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22살의 데이비드 돌린저씨는 결핵 환자들에 대한 의료봉사를 위해 미국에서 전남 영암으로 향했습니다.
그후 2년동안 그는 주한미군 통역보조, 영암보건소 근무 일을 하며 한국에서 살아왔지요.


데이비드는 광주 주재 외신들을 찾아가 상황을 알리고,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희생자들의 증언을 기자들에게 번역해주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미국 평화봉사단과 함께 친구의 결혼식에 참가할 겸, 직무교육을 할 겸 광주에 들렸던 데이비드는, 한국 근대사의 비극을 직접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일반적인 시위와 진압이 과격해지고 있다고만 생각했던 데이비드였지만, 계엄군이 도시를 봉쇄하고 시민들을 총살하기 시작하자 이 상황이 단순한 시위진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데이비드는 광주 주재 외신들을 찾아가 상황을 알리고,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희생자들의 증언을 기자들에게 번역해주었습니다.
당시 헬리콥터의 시민 사살을 직접 목격하고 외신에 증언한 것도 데이비드 돌린저였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이 순간까지 그가 보여준 용기와 선의만을 놓고 보아도 그의 행동은 의인으로 칭송받기 모자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광주 도청에 모여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는 시민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광경을 보고도 모른 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
"누군가는 그들의 저항과 희생을 기억하고 기록해야만 한다면, 내가 이곳에 남아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 데이비드 돌린저
데이비드는 목숨을 걸고 도청에 남았습니다.
그는 시민군의 패색이 짙어지는 25일까지 도청에 남은 유일한 외국인이자, 공식적으로 시민군으로 참전해 외신 대변인, 통역으로 활동한 유일한 외국인이 되었습니다.

항쟁 이후에도 데이비드는 1981년까지 미군기지 강사로 근무하며 광주와 한국의 민주화운동 상황을 미국에 알렸습니다.
귀국 이후 유엔인권위원회에 광주 목격담을 담은 인권침해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했으며 1985년 전두환 미국 방문 반대 시위, 1990년 광주항쟁 10주년 하버드대 추모 강연 등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25년 5월 14일 오늘, 데이비드 돌린저는 '임대운'이라는 이름으로 명예시민증을 수여받았습니다.
압제의 시대에 굴하지 않은 '푸른 눈의 시민군' 데이비드 돌린저씨의 용기에 대한 조야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분들이야 말로 대접받아야 함.
총탄이 오가는, 그것도 남의 나라에서 선을 행하기 정말 어려웠을건데
진짜 대단하신 분이구나
백룡 지원나온줄
벌레들 ㅂㄷㅂㄷ
이런분들이야 말로 대접받아야 함.
백룡 지원나온줄
백룡보다 더 든든하신 분이지
벌레들 ㅂㄷㅂㄷ
총탄이 오가는, 그것도 남의 나라에서 선을 행하기 정말 어려웠을건데
진짜 대단하신 분이구나
택시운전사 쿠키영상으로 본인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지 한국 현대사의 귀인
ㅜㅜ
광주 푸른눈 하면 자동완성마냥 위르겐 힌츠페터가 나왔는데 다른 의인분이 계셨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