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천국 코하비닷컴
https://cohabe.com/sisa/449205

[단편]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흉기

두석규는 불이 꺼진 차 안에서 모텔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모텔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두석규는 어느 순간, 두 눈을 부릅떴다.
그에게 너무나 익숙한 얼굴, 여자친구 임여우가 모텔을 나서고 있었다. 최무정이라는 사내와 함께.

운전대를 붙잡은 두석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
.
.


' 치이이익- '

바비큐 그릴의 연기가 집게를 타고 올라와 김남우 형사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펜션의 앞마당. 김남우는 자신이 왜 이곳에서 고기나 굽고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젊은 여인이 접시를 들고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 안녕하세요? "
" 아, 예 안녕하세요. "

그녀, 홍혜화 변호사는 김남우에게 호감 있는 웃음을 보였다. 

" 형사님이라고 하셨죠? 혼자 오셨어요? 사장님이랑 아주 친하신가 봐요~ "
" 아하 하 뭐.. "

김남우는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홍혜화의 질문에 다른 뜻이 느껴지는 듯하여, 반대로 물었다.

" 변호사님도 단순히 오신 건 아닌가 봅니다. 혼자 오신 걸 보니. "

홍혜화는 부인하지 않고 웃었다. 둘의 시선이 멀리 테이블 쪽의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모임을 주도한 두석규 사장에게로.

한눈에 띄는 퉁퉁한 체형의 두석규 사장이 자신의 여자친구 임여우와 함께 대화 중이었다. 
그 근처, 최무정이란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내가 묵묵히 테이블에 식기를 내려놓고, 멀리 땅딸막한 체형의 펜션 관리인이 의자를 들고 오고 있었다. 

'쩝' 입맛을 다신 김남우가 한 손으로 연기를 내쫓으며 홍혜화에게 털어놓았다.

" 저 사장님이 우리 반장님과 무척 친하시더군요. 여행 보내준다는 말에 좋아했더니 참나. 이건 뭐, 사적으로 직원을 굴리는 것 아닙니까? 이거 어떻게 처벌 안 됩니까? 법을 잘 아시니까 좀 상담해보고 싶군요. "
" 어머, 법은 형사님이 더 잘 알겠죠. "

홍혜화는 웃으며 자신의 사정도 털어놓았다.

" 두석규 사장님이 약혼을 제대로 공증받고 싶어 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잘은 모르지만, 변호사가 있으면 좋고, 형사도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셨나 봐요. 사장님 성격이 원래 좀 그렇거든요. "
" 나 원, 약혼 증인 역할이나 하려고 이 주말에 이 먼 곳에.. "
"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푹 쉬다 가시면 좋죠 뭐~! 친구도 사귀고. "

홍혜화는 눈웃음을 치며 김남우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김남우는 너무 가까워진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응?' 조금 움찔했다. 
그 모습에 좀 더 입꼬리를 올린 홍혜화가 물었다.

" 고기 다 됐어요? "
" 아? 아 예. 익은 것 먼저 담아드리겠습니다. "

김남우는 그녀의 접시 위로 고기를 올렸다.
테이블로 고기를 옮기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이는 김남우.

.
.
.

" 자, 이렇게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

테이블 의자에서 일어난 두석규가, 술잔을 들고 모두를 향해 말했다.

" 마음 같아서는 바로 결혼식을 올리고 싶지만, 이 친구가 자꾸 망설이니까 이렇게 약혼이라도 합니다. 어디 도망가기 전에 말이죠 하하. 오늘 저희 약혼을 증명해주실 변호사님과 형사님. "

두석규의 시선이 둘에게 향하고, 둘은 웃어 보였다. 고개를 돌린 두석규는 최무정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사진작가분까지. "

두석규의 웃음을 마주하는 최무정의 웃음이 조금, 비틀려 보였다.

"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고기가 식기 전에 드십시다! "

두석규의 건배를 시작으로, 저녁이 무르익었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두석규가 워낙 말이 많은 성격이고, 펜션 관리인까지 유쾌하여 장단이 맞는 편이라 웃음이 쉴 새 없이 터졌다.
김남우 형사는 바로 옆에 앉은 홍혜화와 단둘이 얘기할 기회가 많았다. 의외로 운동을 좋아하는 그녀였기에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날도 어두워지고, 슬슬 배가 불러 음식에 손이 가지 않을 때쯤, 펜션 관리인이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 여름이고 하니, 제가 무서운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
" 오 좋죠! "

두석규가 크게 호응하고, 관리인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는 한쪽으로 손을 뻗어,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을 가리켰다.

" 저 건물이 원래 뭐하던 건물인지 아십니까? 실은, 아주 예전에 사냥꾼들이 고기를 구워 먹던 곳이랍니다. 그런데 그게 참, 형사님도 계시는데 말해도 되나 모르겠지만..저기서 천연기념물을 몰래 먹었다고 합니다. "
" 천연기념물? "
" 예~! 잡으면 안 되는 동물들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몰래 먹은 거죠. 그래서 지금 저 건물이 창문도 하나 없고, 저 위에 환풍용 덕트만 하나 뚫려있습니다. "
" 아~ "

모두 한 번씩은 건물을 새삼스레 돌아보았다.
관리인은 목소리를 좀 더 깔며 집중시켰다.

" 저런 공간이 생긴 이유가, 한 사냥꾼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살아생전에 모든 동물의 고기를 먹어보는 게 취미였다고 하네요. 산에서 잡은 건 물론, 멀리서 공수해온 것들도 모두 저곳에서 몰래 구워 먹은 거죠. 그런데 지금은 왜 저곳이 비어있는가 하면, 한가지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사냥꾼이 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그만, 오발 사고로 한 학생을 죽여버린 겁니다. "
" 어머나 "
" 사냥꾼은 죽어버린 학생을 보고 너무 당황했고, 시체를 숨기기 위해 저곳으로 들고 왔답니다. 그런데 다른 동물들의 가죽들 틈으로 시체를 숨기다가, 가죽 틈으로 삐져나온 학생의 맨다리를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내가 평생 사람 고기를 먹어볼 기회가 있을까?' "
" 헐? "
" 세상의 모든 고기를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던 그 사냥꾼은, 가죽으로 가린 그 다리 한쪽을 잘라내었답니다. 그걸 먹고는 미쳐서 자살했다는군요. 그 이후로 저 건물은 모두 비워졌고, 나중에 펜션을 짓게 되면서 창고로라도 쓰려고 했는데, 죽은 학생의 귀신이 나타나서 그러지 못했답니다. 한쪽 발로 뛰면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내다리 내놔!! "
" 꺄악! "

관리인이 갑작스럽게 소리를 지르자, 임여우와 홍혜화가 비명을 질렀다.
김남우는 웃으며 가볍게 평가했다.

" 좋았는데, 마지막에 깨는군요. 너무 옛날식 아닙니까? "
" 하하 그렇습니까? "

자기도 모르게 김남우를 붙잡고 있던 홍혜화가 관리인에게 물었다.

" 그 얘기 진짜예요? "
" 믿거나 말거나라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 에이~! "

무섭던 분위기가 웃음으로 전환되고, 좀 더 떠들다가 자리가 파했다. 대충 뒷정리를 하고 다들 자신의 방으로 이동했다. 

.
.
.

잠들기 전. 씻고 나와 침대에 누운 김남우 형사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전화번호를 교환한 홍혜화에게서 카톡이 도착해 있었다. 여자와 카톡을 나눠본 적이 드물어, 뭐라고 답장할지 고르는 게 힘들었다.

" 음.. "

이모티콘 창을 띄우고 그중에 어울릴만한 것을 신중하게 고르는 김남우.
이윽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보내려던 순간,

' 꺄아악-! '

" ?! "

밖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난 김남우가, 방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소리의 근원지 쪽, 안 쓰는 '그' 창고 앞에서 관리인이 문에 붙어 있었다.
번개처럼 달려온 김남우가 관리인에게 소리쳤다.

" 뭡니까?! "
" 모,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비명이! "

김남우는 곧바로 문을 열려고 하다가, 잠겨있는 것을 보며 물었다.

" 열쇠는요?! "
" 아...! "

급하게 펜션 쪽으로 달려가는 관리인!
남겨진 김남우는 문을 쿵쿵 두드렸다.

" 괜찮습니까?! 안에 무슨 일입니까?! "

그 사이, 최무정이 빠른 걸음으로 나타났다.

" 무슨 일인가요? "
" 안에서 비명이! 안에 괜찮습니까?! "

뒤이어 홍혜화도 나타나고, 펜션에 들어갔던 관리인이 급하게 열쇠를 들고 돌아왔다.
관리인이 얼른 문을 열자마자 바로 뛰쳐들어가는 김남우!

" ?! "

발가벗은 남녀, 두석규와 임여우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빠른 눈으로 상황을 살핀 김남우는, 뒤이어 들어오려던 사람들을 향해 팔을 뻗어 막았다. 그 사이, 입이 피범벅인 두석규가 손을 뻗어 환풍구를 가리켰다.

" 저기! 저기로 그 새끼가 나갔어! 그 새끼가! "

인상을 찌푸린 김남우가 황급히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바로 알 수 있었다. 입과 가슴팍에서 피를 흘리는 임여우가 이미 사망해 있다는 것을. 

" 들어오지 마십시오! 현장 보존해야 합니다! 살인입니다! "

김남우의 급한 외침에, 누구도 창고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빠르게 주변과 환풍구를 살펴보는 김남우.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임여우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두석규를 돌아보는 김남우의 시선이 복잡했다.

.
.
.

" 내가 왜 여우를 죽여?! "

두석규는 충혈된 눈으로 김남우에게 소리쳤다. 
김남우는 냉정했다.

" 하지만 그 안은 완전한 밀실이었습니다. "
" 그러니까 그 귀신의 짓이라니까! 이상한 가죽을 뒤집어쓴 녀석이 나타나서 칼로 우리를 찔렀다니까! "
" 세상에 귀신은 없습니다. 그 환풍구로 무언가 드나들었다면, 그건 사람이겠지요. 하지만 환풍구의 끝은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
" 그, 그럼, 사람이 빠져나가고 다시 막았나 보지! 사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자세히 못 봤어! 사람이라면, 그래! 마른 사람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
" ... "

김남우는 뻔히 보이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한가지가 답답했다.

" 내가 여우를 죽였다고?! 뭐로?! 뭐로 죽였는데 그럼?! 무슨 흉기가 있어서 죽였다는 거야?! "
" ... "

바로 '흉기'였다. 텅 비다시피 했던 창고 어디에서도 흉기가 나오지 않았다. 밖에서 문을 열기 전까지 완전히 밀실이었던 공간인데 말이다.
김남우가 답답한 얼굴로 두석규를 바라볼 때, 곁에 있던 홍혜화가 차가운 말투로 나섰다.

" 흉기가 없다면 모든 건 그저 정황입니다. 먼저 저희 사장님 상처 치료를 좀 더 하고 싶은데요. "
" ... "

사무적으로 변한 그녀의 모습에 김남우는 씁쓸했다.

두석규가 떠나고, 김남우가 홍혜화에게 물었다.

" 귀신이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어떻게 봐도 그가 살인범입니다. "
" 하지만 흉기는 없죠. "
" 흉기가 없다고 해도 "
" 저희는 일관된 주장을 할 겁니다. 흉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저는 무죄를 자신합니다."
" ... "

차갑게 돌아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김남우는 뒤늦게 깨달았다. 두석규가 이런 멤버를 구상한 이유를.
두석규는 처음부터 약혼의 증인이 필요한 게 아니라, 다른 증인이 필요했었구나.

.
.
.

창고에 선 김남우는 수첩에 사건을 정리해봤다.

바비큐 저녁이 끝나고, 모두가 방으로 돌아갔을 때 두석규는 임여우와 함께 창고로 향했다. 텅 비어있는 창고 안에서 간단한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펜션 관리인의 도움이 있었다.
창고에서 임여우의 비명이 터지고, 문이 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3분. 들어갔을 때 안에는 발가벗은 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창고에 있던 물건은, 구석에 먼지 쌓인 통나무 의자 넷. 임여우와 두석규가 가져온 커다란 담요와 한쪽에 벗어놓았던 옷가지. 이벤트용 풍선과 양초들. 손바닥만 한 양초 받침대. 장미꽃. 색색 종이. 이것이 전부였다.
그중 유일하게 양초 받침대가 김남우의 관심을 좀 끌었지만, 간장 종지에 가까운 받침대는 절대 흉기가 될 수 없었다. 개중 하나에 피가 좀 묻어 있더라도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걸까? 흉기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환풍구는 천장에서 기역 자로 꺾여, 그 끝에는 철망으로 막아놓은 상태였다. 그곳으로 흉기를 버린다는 건 불가능했다. 
공범이 문이 열렸을 때 들고 나가는 방법도, 김남우가 막았기 때문에 기회가 없었다. 졸지에 완벽한 증인이 되었다.

김남우는 완벽한 정황에서 흉기만 없다면, 그것이 유죄가 될 수 있는지를 떠올려보았다. 가능하던가? 변호사가 유능하다면? 

" ... "

미간을 찌푸린 김남우가 창고를 나섰다. 개인 면담을 해야 할 것 같았다.

.
.
.

두석규와 마주한 김남우가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 제가 대충은 알겠는데 궁금한 것 하나가, 왜 문을 잠갔냐는 겁니다. "

두석규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지만, 곧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 관계를 하기 위해서요. "
" 관계요? 성관계? "
" 그렇소. 사귀는 동안 여우가 혼전순결을 원해서 우린 한 번도 관계를 하지 못했소. 솔직히 불만이었고, 이번 기회에 어떻게 시도를 해볼 생각이었지. "
" 아 "
" 우리가 관계를 하려던 도중에 습격을 당했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린 거요! "

순간적으로 언성을 높인 두석규는 한쪽으로 팔을 뻗으며 말했다.

" 이제 보니까, 최무정! 그 새끼가 의심이 가!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귀신인 줄 알았던 거지, 그 삐쩍 마른 놈은 얼마든지 환풍구를 통과할 수 있지 않겠소? "
" 사진작가 최무정 씨요? "
" 그래! 우리 여우랑 친구라곤 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 새끼가 자꾸 우리 여우한테 찝쩍거렸었다고! "

김남우는 '흠' 생각해보다가, 다시 두석규의 눈을 응시했다.

"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두석규 씨의 범행이란 게 너무나 명백합니다. "
" 무슨! "
" 밀실에 두 사람이 들어갔고,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누가 봐도 범인이 명백하지 않습니까. "

두석규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 그럼 흉기는?! 흉기는 어딨는데! "
" 그건.. "
" 내가 여우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것도 아니고, 흉기도 없는데 내가 명백한 범인이라고?! 형사가 그래도 돼?! "

두석규는 기분 나쁜 모양새로 벌떡 일어나 나갔다.

김남우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
.
.

" 최무정 씨. 사건 발생 시간에 어디 있었습니까? "

김남우는 항상 이 질문을 던질 때 상대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백이면 백 좋은 얼굴이 나오지 않고, 때론 큰 힌트를 보이기도 하니까.
최무정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 방에 있었습니다. 비명이 들리기에 나왔죠. "
" 창고에는 저보다 늦게 도착한 거로 아는데, 제 방보다 더 가깝지 않습니까? "
"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냥 비명을 듣고 나왔을 뿐입니다. "
" 예에.. "

김남우는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다시, 물었다.

" 두석규 씨는, 최무정 씨가 임여우 씨에게 찝쩍댔다고 표현하던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순간, 최무정의 입술이 비틀렸다. 

"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습니까? "
" 예. 인정하십니까? "
" ... "

최무정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김남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 두석규 씨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두석규 씨와 임여우 씨가 사랑을 나누려는 걸 보고 흥분한 최무정 씨가 그들을 해치고, 환풍구를 통해서 밖으로 빠져나갔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 미친.. "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낸 최무정은 곧, 확신을 담아 말했다.

" 여우가 그 양반이랑 관계를 하려고 했다고요? 거짓말입니다. 여우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
" 어떻게 장담하시죠? "
" 그건...여우는 나를 사랑하니까요. "
" ... "

최무정은 스스로도 확신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 표정을 읽어보려는 김남우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
.
.

" 사건 발생 시각에도 실시간으로 창고를 보고 계셨다고요? "

김남우의 질문에, 펜션 관리인은 긴장한 모양새로 고개를 끄덕였다.

" 예, 예 예! 저녁 먹고 남은 뒷정리를 좀 하느라 그랬습니다. "
" 그렇군요. 그럼 이상한 사람이 드나들진 않았다는 거죠? "
" 예. "
" 흠.. 그런데, 문은 왜 잠가주셨습니까? 그 창고 문은 밖에서만 잠글 수 있지 않습니까? "
" 아! 그, 그게..! "

관리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 두 사장님이, 자기가 약혼까지 했는데도 아직 잠자리를 가지지 못했다면서 부탁했었습니다. 제가 이벤트를 위해 문을 잠근 뒤,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하면 그 안에서 두 분이 하룻밤을 보낼 계획이었습니다. 제가 저녁 먹을 때 그 창고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를 한 이유도 다 그것 때문입니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단둘이 갇혀있게 되면, 임여우 씨가 두석규 씨에게 기댈 것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
" 아~ 그 이야기가 그 때문이었군요. "

김남우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 혹시 이벤트 도구는 펜션에 준비된 것들입니까? 풍선이랑 양초랑 종이 꽃가루 같은 것들..."
" 아, 아뇨. 미리 두석규 씨가 준비해온 겁니다. 세팅은 제가 했습니다. "
" 그렇군요.. "

생각을 정리하던 김남우는 곧, 관리인의 표정에 집중하며 정색했다.

" 그런데 왜 열쇠를 펜션에 두셨습니까? "
" 예? 그, 그건 다른 열쇠랑 묶여 있기 때문에 원래 늘 두던 곳에.. "
" 예. 지금, 흉기가 사라져서 문제인 건 아실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게 공범이 있으면 아주 간단합니다. "
" 고,공범이요? "
" 제가 비명을 듣고 창고까지 도착한 시간이 1분은 걸렸습니다. 그 사이에 두석규 씨가 흉기를 공범에게 건네고, 그다음에 문이 잠긴 거라면 어떻습니까? 펜션에 열쇠를 가져오는 척하면서, 흉기를 처리하고 온 거라면? "
" 아, 아닙니다! "

관리인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 펄쩍 뛰었다. 

" 하지만 실제로 두석규씨를 돕지 않으셨습니까? "
" 그거야 이벤트라는 생각으로만! 그것만 도왔습니다! 저는 절대로 흉기를 처리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형사님이 오셨을 때 제가 흉기를 들고 있었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
" 옷 속에 숨겨두었다거나요? "
"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저는 펜션에 갔다가 바로 왔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그 흉기가 펜션 안에 있을 겁니다! "

김남우는 바로 표정을 풀었다.

" 그렇죠. 현재까지 모두와 함께하고 계셨으니까, 따로 흉기를 처리할 시간은 없었습니다. "
" 그, 그렇습니다! "
" 충고드립니다. 계속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계세요. 혹시라도 혼자 있다간, 따로 흉기를 처리하러 간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
" 예, 예! "

관리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 사건 시각에 어디에 계셨습니까? "
" 산책을 하고 있었어요. 제가 카톡 보냈잖아요? "

김남우와 마주한 홍혜화가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 흠. 방에 계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늦은 시간에 산책은 왜 가신 겁니까? "
" 그냥 머리가 복잡해서요. 안 되나요? "
" 아뇨. 그런 건 아니죠. "

김남우는 담담한 홍혜화의 표정을 살피다가 물었다.

" 두석규 씨의 살인이 명백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홍혜화는 잠시 눈을 마주하다가 대답했다.

" 그쪽이 확률이 높을 것 같네요. "
" 그런데도 무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 예. "
" 명백한 살인인데도? "
" 흉기는 없잖아요. 단 1%의 가능성이라도 살인자가 아니라면요? 억울하지 않겠어요? "

김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 두석규 씨가 왜 홍혜화 씨를 부른 겁니까? "
" 솔직히 말하면, 최무정과 임여우의 관계를 의심하는 것 같았어요. 여자의 감으로 한번 알아봐 달라고 부탁받았어요. "
" 왜 그 여자의 감이란 게 꼭, 임여우 '변호사'여야 했을까요? "
" ... "

홍혜화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남우가 말했다.

" 두석규 씨는 정말 운이 좋군요. 완벽하게 상황을 증명해줄 형사가 있고, 침착하게 대응해줄 변호사가 마침맞게 있다니 말입니다. 어쩌면, 정말로 무죄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
.
.

며칠 뒤.


경찰서에서 파일 첩을 정리하는 김남우. 그동안 새롭게 모은 정보들이었다.

[ 창고의 환풍기에 먼지가 밀려간 흔적이 있긴 있다. 사건과의 관계는 불확실. ]
[ 임여우의 가슴을 찌른 흉기는 10cm 길이의 날붙이. 식칼보다 조금 더 두꺼운 정도로 추정. 입 안의 상처는 깊지 않음. 두석규도 마찬가지. ]
[ 펜션 관리인 정재준 - 두석규에게 빚이 있다. 본업은 사냥꾼 출신. 사고로 아들 사망. 되도록 두석규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주기로 약속한 것이 이후 확인됨. ]
[ 변호사 홍혜화 - 뜻밖에도 임여우와 동창. 티를 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친한 사이는 아니었나? ]
[ 사진작가 최무정 - 과거에 임여우와 연애를 했었다가 헤어짐. 결별 이후로도 잦은 만남. 단, 최무정의 일방적인 요청이었음. 이유가 뭘까? ]
[ 두석규 - 아버지의 사탕 공장을 물려받아 크게 키운 수완 좋은 인물. 임여우는 직원으로 만나 2년간 열애. 나이 차이로 인한 콤플렉스? 질투가 심함. ]

김남우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집중했다. 흉기는 찾을 수 없었으니, 동기라도 확실히 하고 싶었다. 두석규는 왜 임여우를 죽였을까?

그 의문은 곧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카톡! '

홍혜화에게서 도착한 카톡을 확인한 김남우의 눈이 커졌다.

모텔을 나서는 최무정과 임여우의 사진이 있었다.

.
.
.

김남우가 굳은 얼굴의 최무정과 마주했다.
그들의 사이에 한 장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 최무정 씨. 홍혜화 씨에게 듣기로, 임여우 씨가 최무정 씨를 싫어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
" ... "

대답하지 못하는 최무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최무정 씨가 바람을 피우고 헤어지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건 뭡니까? 임여우 씨는 그렇게 싫어하는 최무정 씨와 왜 다시 모텔을 드나들었을까요? "
" ... "
" 혹시 무슨, 협박하신 겁니까? "
" 아닙니다. "

입술을 깨문 최무정이 말했다.

" 나는 그냥 부탁했을 뿐입니다. "
" 부탁만으로 옛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가집니까? 약혼까지 생각할 정도의 남자가 있는데도? 임여우 씨가 원래 문란한 여자였습니까? "
" 아닙니다! "
" 그렇죠. 두석규 씨와는 혼전순결을 할 정도의 여자인데 문란하다는 건 이상하죠. 그럼 역시 협박입니까? "
" ... "

최무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김남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 여우는 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우를 되찾기 위해 계속 부탁했습니다. 분명 여우도 언젠가는 깨달을 거니까 말입니다. 우리 둘은 다시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
" ... "

미간을 찌푸린 김남우의 고개가 의문스럽게 기울었다.

그리고 이어진 최무정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김남우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
.
.

" 내 주장은 하나요! 흉기는 나오지 않았고, 나는 죽이지 않았다는 것! 그 외는 내 변호사와 얘기 하시오! "

취조실에서 김남우와 마주한 두석규는 단호했다. 팔짱을 끼고 입을 다문 그는 정말 흔들리지 않는 바위의 태세였다.
김남우는 그저 담담하게 파일 첩을 뒤적거렸다. 이것저것 사진을 들춰보다가 모텔 사진을 찾아 내밀었다.

" 최무정 씨와 임여우 씨의 외도를 알고 계셨습니까? "
" ! "

두석규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그의 입은 다물어져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김남우.

"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은.. "

지퍼백에 담긴 무언가를 꺼내는 김남우. 양초의 받침대였다.

" 이거 아시죠? 죽은 임여우 씨의 근처에 있던 것 말입니다. 임여우 씨의 피도 묻어 있었는데요. "
" ... "
" 물론 이것이 임여우 씨 살해 흉기가 될 수 없는 건 압니다. 그래도 피가 묻어있으니 조사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 받침대에서 희한한 게 나왔다고 하더군요? 뭔 줄 아십니까? "
" ... "
" 설탕 성분입니다. 왜 양초 받침대에서 그게 나왔을까요? 희한하네요. 그런데 두석규 씨. 사탕 공장을 운영하시죠? "

두석규의 눈빛이 흔들렸다. 김남우는 지퍼백 위로 받침대를 들어 손바닥에 맞췄다.

" 10cm 길이로 날카로운 사탕을 가공하는 게 가능하십니까? 이렇게 양손으로 받침대로 잡고 위에서부터 무게를 실어, 꾹 눌러 찌를 수 있을 만한 것으로 말입니다. "
" 무, 무슨...! "

눈에 띄게 동요하는 두석규!
김남우는 재현이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로 양손을 내리다가, 급히 한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 사탕으로 만들어진 흉기는, 찌르고 나서 바로 먹어버리면 사라지겠군요. 물론, 급하게 부숴 먹으려면 입에 상처가 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서 임여우 씨의 입에도 상처를 냈겠죠. 자신의 입에만 상처가 나면 이상할 테니까. "
" 무, 무...! "

두석규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지만, 김남우는 아쉬운 모양새로 말했다.

" 그런데 이것도 다 정황이군요. 흉기는 옛날에 다 소화됐겠지요. "

두석규는 불안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김남우는 다시, 모텔 사진을 손으로 짚었다.

" 임여우 씨가 최무정 씨와 모텔을 드나드는 것을 보고 몹시 분노하셨죠? 자신과는 혼전순결을 얘기하던 모습 때문에 더욱더 화가 났을 겁니다. "
" ... "
" 그런데 모르셨겠지만, 임여우 씨는 좋아서 관계를 한 게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죠. "

두석규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 최무정 씨가 억지로 임여우 씨에게 잠자리를 요구했고, 임여우 씨는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지은 죄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이유는 두석규 씨와 혼전순결을 지킨 이유와도 일맥상통합니다. "
" 그게 무슨? "

참지 못하고 입을 여는 두석규.
김남우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 그녀는 에이즈였습니다. "
" ?! "
" 최무정 씨는 그녀 때문에 에이즈에 걸렸습니다. 그것이 그녀가 최무정 씨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괴롭지만, 어쩔 수 없었죠. "
" 마, 말도 안..! "
" 그녀는 또 두석규 씨를 생각해서 관계를 피해왔습니다. 평소에도 극도로 조심했을 겁니다. 당신을 지켜주기 위해서요. "
" 아, 아니..아니..! "

두석규의 몸이 사정없이 떨렸다. 김남우의 눈이 가라앉았다.

" 그녀의 노력은 결국 헛수고가 되었군요. 당신이 그녀의 피가 묻은 사탕 칼을 억지로 씹어먹으면서, 입안의 점막에 온갖 상처를 냈을 때 말입니다. "
" 아..아..!으..아아아! 아아아아! "

두석규는 무너져내렸다. 

김남우는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는 지금,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 걸까.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 때문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그녀를 오해해서 죽였다는 것 때문일까?
댓글
  • 복날은간다 2017/12/05 00:24

    깁니다... 정말 몇 시간이 걸린 것인지; 이러고 재미 없으면 타격이 큰데 흐하하.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bFXBJT)

  • 코이비또 2017/12/05 00:25

    첫 추천의 영광입니다

    (bFXBJT)

  • 세븐틴예쁘다 2017/12/05 00:35

    오늘도 잘봤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있어서 기뻤어요 ㅎㅎ 코난보는기분이었습니다!

    (bFXBJT)

  • 배고파파 2017/12/05 00:51

    호오 예전에 김전일 시리즈에 나온 얼음칼이랑 비슷하네요! 근데 사탕칼은 생각 못했네... 잘보고 갑니다

    (bFXBJT)

  • 소어 2017/12/05 00:52

    김남우 형사의 사건해결이라니!

    (bFXBJT)

  • 쿠겡쿠겡[정학] 2017/12/05 01:01

    호고곡!
    + 초반에 김남우가 털어놓은 사람이 임여우가 아니라 홍혜화 아닐까요(소곤)

    (bFXBJT)

  • 쿠겡쿠겡[정학] 2017/12/05 01:13

    가끔은 이런 이야기도 신선한 것 같아요! 늘 감사합니다 :D

    (bFXBJT)

  • june0422 2017/12/05 02:02

    정말 감사합니다 ㅎㅎ

    (bFXBJT)

  • 투맘 2017/12/05 03:45

    정말로 대단한 수고를 하셨고
    또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믿고 보는 님의 글이기에 스크랩
    하고 천천히 아껴서 볼랍니다
    애쓰셨습니다 감사해요

    (bFXBJT)

  • 우석 2017/12/05 04:29

    뜨어어어어!! 넘모넘모 재밌어요~!!

    (bFXBJT)

  • dagdha 2017/12/05 08:43

    음... 조금 첨언하자면 소량의 혈액으로는 감염이 쉽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수혈의 경우에는 100% 감염되는걸로 알고 있지만... 역으로 주사바늘에 의한 감염확률은 1/300정도라고 알고 있거든요. 아마 제 생각에는 두석규는 안걸릴 확률이 높지 않을까 싶습니다.

    (bFXBJT)

  • 로스패밀리 2017/12/05 08:50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정말 필력 좋은 분들이 부럽네요 ㅜ

    (bFXBJT)

  • 차단된오징어 2017/12/05 10:16

    에이즈라서 혼전순결이라는게 그럼 결혼하면 어떻게 할거였을까요...
    에이즈여서 피했다면 헤어졌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나쁜 여자네요.....

    (bFXBJT)

(bFXBJ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