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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독신자 사무실.

 



 



 눈이 그친 도심이 무척 더러워진 것과 별개로 하늘은 무척 투명하게 맑았다. 푸른 하늘에 흩어지는 하얀 구름들은 도심에 쌓인 눈들과 심하게 비교될 정도로 깨끗했다. 


 아름다운 것들은 그렇지 못한 것들을 기반으로 한다. 하얀 눈이 아름다운 건, 그만큼 세상이 더러웠다는 얘기일 수 있다. 도심의 녹은 눈들이 더러운 것만큼이나 겨울의 맑은 하늘은 아름다웠다. 


 때로는 아름다웠던 것들도 더러워지고, 더러운 것들이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언제 어느 곳에 있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더러워지기도 하고, 아름답게 변한다. 사랑으로 인한 성교나 성교를 위한 사랑도 그 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기 마련이라, 가끔은 구분이 모호해져 판단이 쉽지 않다. 


 사람들은 보편적인 도덕에 따른 판단을 하는 편인데, 대체로 사람들은 타인의 도덕성에만 관심을 둔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진리에 가깝게 들리는 이유는, 자신의 윤리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은 타인을 비난하고 비판하며 자신을 지킨다. 타인의 이야기가 재미있는 건, 나 자신을 잘 알기 어려워서이다. 소크라테스는 참 어려운 얘기를 했다.



 차 과장과 함께 옥상에 올라온 민석은, 얼마나 뻔뻔하게 대답해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 생각했다. 혹시라도 차 과장이 눈치 챌만한 행동을 걱정했지만, 자신의 평소 모습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먼저 담배를 꺼내는 차 과장에게 불을 붙여주려 했지만, 차 과장은 됐다는 몸짓을 하고 자기 라이터로 담배 불을 붙였다. 차 과장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고 말했다.



 “너 오늘 다시 시흥공장에 좀 가라”


 “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차 과장의 말에 민석이 되물었다. 차 과장은 그런 민석에게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얘기했다.



 “왜? 넌 안 피워? 너도 피워~ 그래. 오늘 시흥공장에 다시 가라고”


 “아~ 제가 거기에서 쪽을 팔아서, 전 거기랑 끝이라고, 호구로 보일 거라고.........”


 “응. 내가 어제 그랬지? 그러니까, 오늘 다시 가서 회복하고 와야지. 계속 호구로 보일 수는 없잖아? 어제는 그게 맞는데~ 상황은 매일 변하니까.”


 “제가 거길 가서 무슨 얘기를.......”


 “뭐. 간단하잖아? 다음 계약에 대한 얘기들을 좀 꺼내고~ 이 번 계약이 잘 끝나면, 더 좋은 계약을 준비 중이라는 얘기들 좀 하고~ 뭐 문제가 있다면, 여태까지 잘 해왔으니까 우리가 해결해 줄 테니, 일은 계약한 대로 처리하자고 해”


 “거기에선 계약이행을 못할 텐데요?”


 “멍청이. 좀 생각 좀 하라고~ 내가 그걸 모르냐? 넌 가서 원론적인 얘기만 하면 된다는 거야. 인상을 쓸 필요도 없어. 아니, 가급적이면 웃어줘. 계약이행을 해주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괜찮다는 말을 하란 말이야. 너희가 어쩌건 간에 우리에게는 별로 상관없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오라고.”


 “아........”


 “이런~ 참. 너 정말 한심한 거 아냐? 지금 몇 년째 내 밑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직도 이 꼴이야? 시키는 일말 하랬다고~ 정말 시키는 일만 하는 거냐? 생각을 하란 말이야. 네가 똥 싼 거 내가 치울까? 스스로 치울 생각을 해.”


 “예. 알겠습니다.”


 “시키는 일만 하라고 하면, 왜 그래야하는지 고민을 해. 진짜 시키는 일만 하라는 말이 아니잖아.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왜 그래야 하는지 짜증을 내지 말고, 왜 그런지 생각을 하라고. 어렵지?”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래. 어제 뭐했어? 어 대리랑 잤어?”


 “아니요.”


 “........이야~ 갑자기 똑똑하네. 반응 좋고~ 단호하고~ 억양도 좋아. 오늘 시흥공장에 다시 가면, 그런 태도로 말해. 지금처럼 얼빵한 표정도 괜찮지만, 조금 웃어주는 게 더 좋겠어. 그럼 더 진심 같겠다. 그냥 서로 실수였군?”


 “예?”


 “집중해. 의문을 보이지 말고, 놀라지도 말아. 네가 만날 사람은 산전수전 다 겪었을 부장이잖아. 네 사소한 태도에서도 많은 걸 건질 수 있는 위치란 얘기야. 군대에서 병장 때, 이등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였지? 이건 그보다 훨씬 심한 경우야. 웃어봐. 직장동료. 아니, 상사랑 잤으면 웃을 수 있는 거 아니야?”


 “.......”


 “웃지 않는군. 관계라는 건, 둘 다 상처를 받거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상처를 받게 되어있지. 어느 쪽이든, 내겐 불편한 일이니 잘 처신해.”


 “지나친 추측 아니십니까?”


 “아니. 전부 지나치지 않아. 내가 어 대리랑 하미희를 놀리는 동안에, 넌 어 대리랑 눈도 마주치지 못했어. 간단히 추측할 수 있었고, 내 질문에 웃지도 짜증도 못내는 너로 확신했지. 시흥공장에 가서 네가 해야 할 일이나, 두 사람의 관계가 내게 불편해질 수 있다는 것도 전혀 지나치지 않아. 넌 대수롭지 않은 척 하기에, 아직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아.”


 “비겁하시네요. 사랑도 연애도 하지 못하시는 분이 관계에 대한 걱정을 한다는 게 어울리긴 합니까? 네. 실수였습니다. 전 그런 실수라도 해서 인간다운 관계를 하죠. 그런데 과장님은요? 정말 걱정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혹시 생길 귀찮은 일이 싫은 겁니까?”


 “.......화가만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해? 나도 한땐 그림을 그렸어.”





 사무실에 어 대리와 미희가 없다는 사실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사무실을 쓰는 김민수 과장이 자리에 없는 건 거슬렸다. 차 과장은 어 대리와 미희가 책상위에 올려놓은 보고서들을 뒤적거리다 김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 비우고 어디에 있나?]


 [어. 차 과장. 지금 좀 바빠]


 [내 전화를 받으면서 차 과장? 누구에게 신호를 준 거지? 조용히 하라는 신호일 테니 최소한 두 명 이상과 함께 있겠고, 내 신분을 말하며 신호했으니 회사 안이군? 어느 부서 여직원들과 담소를 나누고 계신 건가?]


 [........아~ 지금 좀 바빠서 내가 있다가 전화 할게?]


 [대답이 늦어. 그래가지고 무슨 거짓말을 하겠........]



 전화가 끊겼다. 차 과장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 재미있는 상황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어 대리와 미희가 사무실에 돌아왔다.



 “하미희. 어 대리를 심문했나? 소득이 좀 있어?”


 “전 지원 과장님 만나고 왔고요. 미희 씨는 종무식 신입사원행사 때문에 다녀왔어요.”


 “하미희에게 물었는데, 어 대리가 대답하는군. 우리 어린양이 여우에게 대들었다 물렸나?”


 “.......종무식 때, 신입사원들 공연을 준비한다니까, 미희 씨 점심시간 이후에 한 시간씩만 빼주세요.”


 “그런 걸 왜 하는 거야? 계속 어 대리가 말하는 걸 보니까, 하미희도 싫은 모양이군. 하미희가 스트립쇼라도 하는 게 아니라면 보고 싶지도 않아.”


 “그럼 미희 씨는 참가시키지 않나요?”


 “아니, 그래도 참가하게는 해야지. 회사의 주인들이 노예들 재롱잔치를 보고 싶다는데, 거부할 수 없잖아?”


 “........제가 신입 때는 거부하셨잖아요?”


 “어 대리는 흥미를 가졌었으니까. 직장인이 일에 관심을 가져야지. 하미희는 싫어하는 모양이니 참가하게 해.”



 어 대리와 미희를 동시에 실망시킨 차 과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어 대리. 김 과장이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있는 거 같아. 이번에는 또 누구랑 바람을 피우는 건지 조사 좀 해봐.”


 “.......제가 왜요? 직장인은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요?”


 “자네가 이런 일에는 적격....... 응? 이미 뭔가 알고 있군?”


 “.......아니요?”


 “좀 전의 누구보다 형편없어. 반응도 느리고, 어눌한데다, 목소리는 떨리는군. 그렇게 대답하면 ‘네’라고 대답하는 것과 뭐가 달라? 지금 당장 알고 있는 걸 모두 토해놓으면 지난밤 실수에 대해선 더 이상 놀리지 않을게”


 “네? 아....... 싫어요! 과장님은 어차피 제가 뭘 하든 관심도 없잖아요? 제 이익을 위해 남을 고자질 할 수는 없어요.”


 “갈등하고 있군. 진짜 양심은 절대로 갈등하지 않아. 그럴 필요 없지. 하미희? 김 과장이 누굴 만나는지 알고 있다면, 앞으로 네 난잡한 사생활을 존중해주지.”



 설마 하는 어 대리의 눈빛을 무시하며 하미희가 대답했다.



 “어젯밤에 김 과장이 비싼 술집에서 거래처 여직원과 만나고 있는 걸 봤어요.”



 어 대리는 하미희에게 눈살을 잔뜩 찌푸려 보였고, 모른척하던 미희가 참지 못하고 어 대리에게 말했다.



 “대리님은 불륜을 저지르는 남자를 지켜주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어제 김 과장님에게 비싼 밥을 얻어먹었잖아?”


 “우리가 입을 닫는 대가로 밥을 얻어먹은 건 아니잖아요? 김 과장님은 끝까지 불륜이 아닌 척 했으니까요. 제 생각에 어제 그 비싼 밥으로는 충분한 대가를 치룬 거 같지 않은데요?”


 “암묵적인 대가를 치룬 거였잖아? 그리고 정말 불륜이 아니었다면 어쩔 생각이야? 차 과장이 그 사실을 알아버렸으니, 불륜이 아니더라도 불륜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걸?”


 (“이봐 나 여기 있다고~”라고 차 과장이 말했으나, 두 여자는 듣지 않았다.)


 “어 대리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니. 지금 대리님의 말로 대리님의 말이 반박 가능한 걸 모르시겠어요? 암묵적인 대가를 치렀다는 게 불륜이라고요!”


 “미희 씨가 아직 차 과장을 몰라서 그래. 누구나 만나고 실수도 하는 거잖아? 김 과장에게도 그냥 지나는 인연이었을지 모르는 일이잖아? 왜 모든 만남을 불륜으로 이어붙이는 건데?”


 (“어 대리는 나를 아나?”라고 차 과장이 중얼거렸는데, 두 여자는 듣지 못했다.)


 “결혼한 남자니까요! 김 과장은 유부남이잖아요? 거래처의 젊은 여직원을 따로 만나서는 안 되는 거라고요!”


 “아~ 그래서 미희 씨는 남자건 여자건 실컷 만나고 다니는 거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라?”


 “네? 그럼 어 대리님은 결혼이라도 하셔서 아무도 만나지 않는 거예요? 아니, 그럼 어 대리님도 어제 불륜을 저지른 게 되나요?”


 (“이야~ 이거 정말 흥미진진한데?”라고 차 과장이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두 여자를 교대로 바라보느라 고개만 돌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요!”



 어 대리와 미희가 동시에 차 과장에게 소리쳤고, 시무룩해진 차 과장이 자리를 비켜줬다. 더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 과장은 자신의 능력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두 여자가 싸우는데 중간에 껴서 뭔가 할 수 있는 재능은 없었다.


 대신 바로 근처에서 엿듣고 있던 김 과장의 팀원을 조용히 불렀다.



 “이 대리”


 “네.”


 “쟤들 싸우는 거 같지?”


 “네....... 제가 말려볼까요?”


 “죽을래? 이런 구경 언제 또 할 수 있을 거 같아? 혹시 몰래 촬영 같은 거 가능한가?”


 “예?”



 아쉽게도 그 순간, 어 대리와 미희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차 과장은 휴대폰을 챙겨 그녀들을 따라 나가려는 이성호 대리를 말려야했다. 



 “진정해. 몰카는 범죄야. 그보다 너희 팀 거래처 중에 김 과장이 직접 만나러 나간 거래처가 몇이냐?”


 “올해요?”


 “아니, 최근 한 달”


 “세 곳이요.”


 “흠. 그 중에 말이야........”


 “그쪽 여직원이 동석한 거래처는 한곳이요.”


 “똘똘하네. 내 밑에 있으면 잘 키워봤겠어.”


 “존경합니다.”


 “알아. 그 거래처 전화번호 좀 줘”


 “그 여직원 전화번호를 드릴까요?”


 “이야~ 위험하네.”


 “과찬이십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젤을 잔뜩 발라 뾰족한 머리카락이 아플 거 같아 참았다. 대신 이 대리의 어깨를 토닥여준 차 과장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사무실에 차 과장의 팀원들은 아무도 없는데, 바로 옆에 팀원들은 김 과장을 제외한 모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차 과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 잠시 생각을 했다. 곧 생각을 마친 차 과장이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는 여성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김 과장 타입이군.’



 차 과장이 전화를 끊었다.






 계속.



댓글
  • cebacern 2016/12/30 13:13

    선추천 후감상 북풍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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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번김하성 2016/12/30 13:13

    오... 북풍님 첫댓글!! 선추천 후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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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번김하성 2016/12/30 13:14

    잌ㅋㅋㅋ 첫댓글 놓쳤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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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aedriper 2016/12/30 13:16

    요새 북풍님 글은 장편만 있어서 가볍게 읽고 즐기기 어려워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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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ind 2016/12/30 13:23

    아이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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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IAV 2016/12/30 13:26

    ㅊㅊ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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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lrhsgkrns 2016/12/30 14:36

    글 잘 쓰시는 분들 보면 참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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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번김하성 2016/12/30 14:43

    방금 1편부터 정주행했는데요, 이거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면ㅋ 자꾸 읽는동안 이미지가 그려지네요. 차과장은 공유 이미지가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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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ㅊsk 2016/12/30 14:46

    독신자 사무실 시리즈 중에 가장 핫하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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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콜로니아 2016/12/30 14:57

    북풍님 작품 늘 잘보고 있습니다. 요즘 정국때문에 황폐화되었던 감성이 채워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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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thWind 2016/12/30 15:45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흔적을 남겨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차 과장을 공유처럼 잘생긴 얼굴로 상상하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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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천] 2016/12/30 15:48

    요즘엔 글을 잘 쓴다는 건 일반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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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30 20:11

    선 추천/댓글
    후 정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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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넘버에잇 2016/12/30 22:51

    헐 북풍님 오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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