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대혁명.
말할 것도 없이, 중국 현대사 최악의 재앙이었다.
네티즌도 매우 잘 알지.
그런데 이 문화대혁명의 배경에는
어쩌면, 명나라가 있었다고 해도 되겠다.

북경의 외곽 지역인 창핑 구(昌平区)에는 명나라 황제의 무덤들이 열세 기가 모여있다.
명십삼릉이라고 한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황릉은 "지하궁전"이라고 하여
황제와 황후의 관 그리고 부장품을 배치해두는 곳이 있다.
명청황릉은 격동의 근현대사 때문에 고고학적으로 발굴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1955년부터
명나라 역사 전문가인 베이징시 부시장 우한(吴晗)의 주도로
명나라 황릉을 발굴하기 시작한다.
여러 논의 끝에 첫 대상은 정릉(定陵)으로 선정.
만력제가 묻힌 무덤이었다.

(조사단이 만력제의 관을 열어서 보는 모습. 중앙이 우한)
그렇게 발굴을 추진한 결과, 1958년에 만력제의 관을 열었고,
이듬해에는 정릉의 자리에 박물관을 세워 유물을 전시했다.
안타깝게도 당시 고고학이 발전하지 못하여 유물 훼손 정도는 심각했다.
우한은 문학적 재능도 갖춘 사람이었다.
중화민국 시절에 후스(胡适)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도 했으니.
그는 역사를 소재로 한 경극을 한 편 썼다.
그 제목은 (海瑞罢官).

명나라의 해서가 가정제에게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당해 투옥당한 일을 소재로 쓴 작품이었다.
작품은 1959년에 쓰여졌다.
초기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이 주를 이뤘다.
황제에게 충직하게 직언을 올린 해서를 본받으라고
마오쩌둥이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루산 회의에서 펑더화이가 대약진의 문제를 지적했고,
이후에도 마오쩌둥과 류사오치 사이의 견해 차이로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그래서 마오쩌둥과 사인방 일당은
류사오치 세력을 당에서 몰아내고,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하기 위해 일을 꾸몄다.
우선 북경시 시위원회를 목표로 삼았다.

1965년 11월, 사인방의 일원인 야오원웬(姚文元)은
상하이 문회보라는 신문에 우한의 해서파관을 겨냥한 글을 올린다.
해서파관이 펑더화이를 해서에 빗댓고,
따라서 충신 해서를 벌한 암군 가정제는 마오쩌둥을 풍자했다는 취지였다.
부시장인 우한을 비판함으로서 북경시 시위원회의 핵심인 시장 펑전(彭真)을 공격한 것이기도 했다.
펑전은 학술과 문예를 정치와 관련지으면 안된다고 반대했지만,

결국 1966년 5월 16일,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이른바 "5.16통지"를 통과시켰다.
당, 군, 정부, 문화계에 혁명에 반대하는 수정주의 분자들이 있으며,
이들이 때가 되면 정권을 탈취해, 프롤레타리아 독재정을 부르주아 독재정으로 만들 것이다.
그런 흐루쇼프 같은 자들이 곁에 있으며, 후계자로 배양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우한은 반동으로 몰렸고, 1969년에 감금당한 상태에서 사망한다.
사인은 불명이고, 유골의 행방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그런 '반혁명분자'가 발굴을 주도한 명 정릉도 무사할 리가 없었다.
1966년 8월, 홍위병들은 "지주계급의 우두머리 만력제를 타도하자며" 정릉으로 쳐들어가고는
박물관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만력제와 효단현황후, 효정황태후의 시신을 불태워버렸다.
관은 부수어버렸으며, 사진 자료와 초상화도 불태웠다.
현재 명십삼릉에서 지하궁전을 직접 들어가볼 수 있는 곳은 정릉이 유일하다.
명 정릉 발굴 당시 기술의 한계로 인한 거대한 규모의 훼손의 기억 때문에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제왕의 능침을 주도적으로 발굴하지 않는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고고학 발굴에는 유물의 훼손이 필연적으로 동반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술이 1950년대와는 비교도 안되게 좋아진 지금도 발굴을 하지 않는데에는
문화대혁명 당시의 트라우마도 한몫한다.
요즘은 발굴하지 않아도 조사가 가능한 기술이 개발되기도 하고.
해서는 본의 아니게 문화대혁명의 원인의 근원 중 하나가 되었고,
만력제와 황후들은 무덤이 그야말로 박살이 났으니,
명나라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참극의 흐릿하고 어렴풋한 배경이 되었으면서도 그 광풍의 피해자가 되었다고 해도
딱히 과언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번외: 청나라 황릉은 지하궁전을 들어가 볼 수 있는 데가 더러 있다.
대표적으로 건륭제 무덤인 유릉(裕陵), 광서제 무덤인 숭릉(崇陵)이 있다.
이런 경우는 고고학 발굴 때문이 아니라, 도굴당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는 곳들이다.
유릉이 위치한 황릉군인 청동릉은 중화민국 군벌 쑨뎬잉(孙殿英)이 털어먹었고, 유물은 고위층에 뇌물로 뿌렸다.
이 도굴 사건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푸이가 일본과 협력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