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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몰래 80만원짜리 만년필을 산 남편

만년필.PNG행복.PNG

너_정신과전문의 김병후의 인간관계에 대한 탐구

 

3줄요약

1. 남편이 아내 몰래 80만원 만년필 삼

2. 만년필 사서 능률 상승해서 프로젝트 따냄

3. 개이득

댓글
  • 레리아크 2017/11/09 23:30

    대부분의 남자는 솔직히 많은 걸 바라지 않지만, 가끔씩 이건 반드시 원한다는 그런 게 있다.
    그게 안 되면 뭘 하든 힘들어 하지만, 그걸 얻는다면 뭐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 남자는 그게 만년필이었던 거지.

  • 레크시나스 2017/11/09 23:30

    몰래산건 잘못한거 맞음

  • 진리의검스 2017/11/10 00:04

    나 공부 지질이 못했었는데
    만년필 사고 나서 미친듯이 깜지 써대서 장학금 받으면서 다녔었음

  • 멸샷의 체코 2017/11/10 00:07

    요이치는 1950년 일본 토치기현 아시카가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 수학 과목에 관심이 많았지만, 시대적 특성상 컴퓨터는 한 번도 접하지 못했다. 대신 농구나 재즈 밴드 등에 몰두했고, 고교 시절에는 역사 선생님에게 영향을 받아 역사에 빠져들었다. 요이치를 지도한 역사 선생님은 단순 암기식 교육이 아니라 과거를 살아간 수많은 인물들의 일대기와 시대적 흐름을 통해 역사를 즐기는 법을 가르쳤다. 이 때부터 요이치는 국내 역사소설은 물론, '삼국지연의' 등 다방면에 걸쳐 방대한 지식을 쌓았다.
    요이치의 가문은 대대로 염료 도매업을 해 왔다. 요이치 역시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가업을 잇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명문대인 게이오대학 상업학부를 졸업하고 오사카에서 염료판매업을 배운 후 27세에 고향인 아시카가로 돌아왔다. 당시 그의 아버지가 경영해 오던 염료 도매상은 경영 악화로 문을 닫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요이치는 자신이 가업을 되살리겠다는 각오로 코에이(光營)를 창업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섬유업계는 극심한 불황에 빠져 있었다. 섬유업계를 기반으로 한 염료 도매업계에서도 제 살 깎아먹기 식의 경쟁이 계속됐다. 요이치는 2년 동안 온 힘을 다해 회사를 경영했지만, 1명밖에 없는 직원 월급을 주고 나면 부인과 둘이 먹고 살 생활비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나날이 계속됐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요이치는 날로 피폐해져 갔다. 경영자의 자질이 없는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몰려왔고, 결국엔 살아갈 의욕조차 잃어버렸다. 그러던 와중,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PC 잡지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컴퓨터는 경영에 필요한 재고나 판매 및 지출관리는 물론, 교육과 쇼핑, 게임에까지 골고루 활용 가능한 마법 상자였다. 그러나, 이제 막 개인용 컴퓨터(PC)의 보급이 시작될 무렵이었기에 컴퓨터는 30만 엔이나 하는 고가였다. 수익은 고사하고 처가의 유산까지 처분해 가며 염료상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컴퓨터를 구입하는 것은 그야말로 꿈에 가까웠다.
    그러나, 실의에 빠져 있는 요이치를 가만히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요이치의 아내 에리카와 케이코였다. 케이코는 힘들어하는 남편을 위로해주기 위해 어렵사리 모은 적금을 깨 요이치의 30세 생일 선물로 컴퓨터를 선물했다. 요이치는 뛸 듯이 기뻐했고, 독학을 통해 프로그래밍을 배워 업무에 도움이 되는 재고와 판매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요이치에게 있어 컴퓨터란 고달픈 현실을 잊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도피처에 가까웠다.
    그러나 프로그램 도입과 별개로 여전히 장사는 잘 되지 않았고, 남는 시간에는 취미 삼아 게임을 만들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게임 제작이었지만, 이는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당시 인기를 끌던 ‘스페이스 인베이더’나 ‘팩맨’ 등은 반사 신경과 감에 의존하는 액션 장르였다. 당시에도 깊은 사고를 요하는 게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대다수가 어린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30세였던 그에겐 어린애 장난 같았다.
    그래서 요이치는 부인 케이코가 좋아하는 주식 투자를 테마로 한 게임을 제작했다. 바로 ‘투자 게임(1980)’과 ‘가와나카지마의 함전(1982)’이었다. 즉각적인 반사 신경보다는 깊은 생각과 판단을 중요시 하는 이 게임들은 성인들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이었다. 특히 ‘야마나카시마의 함전’은 ‘신장의 야망’에 앞서 세계 최초로 상용화(극히 제한적이었지만)된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으로도 평가 받는다.

  • 멸샷의 체코 2017/11/10 00:09

    초기에만 해도 자신과 아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함께 즐기려고 만든 아마추어 작품이었지만, 게임이 예상보다 잘 만들어지자 요이치는 생활비에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로 당시 유행하던 PC 잡지에 광고를 냈다. 잡지를 통해 자신의 게임을 소개하고, 관심 있는 사람이 전화로 연락을 하면 게임이 담긴 카세트를 우편으로 부쳐 주는 방식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요이치는 게임 개발을 본업으로 삼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리차드 게리엇이 세계 최초로 ‘아칼라베스’ 게임을 상용화한 것이 불과 1년 전인 1979년이었고, 일본에서는 PC게임 소프트웨어 제작/판매업이라는 개념도 제대로 없었다.
    그러나, 요이치의 첫 작품인 ‘투자 게임’은 PC 동호인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대량생산이 불가능해 장당 5만 엔이라는 다소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었지만, 인기는 나날이 늘어 갔다. 밀려드는 주문에 요이치는 하루 종일 게임 포장과 배송에 매달려야 했고, 얼마 안 가 게임 판매 수익이 본업인 염료 도매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요이치는 전율했다. 어려운 생활에 생각지 못했던 큰 수익이 들어온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의 호응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염료 도매업에서 삶의 보람을 찾지 못했던 그에게 게임 개발은 ‘제 2의 인생’과도 같았다.
    첫 작품의 흥행에 힘입은 요이치는 게임 제작을 더욱 본격화한다. 그는 본업인 염료 도매상을 접고, 코에이 사업 분야를 PC게임 제작/판매업으로 바꿨다. 그는 가게 한 켠에서 컴퓨터 관련 물품을 판매함과 동시에, 뒤쪽에서는 개발 스튜디오를 지휘하며 수많은 게임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시장의 동향을 파악하고 다양한 고객 반응을 보기 위해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1983년에는 성인 게임 분야에도 뛰어들어 일본 최초의 성인 게임이라 불리는 ‘나이트 라이프’를 시작으로, ‘코에이 스트로베리 뿅뿅’라 불리우는 ‘단지처의 유혹’, ‘네덜란드 부인은 전기뱀장어 꿈을 꾸는가?’와 같은 타이틀을 다수 출시했다. 비록 코나미는 주식 상장을 위한 기업공개를 앞둔 시점에서 기업 이미지 관리 상 성인물 업계에서 손을 뗐지만, 그 뒤를 이어 스퀘어, 에닉스, 팔콤 등 다수의 게임 개발사가 성인 게임을 제작하는 등 업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위와 비교되는 어떤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
    <출처 - [인물열전] 삼국지와 대항해시대, 코에이 창립자 에리카와 요이치 게임메카 류종화 기자>

  • 레크시나스 2017/11/09 23:30

    몰래산건 잘못한거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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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소리맨 2017/11/10 00:11

    허락얻기보다는 용서받는게 쉽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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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아니 2017/11/09 23:30

    어...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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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리아크 2017/11/09 23:30

    대부분의 남자는 솔직히 많은 걸 바라지 않지만, 가끔씩 이건 반드시 원한다는 그런 게 있다.
    그게 안 되면 뭘 하든 힘들어 하지만, 그걸 얻는다면 뭐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 남자는 그게 만년필이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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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ㅣ린ㅣ 2017/11/09 23:35

    만년필로 가챠 천장을 뚫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만년필로 삶의 qol이 엄청나게 오를 수 있을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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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엑스데스 2017/11/10 00:02

    남편은 80만원짜리 가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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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치츠모 2017/11/10 00:02

    나도 플스프로 사주면 열씸히 일할텐데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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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리의검스 2017/11/10 00:04

    나 공부 지질이 못했었는데
    만년필 사고 나서 미친듯이 깜지 써대서 장학금 받으면서 다녔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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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텐샤 에루 2017/11/10 00:07

    내가 키보드를 사서 과제를 열심히 하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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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멸샷의 체코 2017/11/10 00:07

    요이치는 1950년 일본 토치기현 아시카가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 수학 과목에 관심이 많았지만, 시대적 특성상 컴퓨터는 한 번도 접하지 못했다. 대신 농구나 재즈 밴드 등에 몰두했고, 고교 시절에는 역사 선생님에게 영향을 받아 역사에 빠져들었다. 요이치를 지도한 역사 선생님은 단순 암기식 교육이 아니라 과거를 살아간 수많은 인물들의 일대기와 시대적 흐름을 통해 역사를 즐기는 법을 가르쳤다. 이 때부터 요이치는 국내 역사소설은 물론, '삼국지연의' 등 다방면에 걸쳐 방대한 지식을 쌓았다.
    요이치의 가문은 대대로 염료 도매업을 해 왔다. 요이치 역시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가업을 잇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명문대인 게이오대학 상업학부를 졸업하고 오사카에서 염료판매업을 배운 후 27세에 고향인 아시카가로 돌아왔다. 당시 그의 아버지가 경영해 오던 염료 도매상은 경영 악화로 문을 닫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요이치는 자신이 가업을 되살리겠다는 각오로 코에이(光營)를 창업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섬유업계는 극심한 불황에 빠져 있었다. 섬유업계를 기반으로 한 염료 도매업계에서도 제 살 깎아먹기 식의 경쟁이 계속됐다. 요이치는 2년 동안 온 힘을 다해 회사를 경영했지만, 1명밖에 없는 직원 월급을 주고 나면 부인과 둘이 먹고 살 생활비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나날이 계속됐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요이치는 날로 피폐해져 갔다. 경영자의 자질이 없는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몰려왔고, 결국엔 살아갈 의욕조차 잃어버렸다. 그러던 와중,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PC 잡지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컴퓨터는 경영에 필요한 재고나 판매 및 지출관리는 물론, 교육과 쇼핑, 게임에까지 골고루 활용 가능한 마법 상자였다. 그러나, 이제 막 개인용 컴퓨터(PC)의 보급이 시작될 무렵이었기에 컴퓨터는 30만 엔이나 하는 고가였다. 수익은 고사하고 처가의 유산까지 처분해 가며 염료상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컴퓨터를 구입하는 것은 그야말로 꿈에 가까웠다.
    그러나, 실의에 빠져 있는 요이치를 가만히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요이치의 아내 에리카와 케이코였다. 케이코는 힘들어하는 남편을 위로해주기 위해 어렵사리 모은 적금을 깨 요이치의 30세 생일 선물로 컴퓨터를 선물했다. 요이치는 뛸 듯이 기뻐했고, 독학을 통해 프로그래밍을 배워 업무에 도움이 되는 재고와 판매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요이치에게 있어 컴퓨터란 고달픈 현실을 잊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도피처에 가까웠다.
    그러나 프로그램 도입과 별개로 여전히 장사는 잘 되지 않았고, 남는 시간에는 취미 삼아 게임을 만들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게임 제작이었지만, 이는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당시 인기를 끌던 ‘스페이스 인베이더’나 ‘팩맨’ 등은 반사 신경과 감에 의존하는 액션 장르였다. 당시에도 깊은 사고를 요하는 게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대다수가 어린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30세였던 그에겐 어린애 장난 같았다.
    그래서 요이치는 부인 케이코가 좋아하는 주식 투자를 테마로 한 게임을 제작했다. 바로 ‘투자 게임(1980)’과 ‘가와나카지마의 함전(1982)’이었다. 즉각적인 반사 신경보다는 깊은 생각과 판단을 중요시 하는 이 게임들은 성인들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이었다. 특히 ‘야마나카시마의 함전’은 ‘신장의 야망’에 앞서 세계 최초로 상용화(극히 제한적이었지만)된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으로도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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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멸샷의 체코 2017/11/10 00:09

    초기에만 해도 자신과 아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함께 즐기려고 만든 아마추어 작품이었지만, 게임이 예상보다 잘 만들어지자 요이치는 생활비에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로 당시 유행하던 PC 잡지에 광고를 냈다. 잡지를 통해 자신의 게임을 소개하고, 관심 있는 사람이 전화로 연락을 하면 게임이 담긴 카세트를 우편으로 부쳐 주는 방식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요이치는 게임 개발을 본업으로 삼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리차드 게리엇이 세계 최초로 ‘아칼라베스’ 게임을 상용화한 것이 불과 1년 전인 1979년이었고, 일본에서는 PC게임 소프트웨어 제작/판매업이라는 개념도 제대로 없었다.
    그러나, 요이치의 첫 작품인 ‘투자 게임’은 PC 동호인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대량생산이 불가능해 장당 5만 엔이라는 다소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었지만, 인기는 나날이 늘어 갔다. 밀려드는 주문에 요이치는 하루 종일 게임 포장과 배송에 매달려야 했고, 얼마 안 가 게임 판매 수익이 본업인 염료 도매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요이치는 전율했다. 어려운 생활에 생각지 못했던 큰 수익이 들어온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의 호응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염료 도매업에서 삶의 보람을 찾지 못했던 그에게 게임 개발은 ‘제 2의 인생’과도 같았다.
    첫 작품의 흥행에 힘입은 요이치는 게임 제작을 더욱 본격화한다. 그는 본업인 염료 도매상을 접고, 코에이 사업 분야를 PC게임 제작/판매업으로 바꿨다. 그는 가게 한 켠에서 컴퓨터 관련 물품을 판매함과 동시에, 뒤쪽에서는 개발 스튜디오를 지휘하며 수많은 게임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시장의 동향을 파악하고 다양한 고객 반응을 보기 위해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1983년에는 성인 게임 분야에도 뛰어들어 일본 최초의 성인 게임이라 불리는 ‘나이트 라이프’를 시작으로, ‘코에이 스트로베리 뿅뿅’라 불리우는 ‘단지처의 유혹’, ‘네덜란드 부인은 전기뱀장어 꿈을 꾸는가?’와 같은 타이틀을 다수 출시했다. 비록 코나미는 주식 상장을 위한 기업공개를 앞둔 시점에서 기업 이미지 관리 상 성인물 업계에서 손을 뗐지만, 그 뒤를 이어 스퀘어, 에닉스, 팔콤 등 다수의 게임 개발사가 성인 게임을 제작하는 등 업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위와 비교되는 어떤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
    <출처 - [인물열전] 삼국지와 대항해시대, 코에이 창립자 에리카와 요이치 게임메카 류종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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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멸샷의 체코 2017/11/10 00:16

    이거 올리고 보니까 게시물을 잘못 왔네...
    남편 컬렉션 버린 글에 올리려던게 왜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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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isy__ 2017/11/10 00:12

    가족끼리 상의 없이 뭐 사는건 좀 섭섭할 수 있다고 봐
    마누라도 잘 보면 시어머니 환갑 잔치 챙기는거 걱정하고 애들 둘 키우는것도 있고 다 가족들 걱정하는거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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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Р’льех 2017/11/10 00:12

    만년필이 참 좋은게
    손목에 무리가 안옴=>피로도 감소=>스트레스 감소=>Prof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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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다. 2017/11/10 00:15

    이런건 걍 서로 이해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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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뷰/감상 2017/11/10 00:16

    80이면 몽 르그란드라...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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