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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우스 심볼리:
1
심볼리 루돌프:
1
승부복은 우마무스메에 있어 매우 중요한 복식이다.
자신의 신념, 의지, 앞으로 선보일 미래. 그 모든 걸 함축해서 보여주기에 첫 G1이 열리기 이전부터 그 디자인과 제작에는 정말 심혈을 기울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어째 초안들이 하나같이 소양지판(霄壤之判) 그 자체인데, 트레이너군.”
그렇기에 심볼리 루돌프는 자신의 앞에 트레이너가 내민 안건들을 보고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 컨셉아트, 정도라고 해두자. 대충 감은 잡아야 하니까.”
“컨셉이라.”
어차피 이번 해에는 데뷔 레이스를 해야 하고, 이후 몇몇 G3을 뛰는 것에서 그칠 것임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걸 고려해도 승부복의 제작에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리기에 이렇게 진지하게 접근하는 건 나쁜 선택이 아니긴 한데….
“저기 중앙아시아에서 뛰어놀 법한 스타일부터 진중한 귀족풍까지라니, 지금 날 놀리는 건 아니겠지.”
루돌프는 따질 건 따지기로 했다.
“루나, 생각을 해볼까.”
트레이너실이기에 아무도 듣는 이가 없다는 걸 염두에 두고 트레이너는 팔짱을 끼며 반박하기 시작했다.
“시리즈에서 네 목표가 뭐라고 했지.”
“일단은 3관?”
“봐, ‘일단’이 붙었지. 그러면 뛰는 족족 다 이기겠다는 소리 아냐? 이건 아예 기존 판을 다 엎겠다는 뜻이지.”
훗날 얻는 ‘황제’라는 칭호를 취하기 이전이었지만, 그런 미래를 일찌감치 예측한 트레이너는 생각 이상으로 진지했다.
“그러면 네게 어울리는 건 군주야. 모든 걸 엎어버리고 지배해버리는 군주.”
“아하, 그래서 이런 걸 가져오셨다?”
“전 세계를 불태운 칸은 뭐 군주가 아니니. 인도 대추장이나 카이사르만 군주가 아니란다.”
그가 활짝 웃으며 하는 말에 루돌프도 싱긋 웃었다. 이마에 힘줄이 팍, 솟은 채로.
“트레이너… 아니, 오라버니, 한 대만 맞자.”
“살려만 다오.”
루돌프의 양 주먹이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드는 것을 보며 본격화가 찾아온 우마무스메의 완력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곱게 운명을 받아들였다.
장난친 그의 잘못이지 뭐.
-⏲-
“이게 진짜 원안이구나. 괜찮아 보이는데.”
‘진짜’ 컨셉을 받은 루돌프는 꽤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으어어, 마음에 들면 됐다. 디자인 방향성 잡는 데 꽤 애를 먹었거든.”
머리가 압축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철저하게 응징당한 트레이너는 찌부러진 느낌을 흔들어 떨쳐내며 말했다.
“너무 예스러워도 안 되고, 너무 현대적이어도 안 된다. 딱 그 중간에 있는 게 그런 분위기 아니겠어?”
“법고창신(法古創新)인가. 하긴, 어느 나라의 제복과도 일치하지 않네.”
이리저리 둘러본 그녀는 가방 속에서 자신이 그려온 자신의 원안도 꺼냈다. 분명 비슷한 느낌의 제복 타입이었지만, 눈여겨볼 만한 차이점이 있었는데-.
“루나, 대체 너 몇 승을 노리고 있는 거니.”
가슴팍에 달린 훈장들. 그 개수는 명확히 3개 이상이었으니까.
“글쎄.”
다소 무료한 느낌이 나는 목소리로 신임 학생회장은 디자인 원안을 톡톡 건드리다가 이내 스산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답했다.
“역사를 내 손으로 쓸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여태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위압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분명 트레이너 군도 말했었지. 내게는 지배가 어울린다고, 그걸 위해선 모든 걸 짓밟고, 내 손아귀 안에 넣어야 하지.”
“솔수식인(率獸食人)을 할 셈이니.”
트레이너가 정색하며 말하자 루돌프는 순순히 수긍했다.
“흠, 역시 오라-. 아니 트레이너 군도 그런 말을 쓸 줄 아는군. 맞아, 목표를 위해서라면 그런 것도 감수해야지.”
그녀의 그런 태도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목표를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모두를 짓밟으면서 올라가려는 거야.”
그의 물음에 검지로 턱 끝을 잠시 짚었던 루돌프는 입을 열었다.
“모든 우마무스메가 자신의 꿈을 좇아 행복해지는 것.”
폭정을 휘두를 것이리라 선언한 군주의 씨앗이 품은 것치고는 너무나 이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인 목표.
“하지만 이건 ‘심볼리 루돌프’로서 가진 꿈이자 목표, 루나로서 가진 목표는 달라.”
“으음?”
그 원대함에 혀를 내두르는 사이, 잠시 맥이 빠지게 하는 말이 나오자, 트레이너의 머릿속에 절로 물음표가 차올랐다. 그런 그에게 다가가 보랏빛 눈을 마주하며 검지로 그의 입을 막았다.
“삼년불비(三年不蜚)의 끝이 다가오고 있어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줘, 트레이너군. 기다림도 재미의 일부분이니까.”
중등부로 막 올라온 나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어른스러운 목소리와 행동에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도 특채로 평균 나이대보다 이르게 트레이너 자리를 따낸 거였으니 생각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뭐 루나, 아니 루돌프와 알고 지낸 세월도 생각보다 오래되었는데 설마 말문이 막히는 무언가를 제시하겠는가.
당장 G3도 만만한 것이 아닌데 말이다.
그러던 중 문득 중요한 것이 떠오른 트레이너는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부회장들 뽑아야 하지 않아?”
“부회장 말인가? 일단 안면을 튼 두 사람에게 임시로 부탁하긴 했다만.”
루돌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누구한테?”
“마루젠스키와 미스터 시비.”
한창 이름을 날렸던 이와 유망주의 이름을 말한 그녀는 살짝 웃었다.
“정식으로 부회장들을 선출하기 전까지 임시로 도와주겠다더군.”
-⏲-
시간은 흘러갔다.
데뷔 레이스는 뭐 말할 필요도 없이 모두의 이목을 이끌고도 남을 정도의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였으니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언론에서도 주목하는 유망주로서 이름을 올리게 된 루돌프는 그렇게 첫 G3에 발을 디뎠다.
예상과 달리, 첫 경주는 마일이었고, 불안 요소가 다소 있었음에도 결과는 깔끔했다.
『1착은 심볼리 루돌프! 사우디아라비아 로열컵의 우승컵을 들어 올립니다!』
1착.
『심볼리 루돌프! 심볼리 루돌프가 추격을 따돌리고 나카야마를 정복합니다! 사츠키상의 영광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첫 G1인 사츠키상, 1착.
추격해 오는 모든 우마무스메들을 폭정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달리기로 비웃듯이 압살하며 첫 관을 손에 넣었음을 선언하는 아나운서의 알림이 경기장을 울렸다. 나카야마의 직선이 짧으니, 뭐니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땀에 흠뻑 젖은 대원수의 복장을 연상케 하는 암녹색의 승부복을 입은 우마무스메의 시선은 잠시나마 함께 달린 라이벌들을 잠시 향했다. 내려다보는 것 같은 폭군의 보라색 시선은 모두를 움츠러들게 하는 가운데,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관객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 루돌프는 천천히 검지를 하늘로 들어 올렸다.
“우선은 1관.”
무섭도록 냉정한 눈빛으로 고작 첫 관을 따낸 것에 불과하다는 걸 선언하는 그 모습은 그걸 지켜보고 있는 모든 이들을 열광시켰다.
압도적인 기량의 폭력.
폭정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터프에서의 군림.
그 모든 걸 지켜본 이들은 직감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새로운 삼관 우마무스메가 웅비하기 시작했다고.
그리고 그 기대는 정확했다.
일본 더비.
『1착은 심볼리 루돌프! 더비를 정복하며 2관을 취합니다! 【황제】의 도전은 가을의 교토로 이어집니다!』
‘우오오오오오!’
1착.
가슴에 첫 훈장을 단 채 도쿄를 정복한 우마무스메는 마침내 그에 걸맞은 별명을 얻었다.
‘황제’라고.
누군가는 폭군이라고 불렀지만, 그 승부복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황제가 맞다고 입을 모았다. 잔혹하고 오만하지만, 그 기량과 실력이 뒷받침해 주기에 폭정을 펼칠만하다는 황제. 난세의 폭군으로서 황제는 나카야마와 도쿄를 정복했다.
“….”
그리고 수없이 많은 이들의 환호를 들으며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이 순간을 기억하려는 것처럼. 뒤이어 천천히 손을 하늘로 뻗어, 검지와 중지를 펼쳤다.
-이걸로 두 관째.
오만해 보이기까지 해 보이는 그 모습은 최후의 관문, 국화상도 당연히 자신이 취할 관임을 선언하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같이 달린 우마무스메 그 누구도 거기에 반박의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와 달려보면 알았다.
터프를 폭압적으로 지배하며, 오롯이 자신의 통제하에 지배하는 폭군.
이런 황제를 정면으로 대체 어떻게 꺾으란 말인가.
…
“우와….”
주변이 소란스러운 가운데, 한 소녀는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직 본격화가 찾아오려면 몇 년이 남은 작은 소녀는 트랙과 가장 가까운 관중석에서 매달리다시피 하여 손을 하늘에 뻗는 더비 우마무스메를 동경의 눈으로 쳐다봤다.
“멋져….”
무심코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올 정도로 ‘황제’에게 푹 빠져버린 우마무스메 소녀는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마치 인생의 목표를 찾은 것 같이, 아니 첫사랑을 만난 것만 같이 숨이 가빠졌다.
-나도, 나도 언젠가.
“저렇게, 꼭-.”
어린 소녀, 토카이 테이오의 인생 목표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
“첫 목표까지 하나만 남았네.”
더비를 끝낸 후, 트레이너는 땀에 흠뻑 절은 루돌프에게 음료수를 건네며 말했다.
“이제 뭘 위해 뛰는지 말해주지 않을래?”
음료수병을 받아 든 루돌프는 잠깐 그를 올려다봤다. 그 눈빛에는 ‘아직도 그걸 모르겠냐’라는 감정이 듬뿍 담겨있었지만, 이내 직접 말하기로 결심한 듯 그녀는 순식간에 그에게 바싹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트레이너군에게 내가 3관을 따고 무엇을 하고자 하냐고 말하려 하면 항상 제지당했었지. 이번에야말로 온전히 말할 때가 왔군.”
순간 트레이너는 등골이 스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루돌프의 눈빛에 비치는 감정은 무언가 시커멓다 못 해 끈적끈적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국화상마저 정복하고 나면, 그래. 난 트레이너군이, 오라버니가 영원히 내 것이 되길 원하네.”
“…어릴 때부터 말하고 싶었던 게 그거야?”
기가 막힌 것일까, 아니면 말문이 막힌 것일까 간신히 트레이너가 묻자 루돌프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맞아, 일편단심 이것만 생각했지.”
‘루나는 욕심이 좀 많아서 말이야’라고 농담처럼 덧붙였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의 말투나 태도는 농담이 아니었다.
“어떤가? 트레이너군?”
물기 때문인가, 더더욱 나이에 안 맞는 요염함을 풍기는 ‘황제’의 모습에 트레이너의 동공이 흔들렸다.
대체 몇 년 안 본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자란 거지.
독점력은 무서운거야
조기에 켜지면 더 무서운거야
어린 망아지에게 조언한 대가로 인생을 저당잡히게 된 건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