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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괌에서 있었던 일 1 - 들어가며

 

괌에서 아이를 차에 두고 내렸던 사건의 당사자입니다. 괌 사건의 진실을 늦게나마 얘기하고자 합니다.

이미 끝난 사건이라고 생각하거나, 뭘 잘한 게 있다고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느냐 비난하실 수도 있습니다. 제 가족에게는 환란에 가까운 시기였고, 이제 겨우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데 굳이 다시 이야기를 꺼내는 게 맞는지도 여전히 자신이 없습니다.  

 

사건 직후부터 어떻게든 진실을 밝히고 사실관계를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30도가 넘는 땡볕에 최소 45분 아이들을 방치하고” “한가하게 쇼핑하며” “아이들을 땀범벅 상태”에서 “죽을 뻔 하게 하다가 가까스로 구출되었는데”, 돌아와서는 “웃으면서 내가 변호사요, 판사요” 하면서 “3분만 있었다고 거짓말”하는 파렴치한 아동학대범이 된 마당에 어떤 말도 할 수 있는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괌은 거제도 크기의 작은 섬입니다. 제 사건을 보도한 해당 지역 언론은 아무런 제재나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성역과 같았습니다. 방송국 카메라가 보는 앞에서 아이들을 “극적으로 구출하고”, “법앞의 평등”을 구현한 정의로운 미국 경찰이 작성한 Police Report가 기사의 원전이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기사는 순식간에 유통되었고, 거기에 각자의 상상력이 더해져 모든 보도가 사실로 굳어졌습니다. ‘아동학대’, ‘판사,변호사 부부’ 같은 자극적인 단어들이 흥행요소가 되어 그럴듯한 소설로 거의 창작의 경지에 이른 기사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귀국 직후 우리 가족에게는 더 고통스러운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보호시설에 4일 동안 갇혀 있던 딸은 밤마다 괴물이 나온다며 울며 보챘고, 이 증상은 거의 한 달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동생과 함께 보호시설에서 있었던 아들에게 거기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물어봐도 한동안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건 직후 아들은 첫 등교길에서 자기를 알아보고 웅성거리는 아이들과, 사건에 대해 아는 척을 하며 말을 건네는 아이들 때문에 위축된 모습을 보였고, 저는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자기 아이에게 “이런 미친 부모가 있다”며 교육 시켰다는 글을 블로그에 올린 분도 보았는데 그런 부모들도 꽤 있겠다 싶었습니다. 의미를 모르는 아이들에게는 보도된 사진들이 제가 아이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증거로 보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아들은 평소 얼굴에 상처가 나서 들어와도 이유를 잘 얘기하지 않는 성격입니다. 아들의 침묵은 계속되었고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재우려고 같이 누워 있을 때 가끔씩 어떤 장면이 기억났는지, 아들은 드문드문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어떤 날은 ‘엄마, 아빠가 하룻밤만 자면 온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계속 오지 않아 평생 거기서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며 눈물을 흘렸고, 어떤 날은 ‘보호시설에 있는 동안 동생이 너무 많이 울어서 자기도 눈물이 났다’, (성별이 다르다고 따로 떨어져 자게 하였는데) ‘밤에 동생의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서 자기도 눈물이 났다’고 하며 딸이 보호시설에 있는 동안 계속 울기만 했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습니다. 동생이 울면서 한국말로 ‘엄마, 아빠’를 반복하는데 직원들이 동생의 입을 틀어 막기도 했으며, 자신에게도 ‘엄마’, ‘아빠’, ‘mom’, ‘dad’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날은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어느 날 밤에는 “아빠를 가장 좋아한다”는 아들의 고백에 눈물을 많이 흘리기도 했습니다.

 

난처한 상황도 자주 벌어졌습니다. 어느 날에는 아들이 ‘왜 사람들이 자기가 땀이 많이 난 걸로 알고 있냐’고 묻기도 했고, ‘원래 경찰은 나쁜 사람들이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한때 아들의 장래희망이 경찰관/소방관이었습니다. 제가 컴퓨터 앞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사건 당시 동영상을 보여 달라고 조른 적도 자주 있었고, (이미 여러 번 봤던 것으로 보이는) 엄마, 아빠의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럴수록 부모로서 더 밝은 모습만 보이고, 더 잘 해주어야 했겠지만, 부끄럽게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고, 주말에 같이 했던 축구/야구는 사건 이후로 한 번도 해 주지 못했습니다. 작년에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아빠 화났어?”였습니다.

 

제가 속한 곳에 경위서를 작성해야 하기도 했고, 어떻게든 사실관계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지 모든 기사들과 커뮤니티/까페/블로그, 방송내용을 하나하나 챙겨 보았습니다.  저는 기존 facebook 계정 비밀번호도 까먹어서 미국에서 새로 하나 만들 정도로 SNS는 하지 않았고, mlbpark 정도만 가끔 들어가는 정도였는데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커뮤니티와 까페 등이 있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선 모자이크 없이 괌경찰이 불법으로 유출한 사진이 돌아다니는 것만 만 개가 넘었습니다. facebook 공유 횟수가 천 번이 넘는 분이 5명 정도 있었고, 수백에서 수천개의 댓글이 달린 뉴스기사는 물론, 각종 커뮤니티/카페마다 200~300개씩 댓글이 달린 글들도 많았습니다. 얼추 수만 개는 되어 보이는 글들과 그에 딸린 욕설들의 양과 살기어린 분노에 압도되어 무기력해졌습니다. 교수대로 나와 사람들 앞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 제가 잘못한 사실이 있고 이에 대해서는 비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잘못 알려진 사실에 근거한 욕설과, 정작 비난을 받아야 하는 저보다 아내가 집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무엇보다도 살인마, 살인미수범, 아동학대범 등의 표현은 부모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 중에 제가 아는 사람들도 있을 것만 같았고, 모두 제가 죽기를 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내가 죽어야 아내의 누명을 벗길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상황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귀국 직전에 그나마 유일하게 저에 대하여 취재활동을 하는 기자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귀국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기자 분과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객관적 증거들도 없고 무슨 말을 하여도 거짓말로 몰리는 상황이니 나중에 말씀드리겠다, 지엽적인 반박은 의미가 없다, 당시의 날씨 자료 등 객관적인 사실로만 기사를 작성하신다면 얼마든지 돕겠지만 인터뷰는 어렵다고 하며 최대한 말을 아끼고 제한적인 사실에 대해서만 답변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기사가 나간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한 상황에서 ‘인터뷰’라는 제목의 “단독” 기사가 나와 매우 당황하였습니다. 마치 제가 사건의 비본질적인 내용을 가지고 매우 억울해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내용이어서, 이제는 더 이상 소명의 기회가 없겠다는 생각에 절망스러웠습니다.





기사가 생성∙유통되는 과정이나 단독 경쟁 현실에 어두웠던 저의 불찰이라고 생각하고, 그래도 객관적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했던 좋은 기자라고 생각하고 넘겼습니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모든 연락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내와 제가 속한 곳에서는 징계 조사절차가 개시되었고 징계 여부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사실관계를 제대로 바로 잡을 수 있을 지가 중요할 뿐, 징계 여부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내심 두 기관 중 하나라도 조사한 내용을 조금이나마 발표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이 사건의 책임 당사자인 저에게 중징계가 내려져도 상관 없으니, 경위서에서 자세히 설명한 내용이 밝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까지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 때문에 삶의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는 아내에게 잘 해 주었어야 하는데, 아내에 대한 죄책감이 모순적으로 아내와 갈등을 키우게 하였습니다. 저는 괌 현지 경찰과 언론을 상대로 법적 대응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국내에서도 더 이상의 허위사실 유포는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악의적으로 사진을 계속 퍼나르고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사람들도 고소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내가 현직에 있는 이상, 사실상 모두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내는 현지를 상대로 한 소송이나 국내에서의 정정보도청구, 사실관계 정정을 위한 노력들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내와 의견충돌이 계속되다 보니 싸움으로 이어졌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에게 무력감을 느끼며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갔습니다. 아내를 힘든 상황에 놓이게 한 죄책감이 저의 조급함을 자극했고, 더욱 빨리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며 누구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아이를 죽일 뻔한 거짓말쟁이 부모로서 평생 자숙하며 아이들만 돌보는 것이 마땅한 선택일 수 있지만, 계속되는 불면증과 감정기복 속에서 제 감정을 제어하고 통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한동안은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당혹스러웠고, 멀쩡히 걷다가 땅이 꺼져 버리는 느낌에 휘청하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사기를 쳤거나 업무 중 실수가 문제된 사건이었다면 감내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아이와 직결된 문제라는 게 힘들었습니다. 추석 직후 아들이 등교길에서 겪었던 일이 반복되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가 가장 컸습니다.


오랜 갈등 끝에 마지막으로 찾은 타협점은 유출된 사진을 삭제하고 허위사실이 담긴 게시물은 되도록 삭제하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공개된 게시물만 수 만개에 달했기 때문에 이걸 언제 다 할 수 있을지 막막했지만, 그냥 끈기로 밀어붙이는 방법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게시물을 작성한 사람에게 일일이 쪽지를 보내기도 하고 읍소하기도 했지만, 무시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쪽지기능 자체가 없는 곳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이 방법으로는 속도를 낼 수 없어서 사이트 운영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삭제를 요청하기 시작했지만, 게시물 하나하나 좌표를 지정하여 요청해야 하기 때문에 지난한 작업이었습니다. 어차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퇴근하면 밤새 삭제를 요청하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언론사에는 기사를 쓴 기자나 관련 부서의 전화번호를 수소문하여 개별적으로 사진의 삭제나 교체를 요청했는데, 다행히 연결된 분들은 모두 취지를 수긍하고 사진을 교체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시적인 방법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모든 기자의 연락처를 알아낼 수도 없고, 국내법을 무시하는 구글, 트위터는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 한 해결이 어려웠습니다. 이런 생활을 2~3달 하고 나니 체력도 바닥이 났고,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 남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회의가 들었습니다.


12월이 되어도 여전히 사진을 퍼나르거나 욕하는 분들은 잦아들지 않았고,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습니다. 아동과 관련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저는 맥락도 없이 소환되어 아동학대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법조인들의 크고 작은 사고가 터지거나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생기면 누가 더 나쁜 사람인지 비교의 대상이 되었고, 흉악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나라는 왜 얼굴공개를 하지 않느냐며 불법유출된 저희 사진을 들이밀었습니다.


부모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지니 쉽고 빠른 해결책을 찾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거나 ‘다 지나갈 것’이라는 위로의 말들이, (이성적으로는 그 진심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너는 죄인일 뿐이다라는 말로 상처가 되어 돌아왔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침묵과 시선조차 비난의 칼날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빠는 원래 그래야 하더라’, ‘수많은 아버지들이 모두 그렇게 살아 왔다’는 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아버지로서의 무게감으로 다가왔고, 못난 아버지로서의 자괴감을 더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하루하루 마음을 다스리며 버텨야 했지만 1시간은 커녕 1분도 버티기 힘들 정도로 인내심이 바닥났을 때 쯤에는 많은 분들이 저에게 요구했던 것처럼 다 내려놓는 것이 이 사건을 일으킨 책임자로서 유일한 해결책이고 책임지는 자세라 느껴졌습니다. 그것이 차라리 가족들에 대한 동정심이라도 불러 일으키고 사실관계도 밝혀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10년 전 친구가 갈 때 썼던 방법 밖에 없는 것 같아 새해가 되는 날 작별을 고하고 그 친구가 했던 것처럼 술을 들이켰습니다.


막상 올라갔지만 고소공포증이 있어 겁이 나기도 했고, 아이들이 계속 눈에 밟혔습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인지, 핑계거리를 찾으려는 발악이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앉아 지난 날들을 반추하다가 결혼하기 얼마 전에 죽을 뻔했던 그 날에서 시계가 멈추었습니다. 새벽에 서해안 고속도로 운전 중 앞바퀴와 핸들 조향장치를 연결하는 부분이 끊어졌고 핸들이 마구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중앙 분리대를 들이받은 후 정신을 잃었던 날이었습니다. 깨어나 보니 육중한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바로 앞에서 저를 비추고 있었고, 운전사 분이 저를 깨우고 있었습니다. 그 분 말로는 중앙 분리대로부터 반대편 가드레일까지 720도 회전하며 차선을 횡단한 후 차량 후미 부분이 반대편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차량이 멈춰 섰다고 했고, 가드레일 바깥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본인 차량으로도 들이받을 뻔 했고 차선을 가로 질러 가는 중에 다른 트럭 한 대도 지나갔는데 정말 너무 다행이라고 하더군요. 차량은 완전히 파손되었지만, 신기하게도 몸은 멀쩡했고 한동안 운전대가 마음대로 돌아가는 느낌 때문에 운전을 하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어차피 덤으로 사는 인생인데, 아내와 가족에게 충실하고 희생하면서 제 성명대로 ‘상서로운 집’을 이루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이 우습기도 했고, 그 때부터나 앞으로나 어차피 덤으로 사는 인생인데 아이들 크는 것은 왜 못 도와주나 하는 뻔뻔함도 생겼습니다. 굳은 결심으로 올라왔다가 빈 손으로 내려가는 것이 적당히 타협하는 것만 같고 비겁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철판 까는 인생의 첫걸음으로서의 실천이라고 생각하고 새해가 밝는 것을 보면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이 글을 시작합니다. 아직도 사건 당시에 머물고 있는 제 마음을 2018년으로 옮기고, 아이들과 뛰어 놀고 싶습니다. 제가 잘못한 부분이 있고, 깊이 반성합니다. 하지만 비판은 모든 잘못을 저지른 저에게로만 향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사실이 아닌 일로 아내와 아이들까지 고통받는 일은 멈추고 싶습니다. 


2017. 10. 2.부터 2017. 10. 5.까지 4일 동안 괌에서 있었던 일의 사실관계에 대해 상세히 밝히는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제 아이들이 아동학대범이라는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아빠와 평생 살아가게 할 수는 없어서입니다. 부디 앞으로 시작할 이 글이 장황한 변명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고, 제가 이제라도 가정을 지키는 첫걸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글을 읽을 분들이 저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제 사정을 헤아리고 선뜻 글을 삭제해주시고, 내용을 수정해주신 네티즌 분들께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덕분에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2018. 1. 22.에서야 통보받은 조사결과를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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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편에서 이어집니다.



괌에서 있었던 일 2 - 사건 당일


https://mlbpark.donga.com/mp/b.php?p=1&b=bullpen&id=201803280015154220&select=&query=&user=&site=&reply=&source=&sig=h6jzHl2Yk3HRKfX@hlj9Gf-ALmlq



괌에서 있었던 일 3 - 내가 경험한 미국의 사법절차


https://mlbpark.donga.com/mp/b.php?p=1&b=bullpen&id=201803290015177698&select=&query=&user=&site=&reply=&source=&sig=hgjXHl2YghXRKfX@hlj9Gf-AKml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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