없다며 꼭 욕쟁이 할머니네로 가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도착한 그 식당은 분명 자신만이 알고 있는 맛집이라 했는데, 식당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었고, 사람들의 예약을 받고 있었다.
"너만 아는 맛집이라면서?"
"어.. 여기 이렇게 사람 많지 않았는데..."
"그리고 욕쟁이 할머니네가 왜 이렇게 친절해.. 물과 채소는 셀프서비스입니다..라니 물과 채소는 알아서 갖다 쳐 잡숴.. 이래야 정상 아니야?"
녀석은 자신이 왔을 때와 너무 많은 것이 변했다며 당황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예약을 한 뒤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할머니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찰진 욕을 선물해 주실까 하며 욕쟁이 할머니로 빙의하여 서로에게 욕설을 주고받고 있을 때 우리가 입장할 차례가 되었다.
식당 안에는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고, 나와 친구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욕쟁이 할머니를 가장 먼저 찾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로 보이는 분들은
많은데 욕을 잘하게 생긴 할머니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6시 내 고향은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욕쟁이 할머니의 존재가 없다는 것에 더 긴장한
눈치였다.
"어.. 어.. 분명히 할머니가 지난번에 왔을 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손님들에게 욕을 해주셨는데.."
내가 봤을 때 녀석은 밥을 먹으러 온 게 아니라 욕을 처먹으러 온 게 분명해졌다.
"그래서 욕쟁이 할머니는 어디 계시는 데?"
"기다려봐.."
잠시 후 서빙하는 아주머니께서 우리 테이블로 오셨고, 녀석은 음식 주문보다 욕쟁이 할머니의 존재 여부가 더 급했다.
"아줌마.. 욕쟁이 할머니는 어디 계세요?"
"할머니 오늘 안 계시는데요."
녀석의 계획이 수포가 되는 순간이었다. 녀석은 자기를 믿고 따라와 준 친구들을 결코 실망하게 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언제 오세요?"
"아마 오늘 안 오실 건데.."
녀석은 자기를 믿고 따라와 준 배고픈 그래서 성격이 흉악해진 다섯 명의 친구들을 욕쟁이 할머니로 아니 욕쟁이 아저씨들로 만들 수 없었나 보다.
"저.. 그럼 아주머니 정말 죄송한데.. 저희한테 욕 한 번 해주실 수 있나요? 저희는 욕먹어도 싸요.."
아주머니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하지만 친절하게 "어떻게 손님한테 욕을 해요. 제가... 여기 음식도 맛있으니 오늘은 맛있게 드시고 가세요."
라고 친구를 설득했다.
그날 우리는 시래기 정식을 아주 맛있게 먹었고, 배고픈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다닌 6시 내 고향 녀석은 우리에게 욕을 아주 찰지게 먹었다.
녀석.. 아주 오래 살겠어..
오늘 밤 그녀를 집으로 보내지 않아도 되는 여행지 69
출판되면 구매 합니다 . ㄷㄷㄷ
할머니 시 발표회 나가셨음
꼬릿말.
6시 내 고향은 내수용 여행작가가 되어 책을 내는 꿈을 가지고 있다.
어느날 녀석이 내게 이 정도면 책을 내도 되지 않겠냐며, 한국의 대표 여행지 몇 곳의 사진과 녀석만의 멘트를 담은 글을 보냈다.
기존 여행작가 책들과 큰 차별점을 느낄 수 없었고, 나는 녀석에게 솔직하게 기존 출간 도서들과의 차별점을 모르겠다며 너만의 컨텐츠를
담아달라고 했다. 나도 어느정도 진지했고, 녀석도 태어나서 가장 진지한 궁서체를 연상시키는 메일을 내게 보냈다.
"그래 나도 나만의 차별점을 만들어 보겠어.."
녀석은 굳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며칠 뒤 녀석은 다시 나를 만나자고 한 뒤 자신만의 여행 책에 대한 브리핑을 하겠다고 했다.
심지어 이번에 녀석은 출력물까지 들고 왔다. 녀석이 만든 책의 제목은 "오늘 밤 그녀를 집으로 보내지 않아도 되는 여행지 69"
그리고 당당하게 내게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보통 남자들이 연애할 때 목적이 흐흐흥흐흥... 그런 남성들을 위한 책이야."
예로부터 미칭놈에게는 매가 약이라고 했다. 옛날 사람들 말이 틀린 경우는 거의 없다.
취미가 SM 이신가봐요 ㅋㅋ
밥집 종업원한테 다짜고짜 대신 욕좀 해달라니 ㅋㅋㅋㅋ
겁나 당황했을듯
책을 팔려면 재밌거나 아니면 감동을 주거나 둘중 하나 입니다. 여행작가는 글을 잘써야 합니다. 웬만하면 성성님이 글을 쓰고 친구분이 경험을 제공하시는게 좋습니다. 재밌는 경험을 해도 더럽게 못쓰는 사람은 못 쓰거든요. 성성님의 필력이라면 책을 출판하면 될거 같아요. 공저자 두명을 올리고 인세를 반으로 나누어서... 그게 더 빠를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