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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소 맨: 레제편》의 상징언어: 불에서 피고, 물에서 지다. (장문)

전 게시글( https://m.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72945317 )과 묶어 쓸까 고민했지만, 맥락이 산만해질 것 같아 분리해서 쓰는 레제편 리뷰.






앞선 리뷰의 빔과 레제의 대칭구조 해석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영화 안에서 '물'은 평화롭고 평범한 일상의 상징이다.


레제와 덴지의 순애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수영장 씬에서, 레제는 덴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헤엄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 그리고 덴지가 모르는 다른 것도.'


레제가 그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열여섯은 아직 어리다. 더 평범한 행복을 누려야 한다' 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대사의 의미는 명확하다. 수영장을 채운 물은 무기 인간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평범한 삶이며, 헤엄은 그 삶을 헤쳐나가는 방법, 즉 일상의 행복을 누리는 방법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덴지를 '물'로 끌어들이는 레제가, 사실 가장 물과 상극인 폭탄의 악마라는 것이다. 종반부에 레제는 물에 흠뻑 빠지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씬에서 그녀는 아랑곳않고 수영장에서, 비가 퍼붓는 옥상에서 자신을 물로 적신다.


즉 레제는 무력해지기를 꿈꾸었으며, 적어도 덴지와의 '데이트' 중에는 결코 폭탄인간이 아니라 한 명의 소녀로 있기를 바랐다. 그녀는 -포치타를 기꺼이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덴지와 달리 - 폭탄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떨치고 싶었던 것이다.


《레제편》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발생한다. 그녀가 물을 동경한다는 점, 그러나 그녀는 결국 불이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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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만 여기서 불의 상징성은 물과 대칭을 이룬다.


살육, 투쟁, 폭력, 유혈의 격렬하고 잔혹한 삶. 자기 자신을 살라버림으로써 유지되는 삶.


'폭탄'의 악마인 레제는 불의 화신이며, 모든 불 중에서도 가장 폭력적인 존재로서의 불을 구현한다. 그리고 그런 레제가 물을 희구한다는 점, 자신이 불발되기를 바란다는 점, 그것이 레제라는 캐릭터를 이루는 딜레마이다. 그녀는 물 속에서 평화롭기를 바라지만, 살육과 폭력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그 행복은 자기 자신을 지우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다.






《체인소 맨: 레제편》의 상징언어: 불에서 피고, 물에서 지다. (장문)_2.jpg



이번엔 운동성의 대칭구조에 대해서 말해보자. 요컨대 상승과 하강이다. 《체인소 맨: 레제편》에서, 물은 하강하고 불은 상승한다. 즉 물은 비의 형태로, 불은 솟구치는 폭염(爆焰)의 형태로 감상자에게 육박한다.


다시 말하면, 아래는 평범한 인간의 세계를, 위는 악마와 초인의 세계를 상징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인간은 하늘을 못 나니까. 그런 건 괴물이나 되는 거다.


덴지와 레제 두 사람의 만남이 아래로 쏟아지는 물, 즉 비가 오는 날 처음 이루어지는 것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격렬한 투쟁의 초현실세계(하늘)에서 평온한 인간의 현실세계(땅)로, 레제는 비처럼 덴지에게 다가온다. 아니 레제 자신이 스스로를 그렇게 느꼈으리라. 학교 옥상에서, 레제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하염없이 올려다보다, 빗방울이 그녀의 동공으로 떨어지던 그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비를 통해 이어진 인연은 점점 심화하다가, 온세상이 비로 둘러싸인 태풍 속에서, 더이상 내려 갈 곳이 없는 수영장이라는 고인 물 속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더 하강할 아래가 없는 수영장의 물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사랑의 절정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비가 멎고,

불꽃이 위로 쏘아올려질 때, 반전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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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지가 레제의 속공에 어떻게 맞섰는지 생각해보자.


레제는 폭발의 불꽃으로 하늘을 날아다닌다. 하늘은 비인간적 세계, 그것을 악마라고 부르든 무엇이라 부르든, 인간다움의 입자농도가 한없이 희박한 세계다.


반면 덴지는 체인소 맨이 되어도 하늘을 날 수는 없다. 단지 빔-앞선 리뷰에서도 밝혔듯이 빔은 레제의 대칭으로서 물[水]적, 대지적 존재다-을 타고 땅을 달리거나, 빔이 가르쳐준 대로 체인소를 건물에 걸어, 일정한 고도 안을 활강할 수 있을 뿐이다. 어느 쪽이든 날아다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잘해봐야 상공과 대지의 사이를 3차원적으로 왕복하는 중간자이다.



건물 안에서의 싸움 도중, 건물 밖으로 날아간 체인소 맨이 튀어나온 철골을 붙잡은 채, 허공에 간신히 대롱대롱 매달려 레제의 공격을 받는 위기 상황을 기억하는가?


그 장면은 레제와 덴지의 차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레제는 하늘(비현실)의 주민이지만, 덴지는 아니다. 그는 도와주는 누군가(빔) 혹은 무언가(건물)가 있어야 하늘을 난다.


[그리고 이 장면은, 원작 만화에 없는 극장판 오리지널 장면이다. 영화감독이 이러한 구조를 의식하고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로서는 정말 멋진 가획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덴지와 레제의 격전은, 빔과 레제를 모두 취합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전 리뷰를 참고하시길- 덴지의 아이디어로 두 사람이 함께 바다에 깊이 빠지면서 끝난다.


깊이. 더 깊이.


수영장 따위 얄팍한 물웅덩이보다 더 아래로.


정말 이보다 내려갈 수 없는 깊숙한 아래로.


영화 최고의 순애씬이 갱신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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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눈여겨볼 상징이 있다면, 바로 꽃이다.


첫만남 당시 덴지가 레제에게 건네준, 그녀가 임무를 잊어버리게 만든 꽃.


이 꽃의 출처를 따지자면, '자신이 마음이 없는 게 아닌지 고민하는 덴지에게 마키마가 마음이 있다고 긍정해주고,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덴지가 악마 피해자 성금에 기부를 하고, 감사의 의미로 기부단체에게서 받은 꽃'이다. 즉 이 꽃은 덴지에게 마음이 있다는 증거이며, 나아가서는 마음 그 자체다.



그리고 카페 데이트 장면을 잘 보면, 이 꽃은 물컵에 꽂혀 테이블에 장식되어 있다. 당연하게도 꽃은 물을 먹어야 사니까. 즉 '꽃'은 작품을 관통하는 물 - 불의 대칭구조 중 물의 세계의 연장에 존재하는 상징이다. 마음은 평화로운 세계에서만 꽃을 활짝, 오래 피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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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꽃이 불에 던져지면 재가 되어 사라질 뿐이다. 불이 어떻게 꽃을 가질 수 있겠는가?


모든 전투가 끝난 결말부, 레제는 초반의 덴지처럼 성금을 기부하고 꽃을 얻은 뒤, 그 꽃을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떠나기 위해 타야 하는 기차를 놓친다. 레제는 꽃을 계속 피우고 싶다고 결심하고 덴지를 만나러 간다.


....그러나 그녀가 꽃을 받은 성금단체는, 바로 폭탄의 악마- 즉 레제 자신이 짓밟고 살육한 피해자들을 도우려는 마음씨로 모인 사람들이다. 레제가 손에 쥔 이 꽃은 그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레제는 모순덩어리인 이 꽃이라도 보전하고자 하지만, 마키마와 천사는 그것을 심판한다.


그리고 그날 저녁, 덴지가 레제한테 주었던 꽃도 물컵 안에서 시들고, 카페 마스터는 그것을 치워버린다. 이 사랑의 불가능성은 그렇게 상징을 통해 웅변된다. 불에서 피는 꽃은 없다고.


....아니,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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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불에서 피는 꽃이. 불꽃[花火]이.


일본어로도 불꽃놀이를 뜻하는 하나비[花火]에 꽃[花]이 들어간다는 것에 주목하자. 상기하였다시피 폭력과 유혈의 향연, 그 신호탄이 되는 불꽃놀이는 다름아닌 레제라는 불이 피울 수 있는 유일한 꽃이기도 하다.


즉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불꽃놀이를 배경으로 키스를 가장해 혀를 끊어버리는 레제의 입맞춤은, 강렬한 반어反語면서 그 반어를 포함하는 역설逆說이기도 하다. 그녀의 유혈낭자한 키스는 불로 피어오른 꽃과 동일시된다. 레제가 키스로 덴지를 죽이듯, 불꽃은 꽃처럼 아름답게 태운다.


그것은 상대를 파괴하는 행위인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증명하는 가장 선명한 시도다. 사랑과 사름[燃]이 포개어지는 한순간의 지점이다. 파괴적인 사랑이며, 파괴적이지만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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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레제와 덴지의 전투를 보면, 레제가 덴지에게 날리는 공격에는 일반적인 폭염도 있지만 위와 같이 알록달록하고 꽃처럼 아름답게 터지는, 불꽃놀이 폭죽 같은 폭염도 섞여있다.


그리고 필자가 3회차 관람을 하며 확인한 결과, 이 알록달록 폭파는 덴지를 상대할 때만 사용하며, 다른 인물들과 싸울 때는 평범하게 솟구치는 폭발만 일으킨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즉 레제는 덴지와 싸우면서도 덴지에게 계속해서 '꽃'을 안겨준 것이다. 마치 덴지가 처음 주었던 꽃에 답례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 꽃은 덴지의 몸을 태우는 파괴적인 불꽃이지만, 그러나 레제가 피울 수 있는 유일한 꽃이다.


[그리고 이 불꽃놀이 모양 폭파공격 역시 원작에는 나오지 않는 오리지널 장면이다. 극장판 감독이 이 만화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치밀하게 해석해서 재구성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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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체인소 맨: 레제편》은 의 상징 연쇄와 의 상징연쇄를 대칭구조로 하여, 그 사이를 체인을 걸고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소년과 한쪽에서 다른 한쪽을 소망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소녀의 시점으로 볼 때, 이 영화는 물에 한없이 잠기고 싶던 불의 이야기, 빗물과 함께 내려가고 싶었던 하늘의 주민의 이야기, 오래오래 피어있는 꽃을 피우고 싶었던 화약의 이야기다.


그러나 불의 화신인 그녀가 피울 수 있는 유일한 꽃은 불꽃뿐이다. 아름답고 강렬하고 파괴적이지만 오래 지속할 수는 없는, 그러나 망막에만큼은 오래가는 흔적을 남기는 불꽃놀이의 불꽃. 그 불꽃처럼, 레제 역시 찬란하고 덧없는 사랑을 덴지의 가슴에 남길 뿐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영화의 한줄평을 이렇게 남기고 싶다. 이것은 꽃이 되고 싶었던 불꽃이, 불에서 피어 물에서 지는 이야기라고.

댓글
  • 맥스커피 2025/11/06 15:26

    역시 대중이 재밌게 보고 재밌어야 이런 감상문들이 많이 나와

    (z8U6vJ)

  • ❤️꿀꿀❤️ 2025/11/06 15:46

    역시 레제는 순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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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TgxMDAw 2025/11/06 17:10

    순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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