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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콘 프로젝트 외전 퍼스트 컨텍트 (23)


그런데
모리 유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상황은 긴박했다.
아니
시간 자체가 긴박했다고나 할까?
모리 유키와 JOAK 교향악단이 탈출을 하기 위해서
작전을 짜던
바로 그 시기의 프랑스 전역은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의 전격전의 시작이었을 때였으니........
모리 유키의 대원 한 명이
탈출을 하고 난
그 다음날
드디어 공세의 날이 밝았다.
5월 13일 오전 8시부터
스당 지역에는 독일 공군의 롤러식 폭격이 몰아쳤는데,
독일 공군은
310대의 폭격기와
200대의 슈투카,
300여 대의 전투기/전폭기를 투입했고,
기갑집단이 마스 강을 도하하기 직전의 90여분 동안에는
750여 대에 이르는 슈투카와 폭격기가 집중되었다.
08시부터 시작된
독일 공군의 폭격은
보병부대의 도하작전 개시 직전인
16시까지
집중적으로 프랑스군을 때렸다.
구데리안이 큰 위협으로 평가한
55보병사단의 포병대는
이 폭격으로 무력화된다.
뿐만 아니라
폭격으로 인한 프랑스군 사상자는 56명에 불과했지만,
스당의 거의 모든 야전 통신선이 절단된 데다
훈련이 부족한 55보병사단은
공황 상태에 빠지면서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말았다.
아군의 폭격을 마스 강변에서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독일군은
16시 마스강 도하 작전을 개시한다.
제1 기갑사단은
앞서 벨기에 종심에서 공중강습작전을 수행한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연대와
제43 강습공병대대를 지원받아
도하 작전에 돌입했다.
본래 제1 기갑사단은
스당 북부의 퐁네프 교량을 통해 도하하려 하였지만
무력화되지 않은 프랑스군 벙커의 강력한 저항으로
수시간 동안 실패하였다.
그래서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는
수시간의 탐색 끝에 프랑스군의 벙커 위치를 파악,
88mm 대공포로 파괴한 이후
본격적으로 마스강 도하에 착수하였다.
그로스도이칠란드 연대 2대대는
선두로 마스 강 도하 이후
신속하게 퐁뇌프, 심티에르 일대 프랑스군과 시가전을 벌여
제1 방어선을 무력화시키며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2대대는
돈 셰리- 스당간 도로에서
프랑스군의 포격에 잠시 저지당하지만
신속하게 프랑스 군 방어선의 측후방으로 접근하여
도하 개시 3시간이 지난
19시
어간 프랑스군의 2차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프랑스군 중대 방어거점이 위치한
라 프라이엘을 백병전 끝에
20시경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1기갑사단의 또다른 도하작전의 주축인
1보병연대는
군단장 구데리안이 직접 현장에서 도하작전을 통제하였다.
그로스 도이칠란트 연대와 달리
헤르만 발크 대령의 1보병연대는
공군의 공습으로 프랑스군 방어선이 무력화된 사이
손쉽게 도하에 성공했다.
무난하게 도하에 성공한 1보병연대는
신속하게 남하하여
70년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나폴레옹 3세가 항복을 선언한 벨뷔 요새를 향해 진격, 함락시키며
55사단 종심을 향해 진격하였고
일부 제대는
2 기갑사단에 강력한 저항을 펼치고 있는
돈 셰리의 프랑스군 측방을 공격하여
2기갑사단의 도하를 지원하였다.
5월 13일
도하 첫날
발크가 이끄는 1보병연대의 공격으로
프랑스군의 3개의 방어선을 돌파하며
8km에 달하는
길쭉한 돌파구를 형성되었다.
하지만
비교적 수월하게 도하에 성공한
1기갑사단과 달리
2기갑사단, 10기갑사단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2기갑사단은
마스 강변까지의 기동로에
은/엄폐물이 거의 없는 데다
프랑스 포병대의 위협에
사단의 좌익이 노출되어 있었다.
거기다
1기갑사단 방면으로 포병 전력을 집중시킨 터라
가용할 수 있는 경포뿐이었는데,
아르덴 숲 어딘가에서 탄약 운반 차량들이 헤매고 있는 통에
그나마도 애물단지인 상황이었다.
다행히
먼저 도하를 마친 1기갑사단 병력들이 마련한 교두보 덕분에
2기갑사단도
이어서 도하를 성공한다.
10기갑사단의 도하 작전 역시
파괴되지 않은 프랑스군 벙커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큰 차질을 빚고 있었다.
여기서
독일군의 임무형지휘가
또 다시 큰 빛을 발휘하게 된다.
10기갑사단 예하
49공병대대 2중대의 일개 소대장이던
루바르트 중사가 이끄는
10여 명의 병력이
유일하게 도하에 성공하였고
7개의 벙커를 장악하며
10기갑사단의 돌파구를 개방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들의 활약으로 형성된 돌파구로
10기갑사단은
마스 강 도하를 시작하였고
21시경
먼저 도하한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와 조우하며
1기갑사단과 연결된 돌파구를 형성하는데 성공한다
이는
주공을
스당 서쪽의 개활지로 잡지 않는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사례였고,
해당 방향으로 주공을 주장했던
클라이스트도
구데리안이 옳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서부전선을 통틀어
가장 기이한 사건으로 알려진
55보병사단의 와해가 발생한다.
사단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던
뷜송(bulson) 일대에
독일 기갑부대가 출몰했다는 풍문이 돌면서
사단 전체가
사실상 붕괴되어 버린 것.
하지만
실제로는
뷜송 일대에는
기갑부대는커녕 독일군 보병 하나 없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상황이냐면
뷜송 북쪽의 고지에서
포탄이 발사되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프랑스군 포병 장교가
'혹시 전차포탄일수도?'라는 뉘앙스의 보고를 했고,
이것이 순식간에 확산되면서
'뷜송으로 독일군 기갑부대가 몰려오고 있다!'로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단 몇 시간만에
55보병사단은 산산조각나며
상당한 숫자의 방어 거점들을 방기하고 말았다.
( 이후 이 사태의 원인 규명을 위한 조사 위원회에서
당시 55보병사단의 장교와 병사들은
"우리가 전차를 보았다! 거짓말이 아니다!"라며 팔딱댔지만...
독일군 기갑부대는
와해 뒤 12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도착했음이 밝혀졌고,
보고서들은
이 사태를 집단 환각 증상으로 평가했다.
이 사례는 무도병과 함께 심리학계에서 대표적인 집단 환각 사례로 자주 거론하는 사례이다.)
이처럼
각성제를 포함한 오만가지 약물을 잔뜩 빨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72시간 동안 미친 듯이 진격한
19기갑군단 예하 1기갑사단의 진격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고,
결과적으로
그 시간 안에 전차의 최대 속도로 갈 수 있는 거리를 초과해서
진격해 버린다.
이 보고를 들은 히틀러가
'혹시 허위로 보고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여태 시종일관 얻어터지던 프랑스군도
슬슬 A집단군이
단순히 벨기에 남부와 룩셈부르크를 노리는 조공이 아닌 주공이었다는 것,
스당 방어선이 위험에 빠졌다는 전황을 파악하고
역습을 시작했다.
독일군이 형성한 돌파구는 아직 좁았고,
1기갑사단이 도하하며 설치한 골리에의 교량을 제외하면
중장비/중화기가 수송될 만한 통로가 없었다.
따라서
이 교량에 연합군은 공군력을 집중시켰고,
제2군에서
2개 전차대대를 증원받은 10군단은
증강된 2개 보병연대로 반격을 지시했다.
더불어
2군 사령관
샤를 욍치제 장군은
제2군 지역으로 배속된 21군단에
야전군 예비대 일부를 충원해
야전군 차원의 대대적인 역습을 준비했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만 했다면
지금까지 독일군이 이뤄낸 성과는 무로 돌아갔을 것이다.
제대로 들어가기만 했다면 말이다.
우선
교량을 파괴하기 위한 연합군 공군이
개박살난다.
골리에 교량이 목표가 될 것을 예측한
독일군은
다리 인근에 조밀한 방공망을 구축했고,
가용한 공군력까지 총집결시켰다.
반면
연합군은
전력 집중은커녕
그나마도 축차 투입으로 참혹한 피해를 입는다.
이 동안 구데리안은
19기갑군단의 주력을 마스 강 너머로 도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시점에서
10군단의 역습이라도 실행되었다면
어떻게든 도하를 저지할 수 있었겠지만...
역습의 지휘를 맡은
55보병사단장 라퐁텐 장군은
'문서화된 명령의 서식'을 수령하기 전까지는 따를 수 없다며
공식 명령을 받기 위해
사단 지휘소를 떠나버린다.
결국 명령을 수령한지
9시간이 지난
5월 13일 오후 8시 후에
라퐁텐은 역습을 지시했고,
실제로 시작된 것은
11시간 반이 지난 이후였다.
(그 정도로 프랑스 군은 1차대전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함)
애초에
군단장 그랑샤르 장군이
최초로 명령을 발한 것은 16시였으나
라퐁텐은
4시간이 지나서야 수령하였다.
게다가
역습부대의 우익이
탈영 사태로 지체된 탓에
실질적인 병력은
본래 계획의 절반에 불과했다.
당시 55사단이 공황에 빠져 있긴 했지만
방어 거점의 상당수가 건재했고,
예비대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점,
그리고
역습 명령 하달 이후
프랑스군의 사기가 왕성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때의 역습이 즉각적으로 이뤄지지 못한 것이
프랑스 입장에서는 천추의 한이라 하겠다.
한편
플라비니 장군이 지휘하는
21군단은
이번 야전군 차원의 반격 작전의 핵심이 되어
2개 군단급의 부대를 동원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21군단은
직할로만 3흉갑기병사단과 5경기병사단, 3차량화보병사단에 1기병여단 등을 보유했고,
여기에
2군 예하의 예비대와
10군단의 잔여 병력 등을 배속받았으나,
문제는
이들 역시 턱없이 느리게 움직였다는 것이다.
5월 14일 6시에
르 쉔느에 대기하고 있던
3흉갑기병사단은
13시가 돼서야 기동을 시작했고,
플라비니 장군이 진두지휘하는 역습부대는
무려 17시 30분이 되어서야 공격 준비를 완료했다.
이 시기의 구데리안은
측방 위협을 아예 무시하고 돌격을 주도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밍기적거리는 사이
구데리안은
프랑스군이 역습을 한다면
핵심적인 교두보가 될 수 있는 스톤(Stonne)에
10기갑사단으로 하여금 공세적 방어를 지시한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를 배속받은
10기갑사단은
5월 15일 새벽에
스톤 고지 일대를 점거한다.
선형 방어 사상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
프랑스군은
스당 역습은 까맣게 잃어버리고
스톤 고지 탈환에 매몰되어
그 일대에서 고착된다.
그 사이
구데리안이 지휘하는 19기갑군단의 주력사단인
1,2기갑사단은
빠르게 서쪽으로 질주하였다.
같은 시각
41기갑군단의 6기갑사단 역시
프랑스군 방어선을 뚫고
양 측면의 19기갑군단과 15기갑군단을 추월하며
거대한 돌파구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프랑스군의 더 큰 실책이 터지고 말았으니...
겁에 질려 후퇴한 병력들과
역습에 실패한 10군단 예비대를 확인한
플라비니 장군이
역습 자체를 취소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기갑부대를 해체해 분산 방어로 투입해버린다.
(진짜 천추의 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똥별의 뻘짓으로 유명함)
북동부전선을 총괄하는 조르주 장군은
2군 사령관
샤를 욍치제 장군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스당 일대에의 반격을 재촉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병력을 재배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5월 15일 14시에 예정되었던
스당 역습은
18시 30분까지 늦춰지다
결국 취소되어
스당이 아닌 스톤 고지에 대한 반격으로 변경된다.
더 웃기는 것은
취소 명령을 제때 하달받지 못한
2개 전차중대가
국지적인 역습에 나섰다가 독일군을 유린할 뻔 했다는 것.
이 2개 중대는
자기들만 역습 중인 것을 알고 급히 후퇴했다.
결국
독일군을 스당 일대에서 저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는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사라졌다.
프랑스 2군 예하
10군단, 21군단의
스당 방면 역습이
모두 무위로 돌아가자
프랑스는
9군과 신편된 6군으로 하여금
서쪽으로 뻗어나가는
19기갑군단의 진격을 차단하려 했지만,
채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전에
19기갑군단은
가공할 속도로 기동하여
15일
6군과 9군 사이의 간격을 공격, 돌파하였고
5월 16일
아르덴 운하의 서쪽 구릉지대까지 돌파하는 데까지 성공한다.
5월 17일
스톤 고지 전투가
최종적으로 독일의 승리로 끝난 시점
비스듬히 진격하던
19기갑집단은
서북쪽으로 반전하여
6기갑사단이 뚫어놓은 돌파구로 향한다.
뒤늦게
프랑스와 영국군은
독일군의 실제 주공이
바로 아르덴 산맥을 넘어온 A집단군이었으며
베네룩스 방면으로 강력한 공격을 가해온
B 집단군이
사실 조공이었음을 깨달았지만
여기서
또 다시 A집단군이 파리로 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파리 방면으로 병력을 배치했다.
하지만
A집단군의 목표는
파리가 아니라 대서양이었다.
18일 오후
독일군 1,2,6 기갑사단이 공격을 개시하였고
19일
이들 앞을 막던 프랑스군 방어선은 와해되었다.
이제 때는 늦었고
A집단군의 대서양을 향한 진력로를 막을 연합군은 없었다.
드디어
낫질이 대서양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본래 구데리안의 19기갑군단과 병진하기로 되어 있었던
라인하르트의 41기갑군단은
여전히 아르덴의 끔찍한 교통 정체 속에 갇혀 있었다.
5월 13일 16시,
계획대로 마스 강변에 도착한 것은
6기갑사단 예하의 1개 보병대대뿐이었고,
이들은 어찌어찌 몽테르메(Montherme)를 확보하여
작은 교두보를 만들기는 했지만
이미 프랑스군의 방어 태세가 확고하여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런 고착 상황을 돌파할 수 있던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기갑집단을 아니꼬워하던 보수적인 독일군 장군단이었다.
몽테르메에서의 정체를 핑계로
A집단군 사령부는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을 12군에 배속하려고 했고,
특히
라인하르트의 41기갑군단을
12군 예비대로 돌리면서
6기갑사단만 전선에 남기겠다고 명령했다.
온갖 눈치, 부조리에 불구하고
지금까지 충직하게 야전군의 지시를 따라 왔던
클라이스트는
결국 참지 못하고
A집단군의 명령을 완전히 무시,
예하 전 병력에게 공세를 지시한다.
6기갑사단은
고작 네시간 반만에
프랑스의 방어선을 분쇄하였고,
돌파에 성공한
6기갑사단장
베르너 켐프 장군은
도하를 완료한 가용 부대 전체를 묶어
프랑스군 후방 종심으로 돌파를 감행한다.
구데리안의 19기갑군단을 추월한
6기갑사단의 공격은
프랑스 군을 완벽하게 혼란에 빠뜨렸는데
6기갑사단은
선형전선 사상에 따라 보병사단과 함께 움직일 것이라는
프랑스군의 예상과 달리
좌우측면을 완전히 무시하고
16일까지 맹렬히 진격한다.
결국
몽코르네(Montcornet)까지 진격한
6기갑사단은
남쪽에서 치고 올라온
구데리안의 19기갑군단과 합류했고
프랑스 6군이 구축한 방어선을 각개격파하였다.
위와 같은 기갑부대들의 헌신적인 돌파 끝에
마스 강 중부 일대의 프랑스군 방어선은
사실상 완전히 붕괴되었고,
클라이스트 기갑집단 역시 존속할 수 있었다.
마스 강 북부에서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우측방 엄호를 담당하게 된
헤르만 호트의 15기갑군단은
프랑스 9군의 좌익 부대가 투입될 지역을 돌파하게 되었다.
15기갑군단은
벨기에군이 구축한 장애물과
아르덴 지역에서 지연전을 펼치는
프랑스군 1경기병사단과 4경기병사단을 극복해야 했다.
독일 15기갑군단 산하에 있는
2개 기갑사단 중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7기갑사단은
5기갑사단보다 앞서 나가고 있었는데,
5기갑사단 예하 31전차연대를 증원받아
마스 강 도하를 시도했다.
5월 12일,
기존의 도하 지점이던
디낭의 교량은 프랑스군에 의해 폭파되었고,
이브와(Yvoir)의 교량도 다소 늦었지만
독일군이 장악하기 직전 폭파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브와로부터 3km 남쪽에 위치한
우(Houx) 지역을 흐르는 마스 강에는 하중도가 있었고,
이 하중도와 강의 양안을 잇는 제방은
수위 조절 문제로 인해 폭파하지 못한 상태였다.
5기갑사단은
해당 지점으로 도하를 시도하게 되었다.
7기갑사단은 우 남부와 디낭(Dinant) 북쪽에서 교두보를 형성하였고,
프랑스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으면서도
결국 우 남쪽의 교두보를 통해 마스 강을 도하했다.
5월 14일,
7기갑사단은
도하 뒤 옹에(Onhaye)를 목표로 한 공세에서
롬멜이 전사할 뻔한 위기를 겪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웃기는 것이
선봉 부대를 이끌던 비스마르크 대령에게서
옹에에서 포위되었다(eingeschlossen)라는 비보를 듣고
사단장 롬멜이 직접 최전선으로 달려나간 것이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4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상급대장도
2군단 예하 부대 투입을 고려하고 있엇는데,
알고 보니
포위되었다는 게 아니라
옹에에 도착했다(eingetroffen)을
무선상의 발음 문제로 잘못 알아들은 것이었다.
결국
간신히 옹에(Onhaye)를 함락시키며
마스 강 서쪽 12km에 위치한 모르빌(Morville)까지 진출한다.
5기갑사단도
하중도를 통한 도하에 성공한 뒤
오르바스티아(Haut-le-Wastia)를 함락시키는 등 맹활약을 펼친다.
당연히
상술한 기갑군단들의 기동에 대해서도
프랑스군은 반격을 시도했으나
그 수준은
스당의 프랑스군보다 더 한심한 것이었다.
본래대로라면
프랑스 4경기병사단의 일부를 배속받은
5차량화보병사단,
1경기병사단의 일부를 배속받은
18보병사단,
그리고
6전차대대를 바탕으로 역습을 감행해야 했지만...
우선
제일 먼저 독일군과 접촉한
18보병사단은
몇 차례의 지엽적인 반격을 제외하면
상층부가 지시한 대대적인 역습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8보병사단은
11군단장 마르탱 장군이
정오에 사단 지휘소를 방문할 때까지
총 7시간 반동안
교두보가 2개나 형성되고 있던 것을 방치하고 있었다.
마르탱의 불호령을 맞고서야
8시간이나 지난
20시에 역습이 예정되었으나,
이것은 21시로 늦춰졌다가
보병들이 지체되어 끝내 역습 자체가 중단된다.
(진짜 저 당시의 프랑스 군은 일본군보다 더 못한 모습을 보였다고나 할까요?
적어도 일본군은 닥돌이라도 하지
저 때의 프랑스 군은 닥돌은 커녕
몸만 사리는 모습을 많이 보였으니........)
5월 13일 오전 2시,
5차량화보병사단은
독일군 보병들의 침투를 확인했으나,
5시간 반이 지난 이후에야 대응을 결심한다.
최종적으로는
오후 2시에 역습을 결정했으나
이것도
또 1시간이 연기되었다.
거기다
루프트바페의 공습으로
역습에 나선 보병대대가 격퇴당한다.
재역습은
오후 8시 15분으로 잡혔지만,
보병대 이동의 지연으로
9시, 10시 하염없이 미뤄진다.
이러더니
포병대가 야간을 핑계로
작전 불가를 주장하며
익일 아침까지 역습은 연기되었다.
다음날인 5월 14일,
2군단이 역습에 나서
오르바스티아 일대를 잠시 탈환하긴 했지만,
이미
독일군은 옹에 남부까지 진출한 뒤였다.
군단급 대응에 실패한 프랑스군은
야전군 예비대를 동원한 반격을 기도했다.
본래 1군 휘하 겜블루(Gembloux) 방면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1흉갑기병사단이 디낭 방면으로 역습 명령을 하달받은 것이다.
하지만
5월 14일 오후 2시에 이르러서야
해당 명령이 전달되었고,
2시간이 지난 뒤에 사단 선두 부대가 기동에 나섰다.
그리고
주둔지 35km 북쪽의 플라비용(Fl에이브이ion) 북부까지
5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프랑스 군의 움직임이 너무 둔중하고
느리게 진행된 이유는 통신 부분에 대한 문제가 컸다고 합니다.
독일군은 각 전차마다 무전기를 장착해서
원할한 통신이 실시간적으로 가능했지만
프랑스 군은
그런 부분도 준비하지 않았다고.....
심지어 전서구용 비둘기조차도 없었고
서로 연락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전화기 달랑 1대였는데
그 전화도 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 쓰지를 못했는데
그 이유가 교환원들이 점심을 먹는 시간 때문이었다고...........)
(그리고
거기에 덧붙이자면
그 당시 프랑스 군 총사령관인 가믈랭은
유선 전화, 특사 파견 등 구식 방식을 선호해
라디오, 무전기의 사용을 기피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통신감청 부분의 문제 때문에
중요한 부분은 유선으로 보내는 것을 선호하기는 하지만
전격전 같은 시시각각 상황이 변하는 그런 때
무선이 오히려 나을 수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는 이런 상황이었으니
전선에서의 상황 전파는
오토바이를 이용한 전령을 통해
통상 48시간이나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참모진들이 최소한 전신기 한 대 정도는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에,
가믈랭은
"군사 명령을 하달하는 것을 경마 경기 결과를 전달하는 것과 비교해서는 안된다."며 거부했다고.......
더욱이 총사령관 가믈랭과
부사령관 조르주 간의 임무분담에 대한 소통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가믈랭은
조르주와 해당 문제에 대해 조율하기 위해
친히 75km를 차로 달려서 조르주의 지휘소로 가야 했다고.......
거기다 이 둘의 의견 조율을 담당할 북동부전선 참모들이 소재한 곳은
총사령부와 북동부전선 사령부의 중간지점이었다고 하니......
이런 주먹구구식에다
구시대적인 방식을 고집한 프랑스군이
급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고나 할까요?)
1흉갑기병사단의
굼뜬 기동의 원인으로는
우선 B1 전차의 짧은 항속 거리가 문제였다.
그리고
연료 수송 부대가
하필 부대 후미에 처져 있다가 헤메는 통에
보급을 받지 못한데다가
피난길과 겹치기까지 했기 때문에
1흉갑기병사단은 절호의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루프트바페의 공습으로
상당수의 연료 차량이 망실되면서
사단의 이동은 더욱 늦어졌고,
어떻게든 연료를 보충하는 와중에
독일군 기갑부대에 기습을 받는다.
그 선두에 선 것은
롬멜이 이끄는 7기갑사단이었다.
롬멜은
5기갑사단 예하 31전차연대가
전장에 도착하자
이들에게 구역을 인계하고 이동한 것이라
프랑스군 1흉갑기병사단이
실제로 상대한 것은 2개 전차연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양자간 규모 차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참패한다.
프랑스 기갑부대는
무전기의 부재로 전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으며,
독일 기갑부대의 협공 앞에 각개격파당했다.
전차의 개별 성능은
안드로메다급 차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연료 부족과 지휘통제 혼란이
1흉갑기병사단에게 파멸을 부른 것이다.
결국 플라비용 전차전으로
독일군은 프랑스군 종심 깊숙이 침투할 여유를 얻게 되었고
프랑스 9군의 방어선은 조각조각나고 말았다.
A집단군이
아르덴 일대와 마스 강을 돌파하는 동안
B집단군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다룰 필요가 있는데,
시간을 살짝 거슬러 올라간
5월 12일,
B집단군은
주공 방향에 혼선을 주기 위해서
A집단군의 우측면에서 강력한 조공을 펼치고 있었다.
독일군은
딜 방어선의 약점인
장블루 갭을 향해 진격했고,
한편 연합군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딜 계획을 발동한다.
B집단군은
이 부대를 최대한 오래 붙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는데,
그 선두에 선 것이
회프너가 지휘하는 16기갑군단이었다.
이에 맞서
프랑스에서는
1군 예하 프리우 장군이 지휘하는 기병군단이 나섰다.
연합군과 독일군의
가장 날카로운 창 끝인 기병군단과 16기갑군단은
장블루 갭의 동쪽에 위치한 안뉘(Hannut) 일대에서
대대적인 정면 충돌을 펼치게 되었다.
5월 12일 오전,
안뉘에서 양군이 격돌했고
독일 기갑부대는
전차전에서 큰 피해를 입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 전차군단의 모습은
1943년 때나 가능했고
그 당시 독일군 전차 반 이상이 체코제 전차였음
그 정도로 독일군도 전차의 대량생산이 힘든 시기였음)
안뉘 전투에서 격돌한 전차의 숫자는
프랑스 415대와
독일 623대로
독일군이 우세한 것으로 보이나,
16기갑군단 예하의 전차 623대 중
실질적으로 프랑스 전차와 교전이 가능한 3호/4호 전차는
각기 73대/52대에 불과했다.
1호/2호 전차가
대전차전에서 전력외나 다름없고,
거기다
기병군단이 보유하고 있는 장갑차들은
1호/2호 전차에 필적할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기갑부대 또한
기갑전 교리의 미확립/무전기의 부족으로 인해
제병협동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독일 공군의 맹폭을 받은
프랑스군 기갑부대는
전차전으로 얻은 이점을 다 까먹었다.
한편 구식 선형 전술을
기갑부대에 적용하느라
기병군단은 상대적으로 분산되어 있었는데,
회프너는
이 약점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5월 13일,
16기갑군단은
선형으로 늘어선 기병군단 예하 부대 중
3경기계화사단의 책임 구역에
전체 전력을 집중시켜 돌파에 성공했다.
다만 이때도
전차 교환비는
프랑스군이 훨씬 더 뛰어났다.
프랑스군이
전차 105대를 잃는 동안
독일군은 160여 대의 전차를 잃었던 것이다.
이렇게 안뉘 전투 자체는
독일군의 돌파를 저지하려는
프랑스군의 명백한 전술적 승리로 끝났지만,
3경기계화사단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전선에서 탈락하자
2경기계화사단 역시 후퇴해야 했고,
곧 프랑스 기병군단 전체가 전장에서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때
기병군단은 후퇴하며
제대로 된 지연전조차 수행하지 못했는데,
그저 일렬 종대로 신속한 철수에만 급급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이를 노려
프랑스군의 전열에 끼어들었고,
프랑스 포병은
피아식별 문제로 기병군단을 지원할 수 없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회프너는 딜 방어선 일대까지 빠르게 육박하여
공세를 감행했다.
초기에는
4기갑사단이 큰 피해를 입고
회프너 역시 공세의 중단을 지시했지만,
해당 명령을 수령하지 못한 3기갑사단이
방어선 일부를 돌파하는데 성공하며
최종적으로
16기갑군단 전체가
5월 15일 겜블루 일대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 기간 프랑스의 방어는
독일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하였지만
스당 방면에서
A 집단군이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우측방이 위협받자 철수를 결정해린다.
여기에서도
프랑스군은 후퇴한 기병군단을
대대급으로 분할하여
각 보병사단에 배속하는 실책을 저지른다.
이는 프랑스군이
작전술적 차원의 반격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해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로 인해
A집단군의 측면을 위협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세력인 기병군단은
큰 피해를 입고
그 지위를 상실했으며,
프랑스군은
이제 A집단군의 쾌속진격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다만
전술적으로는
16기갑군단은 큰 손실을 입었다.
343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던
4기갑사단은
5월 16일 오전 기준으로
137대의 전차만이 가용한 상태였고,
이 중 유의미한 대전차능력을 가진
4호 전차는
4대에 불과했다.
독일군은 조공이었던
B 집단군의 이러한 전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같은 시각
주공이었던
A집단군의 마스강과 스당 돌파 소식을 누락하거나 지연 보도하며
철저히 기만하였다.
그 기만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연합군은 물론이요
심지어 이러한 작전의도를 알지 못하던 A집단군 말단 사병들까지 속였다.
이렇듯 B 집단군은
강력한 연합군 주력부대의 저항에 적지않은 피해를 받았지만
목표한 주공 속이기와
강력한 조공으로
연합군의 주력부대를 밀어내기를 완벽하게 달성하며
전황은
독일군이 예상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모든 사항이
바로 모리 유키가 프랑스에서 파악한 낫질 작전의 요지였음)

댓글
  • 사이보그 탐색자 2025/05/21 05:23

    필력이 좋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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