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8년 음력 4월 21일, 요동총병 장승윤이 이끄는 군대가 아직 허투 알라로 완전히 퇴각치 않은 누르하치의 군대의 후방 지역에 나타났다. 정찰병들은 장승윤의 군대를 파악하고 이를 누르하치의 군대의 양 지휘관이자 버일러인 다이샨과 홍타이지에게 알렸으며, 다이샨과 홍타이지는 이를 다시 누르하치에게 알렸다.
누르하치는 장승윤이 출현했다고 해도 그들이 본인의 군대에 교전을 걸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실제로도 그의 의견은 타당했다. 장승윤은 당시 누르하치의 후방에 나타나긴 했으나 경계를 넘진 않으며 누르하치의 군대와 적절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는 아마도 누르하치의 군대와 맞붙기에는 군대의 상황이나 여건이 좋지 않아 단순히 누르하치가 그대로 철군하는 것을 유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누르하치 역시 장승윤과 굳이 싸우고자 하지 않았다. 꼭 싸울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굳이 총병급이 이끄는 군대를 공격하는 것은 당시 상당히 많은 군대를 전리품, 포로와 함께 먼저 허투 알라로 보낸 탓에 당시 휘하 군병이 그리 많지 않던 누르하치로서는 그다지 끌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누르하치는 문관 어르더니 밬시를 파견하여 다이샨과 홍타이지에게 자신이 판단한 장승윤의 의도를 전하며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전의 글에서 언급했듯 다이샨과 홍타이지는 이 의견에 동조치 않았으며 오히려 추격해온 명 군대와 맞붙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추격 명군과 조우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그대로 철군시키자면 그것은 곧 명군의 사기를 올려주는 것이 되고, 그로서 무순 전투의 승리도 빛이 바래게 될 수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다이샨과 홍타이지가 결전을 주장한 이유는 이상의 이유에서 뿐만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이샨과 홍타이지가 전투를 주장한 이유 중 또 한 가지는 추격해온 명군의 규모나 수준 살펴본 바로 군대의 지휘관이 총병인 장승윤임을 대략적으로 유추하고 그를 이번 기회에 격살하고자 했던 것 역시도 유추된다.
(다이샨과 홍타이지. 누르하치의 아들들 중 가장 영명했으며, 동시에 치열했고, 경쟁적인 관계였으며, 협력자이기도 했다.)
이전에도 몇 번 언급했듯이, 장승윤은 후금에게 있어서 원한이 깊은 상대였다. 장승윤이 요동총병으로 있던 시기에 명의 대건주/후금 압박이 강해졌고, 장승윤 본인 역시도 그러한 압박에서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다.
다이샨과 홍타이지로서도 장승윤은 원한이 심대한 인물이었고, 이는 1615년의 후금의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1615년, 건주의 적대세력이던 해서여진의 여허와 칼카 5부내에 소속된 옹기라트간의 정략혼 추진되던 시기에 누르하치 휘하의 버일러들과 암반들은 여허와 공조체제를 구축하며 여허에 힘을 실어주고 있던 명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며 요동을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1
해당 주장의 원한 대상은 기록상에서 명이라는 국가와 황제인 만력제에게 집중되고 있지만, 요동총병으로서 변경의 대후금 압박 정책의 일선에 선 장승윤 역시도 그들의 원한의 표적으로 충분히 추정해 봄 직 하다. 당장 같은 해에 장승윤의 시찰과 그 결과로 인한 후금의 경계 후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들이 이번 기회에 장승윤과 끝장을 보고자 했다는 것은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다.
물론 적장이 장승윤임을 모르고 그저 적을 뒤에 둔 채로 철군하는 것을 마뜩치 않게 여겼기만 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당시 후금과의 접경지대에서 다이샨과 홍타이지가 당면한 규모의 추격군을 이끌고 움직일 만한 장수라 하면 총병급인 장승윤 정도로 대상이 한정됨을 생각해 볼 때, 그들로서는 어느정도 상대를 짐작했을 가능성이 보다 큰 것 같다.
다이샨과 홍타이지 두 사람은 상호 합의 하에 교전의지를 다잡은 뒤 장승윤군을 기준으로 상대적으로 후방 지역에 있던 누르하치에게 그가 파견한 어르더니 밬시를 돌려 보냈다. 그들은 어르더니를 통해 본인들의 논거를 이용하여 장승윤과 결전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누르하치에게 전달했는데, 장승윤군이 철군치 않고 본인들의 철군을 관망하고자 한다면 군대를 이끌고 그들과 일전을 겨루고, 그들이 철군한다면 그들의 뒤를 습격하겠다는 것이었다.2그것은 명군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던지간에 명군과 싸우겠다는 뜻이었다.
처음에는 명군과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누르하치는 다이샨과 홍타이지의 논지, 즉슨 이대로 명군과 대진치 않고 철군하면 명군의 사기를 올려주게 되어 이번 전역의 승리가 빛이 바래게 된다는 논지를 수용하고 생각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누르하치는 다이샨과 홍타이지와 함께 본인이 통솔할 수 있는 전군을 대동하여 장승윤을 공격하기 위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누르하치가 군을 이끌고 전진하여 장승윤군 근처에 이르렀을 때에 장승윤군은 이미 방어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이 때 장승윤은 고지를 낀 채 이미 전열을 갖춘 것으로 판단되는데, 확실히 승산이 있는 상황이었다. 무순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나선 그들로서는 우월한 기병전력을 갖춘 후금군과 야전에서 맞붙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본인들이 공격을 가하는 상황도 아니고 험지를 끼고 강력한 화기를 중심으로 방어태세를 갖춘 상황에서는 승리의 가망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전체적인 상황을 생각해 보자면 명군이 후금군에 비해 다소 유리한 점 역시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전투의 결과는 후금군의 명백한 승리였다.
(만주실록 中. 장승음(윤)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는 후금군에 대한 묘사. 만주실록에서는 피휘(옹정제 아이신교로 인전/애신각라 윤진愛新覺羅 胤禛)의 문제로 인하여 장승윤이 장승음으로 개명되었다.)
시여리 전투의 전개 과정에 관하여서는 여러가지 분석이 있다. 단 분석의 모체가 되는 만문노당과 만주실록등 청의 기록에 따르면 대략적으로 이러한 전개가 구성된다.
명군에 근접한 누르하치는 지체없이 공격을 지시하였다. 이 때 후금군이 명군을 향해 돌격을 시작할 때서부터 이미 동쪽에서부터 불어오던 모래바람이 후금군이 명군에 근접했을 때에는 시의적절하게 전장에 닥쳤다. 모래 섞인 바람으로 인하여, 미리 응전태세를 갖춘 명군의 총포는 제대로 작동치 않았다. 덕분에 후금군은 손쉽게 명군의 방어를 돌파하고 진영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
즉, 후금군이 막 전투에 돌입할 때에 바람이 전장에 들이닥쳤고, 그로서 별 다른 저항 없이 명군의 방어를 손쉽게 돌파하여 그들의 전열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3
후금측은 이 바람을 하늘의 도움으로 포장한다. 실제로 만문노당에 기술된 시여리 전투에 대한 사관 어르더니의 사론(史論)에는 시여리 전투에 대해 하늘과 땅이 누르하치의 올바른 일들을 옳게 여기고 명나라의 만력제를 책망하여 누르하치를 위해 바람과 비를 움직였다고 기술한다. 그 뿐이 아니라, 전투 과정중 바람으로 인해 명군 내에서 오발 사고가 나 포대 하나가 박살이 난 관측 역시도 서술하며 이를 '하늘과 땅'의 책망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로서 누르하치에게 천명(天命)이 존재하고 이 전쟁이 '옳은 전쟁'임을 기록상으로 분명히 한다.4
그러나 이와 같은 일들을 실제로 하늘의 도움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록은 누르하치가 명군과 대치하는 와중에 바람의 낌새가 감지되자 바람을 이용키 위해 시간에 맞추어 돌격을 지시했고, 그로서 바람을 등에 업은 후금군이 명군을 상대로 승리를 했다고 해석해야 적절할 것 같다.5실제로 기록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누르하치와 후금군의 행동에서는 전투에 바람을 이용하여 손실을 최소화하고 이익을 극대화한 흔적이 살펴진다.
한편 명의 기록에서는 명측의 입장이 좀 더 자세히 드러난다. 이에 따르면 후금의 기습 소식을 접한 장승윤은 곧 후금군을 저지코자 출정했고, 후금군이 무순을 파괴한 뒤 철군하자 그런 후금군을 추격하면서 후금군 숙영지의 지근거리 고지에 방어진을 구축했다. 그러나 곧 자신들을 쫓아온 명군을 요격코자 나선 후금군의 삼면 포위 공격에 의해 진이 무너졌다고 한다.6 이 과정에서 부총병 파정상(頗廷相)과 유격 양여귀(梁汝貴)가 분투를 하여 포위를 어떻게든 뚫어냈으나 결국 주장을 잃고 중과부적으로 전장에서 전사했다고도 한다.7 후금의 기록에서와 같이 바람과 같은 언급은 없으나, 대체적으로 후금의 기록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후금의 시여리 전투 승리는 하늘의 도움을 받은 후금군의 승리가 아니라 전략, 전술에 철저했으며 상황을 이용할 줄 알았던 누르하치와 후금군의 승리였다. 하지만 후금의 사관들은 '하늘과 땅의 누르하치와 후금에 대한 도움', '하늘과 땅의 만력제와 명에 대한 책망'을 강조하며 하늘이 도운 승리임을 강조한다. 이는 곧 해당 전투의 과정을 선전화하여 후금의 명에 대한 전쟁 선포의 대의명분을 드높이고자 함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1.『만문노당』 을묘년 음력 6월, ere nikan i wan lii han cooha tucifi yehe de tuwakiyame tefi, ere yehe i gintaisi, buyanggv, nikan han de ertufi, orin aniya asaraha gvsin ilan se baha sargan jui be monggo de buci, muse nikan be dailaki dere seme gisureci (후략)
2.『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4월 21일
3. 『청태조고황제실록』, 『만문노당』등 이상과 날짜 같음
4.『만문노당』 이상과 같음, Kooli be ejeme bithe araha amban erdeni baksi hendume, nikan gurun i wan lii han de waka hendume nikan gurun i wan lii han de waka ambula ofi, abka na wakalafi (중략) jušen gurun i genggiyen han de uru ambula ofi abka na dafi edun aga erin fonde acabufi (후략)
5. 진첩선의 경우에는 이와 비슷한 논지로 해당 전투를 해석했다. 진첩선, 『누르하치 : 청제국의 건설자』, 홍순도역, 돌베개, 2015, 189쪽.
6.『명신종실록』 만력 46년 4월 27일.
7.『명신종실록』 만력 46년 7월 28일. 이러한 논지는 『명사』 권239 열전 127 장승음 열전에서도 인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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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주면 감사
아 우리도 존나 쫄리긴 했는데
하늘이 우릴 도와줘서 이김 ㅎㅎ
(압도적인 전술로 이기며)
선도부장 히나
2024/12/15 20:51
아 우리도 존나 쫄리긴 했는데
하늘이 우릴 도와줘서 이김 ㅎㅎ
(압도적인 전술로 이기며)