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편
1597년 음력12월23일~1598년 음력1월04일
1차 울산왜성 전투
정유재란 발발 이후
왜군의 별탈 없이 진행되던 왜군의 침공계획은
1597년 음력 9월16일 명량에서의 해전으로 앞일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뒤엉키고 말았다
결국 왜 수군에게 보급을 받을 수 없게된 왜 육군은 전면적으로 후퇴를 감행하였다
원정군의 장수들은 이제 전쟁을 그만두고 본국으로 철수하고 싶어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철수불가 명령에
해안가 인근 지역에서 왜성들을 쌓고 농성 준비에 들어갔다
이렇듯 왜군의 기세가 꺾여 전쟁의지를 모두 잃은 상태였지만
아직 조선에 남아있는 왜군은 상당한 숫자였으며, 이것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따라서 조명연합군은 이를 모두 제거하여 전쟁을 끝내기로 결심하였다
조명연한군이 최우선 함락 목표로 삼은 곳은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 중인 울산왜성(도산성)이었다
부산에 가까운 울산왜성은 점령시엔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을 직접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데다가
반대로 계속해서 울산을 왜군이 점령하고 있게 된다면 부산으로 상륙한 왜 원군이 쉽게 북상할 수 있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인 목적 이외에도
순천에 주둔하여 조,명과의 화친협상에 적극적인 고니시 유키나가와는 달리
가토 기요마사는 호전적인데다가 임진년에 조선의 왕자 둘을 사로 잡는등 조선에 굴욕을 준 인물이었기때문에
가토를 제거하여 상징적인 이득도 보자는 생각이었다
조명연합군은 이 작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명군 부총병 양호가 이끄는 정예군단 3만6천
조선도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정예병 1만이 넘는 병력을 투입하였다
총합 4만 7천에 가까운 병력
조명연합군이 단일 전투에 이 정도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것은
1593년 4차 평양성 전투 이후 처음이었다
연합군 본영은 경주에 설치되었고,
경주로 각지에서 화포와 병장기를 비롯한 군수품과 정예병들이 모여들었다
동시에 명군은 경상도 주요 육로를 차단하여 혹시모를 적의 구원시도를 차단하려 하였고,
순천을 비롯한 전라도와 경상도 각 지의 왜성을 동시에 공격하며
연합군의 주목표를 헷갈리게 하는 양동작전을 펼쳤다
가토 기요마사 역시 연합군의 움직임에 잔뜩 경계하며
울산왜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한편 인근 지역의 왜군과 연계를 강화하려 하였다
하지만 왜장들은 모두 자신들이 연합군의 목표가 될까 우려하여 연계에 소극적이었고,
결국 가토는 자신의 직속부대 1만 6천으로 수비하기로 하였다
음력 12월23일 연합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울산왜성의 외곽방어를 맡은 병산성과 언양성은 순식간에 울산과의 연락이 끊겼고
가장 가까운 왜성인 서생포왜성 역시 울산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가토가 상황파악을 하기 전에 이미 연합군은 울산왜성을 빽빽하게 포위하였다
하지만 이번 전투는 연합군에게도 쉬운 전투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공성전은 왜군이 점령한 조선성을 다시 탈환하는 전투였었다
하지만 이번 전투는 왜군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축조된 왜성에서 벌어졌으며,
연합군의 생소한 왜성의 축조형식에 당황한 반면 왜군은 익숙하게 공격에 대응할 수 있었다
연합군 역시 화포로 울산왜성에 포격을 가하여 왜군의 피해도 급증하였으나,
당시 화포의 화력은 성벽을 무너뜨리기엔 역부족이었으며
화약 보급 역시 차질을 빚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진 못하였다
결국 예상치 못한 피해에 명군 부총병 양호는 잠시 병력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직접적인 공성은 포기하고 울산왜성 인근의 모든 우물을 메우고 강줄기를 틀어막았다
울산왜성의 병력을 고사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이는 왜군에게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성이 축조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었기 때문에 당시 울산왜성에는 식량과 식수가 비축되지 않았었고,
성내에 우물 하나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성 축조에 동원된 인부들마저 성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해 식량을 축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왜군은 식량과 식수가 떨여저 피와 오줌을 먹는 등 처참하게 버텼으며
가토 역시 천에 고인 물을 짜마시는 등 상황이 좋지 못하였다
참다못한 가토가 병력을 이끌고 식수를 구하기 위해 태화강 방면으로 돌파를 시도했으나
연합군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고 포위망 돌파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연합군 역시 시간이 없는건 마찬가지였다
각지의 왜군이 전의가 없다지만 그 수는 연합군을 압도하였었고,
결국 양호는 다시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다
음력12월28일
울산왜성의 외성이 함락당했다
가토가 이끄는 왜군은 내성으로 들어가 결사항전을 다짐하였으며 가토는 함락을 대비하여 할복을 준비하였다
사실 왜군의 울산왜성 구원시도는 전투 초기부터 꾸준히 이어졌었다
하지만 서생포왜성에서 출발한 왜군은 진격로를 차단하고 있던 연합군에게 전멸당했으며
다른 곳에서 소규모로 출발했던 병력들 역시 피해를 입으며 발이 묶인 상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연합군의 목표가 울산왜성인게 확실해지자
각지의 왜군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울산왜성의 구원에 나섰다
나베시마 나오시게, 모리 카츠노부, 다치바나 무네시게, 히치스카 이에마사 등이
각자 병력을 이끌고 울산으로 향했고,
가토와 사이가 좋지 않던 고니시 유키나가도 순천에서 병력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그 병력이 합해서 8만에 육박했다
연합군 역시 공성병력을 상당수 뒤로 돌려 진격로를 차단하고 있던 부대들을 보강하였지만,
결국 왜의 지원부대들에게 크게 밀려 조명연합군은 공성을 포기하고 철수를 개시했다
조명연합군은 퇴각을 하면서도 퇴로에 복병을 배치하고 함청을 설치하는 등
왜군에게 피해를 안겨주며 퇴각하였지만,
결국 조명연합군은 1만이 넘는 전사자를 내는 패배를 하고 만다
가토 기요마사의 병력 1만6천 역시 전투가 끝난 이후에는 500여명만 남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울산왜성은 지켜내는데 성공하였고,
조명연합군의 회심의 일격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며 전쟁이 조금 더 길어지게 되었다
가토가 저때 존나게 개고생해서 일본 돌아간 뒤에 자기네 성 다다미도 먹을 수 있는 토란 줄기로 만들 정도로 강박이 생김 ㅋㅋㅋㅋㅋㅋㅋㅋ
혹시.... 꼬우신가요? 밴쥐 글이나 이상한 잡 정보글은 베글 가도 되고 이건 가면 안되죠 ㅎㅎ 그쵸 ㅎㅎ
겨우 500명 남은 시점에서 점령 실패라니... 많이 안타깝네...
진짜 명량해전의 나비효과는 엄청나네.
일본놈들도 그 전까진 지들이 수성에 몰릴 줄은 몰랐을거 아니여 ㅋㅋ
HOXY?
겨우 500명 남은 시점에서 점령 실패라니... 많이 안타깝네...
우리나라는 언제나 정예강병인가
ㄴ 조선군은 징집병인데다가 육지에서의 싸움이 익숙한 북병도 그닥 힘을못썻음 정예강병은 명군쪽이 맞는말 저쪽은 직업군인에다가 왜군과 전투가 이골이난 남병위주로 구원군을 편성했으니까 임란이후로 명의 군사제도나 무기를 많이 들여옴 삼수병이라던가 홍이포라던가
이런건 역갤에 올려
HOXY?
혹시.... 꼬우신가요? 밴쥐 글이나 이상한 잡 정보글은 베글 가도 되고 이건 가면 안되죠 ㅎㅎ 그쵸 ㅎㅎ
꼬와이요~
명예...황국...?
진짜 명량해전의 나비효과는 엄청나네.
일본놈들도 그 전까진 지들이 수성에 몰릴 줄은 몰랐을거 아니여 ㅋㅋ
가토가 저때 존나게 개고생해서 일본 돌아간 뒤에 자기네 성 다다미도 먹을 수 있는 토란 줄기로 만들 정도로 강박이 생김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언제나 도시락과 물을 들고 다님....ㅋㅋㅋㅋ
그리고 쿠마모토지역엔 우루산 마치라는 울산촌이 생김ㅋㅋ
가토가 선봉장 군장중 한명으로 전공 많이 쌓긴했는데
설마 일본애들도 그때 많던 다이묘 중 한명 정도 밖에 안되는 위치인 사람 한명 잡을러고
저리 대부대 이끌 거라고 생각안하고 먼가 다른 군사작전 있나 싶어서 가만히 있었는데 덕분에 가토는 고생했음
뭐 조선 입장에선 왕자 둘도 잡혔었고 하니깐. 그 사이코 패스 선조에게 가토 목 정도면 눈 돌아갈만 하지.
ㅇㅇ 단지 일본군 입장에선 참전 다이묘 중 한사람 정도에 불과
어차피 전쟁 끝나면 경쟁자들이고
글자 중간 정렬 좀 안하면 안되나 가독성 진짜
언제나 잘보고 갑니다
당시 왜성 축조술 수준이 말려죽이는거 빼면 뚫는게 불가능할 수준이긴 했죠
진짜 저때 일본 육군은 동북아 최강인듯. 100년 동안 전쟁만 하던 넘들이라 ㄷㄷ
단병접전 실력은 몰라도 기병비율이 너무 창렬이라 충격력이 없어서 말이죠...습한 기후에 맞춰서 무기체계가 발달하다보니 대륙에서 활동하기엔 부적합하기도 했고
그 최강이 조선의 땅하나 먹지도 못하고 결국 최후에는 전쟁 목표 전부 달성못하고 완패
그리고 그 전쟁 여파도 정권도 교체
임진왜란이 일본입장에서 완패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류큐국과 대마도가 완벽하게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과 명에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줬구요.
저도 일본이 최강이라는 소리엔 전혀 공감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일본이 피해만 본 전쟁이라는 주장은 동조 할 수 없네요.
저는 히데요시 세력이 멸망하게 된 전쟁인거지 일본(도쿠가와 막부) 입장에선 완전 이득을 본 전쟁이라고 봐요.
왜 일본의 많은 국민들이 아직도 히데요시를 사랑하고 감사 해 하는데요.
일단 임진왜란의 가장 1차적 목적이 명을 치기 위한 교두보로써 조선을 점령하는 게 목적이었고
그거에 실패한 이상 임진왜란은 일본이 패한 전쟁이 맞아요.
일본도 멀쩡한 인구 수십만을 바다에 처박고 이후 또다시 내전 주구장창 했던 걸 생각하면 이득일리가.
2차대전 때 독일이 전쟁 지고 얼마 안되서 마셜플랜으로 부유해졌다고 2차대전이 독일에 이득인 전쟁! 이라고 합니까...
그리고 류큐를 점령한 건 사쓰마지 일본이 아니죠. 사쓰마도 공식적으로 류큐를 먹었다간 막부에게 뜯길까봐 일부러 대놓고 안먹은 건데요.
일단 류큐는 에도막부가 완전히 설립되고 이후 조선에서 회답겸쇄환사가 왔다간 후에나 겨우 복속되게 되는데 이것도 류큐는 기존 중국과의 조공체제가 계속 유지되는 상태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대마도는 그전부터 소오 씨족의 영지인데, 대마도는 대조선 무역비중이 높은거지 일본영토가 아닌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대마도가 완전히 통제된건 임란 직후도 아니고 3대 에도막부 쇼군대 즈음에 국서개작이 들통나면서 조선무역을 에도막부에 견제받았을때 입니다
그리고 임란으로 분명 타격을 받았지만 조선은 경신년 대기근 이전까지는 회복기를 이미 넘겼습니다.
그리고 명나라도 피해를 봤지만 만력제의 묘에 임란 파병에 쓴 돈보다 더 큰 돈을 부을만큼의 국력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쿠가와가 이득을 본건 맞지만, 임진왜란이 실질적인 패전이었기 때문에 대마도에서 국서개작으로 조선에 협상을 트기 전까진 참전 다이묘의
불만을 누그러뜨리지 못해서 불안정했고, 도쿠가와도 당시에는 히데요시 가신으로서 존재했는데 일본 입장이라는 표현은 조금 이상한것 같습니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사랑받는건 히데요시가 천한 계급에서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된 부분에서 신분상승과 부귀의 상징이기 때문에 신사가 세워지고 사랑받는 것이지 임진왜란으로 뭔가 있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도요토미가의 입장에선 자신의 가문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고 도쿠가와 가문의 입장에서도 참전다이묘들이 실질적인 패배를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내부 불안 때문에 에도막부 초기는 혼란스러워하다가 회답겸쇄환사로 겨우내 수습하고 불만을 잠재웠는데, 이정도면 임진왜란은 부차적인 이득만 있었을 뿐이지 일본 입장에선 패배라고 보는것이 맞을 듯 합니다
여기에 댓글쓰는게 맞는진 모르겠지만 임란이라는 전쟁 하나 이야기 하는데 향후 역사 끌고오는건 안맞는것 같아요.
고구려는 수와의 전쟁에서 이겼지만 그 여파로 멸망했습니다.
일본이 무슨 왜란 이후에 내란을 주구장창합니까; 히데요시 죽고나서 제대로 된 전쟁이라고 해봐야 세키가하라(그나마도 반나절만에 끝난)전투 하나인데요. 오사카 겨울, 여름 전투는 사실상 전쟁이라고 보기도 힘든 수준이구요.
류큐왕국의 경우엔 막부가 사쓰마가 먹은걸 모르고 그냥 뒀다고 보시는건가요. 어차피 중개무역으로 인한 세금은 들어오겠다 관리를 사쓰마가 하니 그냥 둔거죠. 중개무역으로 인한 수입이 대부분인 곳인데 완벽하게 지배하는것보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게 더 이득이니 적당한 수준에서 지배한거죠. 그 전 대마도가 그랬던것 처럼요. 대마도는 저정도 위치였다가 임진왜란 이후엔 아예 일본쪽으로 붙어 버리게 된거구요. 왜란 당시 고니시 옆에서 부장으로 있었던게 대마도주였으니...
이런건 우리의 입장에서 볼일이 아니고 일본사람의 입장에서 볼일이겠죠. 이런 역사에 관심이 많으시니 일본어는 어느정도 하시리라 믿고 링크 하나 올립니다.
http://historivia.com/cat4/toyotomi-hideyoshi/908/
뭐 제 주장을 뒷바침 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찾아 본거 아니구요. 당장 구글재팬에서 검색하면 첫화면에 나오는 글이고 이 글말고도 이런 논조 참 많습니다.
저는 저 주장이 맞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은게 아닙니다.
일본사람들은 실제로 임진왜란 덕분에 서구열강에게 일본의 힘을 보여주게 되었다라고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말씀하신것처럼 단순히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와서 출세한 것 하나만 가지고 히데요시가 사랑 받는게 아닙니다.
もし、秀吉の朝鮮出兵がなければ、スペインは中国、朝鮮、日本の支配を試みたかもしれません。 また、朝鮮出兵による豊臣政権内部の分裂や豊臣家の衰退がなければ、徳川家康が天下をと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かもしれず、そうなれば鎖国によって300年間の平和をむさぼることもできなかったかもしれません。 秀吉の朝鮮出兵は間接的には日本にも海外にも大きな影響を与えたと言え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일본은 보면 백병전에서 맹활약하는 거 보면 병사들의 숙련도는 동북아 최강인데 자기네들끼리의 내전에 최적화되어있다 보니까 무기나 병과 체계가 그걸 못 따라가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기병이나 대형 화포가 많이 부족한 점도 그렇고, 습한 환경에서 잘 작동되는 장궁을 쓰다 보니 조선이랑 명에서 쓰던 각궁이나 쇠뇌보다 활 성능이 딸리기도 하고.
일단 오사카 진은 세키가하라 이후에도 이에야스가 명목상 주군이였던 히데요리를 토벌한다는 점에서 반발이 있었고, 도쿠가와도 그런 입장이었기에 생각보다 규모가 컸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패배해 떨어져나간 로닌들도 대거 참여했고, 호류지 재건 이후 남아있던 도요토미가문의 자금을 끌어다 썼는데, 도요토미 씨족은 나가사키항을 기독교 문제로 접수한 이후 상당한 자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용병을 고용할 수 있었습니다. 괜히 일개 다이묘보다도 개역당해 축소된 도요토미 가문에 엄청난 돈이 드는 호류지를 재건하게까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류큐는 류큐의 난민을 돌려주었는데도 막부에 대해 의사표시를 하지 않는 점을 들어 막부가 직접 사쓰마에 명령해 시마즈가의 1천군대로 토벌하고, 류큐의 쇼네이왕을 막부에 보내고 사쓰마에게 전후처리를 일임했지만 여전히 중국의 속방으로 남아있었고, 막부도 사쓰마에 이렇게 대응하라고 지시했는데, 대마도는 히데요시가 집권하던 시절부터 히데요시의 직접적인 명령을 듣는 지역이었습니다 다만 에도막부 시절 회답겸 쇄환사 문제로 국서개작한 것이 들통나 소오가문에 대한 개역을 하지 않는 대신 조선무역을 간섭하게 되면서 영향력이 강화되었을 뿐입니다
어찌되었건 조선은 그이후 300년은 더 존재하게 되고요
일본은 히데요시가 사망하며 그 권력이 도쿠기와에 넘어가고
명은 청으로 바뀌게 되죠....후유증은 엄청나지만 조선이 이겼다 봐도 되죠...
저는 말씀하신 이유로 도쿠가와군은 필요 이상으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고, 그러므로 이건 전쟁이 아닌 정치적 쇼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건 전쟁이라고 쳐주기 힘드네요 전. 뭐 이부분은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나다 노부시게를 일본 제일의 창이라고 부른것도 실제로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통일된 국가에선 충성의 화신의 케릭터가 필요하니 붙여준 이름이라고 생각하구요. 여말선초의 정몽주를 칭찬한 조선과 똑같이요. 이용하는거죠.
오사카의 진에서는 이미 잃을게 없는 로닌들이 주축이었지 다이묘는 거의 다 편을 안들었죠. 여름진은 말할것도 없었고(사실상 린치 수준이었으니) 겨울진도 저는 실제당시상황 이상으로 도쿠가와 측에서 과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용병집단은 결코 주력군이 될 수 없죠.
그리고 도요토미세력측에서는 어차피 가만 있어도 도쿠가와가 가만두지 않을게 뻔하니(도요토미도 오다가문에게 한 짓의 전례가 있었죠) 마지막 발악을 한거죠. 가진거라곤 오사카성의 돈밖에 없었으니... 당연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그걸 알고 있었다고 보구요.
그리고 '일본의 힘을 보여주게 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좋아한다' 라는 것은 일본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이 등장하게 되는 메이지 이후 근대국민국가가 형성된 이후입니다. 이전에는 당연히 이런것에 대해 일본과 일본인 이라는 정체성이 희박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았고, 메이지 후에는 대동아공영권과 같은 것으로 그렇게 보는 사람이 존재할 순 있겠지만, 전근대 시대에 동아시아의 대표국인 조선 침공을 '서양국가에 일본의힘을 보여주었다'라고 연결시켜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것 같습니다
대마도는 저 시대에 단 한번도 중립국이었던 적이 없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단지 소속 영토라 하더라도 그 종속성의 차이는 있는 것이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일본쪽에 더 가까워진 처지가 같은 류큐왕국과 나란히 쓴건데 보기에 따라 류큐왕국과 똑같은 수준의 독립성을 가졌다라고 주장한걸로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두 지역은 엄연히 다른게 맞죠.
그 일본군을 동북아 최강병이라 주장하는분이 계시니까요.
이걸 이야기 하려면 메이지 유신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그건 너무 길어질거 같아서;;
간단히 말씀드리면 제 생각은 현재 일본을 지배하는 세력은 사쓰마번 조슈번 출신 인사들이고, 그들 입장에선 자신들이 무너뜨린 도쿠가와 막부를 부정하기 위하여 실제 이상으로 히데요시를 빛나보이도록 역사 교육을 하였고, 그로인해 일본 사람들은 히데요시가 한 일이 실제 끼친 영향보다 더 과장되게 믿고 있다. 입니다.
당연히 지금의 세계 영토가 거의 고정된건 백년도 안된 굉장히 짧은 역사이고, 민족주의 역시 역사가 길지 않은 개념이기 때문에 과거의 행동을 지금의 기준으로 평가하는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해요. 김유신이 당나라의 힘을 빌려 영토 일부를 포기하고 통일했다고 욕하는 것 같은일 말이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식으로 생각하잖아요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고, 일본도 마찬가지이겠죠. 참 바보 같은 생각인데 그런생각 가진 사람이 더 많을 겁니다. 국가가 그렇게 교육하고요. 애국심 고양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죠.
뭐 이젠 자야해서 결과적으로 제 생각을 정리하자면 저는 일본입장에선 완패는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판단했을 때 이익이 더 큰 전쟁이었다. 다만, 일본에서 주장하는 정도까지의 이익은 아니라고는 생각한다. 정도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국가가 근대 민족 정체성에 맞추어 교육하기 때문에 당시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되어 교육되어 사람들의 머릿속에 인식되기 마련이죠
다만 제가 의문점을 갖는 것은 사쓰마와 조슈번사들은 정한론을 주장하는 배경에 일본식 화이이론(물론 후대의 민족 정체성에 의해 창작되어진)에 맞추어 조선을 바라보고 이러한 관점에서 히데요시는 '일본의 속방'이었던 조선에 일본의 세력투사를 통해 일본의 힘을 보여준 인물로 교육받아진 것은 맞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서양세력'에게 일본의 힘을 보여준 인물로서 확대되어
사랑받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가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뭐 어쩌다보니 사설이 길어지게 되었지만 저는 도쿠가와 막부의 입장에서는 조선의 회답겸쇄환사를 통해 실질적인 국가수장으로서 인정받아지게 되었고, 막대한 유물이나 숙련공을 탈취해온 부차적인 이익은 있었다고 보지만, 전략목표였던 조선에서의 완전철수와, 임진왜란 이전에도 히데요시가 받았던 통신사를 괜히 회답겸쇄환사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받은점과, 쇄환사를 통해 대거 피로인들이 귀국한 점, 그리고 남아있던 숙련공 피로인들은 대부분 지방 다이묘의 자본이 되어준 점, 마지막으로 에도막부가 임진왜란 처리를 양보로서 끝내고도 목표였던 조선의 회답겸쇄환사를 통해 명과의 관계회복을 통한 이윤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히데요시 집권기에도 5대로로서 도쿠가와 씨족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역사대로 히데요시가 살았을 경우 전쟁이 없었어도 히데요리의 보호자로서 실권을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임진왜란은 도쿠가와 막부 입장에서도 그렇게 이득이 없는 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야밤에 사설로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이만 줄입니다
네 맞아요 저도 같은 황당함? 한심함? 을 느낍니다.
저도 처음엔 '극우 애들이나 하는 주장이겠지'라고 생각하고 찾아 봤는데 생각 외로 저런 주장이 통설인걸로 느껴졌습니다.
일본사람중엔 굳이 극우가 아니라도 제국시대에 대한 동경, 향수 같은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 많다고 느껴요.
특히나 속칭 '잃어버린 20년'이란 세월을 겪은 사람들에겐 더 크게 다가 왔을거 같긴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임진왜란이란 끔찍한 사건도 아무래도 좋게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겠죠. 처음으로 동아시아사, 넘어서 세계사에 큰 영향을 준 사건이었으니까요.
Rike Krupinski님 덕분에 저도 '역사를 양쪽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라는 생각에 너무 매몰되어 일본쪽의 입장을 필요 이상으로 받아들인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 늦은 시간에 하게 되었네요. 편히 쉬세요 :D
다치바나 무게시게..
인왕에서 서국무쌍 아닌가.
게임에서도 망할놈인데 역사적으로도 망할놈이네.
가토 기요마사가 저게 트라우마가 되서, 귀국 후에 완전히 인물이 바뀌죠..
쿠마모토 성 축소 시에는 성 안에 우물 30개 이상 만들고, 다다미도 토란 줄기로 만들고..
게다가 백성들에게 성군으로 불릴 정도의 인간이 됨...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그저 죽일 놈..;;
우물 120개 ㅋㅋㅋㅋㅋ
가토가 기독교신자 맞죠?
고니시가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래서 이후 가톨릭 신자들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던 시마바라의 난도 이전 고니시의 영지와 고니시와 비슷하게 기독교 영주였던 아리마 하루노부의 영지에서 일어났습니다
가토는 불교신자일겁니다. 가토랑 사이 안 좋았던 고니시가 기독교 신자고요.
그래서 가토가 휴전기때는 사명대사를 그렇게 만나고 싶어했다고 한걸로 압니다
둘이 항상 헷갈리더군요...암튼 고니시가 참전한데는 복음전파도 꽤 중요한 목적이었다 하더군요
고니시가 조선인들을 많이 데려갔는데 그 조선인들이 가톨릭으로 많이들 개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황청에서 조선인들이 개종이 쉬울거라고 호시탐탐 노렸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복음 전파가 정확한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니시가 조선에서 주운 아이를 가톨릭에 들이고 양녀로 받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쇄환사가 오기전 10여년간 일본땅에 정이 든 사람들이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개 영지민들은 다이묘의 종교를 따라가다보니 이들도 마찬가지 이유로 개종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명군 :가토 딸피야 딸피라고 포커싱!
조선군 : 힐러 다 짤렸어요
명군 : 에라이 팀합 겁나 안맞네 ㅈ망겜
진짜 역사지식이 느는군
저 당시 왜군의 축성술은 대단했지. 급조한 상태에도 방어력이 좋았으니.
제일 큰 건 일본식 성이 조선, 중국식 성이랑 많이 달라서 공략하는 방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일 겁니다. 조선, 중국은 성벽 자체의 방어력에 몰빵한 방식이라면 일본은 성벽을 여러 겹으로 짓고 첫 성벽 내부를 복잡하게 만들어서 첫 성벽을 뚫고 들어온 적들을 소규모로 각자 고립시켜 각개격파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뭐 조선에서 막 지은 왜성이 그렇게 정교한 설계대로 짓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을 기반에 둔 만큼 최소한 조선 성이랑 구조나 공략법이 다르긴 했을 텐데 그런 성을 처음 만났으니 어렵긴 어려웠겠다 싶습니다.
일본 춘주전국시대부터 늘 싸우고 공성전도 워낙 많아서 성은 잘 짓는다더라.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일본은 그냥 전국시댑니다
일본역사 잘아는 사람이 왤케 많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