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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싹오싹 택견 시리즈 - 조선의 중앙군 훈련도감과 택견 上편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시리즈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1편 - 소개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2편 - 송덕기. 그리고 현대 택견의 시작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3편 - 두 거인의 죽음과 혼란기의 개막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4편 - 대한택견회의 부상과 이면의 문제점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5편 - 대고소시대와 돌아온 송덕기 택견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6편 - 결련택견협회의 비상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7편 - 통합 대회와 대한택견연맹의 체육회 가입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8편 - 황금기의 뒷면과 또 다른 계승자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9편 - 결련택견협회의 내전과 위대태껸의 등장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10편 - 태껸춤과 정통성 논쟁 上편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11편 -태껸춤과 정통성 논쟁 下편-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12편 - 옛법택견의 짧은 봄 -

오싹오싹 택견 근현대사 13편 - 서울시 문화재 결련택견과 택견진흥법 -


오싹오싹 택견 시리즈

1편. 택견 4대 협회의 간략한 특징 요약 및 기술 모음집

2편. 택견은 왜 주먹이 아니라 발차기부터 배웠을까? 

3편. 택견에도 개파조사가 있다?!

4편. 놀이인가 무술인가? 기록을 통해 알아보는 구한말 택견.

5편. 택견과 석전의 상관 관계

6편. 제 1회 택견 경기와 실종된 활갯짓

7편. 택견의 손질은 본래 검술에서 왔다(?!) 上편 

8편. 택견의 손질은 본래 검술에서 왔다(?!) 下편

9편. 조선의 중앙군 훈련도감과 택견 上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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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여러분, 택견빌런입니다.

지난 편에서 저희는 택견의 손기술과 검술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여러 시연들(윗대태껸)과 인터뷰(결련택견협회), 그리고 문헌(문화재 택견)적 측면으로 확인하였으며,

마지막으로 흔히들 알려진 바와 같이 '중앙 정부 차원에서 민간의 무예 수련을 금지한' 조선 사회에서 어떻게 검술이 택견과 기술적 연관성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분석을 해 보이겠다고 말씀드린 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지난 편에서 말했듯 택견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등장하는 18~19세기 당시의 한양의 사회·문화에 대한 분석과, 그 가운데에서 택견을 향유한 계층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는 시간을 가지는 한편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해당 계층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조직인 후기 조선의 중앙군, 오군영에 대해서도 다루어 볼 계획입니다.

아무래도 텍스트가 많을 수밖에 없어 살짝은 지루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추후 이어질 내용들의 스무스한 전개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한 번 정도는 언급하고 넘어가야 하는 내용들이니 부디 양해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1. 조선 후기 한양의 입지 변화

18~19세기 한양의 사회·문화적 분위기에 대해 다루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조선 후기 한양의 정치 및 경제적 입지 변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실이지만 한국사에 있어 한양(서울)이 한반도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었습니다.

삼국시대 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정치·경제적 중심지는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로 이어지는 정치적 정통성과 산동반도와 접해 있어 중국과의 교역 및 선진 문물 수용이 수월하다는 입지를 두루 지닌 패서 지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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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게는 황해도. 넓게는 평안도 남부와 경기 북부까지 포함하여 패서지역이라 호칭합니다)


비록 기나긴 전란과 신라의 반쪽짜리 삼국통일 이후 변경지화 되어 과거의 영광이 상당 부분 퇴색되기는 하였지만 폼은 일시적이라고 해도 클라스는 영원하다고, 특유의 입지는 어딜 가지 않아 고려의 건국 이후 다시 한반도의 정치·경제적 중심으로 화려하게 복귀를 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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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시대 최후의 승자, 왕건 또한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패서 지역의 호족 출신이었죠.)



그에 비해 한양을 비롯한 한강 유역은 한반도의 허리에 위치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내륙 수운의 중심지로서 국가와 시대를 막론하고 중요한 지역으로 손꼽히곤 했지만, 기원후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벌에 의해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이 불탄 이래로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세월이 워낙 길었던지라 전통적인 한민족의 정치·경제적 중심지였던 평양을 위시한 패서 지역이나 신라의 천 년 고도 경주와 같은 정치적 무게감까지는 지니지 못한 지역으로 남아야 했지요.

하지만 고려 말에 이르러 개성의 젖줄 역할을 하던 예성강이 퇴적 작용으로 인해 수운 활용이 곤란해지게 되고, 왜구가 개경 인근까지 쳐들어 오는 안보 이슈마저 터지게 되자 고려 조정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용이한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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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서 바라본 한양 도성 지형도. 동서남북을 4개의 산이 감싸고 있는 것을 확인 가능하다.)



한강을 지척에 두어 전근대 한반도의 전통적 물류 시스템인 수운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한양으로의 천도를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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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기가 넘치는 1945년의 마포 새우젖 나루터)



비록 대신들의 반대에 의해 얼마 안 가 개경으로 환도하기는 하였으나 우왕과 공민왕 시기에 일시적으로 한양으로 천도(1382.9.~1383.2., 1390.9.~1391.2.)하여 짧게나마 고려의 수도가 되기도 할 정도였으니 입지 만큼은 당대 그 어떤 지역보다 수도에 걸맞다고 평가 받은 셈이며, 조선의 건국자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새로운 국가의 수도로 선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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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입지가 그렇게나 좋다지?)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중심지에서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유래 없이 강력한 중앙 집권을 자랑하는 조선 왕조의 수도였음에도 한양은, 물론 한 나라의 수도로서 정치·경제·군사적 중심지였긴 하였으나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 있어 현재의 서울이 가지는 것 같은 대체 불가능한 수준의 지역으로까진 발전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임란 당시의 선조와, 호란을 맞은 인조가 한양에서 군민들을 모아 결사 항전을 택하는 게 아니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도를 버리고 몽진하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고구려-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유구한 한민족의 전쟁 프로토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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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를 지킬 수 없다면 수도를 버린다.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러한 선택을 내릴 수 있던 것은 한 나라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수도를 적군의 손에 넘겨주더라도 구심점인 왕실만 무사하다면 지방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전세를 역전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왕실은 물론 대소신료들 사이에서도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으며,


달리 말하면 이건 당시의 한양이 지방을 압도할 만큼의 정치·경제적 체급을 가지지 못한 도시였기에 내릴 수 있는 선택지였다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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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국민들은 모두 안심하시고...!)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18세기 즈음 들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수 차례의 사화로 인해 지방에 근거지를 둔 당파들이 정치적 힘을 잃어간 반면 한양과 경기 일대에 거주하던 경화사족들이 왕실과의 혼맥 등을 이용하여 조정의 주요 관직을 독점하는 세태가 강해지고,


조선 후기 농업의 발전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와 유통 경제의 활성화가 마침내 한양을 한반도 전 지역과 밀접한 인적, 물적 연결망을 지니는 상업/소비 대도시로 탈바꿈 시키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조선의 정치·경제·사회적 역량의 전부가 한양으로 집중(종속)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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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공화국은 이미 18세기경부터 조짐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조선의 국방 대전략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했습니다.
이전 시대만 해도 외적이 도성에 접근하면 사직의 안녕을 위해 국왕이 도성 밖으로 피난을 떠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18세기 이후의 조선에 있어 수도인 한양을 버린다는 것은 곧 조선의 모든 역량이 집중된 도시를 버린다는 말과 같아졌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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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양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조선의 모든 것이기도 하지.)



따라서 18세기 이후의 조선의 왕들은 병자호란과 이괄의 난의 전훈들을 반영하여 종래의 국경 지대 중심의 방어 전략이 아닌 수도권 중심의 방어 전략을 구상해 남한산성과 탕춘대성(북한산성)에 각각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을 두어 한양으로 들어오는 주요 거점들을 지키게 하는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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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청이 위치한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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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융청이 위치하던 북한산성과 한양도성 사이의 탕춘대성)



현대의 수방사와 같이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소위 삼군영(三軍營)이라 불리운 3개의 군영을 한양 내에 두어 왕실 호위, 치안 유지, 도성 방어 등의 다양한 임무들을 맡겼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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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한양의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바로 이들이 앞서 언급한 수어청과 총융청을 합하여 오군영(五軍營)으로 일컬어진 후기 조선의 중앙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들의 창설과 수도권 중심의 국방전략으로의 개편은 곧 과거엔 없었던 대규모 신규 계층의 등장으로 이어졌는데, 바로 군영의 사무를 보는 실무자들이자 하급 장교라 할 수 있는 군관직을 역임하였던 중인들과 군영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양인. 혹은 천민 출신으로 구성된 병사들로,


택견을 향유한 대표적 계층의 등장이었죠.



2. 군사 도시 한양.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삼군영 체제가 완성된 18세기 이후의 한양은 감히 말하건데 놀라울 정도로 군사화된 도시였습니다.
문치주의를 표방하는 조선 왕조에서 수도가 군사 도시라니,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싶겠지만 기록을 확인하면 이는 조금의 과장도 덧붙여지지 않은 수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30만명을 넘나드는 것으로 추정되는 당시 한양의 인구 가운데 삼군영에 소속된 병사들만 무려 1만을 넘는 숫자였기 때문이며, 병사들의 직계 가족들만 셈에 넣어도 대략 5만여명. 요컨대 한양 인구의 16~17%에 달하는 인구가 순수하게 군인 계층에 소속되어 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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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으로 복무가 불가능한 여성과 노약자를 빼면 대략 10만명 정도가 생산 활동이 가능한 청장년층의 남성 인구라 할 수 있을 텐데, 그 가운데 무려 1/10이 직업 군인으로 복무를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어... 최후의 1인까지...?)



그리고 저 군인들이 가장 많이 소속된 군영이 바로 훈련도감으로, 다른 두 군영(어영청, 금위영)이 각각 1000여명 남짓한 병력을 상시 유지한 것에 반해 훈련도감은 홀로 약 7000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사들을 유지하던 조직이었습니다.
이것은 어영청과 금위영이 지방에서 병사를 차출해 한양에서 일정 기간 동안 복무를 시키다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번상제(番上制)를 기반으로 한 군영이었던 것과 달리 훈련도감은 급료를 지급받고 근무를 계속하는 장번군(長番軍) 위주로 운영되었던 군이었기 때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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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의 병사들은 거의 모두가 상비군이었습니다.)



장번군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지역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에(다시 말해 병사들의 거주지가 군영 근처여야 한다는 것) 훈련도감은 구성원의 대부분이 한양 태생이었으며, 사무관이나 군교(장교)를 맡는 소수의 중인 계층과 말을 키울 수 있는 재력을 보유한 마병들을 제외한 나머지 일반 병사들은 가난한 양인들과 면천을 위해 복무하고자 하였던 천민 출신들로 한양 하층민의 상당수를 구성했습니다.
그렇기에 번상제를 바탕으로 한 이전 시대의 중앙군들과는 달리 이들은 지역적, 계층적 소속감을 공유하는 기질이 강했고, 신분적으로는 사회 하층민에 불과하지만 조선의 실질적 무력을 담당하고 있는 집단 답게 주변에 힘을 과시하는 것을 즐겨하여 신분 질서에 억눌린 감정을 공공연하게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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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처음 맛보는 집단 폭력의 달콤함에 살짝 HIGH해진 훈련도감 병사(?)의 상상화아무말)


일례로 서울 거리에서 떼를 지어 말을 타고 달리면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한밤중에 공연히 총포를 쏘면서 도성민을 놀라게 하고, 심지어 자신들보다 훨씬 지위가 높은 금군을 집단적으로 구타하는 것은 물론, 도성 거리에서 사대부를 만나도 조금도 피하려는 기색이 없이 노려보고 지나가는 것도 부족해 사소한 일로 화를 내어 말까지 몰고 저택에 뛰어 들어 사대부를 능욕하기도 하는 등.


조선 후기 한양에서 이들이 벌인 크고 작은 사고는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현종 4년(1663) 10월에는 술에 취해 횡포를 부리는 훈련도감 군인을 형조 금리가 잡아 가두자 화가 난 동료 군인들이 떼를 지어 몰려가서 금리를 구타하고 그 군인을 빼내어 갔는데, 이때 형조 사령들이 이들을 추적하자 훈련도감 군인들이 뒤쫒던 사령 2명을 집단 구타하여 거의 초죽음 상태로 만들어 놓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을 정도였으니 말은 다 한 셈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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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게 군대야 깡패 집단이야....)



당연하게도 이러한 훈련도감의 사회 질서를 흔드는 행동들은 문반 관료들의 염려를 자아내었고 솔직히 저같아도 한소리 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병사들이 지역적 연고를 바탕으로 한 집단행동을 감히 할 수 없도록 어영청과 금위영처럼 지방에서 번상시키는 병사들로 훈련도감의 군제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하게 나왔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 있어 내금위(용호영)에 소속된 1000여명의 금군을 제외하면 상시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는 조선의 유일한 대규모 상비군이었다는 점과,


어영청과 금위영이 은연중에 당파 싸움에 동조하는 면모를 보인 것과는 달리 순수하게 왕실에 충성하는 기조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한 유일한 군영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조선 왕실은 훈련도감을 비호하였고,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특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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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입장에선 훈련도감이 사라지면 진짜로 망할 판이었다.)


대표적으로 매 해 겨울이 되면 실태조사를 실시해 병사들에게 옷가지를 나누어 주거나, 고질적인 예산 문제로 인해 병사들에게 충분한 급료를 주기 어려워지자 시전 상인에게만 주어졌던 상업의 특권을 쪼개어 병사들에게 부업으로 한양 내에서 장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기도 하는 등, 조선 왕조는 없는 살림에도 훈련도감 만큼은 왕실의 근왕 세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장 저 훈련도감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이 한 해 세수의 30~40%였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특권들(세곡 운수업, 강제징수, 인쇄/출판의 권리 등등...)을 내 주면서까지 구한말까지 그 규모를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는 점만 봐도 조선 왕실이 얼마나 훈련도감에 진심이었는지 알 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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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오랜 노력을 임오군란 한 방에 날려먹은 민씨 척족은 도대체....)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어째서 이번 화의 소제목이 '군사 도시 한양'이었는지 슬슬 감이 오실 겁니다.


조선의 국방 대전략의 변화는 이전 시대까지 없었던 '한양에 지역적 연고를 가진 군사집단'을 만들었으며, 훈련도감을 위시한 한양의 삼군영은 다양한 특권들로부터 비롯된 이권을 통해 한양 경제에 깊숙하게 개입을 함은 물론 군영에 소속된 사무관, 군교, 병사들의 직계 가족들만 해도 한양 전체 인구의 16%를 차지할 만큼 한양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한양 사회에 남긴 영향력도 상당했지요.


대표적으로 한양에서 훈련도감에 소속된 병사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지역 가운데 하나인 왕십리의 경우 서울의 타 지역에선 찾아볼 수 없는 "하걸랑."과 같은 특유의 계층어가 생겨났음은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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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는 한양 도성 밖이었지만 관습적으로 아래대로 분류되는 지역이었습니다.)


택견과 모종의 관계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인 '까기'를 비롯해 샅바를 잡지 않고 시작하는 '놓고씨름(레슬링)'이 일제 강점기의 끝자락까지 왕십리의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였을 만큼 상무적 기풍을 유지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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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구한 까기 명인 김명근 선생님의 기술 시연 영상들.

기술을 받아주는 분은 윗대태껸협회의 강태경 관장님이십니다.)



훈련도감의 본영이 있는 서촌 일대 하급 관리들과 무예별감으로 대표되는 중인 계층과 한량과 같이 군문에 몸을 담은 이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앞서 언급한 왕십리(아랫대)와 함께 택견이 흥행한 두 지역 중 '택견이 가장 세었다'는 평가를 받은 윗대 지역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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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건 저 서촌 지역의 중인들이 주로 들어간 액정서의 별감도 사대부들이 질색하는 집단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부업으로 기생의 일정과 수입을 관리해 주기도 했으며, 한양 제일의 깡패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암시해 줍니다.


요컨대 신분제 사회의 특성상 신분에 따라 향유하는 문화와, 유희가 차이가 나는 것이 당연하였음에도 지역적(윗대 vs 아래대), 신분적(중인, 한량 vs 천민, 양인) 차이가 있는 두 집단이 공통된 문화(택견)를 향유하였다는 것당대의 한양에 훈련도감과 기타 군영들을 중심으로 하여 일정 부분 이상 문화적 동질성은 공유하는 군사 계층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죠.


이렇듯 조선 후기의 한양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약하고 공맹만 찾는' 조선의 스테레오 타입과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차이가 나는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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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지 못했을 뿐, 사회 곳곳에 상무적 기풍이 스며들어 있던 곳이 18세기 이후의 한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왕 한양의 군사 문화와 택견의 관계를 언급한 김에 조금만 더 딥하게 들어가 보는 건 어떨까요?
다음 편에선 후기 조선군의 훈련과 장비, 그리고 전술을 통해 택견이 어째서 훈련도감을 비롯한 한양 삼군영의 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었는가를 추측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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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담컨대 이번 편보다 몇 배는 더 재미있으실 겁니다!)

지금까지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다음 편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택견 빌런이었습니다!



댓글
  • 오뚜기후추 2025/01/23 08:14

    뭔가 열심히하네! 열정추!


  • 오뚜기후추
    2025/01/23 08:14

    뭔가 열심히하네! 열정추!

    (SW8c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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