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잇 했던 남자를 또 만났다.
몇 년 만이더라, 아무튼 꽤 오래전에 하룻밤을 보냈던 남자가 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제발 그가 나를 못 알아보길 바랐지만, 보통의 바람들이 그런 것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저 알죠? 아~ 역시~ 이름이.......민효정 씨?”
“누구시죠?”
사실 내가 먼저 발견했다. 훤칠한 키와 저런 얼굴에 시선이 가지 않으면 시력에 문제가 있거나 여자도 아니다. 보자마자 알아봐버렸는데 이미 눈이 마주쳤다. 급하게 술잔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술잔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건 역시 자연스럽지 못했다.
뒤늦게 모른 척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내 자연스럽지 못한 태도에 그가 피식 웃어 보이며 계속 말을 걸었다.
“아~ 기억 못하시는구나. 우리 그때 말도 놓기로 하지 않았나? 음~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고? 휴가 나온 군인.”
“아아~ 군인.”
“에이~ 이제야 기억나시나? 우리 둘 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랑 동거한다고 해서 얘기가 통하지 않았어?”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생생히 기억난다. 그날이 내 첫 원나잇이었다. 좋아하는 남자애가 다른 여자애와 동거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그날이었다. 내 삶의 많은 방식들이 바뀌기 시작했던 날이었다. 굉장히 위험하고 스스로에게 폭력적인 선택을 했었던 날이었고, 위험하고 폭력적인 일일수록 자극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날이다.
나쁘지 않았다. 외모도 괜찮았고 매너나 성격도 재미있었다. 그가 경험이 많아 보였다는 사실은 오히려 장점이 되었던 날이었다. 그는 충분히 나를 존중해주면서도 심심하지 않게 나를 도왔다. 조금 자극적인 음식 같았지만, 심심한 건강식을 원했던 날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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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식 같은 친구가 있었다. 고등학교 편집부에서 만난 아이인데, 착하고 모범적인데다 순진했던 남자애가 있었다. 나랑은 모든 게 다른 아이였다. 화목하고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아이처럼 모든 일들에 침착하고 여유가 있었다. 그 나이의 다른 남자애들처럼 끓어오르는 호르몬을 억제 못해서 이리저리 튀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 애랑 있으면 내가 부자연스러워 보이곤 했다.
난 이혼한 엄마의 손에 자라며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여자애였고, 이미 중학교 때 남자경험이 있었던 여자애였다. 그렇다고 날라리는 아니었지만, 학교의 노는 애들도 나를 건들지 못할 정도로 성질머리도 더러워서 친구도 별로 없던 여자애였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그런 칙칙한 학창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었다. 다른 많은 애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바뀌는 환경에서는 달라지고 싶었다. 그래서 편집부 같은 동아리 활동도 시작했다.
선배들이긴 해도 어린애들 같은 편집부 선배들이나 친구들과 친해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였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미리 보고 선택할 수 있는 영리한 여자애였다. 어수룩하게 마냥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고, 교활하게 이득을 계산할 만큼 멍청하지도 않았다.
공부를 도와주는 남자선배의 어깨에 실수인척 기댈 줄 알았고, 내게 도움이 되지 않을 선배에게도 커피를 뽑아 줄 수 있었다. 여자선배들이 있는 앞에서는 절대로 남자선배들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지만, 멀리서 여자선배를 보면 먼저 다가가서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 애랑 있으면 내 모습이 그렇게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난 그런 그 애랑 있는 게 좋았다. 그런 내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이 좋았다. 인터뷰를 준비하느라 둘이 있었는데, 그 애가 말했었다.
“음~ 난 괜찮은데, 우리 지금 너무 가까이 붙어있지?”
“!!!???”
“내가 더 벽 쪽으로 가려면, 이제 벽을 밀어야할 거 같거든”
황급히 물러나 앉았다. 그 애는 벽에 기대서 나를 보며 멋쩍게 웃더니 다시 인터뷰 질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애는 그냥 그렇게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내가 선배들에게 공부에 대한 도움을 많이 받는다는 걸 알고, 자기가 공부했던 노트를 내밀어 참고해보라는 말도 했었다.
“너무 공부 잘하는 선배들에게만 부탁하는 거 아니야? 내 노트도 좀 참고해줘~”
“왜........”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궁금하거든. 선배들이랑 나랑 비교 좀 해주면 좋겠는데”
“어~ 난 진도가 좀 늦어서 잘.......”
“그러니까 더 도움이 되지~ 아~ 널 무시하는 거 아니야. 내 생각에 네가 곧 나보다 더 잘할 거 같거든. 넌 정말 머리가 좋은 거 같아. 그래서 그러는 거야”
같이 인터뷰를 가기로 한 날에 노트를 돌려달라고 했다. 그 애의 노트는 당시 내 학업수준으로도 이해하기 편할 정도로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글씨가 깨끗하고 예쁜 건 아니었지만, 그 애의 글씨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작은 낙서가 발견되면 너무 기뻐서 몇 번이나 다시 보고 또 보기도 했다.
그 애의 노트를 복사하려면 지하철역 근처까지 나와야 했다. 우리 집은 언덕 높은 곳에 있어서, 지하철역까지 나오려면 골목계단을 한참 내려와 마을버스를 타고 가야했다.
날씨가 좋으면 걸어서 다녀올 만도 했지만, 그날은 비가 내리고 있어서 마을버스를 탔었다. 그 애의 노트가 젖을까봐 봉투에 담아 들고 있었는데, 마을버스에서 내리다가 봉투가 문에 걸려서 찢어졌다.
노트를 급하게 잡으려다 빗물에 미끄러졌다. 노트를 떨어뜨리고 발목도 다쳤다. 발목을 삔 것 같은데, 내 발목이 아픈 것보다 그 애의 노트가 걱정이 되었다. 우산부터 폈어야 했는데, 노트부터 집어 들다가 내리는 비를 다 맞아야 했다.
그 애의 노트는 복사하기 힘들만큼 젖어버렸고, 난 발목을 다쳐서 그 애와 함께 인터뷰를 갈 수 없었다.
어쩌다 그 애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그 애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다친 건 발목인데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아픈 적이 없을 만큼 마음이 아팠다. 마음이 너무 아프니까 사람이 멍청해지는 것 같았다.
울어보고 떼쓰고도 싶었다. 나중엔 미워하고 원망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더 좋아하는 사람이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이미 알았기에 아팠다.
그 애를 편하게 보고 싶었는데,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그 애가 하는 만큼은 공부도 하고 싶었고, 그 애의 곁에서 맴돌 수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다리고 기다리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도 그 애를 기다렸다. 미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기다리다. 그 애가 나보다 먼저 알았고, 더 친하게 지냈던 여자애와 동거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길었던 기다림의 끝에 기다리고 있던 건 이런 거였다.
죽을 만큼 괴롭거나 하지는 않았다. 너무 오래 기다린 덕분에 내 심장은 단단해져 있었다. 딱히 삐뚤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어도, 드디어 기나긴 기다림의 끝이 왔다는 홀가분한 기분이 들기는 했었다.
수능이 끝났을 때처럼, 이제부터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했고 조금은 걱정도 되었다. 일단은 그 애를 잊고 싶었는데, 그 기나긴 시간 기다려오면서도 끊임없이 잊고 싶어 했었다는 내 자신에 서러워졌다. 끝이 났어도 나는 같은 걸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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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대학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었는데, 이제는 정말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단 하룻밤 시간을 같이 보냈던 그를 다시 만나니까, 그 애가 생각났다. 그 애가 다른 여자와 동거를 한다는 사실에 포기하고 만났던 첫 남자였을 뿐인데, 그냥 하룻밤을 보냈던 남자일 뿐인데, 그날 이후로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만났는데, 또 그 애를 떠올렸다.
이 자극적인 남자는 그날의 나에게 나쁘지 않았다. 외모나 성격뿐만 아니라, 휴가 나온 군인이었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었었다. 내게 홀가분한 즐거움을 안겨줬던 남자였다.
“왜 혼자 마시고 있어? 나 기다리고 있었어?”
“아쉽겠지만, 아니야. 군대는 다녀 온 거야?”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지금 몇 년이나 지났는지 알긴 해? 정말 기억 못했구나? 섭섭한데?”
“미안. 이렇게 반말로 인사를 나누는 것도 어색해.”
“난 우리가 어색해지지 않을 방법을 아는데~”
사실 혼자 술을 마시고 있기도 했었고, 지겹게 치근덕거렸던 놈들에 지루해지기도 했었다. 몇 번 만났던 녀석들 중에는 내 마음도 가지려는 놈들이 있어서 피곤했다. 약간의 새로움을 기대하며 이렇게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잠깐은 그냥 이 남자랑 또 한 번의 하룻밤을 보낼까도 생각했었다. 내 몸이 기억하는 그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은 한 번으로 남을 수 있지만, 두 번은 세 번째와 네 번째를 만든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남자들은 원래 그런 족속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조금은 귀찮다는 태도를 보였는데 그가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어차피 이 술집에서는 글렀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도 그가 나를 따라 나왔다. 좋은 추억을 좋은 추억으로 남길 줄 모르는 보통의 남자들과 똑같았다.
조금 정색하며 말했다.
“이런 스타일은 아닌 줄 알았는데?”
“아니지. 아닌데도 이럴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는 얘기지.”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이야~ 역시 내 눈에만 보석이 아니었네?”
이제는 정색하며 화를 내려 했는데, 또 아는 사람을 만났다. 지저분한 비가 내리는 날처럼 운이 없는 날이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이번엔 과거의 망령이 아니었다. 우리 사무실의 차 과장님이었다.
세상의 많은 남자들처럼 내게 잘해주는 사람이었고, 예의는 바른 대신에 시선은 음흉한 보통의 남자였다. 난 차 과장님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그를 보낼 수 있었다. 그는 마치 나와 오래 알고 지냈던 친구가 내게 섭섭해 하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차 과장님은 그가 내 친구가 아니란 걸 눈치 챈 것 같았다.
“친구 아니지? 젊은 여자가 혼자 술 마시고 있으니까 저런 놈들이 붙지.”
저 남자는 아니지만, 저런 놈들이 붙으라고 혼자 마신 거라는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별로 힘들지도 않았던 회사생활에 대한 토로를 해야 했고,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일상과 삶에 대한 고뇌를 늘어놔야 했다.
그래서 차 과장님과 단 둘이 술을 마시게 되었다. 자신이 매우 어른이라 생각하는 차 과장님의 비위를 맞춰주려 고민들을 만들었다. 순전히 내 과소비 때문에 생긴 금전적 어려움들은 생활고로 둔갑했고, 내가 나서서 만나고 다녔던 남자들에 대한 지겨움은 스토킹 피해자로 변해있었다.
차 과장님은 술이 그다지 센 편이 아니었다. 조금 취한 채 대화하다 말고 그랬다.
“아. 미안. 내가 너무 취했나봐.”
“........”
대답하지 않았다. 차 과장의 손이 내 허벅지를 더듬고 있었다는 걸 내가 모를 리가 없으니까, 난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내가 대답이 없으니까, 차 과장이 내 허벅지에서 손을 치우지 않았다. 난 술에 취한 척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난 아까 그 놈이랑 차 과장을 비교했다. 차라리 그 놈이랑 두 번째를 만드는 게 나았을까? 직장 상사와의 첫 번째가 괜찮은 걸까?
미혼의 차 과장은 바람둥인데 소문이 돌진 않아 괜찮은 남자였다. 누구나 바람둥이라는 걸 알지만, 딱히 소문이 없다는 건 현명하다는 얘기다. 그로 인해 회사생활이 편해질 수도 있겠다는 그런 멍청한 생각들을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새로운 자극을 원하고 있었다. 기다리던 그 애를 잊을만한 도구가 필요했다. 지저분한 비가 내리는 날이었고, 나는 결정했다.
“이러지 마시고.........여기서 나가요.”
차 과장이 비틀거리기라도 했으면, 난 그대로 도망갔을 것이다. 역시 차 과장은 괜찮은 남자였다. 언제 술에 취했냐는 태도로 술값을 계산하고 앞장섰다.
직장상사랑 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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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내일 쓰겠습니다.
...
엠엘비 문학 흥하네요 ㅋㅋㅋ
전 그냥 좀 지저분한 이야기.
민효정이 전 편 어디에서 등장했는지 왜 기억이 안 나죠? ㅠㅠ
4Justice// 바로 전 6편 마지막에요. 제가 좀 두서없이 써서 그럴 거예요.
믿고 보는 북풍님 글
휴... 아직도...
정주행 달렸네요. 혜주 얘기도 궁금합니다요...
잘 읽고갑니다. 8편 기대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